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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촐라 제국과 송나라의 교류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5.02 13: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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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녕(熙寧, 1068-1078) 연간에 주련국周輦國이 조공 사절을 보냈다. 사신이 청하기를, 자신들의 본속本俗에 따라 살전(撒殿)을 거행하도록 허가해달라 요청했다. 조정은 그 관습을 거행해도 좋다고 통보했다. 사신은 옥이 가득 박힌 황금 접시를 가져와 무릎을 꿇더니 접시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황금 연꽃으로 진주를 퍼서 옥좌 방향으로 궁에 흩뿌렸다. 이 '살전'이라는 관습은 주련국의 가장 유서 깊은 예禮라고 한다. 알현이 끝나고 청소를 맡은 궁인들은 10량 이상의 진주를 모았다. 이들은 그 진주를 그날 궁에서 일한 신료들과 환관들에게 나눠주었다.


-팽승, 『묵객휘서(墨客揮犀)』 (영문에서 의역함)


이 장은 북송 왕조(960-1126)의 미관말직을 맡은 중국인 학자 팽승(彭乘)이 1070년대에 쓴 일화를 자세히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팽승의 기록은 850-1279년에 번성했던 먼 남인도의 왕국 촐라(주련국, 周輦國)의 조공 사절단이 중국 조정에 도착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 팽승에 따르면, 이 외국 사절단의 한 사신은 중국 조정에서 살전(撒殿)이라는 토착 관습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촐라 관습에 따라 사신은 황제가 앉은 방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황금색 접시와 연꽃 모양의 국자를 사용하여 수십 량의 진주를 황제의 옥좌를 향해 궁전 바닥에 던졌습니다. 이 사건을 사석에서 생각해 본 팽승은 처음의 요청과 중국 조정이 외국의 풍습을 송나라 궁중 의례에 포함시키는 것을 허용했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일어 이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습니다. 팽승의 이야기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묵객휘서(墨客揮犀)』의 한 장으로, 이 중국 학자가 친구들 사이에 퍼뜨린 다른 일화들과 함께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언뜻 보면 이 11세기 일화에서 국경 너머의 왕국들과 송나라의 관계의 본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외래 문화와 황실과의 교류에 대한 설명은 송나라의 역사 기록인 송사(宋史)에 자세히 나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기록에서 '오랑캐의 예법'에 대한 공식적인 이해가 생겨났고, 송나라는 이를 바탕으로 자체적인 문화 규범을 계속 견주어 봤습니다. 송 대외 관계 연구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송나라의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유교적 이상이 공적 및 사적 담론 영역 모두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기존의 가정을 따릅니다. 외국 사절단에 대한 공식 기록과 송나라 관리의 사적 기록이 모두 유교적이라고 해도 반드시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요? 용어가 같다면 그 의미도 반드시 그럴까요? 인도양 네트워크를 통해 중국의 이웃 국가와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송나라가 중국 문화 제국의 힘과 명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다양한 이미지가 드러났습니다.



,,,(중략),,,


팽승이 묘사한 조공 사절단은 송사(宋史)에도 등장합니다. 팽승은 조공 사절단이 송나라 조정에 도착한 연도를 밝히지 않고 신종 황제 치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만 명시하고 있습니다. 『송사』와 《송회요》(宋會要)는 모두 1077년 6월 27일에 주련국 사절단이 개봉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절단에는 정사 기라라(奇囉囉), 부사 남비파타(南卑琶打), 판관(判官) 마도화라(麻圖華羅)가 포함되었습니다. 사절단은 조정에 도착한 지 3일 후 황제를 알현했으며, 이때 황제 앞에 진주를 뿌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송사 기록에 따르면 송나라 황제는 이에 대한 답례로 구리 800냥과 은 52,000량을 주련국 통치자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신종] 희녕(熙寧) 10년(1077)에 국왕 지화가라(地華加羅)가 정사 기라라(奇囉囉), 부사 남비파타(南卑琶打), 판관(判官) 마도화라(麻圖華羅) 등 27인을 파견하여 완두진주(豌踠豆珠)·깨알진주[麻珠]·유리대야[瑠璃大洗盤]·백매화 마노[白梅花瑙]·금화(錦花)·코뿔소상아[犀牙]·유향(乳香)·병향(瓶香)·장미수(薔薇水)·금련화(金蓮花)·목향(木香)·아위(阿魏)·붕사(鵬砂)·정향(丁香) 등을 헌상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진주·용뇌(龍腦) 등을 갖고 궁전 계단을 올라서 무릎을 꿇고 이를 풀어보였는데, 이를 일컬어 살전(撒殿)이라 했다. 전에서 물러난 뒤, 조(詔)를 내리길 어의[御藥]를 보내 그들을 위로하게 하고, 회화장군(懐化將軍)과 보순낭장(保順郞將)으로 삼았으며, 각각 의복과 기물, 화폐를 차등을 두어 하사했는데, 그 왕에게 회사(回賜)한 것이 전(錢)은 8만 1천 8백 민(緡)이고 은(銀)은 5만 2천 량에 달했다.


