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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레이션) 광복군 제1사단이 청천강을 도하한 1945년 8월 6일. 이 날은 참으로 공교로운 날이었다. 제1사단이 청천강을 도하하기에 5시간 전, 아침 8시. 일본 혼슈에 위치한 인구 35만의 도시, 히로시마 상공에는 미 육군항공대 B-29 폭격기 한 대가 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료 영상 시작, 은빛으로 번쩍이는 B-29 폭격기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비행하는 장면. 야간에 이륙을 바쁘게 준비하는 정비사들의 영상 등.)
미 육군항공대 제509혼성전대 소속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는 전대장 폴 티비츠 대령과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 대위의 조종 하에, 다른 동료 B-29 폭격기인 ‘위대한 예술가’, ‘빅터 91’과 함께 8월 6일 새벽 2시 45분, 주둔지인 티니안 섬에서 이륙한 상태였다. 내부에는 인류 최초로 실전에 투하 될 원자폭탄, 코드명 “리틀보이”가 탑재되어 있었다.
(육성 음성)
이륙 10분 후, 조종사 티비츠 대령은 “판사님 일하러 가신다”는 통신을 발신하였다. 이는 원자폭탄의 실전 사용 준비에 돌입하겠다는 의미였다. 이후 B-29 폭격기는 목표지점까지 향하는 5시간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오전 7시. 히로시마 상공에는 에놀라게이에 앞서 1시간 먼저 출격한 기상관측용 B-29가 비행 중이었다. 히로시마의 시민들은 폭격기가 단 한 대 비행중인 것을 보고, 대규모 폭격이 아닐 것이라 판단해 거의 대피하지 않았다.
한 시간 뒤인 오전 8시 경. 여름 햇살이 환하게 비추는 도시 상공에 본대인 에놀라 게이와 다른 두 대의 B-29 폭격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종 관측장비와 사진촬영 임무를 맡았던 동료기들이 각자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에놀라 게이는 천천히 폭격 전 비행궤도를 수정하는 ‘폭격장주’ 절차에 들어갔다.
폭탄 투하 임무를 맡은 토머스 페러비 소령은 사전에 점찍어 뒀던 도시 중심부의 아이오이 다리를 목표로 하여 조준기 정 중앙에 놓고, 투하 스위치를 눌렀다. 8시 15분 경의 일이었다.
(멀리서 원자폭탄이 폭발하여 솟구치는 버섯구름의 영상)
인류 최초로 실전투입된 핵폭탄은 히로시마 중심부 시가지를 문자 그대로 증발시켜버렸다. 미군은 전후, 원자폭탄에 의해 사망한 일본인을 20만 명으로 집계했다. 이 중 3만 명은 강제징용 등에 의해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한국인이었다. 당시 히로시마에 머무르고 있었던 경험자들은 하나 같이 인세에 강림한 지옥과도 같은 참상이었다고 입을 모아 증언하였다.
그러나 일본 수뇌부는 이러한 참상 앞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즉각 항복하자는 항복파와, 더 유리한 조건으로 항복을 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자는 강경파의 다툼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본 수뇌부의 갈등을 뒤로 하고, 3일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 상공에서 또 한 발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원자폭탄의 투하 소식은 마닐라 맥아더 사령부와 충칭 스틸웰 사령부 등 미군을 통해 충칭의 임시정부에 통보되었다. 이 소식은 한반도에서 작전 중이던 광복군에도 즉시 알려졌다. 그러나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거대한 폭탄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조금씩 돌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나레이션 끝)
“스틸웰 사령부 편으로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그리고 히로시마가 싹 날아가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지니까, 인제 임정 청사 내부 분위기는 즐거움 반, 충격이 반이었어요.”
“인구 30만의 도시가 폭탄 한 방에 날아가버렸다는데. 당연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아침부터 정부 요인들 모여서 커피를 한 잔 하는데, 김구 주석도 할 말을 잃고, 의친왕 전하는 폭격 소식을 전하는 신문을 들여다보며 혀만 연신 차고 계시고. 이제 전후에 저런 폭탄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명실상부 세계 제일국가가 되는거 아니냐, 여기저기서 이렇게 수군거리지.”
“국내진공작전이 좀만 늦어졌어봐. 어떻게 되었겠어요? 일본이 원자폭탄에 충격을 받고 거기서 항복했으문, 우리 10만 광복군이 야심차게 준비한 국내진공작전도 시작해볼 사이도 없이 끝나는 것 아니었겠어요? 그런 생각에, 거기서 희생당한 민간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은, 우리가 아예 운이 없는 건 아니었구나 싶기도 했지.”
“근데 일본 애들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안 들리니까, 인제 히로시마 다음 날에 나하고 임시의정원 서기관 한민이 형하고 둘이서 점심을 먹으면서 ‘쟤들 간이 부어서 저런 건가, 악에 받혀서 그런건가, 저런 폭탄 한 두 발만 더 떨어질 생각하면, 나 같으면 무서워서 당장이라도 바로 백기 들고 나올텐데. 이러고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나지.”
