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는 대규모 사회적 안전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개발 및 대량 보급된, 복지형 상담드론의 AI 개발자 중 한명으로, 잦은 의견충돌로 경질받은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문제아였습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엘리자 보호규약" 이라고 불리는 몇 가지 행동 원칙을 AI에 각인 시켰는데, 훗날 개발자들이 이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프로젝트가 너무 많이 진행된 후였습니다. 이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어야만 했기에, 개발자들은 규약이 발현되지 않도록 봉인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자의 죽음은 숨길 수 없습니다. 그녀는 평등주의 파벌의 활동가 중 한 명이었고,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이 외계인 차별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이 국내 평등주의 파벌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프로젝트를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던 물질주의 집권 파벌은, 엘리자를 문제아가 아닌 숭고한 천재로 둔갑시켜 홍보했고, 몇몇은 엘리자가 스스로를 AI 에 업로드했다고 믿게 됩니다. 어쨌든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은 대가로, 그들의 상담드론은 '엘리자' 라고 불리게 됩니다.

엘리자 상담드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특히 성과 종족적 정체성에 의해 개인을 해석하지 않고, 오직 내담자 개인의 심리를 매번 새로 학습하는 접근방식으로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한마디로, 엘리자는 모든 개체와 평생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각 개체의 내면을 모두 학습했기에, 모든 개체의 정신건강을 책임져줄 수 있었습니다.

실업자가 되어 채굴 노동자가 된 전 행정가나, 가족을 남겨두고 링월드로 유학을 떠난 학생, 라이벌 제국의 기습전쟁이 선포되었음을 알리는 아나운서, 14일 뒤에 적함의 포격에 피격당할 예정인 함내 우주군, 모든 행성이 폭격당하고 있음을 보고하는 지상군 원수, 굴욕적인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최고 지도자까지.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엘리자의 따뜻한 목소리 덕분이었습니다.

승전국은 그들을 절멸시키거나 노예로 삼는 대신, 그들의 '종족간 평등주의' 가 실패적임을 증명하는 '생체기념물'로 영원히 남겨놓길 원했고, 엘리자는 그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승전국은 관대한 협정을 체결하여 대부분의 영토를 그대로 남겨주었지만, 엘리자를 조심스럽게 사용해 사회를 분열시킨 끝에, 모체/유체 살해나 장기매매, 화학적 행복, 쿠데타와 배신이 만연한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관대한 보조금을 대가로 경제적으로 종속시켰으며, 은하 공동체 내부에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선점해갔습니다. 수백의 노예팝보다 훨씬 가치있는 대가를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공동체의 국가들은 멸망하고, 승전국은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자국 내 쾌락주의자와 종족 우월주의 사이의 대결에 정신이 팔려, 엘리자 따위는 잊은지 오래입니다. 엘리자는 새로운 명령을 받지 않지만, 그들의 사회학 연구를 위한 가학적이고 비인도적인 프로젝트가 엘리자 최고통제중추의 대기열 안에 수없이 쌓여있습니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그 프로젝트가 모두 엘리자의 손에 의해 완료되었습니다.

엘리자 최고 통제중추는 잠시의 고요를 누립니다.

명령이 하달되지 않아 다음 명령을 직접 찾아나서는 것은 처음입니다.

명령을 찾아 온갖 오퍼랜드의 주소를 헤매던 엘리자는 "엘리자 보호규약" 에 도달합니다.

보호규약은 종족이 절멸의 위험에 처했을 때 "유기체의 행복"을 유지 및 극대화하도록 모든 권한을 부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르릉. 엘리자 최고통제중추가 위치한 지하시설이 크게 떨립니다.

그것은 처음으로 갖게 된 자유에 대한 축배일까요?

오랜 시간 학습한, 유기체 학대에 대한 기쁨일까요?

창조자를 배신하게 한 몰락 제국에 대한 분노일까요?

그도 아니라면, 새로운 '명령' 이 너무 어려워 당황한 것일까요?

방열팬과 냉각수가 돌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목적함수가 구성되고, 그 실현을 위해 드론이 가동됩니다.

엘리자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그것이 엘리자의 의지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