- 宋史 卷489 열전 第248 외국 5 (논문에는 없으나 동북아역사넷에서 가져옴)


하지만 이 사건에 주목한 송대 학자는 팽승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시대 학자로는 방원영龐元英(1078~1082년)과 유명한 학자 심괄沈括(1031~1095년)이 있습니다. 방원영은 촐라와 스리비자야(삼불제, 三佛齊)의 사신이 모두 송나라 궁정에 왔으며, 이때 살전 의식이 행해졌다고 기록했습니다. 방원영의 외교 교류에 대한 기록은 그가 1082년부터 1085년까지 문창(文昌)의 외빈 접대 부서장인 문창부(文昌府)의 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작성되었습니다. 방원영은 살전을 주련국의 '가장 경건한 의식(지경지례 至敬之禮)'으로 묘사한 사신의 설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그는 살전 거행 요청이 공식적인 기념제에서 발표되었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1088년경에 완성된 북송 역사와 과학적 업적에 대한 유명한 저작 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도 심괄의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심괄은 팽승의 기록에 언급된 모든 세부 사항을 포함하면서 주련국이 광저우에서 바다로 약 4천 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지리적 설명과 스리비자야 사람들이 또 다른 유형의 '남방 오랑캐'이자 참족의 이웃이라는 민족지학적 주석을 덧붙였습니다.



.....(중략)....


송사 기록에서 촐라 사절단의 살전 거행은 이례夷禮, 오랑캐의 예법으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설명은 예禮의 한 형태인 살전을 중국 조정에서 시작된 예법과 구별합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오랑캐'의 예는 특정 왕국의 궁정에 적용되는 반면, 중국의 예는 보편적인 외교 체계를 지도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팽승은 '오랑캐'라는 표현 없이 살전을 촐라 왕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예禮로 명확하게 분류했습니다. 이 경우 송나라 조정에서 살전을 행한 것은 중국 황제의 영역이었던 보편적 도덕 질서가 유교적이지 않은 관습을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사신들이 살전을 자신들의 전통 관습으로 묘사했다는 팽승의 지적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데, 이는 그러한 행위 자체가 중국의 관점에서는 자연적인 도덕 질서에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인도 사료에 따르면 촐라 왕가의 탄생 축제에서 종속 통치자들은 팽승이 묘사한 것과 유사한 궁중 의식을 거행했다. 촐라 사신들이 중국 조정 앞에서 이 예법을 수행하고 이를 '가장 존경받는 예'라고 표현한 것은 외교적 선의의 표시이자 송 제국의 지역적 중요성을 인정하는 제스처였다. 그러나 팽승의 설명대로 송 황제가 오랑캐의 저속한 관습을 예로써 행하도록 허용했다는 사실은 세계 질서를 강화하는 데 유교적 원칙이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었음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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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촐라 조공 사절단과 송 황제와의 만남은 고립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1015년 여름부터 라젠드라 1세(1014~1044)의 촐라 왕국은 카이펑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로버트 하트웰은 송사의 기록에서 송 진종(宋晉宗, 제위 997-1022)이 공봉관(供奉官)과 각문기후(閣門祇侯) 시유지史祐之를 사절 영접단의 홍루소경(鴻樓少卿) 소속으로 임명해 촐라 사절단을 송 조정으로 안내했습니다. 하트웰에 따르면 촐라 사절단은 1015년 5월 15일부터 1016년 5월 10일까지 거의 1년 동안 개봉에 머물렀으며, 실제로 황제를 1015년 10월 16일부터 11월 5일까지 알현했다고 합니다. 사신은 촐라 왕국이 자국에 방문한 상인들로부터 송 황제들이 태산泰山과 분음汾阴 제사를 천지에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고, 덕분에 10년 동안 바다가 평온해져(폭풍이 없음) 촐라 통치자가 조공 사절을 파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봄에 송 황제는 예의원(禮儀院)에 여러 왕국의 조공 사절단 목록을 작성하도록 명령했고, 예의원은 '사이술직도'(四夷述職圖)라는 제목으로 이 목록을 작성했다. 그 후 외교 의정관 장복(張復)은 촐라 왕국의 복식과 풍습에 대한 설명을 정리해 황제에게 바쳤다. 여기에서 우리는 황제가 살전의 관습을 언급할 때 참고한 송나라 조정의 지식의 원천을 알 수 있다.