“우리 전선 사령부는, 인제 8월 4일을 기해서 안둥에서 신의주로 넘어와 있었어요. 신의주부청에 사령부를 개설해 놓고 가동시킨 다음날 쯤 되었을건데, 충칭에서 들어온 소식에 김원봉 사령관님과 이응준 참모장이 아침 식사도 거르시고, 담배를 뻑뻑 피시면서 통신 전문을 읽고 계시는거야. ‘사령관님, 식사 안 하십니까?’ 그러니까 ‘나는 생각 없으니 자네 먼저 들게.’ 그러셔. 민간인이, 당시 최초 보도로 15만명 쯤 사상 된 것으로 집계되었다는데 두분 모두 상당히 충격을 받으셨던 것 같아요. 민간인이 대량 살상되었다는 것 자체도 충격이지만, 폭탄 한 방에 그렇게 사람들이 날아가면, 소총 들고 전차타는 군대가 앞으로 무슨 쓸모가 있는가 이런 고민을 하셨던 것이 아닌가 싶어. 그리고 사흘 뒤에 다시 폭탄이 나가사키에서 터졌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응준 참모장이 아침나절부터 줄담배를 피우면서 ‘저렇게 다 날려버리면 우리가 싸울 필요도 없겠습니다. 앞으로 미국 애들이 다 해먹는거 아니겠습니까?’ 그러셨었지. 김원봉 사령관님도 담배를 마주 피우며 ‘설마 그러기야 하겠소.’ 그 말씀 하시고. 그 때에도 그 말씀에 참 복잡한 뜻이 담겨있구나, 싶었어요.”
(나레이션) 충칭 임시정부와 전선사령부의 고민과 별개로, 전선에서 작전 중인 각급 부대에는 장병들의 충격을 감안하여 제한적인 정보만이 전달되었다. (나레이션 끝)
“우리야 히로시마에서 엄청 큰 폭탄이 터졌다, 그 정도 이야기만 들었어요. 이게 일본에 엄청난 충격을 줄 것이다. 그런 희망 찬 내용만 전달받았었지요. 그런데 사실, 굳이 원자폭탄이 아니어도 누가 봐도 전세는 기울어 진 것 아니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야 그런 폭탄이 터졌다는게 그리 큰 감흥을 주지는 않았지. 그냥 빨리, 저 간악한 일본 놈들이 백기 들고 나와야 할텐데. 그래야 다리 아프게 행군도 그만할텐데. 그런 생각만 했지. 허허허.”
“일본 포로들을 수용해둔 텐트를 감시하는데 비번이던 동료가 와서 히로시마에 폭탄이 터졌더라는 이야기를 하자니, 포로가 그 와중에도 히로시마라는 단어를 들었나봐요. 일본어로 ‘히로시마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러길래, 동료가 우리도 잘은 모르는데 히로시마에 큰 폭탄이 터져서 도시가 다 날아갔다더라, 대답해줬어. 대번에 안색이 새파래지더니 손을 벌벌 떠는게, 히로시마 출신인 놈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 싸우던 놈임에도 안쓰러워서 나도 모르게 ‘별 일이야 있겠느냐. 너도 군인이어서 알겠지마는, 전쟁이라는게 원래 사기를 진작시키려 전과를 크게 부풀리지 않느냐. 너무 걱정 말아라.’ 그렇게 말해줬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그 포로 얼굴이 아직도 생각이 나요. 눈 한가득 눈물이 고여서 입술을 꼭 깨물고 의자에 앉아서 달달 떨던 그게.”
“우리 대대는 3일 간 휴식 없이 작전을 마친 다음 정비 중이었어요. 그래서 사흘 만에 급양반에서 배식을 받아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기상 점호 때 대대장님이 말씀해주신 히로시마 원폭이 당연히 화젯거리가 되었지. ‘인제 저런 폭탄으로 일본 도시마다 날려버리면 전쟁도 금방 끝나는거 아니냐’ 그런 이야기도 들리고, ‘그런데 저렇게 도시를 날려버리면은, 인자, 거기 살던 민간인들도 죽는거 아니냐.’ ‘그런 소리 말아라. 저놈 새끼들 중국에서 어디 민간인이라고 살려 보내주던 놈들이냐. 누가 목 더 많이 베나 경쟁하던 그러던 세상 말종 놈들인데.’ 그러고 티격태격도 하고. 나는, 신의주를 지나 행군하면서 길가에 삐쩍 곪아서 눈빛이 퀭해서 우리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꼬맹이들 생각도 나고, 그래서 그냥 안 끼어 들었어요. 하여간에 상상만큼 병사들이 마냥 신나하고 그러진 않았던 거 같아요.”
