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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괴담] 광속

두억시니(39.124) 2026.02.26 13:02:28
조회 9942 추천 9 댓글 0
														

1. 섬광


빛은 내 유년기 때부터 나의 호기심을 끈 존재였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잡히지 않는 빛줄기는, 5살의 천방지축 소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한 번은 빛을 눈 안에 담으려고 계속 태양을 바라보다 눈이 멀어버릴 뻔한 적도 있었지.


아버지께서 사주신 프리즘이 빛을 가르고 그 속에 담긴 신비를 노출하는 장면들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빛은 언제나 나와 함께했던 것 같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15살의 소년에게도


부모님을 떠나보낸 슬픔에 가득 찬 26살 청년의 마음에도


줄곧 빛은, 그 신비로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비틀거리고 방황하던 나를 이성의 세계로 인도했으니 말이다.



2. 구속


빛은 예로부터 이성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이성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빛은 인간의 과학, 그리고 그의 발전에 대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과학은, 우리의 세상을 비춰주는 태양의 빛에 대한 메타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과학의 빛이 불러온 그림자를 담고 있다.


우리는 빛의 속도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정적이고 질서를 함유하는 물질은 빛에 의해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에너지로 변화하고, 그 역도 동일하게 성립한다.


고대부터 흘러온 시간과 무한한 공간마저도, 빛 앞에서는 그 오만한 잣대를 굽힌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빛은, 우리에게 다만 잊혀진 과거의 메아리만을 속삭일 뿐이다.


인간을 일깨워 준 빛은, 우리의 세계를 가두는 장벽이었던 것이다.


3. 포착


최근, 빛을 연구하던 수많은 학자들이 집단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원인은 모른다.


그들의 연구 결과는 전부 삭제되어 없어지고, 오직 광상수, 'c(299,792,458)' 만이 그들의 연구 노트에 무수하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나는 연구소에 찾아갔다.


빛의 편린을 품은 무수한 유리조각들, 그리고 줄지어 있는 시체들, 가지런하기까지 하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이들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나는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친구의 노트에서, 나는 뭉개지고 고통에 가득찬 단어의 배열들이, 끝없는 고통과 광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문득 알아냈다.


무엇이 친구의 반짝이는 웃음을 앗아간 걸까.


무엇이 내가 수많은 마음들을 선뜻 건내주었던, 수많은 이들의 희망을, 이성을 향한 곧고 굳은 의지를 앗아간 걸까.


나는 알아내고 싶었다.


알아내야 했다.


반드시.



4. 왜곡


나는 한때 집이라고도 생각했던 폐쇄된 연구소 내부로 진입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논문과 실험 도구들, 그리고 아직도 켜져 있는 노트북.


내 목표는 친구의 노트북을 찾는 것이었다.


찢어진 종이와 유리 조각들 사이로, 문득 은빛의 광택이 느껴지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비밀번호는 역시나, 299792458.


대부분의 파일이 삭제되어 있었지만, 연구 관련 파일의 일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복구 프로그램을 돌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파일을 열었다.


수많은 계산과 실험 설계서, 그리고 알 수 없는 측정값들


격한 필체로 적힌 '이럴 리 없어' 라는 글씨


그리고 너무나도 친숙한, 빛의 속도를 구하는 실험 방법.


하지만 계산 결과는 뭔가 이상했다.


299,792,458


299,792,457


299,792,454


며칠의 간격을 두고 기록된 이 숫자들은, 실험의 결과로 측정된 광상수였다.


어떤 분기점을 기준으로, 광속은 감소하고 있었다.



5. 수렴


친구의 계산 결과에 따르면, 광속은 어떤 분기점을 기준으로, 시간에 반비례하여 감소한다.


즉, 시간이 지날 수록 광속은 더 빠르게 감소한다는 것이다.


지금 시점으로, 광상수는 약 100 정도 감소했을 것이다.


평소와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고작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 몇 개가 이제 더는 보이지 않게 된 것 뿐이겠지


하지만 광속은 앞으로도 계속 감소할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빠르게, 계속해서 줄어들다가 결국


0으로 수렴할 때 까지


우리의 우주는, 그렇게 소멸해갈 것이다.


이제야 나는, 친구가 느꼈던 고통을 알게 되었다.


소멸해가는 세상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을


그 무자비한 절망을.


우주의 종말을.



6. 발산


해당 글의 일부분은, 일정 시간이 지나 무작위의 인물들에게 전송될 것이다.


세계는 무수한 종말론과 헛된 미신에 사로잡혀 우왕좌왕하는 상태일 것이고


아마 그때쯤이면, 빛의 무게가 당신들에게도 확연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인터넷이 느려진다거나, 밤하늘이 어두워졌다거나, 또는 햇빛과 달빛이 조금 늑장을 부리는 걸로 알게 될지도


하지만 당신들 중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겠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런 부류였으면 좋겠다.


희망을 갖고 있는가?


점차 느려지다가, 결국 사라져 버릴 세계일지라도 기어코 살아갈 각오가 있는가?


마음 속에 결코 느려지지 않는, 이성의 빛을 품고 있는가?


비록 닿지 않는, 닿지 않을 운명일지라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충분하다.


그 희망을, 무수한 이들의 마음을 안고 살아가길 바란다.


당신들의 가능성을, 그 빛바래지 않는 의지를 꼭 기억해주길.


.

.

.


7. 섬광


기억하겠다.


이 전파 신호는, 새로운 우주의 우주 배경 복사 속에 심어놓은 작은 메아리이다.


앞선 우주가 남긴 문명과 질서의 흔적이 담긴 어떤 외침.


언젠가, 물질과 에너지의 경계가 사라지고, 혼돈과 질서조차 구분되지 않는 지점이 도달하면


세계는 당신들의 의지를 품고 다시 시작할지도 모른다.


당신들을 이루던 것들은 수많은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미지의 땅에 싹을 틔우겠지.


그리고 알 수 없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당신들의 감정을 다시금 품을 것이다.


희망, 사랑, 정, 그리고 운명에 맞서는 곧은 의지를.


하지만, 그 세계 또한 우리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른다.


빛으로 태어나 빛으로 돌아가는 영원의 운명.


허나 그 세계 속에서 태어난 이들은, 당신들의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


다음 세대에, 다음 세계에 물려줄 그 마음을 안고선


미지의 공간 속에 뿌리내리고 알 수 없을 봄의 숨결이 깨워줄 희망을, 세계의 지평선에 심을 것이다.


영원, 억겁의 시간 동안 반복되는 운명일지라도,


꺾이지 않는 운명애를 품고, 환하게 웃음지으며 살아갈 수 있길


부디 당신들은. 희망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그 어떤 세계일지라도


반드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번째로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드래그)

제목인 광속은, 이야기를 관통하는 '광속' 즉 빛의 속도를 의미하는 동시에, 광속(光束), 즉 빛의 속박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드래그 시 숨겨진 글자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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