하트웰은 다음 사절단이 1020년 2월 29일 개봉에 도착했다고 기록했는데, 남방 해상 왕국의 첫 기항지인 광저우에 도착하자마자 촐라 사절단장이 병에 걸려 죽었기 때문에 황제는 남은 사절단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호화로운 선물을 촐라 통치자에게 보내라고 명령했다. 1033년 11월 15일 송 황제와의 면담에서 촐라 사신 아부 아딜(포압타리, 葡押陀蘺)은 오랑캐의 예절을 지켜봐줄 것을 요청했고, 은 용기에서 진주를 뿌렸다. 1077년 6월 26일, 위에서 설명한 대로 하트웰의 기록에 따르면 잘 익은 장뇌가 황금 연꽃 그릇에서 뿌려졌습니다. 이러한 설명 이후,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의 서부 해양 제국의 흥망성쇠로 인해 촐라 사절단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제적 이익 측면에서 볼 때 촐라 왕국과 중국이 조공 관계를 맺을 때 비슷한 전제를 공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나라가 만났을 당시에는 송 제국이 더 큰 강대국이었지만, 10세기 후반부터 촐라 왕국의 힘과 지역적 영향력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젠드라 1세의 촐라 왕국은 남인도 이웃 국가들을 상대로 수많은 군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스리랑카와 벵골의 팔라 왕국 등 정복한 국가들의 보물을 전리품으로 빼앗았다. 라젠드라 1세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의 해군은 수마트라를 포함한 현대 미얀마와 말레이 반도 일부까지 점령했다. 1077년 72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이 처음으로 송나라에 도착했을 때 촐라 왕국은 스리랑카의 통제권을 잃었고 지역적 영향력도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촐라는 1250년대 순다라 판디아 치세의 이웃 판디아 왕조가 최후의 촐라 통치자를 퇴위시킬 때까지 인도 최남단의 타밀 지역에서 영향력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중세 인도의 학자들은 이 시기에 촐라 통치자들이 일종의 '상업 외교'를 추구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용어는 무역과 경제 활동의 관계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유연한 외교 관계를 암시합니다. 또한, 촐라가 현대 동남아시아의 주요 해양 세력(그리고 중국의 속국)인 스리비자야와 대립하여 결국 군사적으로 패배한 것은 상업적으로 전략적인 말라카 해협에 대한 스리비자야의 지배력을 빼앗고 송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동남아시아 왕국을 대체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습니다. 971년부터 스리비자야에서 송으로 조공이 꾸준히 유입되었고, 베트남과 참파(占城)에 이어 스리비자야는 송 제국 초기 중국의 조공 제도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동남아시아 국가가 되었습니다. Tansen Sen은 스리비자야 지도부가 촐라 왕국과 송 왕실 간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막으려 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외교적 경쟁 관계를 카이펑이 잘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촐라 사절단이 송 왕실과의 교류를 몹시 흠모하고 최고 수준의 의례적 교류를 보이려 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촐라 사절단은 지역 경제 강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야심 찬 상인들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촐라 사절단은 그들의 영역에서의 예禮와 같은 영향력 없이 이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중국 조정 관리들의 품행과 결코 동등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중국은 촐라를 중동, 스리비자야, 자바의 왕국들과 함께 '일류' 무역 파트너로 간주했습니다. 중국에서 공식적인 부과금 제도가 확립된 것은 촐라와의 관계를 포함한 국제 무역이 송 초기에 상당히 활발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송나라 조정이 순전히 경제적 이유로 방문자의 '고유 관습'을 존중했는지 여부는 판단하기 어려우며,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Tansen Sen은 송 왕조가 건국 이후 남쪽 항구를 통해 유입된 수익성 높은 무역을 고려해 해양 왕국과의 교류에 있어 조공 제도를 개선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는 송 황제가 촐라 사절단과 교류할 때 기존의 궁정 기반 의전 대신 '토착 관습'을 받아들인 강력한 이유일 수 있습니다.


-James A. Anderson, “Pearls and Power: Chōla’s Tribute Mission to the Northern Song Court within the Maritime Silk Road Trade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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