(나레이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소식이 전해진 8월 7일에도 광복군은 원자폭탄 투하의 소식을 뒤로 하고 국내진공작전을 계속해서 수행중이었다. 청천강을 도하한 광복군 제11연대는 직후 제7보병연대에게 선두를 교대하여주고 8월 6일 오후부터 정주시에서 정비중이었다. (나레이션 끝)
"연대장님이, 인제 포로로 잡힌 적 지휘관을 심문하겠다고 포로를 수용한 텐트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우뚝 멈춰 서는거야. 그 다음에 하는 이야기가, 인제, 일본어로. '미야기 쿄칸!'하는 것 아니겠나? 일본 지휘관도 놀라서, 수갑 찬 상태에서 벌떡 일어나지."
(나레이션) 광복군 제11연대장 이종찬 대령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49기에 재학 당시, 전술 교관으로 사관학교에 파견된 미야기 겐이치로 중좌와 사제지간의 연을 맺었던 것이었다..
(사진자료. 이종찬 대령과 미야기 겐이치로 중좌가 생도와 교관 시절 찍은 단체사진)
사제지간을 맺었던 두 사람이 8년만에 전장에서 적으로 만난 셈이었다. 전쟁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절묘한 드라마였다. (나레이션 끝)
"이종찬 장군, 당시에 대령이셨지. 그 분은 원래 일제 자작 가문 장남이었어요. 그런데 일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도에 중국에 배치된 한 달만에 전술교범, 정보문건 등등을 닥치는대로 싸들고 귀순한지라, 일본 입장에서는 뒷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셈이지. 인제 귀족 명부에서도 삭제를 하네 마네 이야기가 있었지만, 결국 안 됐다는 걸로 알아요. 한마디로, 우리 연대는 일본제국 귀족님이 지휘하는 그런 부대였다, 그거지. 하하하하! 뭐, 임정 초기에 입지전적인 역할을 하신 동농 김가진 선생께서도 일본 남작위를 받으셨음에도 작위를 박탈당하진 않았던 걸로 아는데, 우리야 일본 애들이 뭔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요."
“연대장님이 인자, 그 포로한테서 압수한 물품을 둘러보는데, 그 중에 은으로 만든 회중시계가 보여요. 그걸 집어들고 만지작거리더니, 그걸 포로, 미야기 중좌한테 슥 건네주는거야. 그게 알고보니까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우수 생도에게 일왕이 하사하는, 그런 기념품이었다는 걸로 알아요. 이종찬 대령도 그걸 당연히 알고 있으니까, 아무리 자기는 광복군이고 포로는 적인 일본군이라도, 그 하나의 프라이드, 자존심인 것까지 빼앗지는 않겠다, 그런 심정이셨겠지. 미야기 중좌는 이종찬 연대장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더니, 꾸벅 목례하고는 시계를 받아 품 속에 집어넣었어요. 그리고는 이종찬 대령은 포로 심문은 정보참모에게 일임하고 돌아서서 나갔지요. 아무래도 직접 심문하기엔 머쓱하지 않으셨겠어요?”
“정주시 왜경들은 무장해제를 시켰는데, 아무래도 대도시가 아닌 산간마을은 헌병들이 여전히 치안유지를 맡았으니까 그 놈들이 소대에서, 많게는 중대급으로 규합해 저항을 두어 번 시도했어요. 결국 정비가 정비가 아닌 셈이었지. 그래도 우리보담야 7연대와 우리 사이를 연결하고 있던 2연대가 고생을 상당히 했지요. 허허.”
“우리 7연대는 그런 저항에 직면하지는 않았어요. 일본 헌병 애들도 결국 혼란 때문에 규합이 지나치게 늦어지지 않았나, 그렇게 추정할 뿐이지. 즉, 우리가 11연대로부터 전열을 교대하고 진격하면서 내려가는 동안 일본 헌병 애들은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가, 우리가 지나간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고 규합을 했다, 그렇게 보는게 옳겠지. 여튼 우리야 신이 났어요. 인제 우리는 차량화연대여서 지에무씨에 한가득 타서 길을 행군하문은, 소식을 어디서 들었는지 동포들이 나와서 길 옆에 서서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봐요. 다들 일제 시절 군인이나 경찰들 서슬 퍼런 것에 질려서 그런지 함부로 길을 막고 그러지는 못하는데, 길가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눈물만 글썽글썽거던 모습이, 참, 지금 생각하면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병력칸에 앉아서 그 사람들을 내려다보자니, 우리는 이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해방자다, 그러면서 한껏 도취되었었죠.”
(나레이션) 광복군 제7연대는 8월 6일 오후 전열을 교대한 이후로 차량화 된 이점을 살려 단 하루만에 평양시 외곽까지 진출하였다. 제7연대의 선두에 선 제118보병대대는 8월 7일 오전 01시경, 평양시 외곽에서 필사적으로 저지망을 형성하고 있던 일본 경찰과 헌병 혼성 1개 대대병력 가량을 단번에 격파하고 평양시 외곽에 도달한 상태였다. (나레이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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