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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한국독립운동가들이 벌인 니콜라옙스크 학살

안티파_굳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26 13:03:04
조회 1726 추천 21 댓글 15
														

A. 니콜라옙스크 학살


1918년에 일본은 시베리아의 내전에 개입하였다. 여기에 복잡한 배경이 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는 러일전쟁이라는 기억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10여 년동안 화해를 즐겼고 제1차 세계대전이 되자 동맹을 맺었다. 1917년 2월에 러시아 혁명이 되자 관계가 더 복잡해졌다.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정치적 변화를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2월 혁명 이후 러시아 임시정부는 이전에 일본과 맺은 약속을 존중했고, 일본도 그런 약속을 존중한 러시아 임시정부를 인정했다. 그러나 1917년 10월에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가 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이전정부가 외교에서 맺은 약속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내부에서 논쟁이 있었는데 개입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일본측의 외교정책은 반 러시아가 아니라 그저 러시아의 국가발전 방향과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 했기때문에 한 것이었다. 러시아 그 자체에 대한 조치는 아니었다. 일본은 반 볼셰비키 세력과 동맹을 맺고 개입했다. 왜냐면 반 볼셰비키 측은 이전정부와 맺은 경제, 군사적 약속을 지키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현실을 잘못 평가했다. 그건 실패로 끝났다. 1


러시아 내전 기간중 시베리아에선 콜챠크 정권이 세워졌다가 무너졌다. 콜챠크 정권이 무너진 뒤 시베리아엔 공백이 생겼고 유격대(파르티잔)와 일본군 사이엔 긴장이 돌았다. 그런 사이에 둘 사이에 충돌이 생겼는데 첫번째 주요 충돌은 니콜라옙스크에서 벌어졌다. 이 곳은 러시아사람 8800명 · 한국사람 900명 · 중국사람 1400명 · 일본사람 730명이 정도가 거주하는 곳이다. 일본인들은 민간인 380명 (그중 여성과 아이들 184명) · 수비대와 해군 통신 부대에 주둔한 군인 350명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시다 토리마쓰(Ishida Toramatsu) 영사는 1917년에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도착해있는 상태였고, 수비대는 이시카와 마사노리(Major Ishikawa Masanori)가 1919년부터 지휘하고 있었다. 2


1920년 1월에 어느 유격대가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 집단은 아나키스트 트랴피친이 지휘하는 붉은 유격대였다. 트랴피친은 아나키스트이면서 소비에트 정권을 인정한 군 지휘관으로서 붉은 유격병들을 지휘하며 아무르강을 따라 지역들을 차례로 “해방”시키며 내려오고 있었다.3 당시 붉은군대는 트랴피친을 감시하기위해 니나 레베데바 를 보낸 상태였다. 레베데바는 트랴피친 부대에서 참모가 됐고 트랴피친과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4


트랴피친은 1919년 11월 기준으로 러시아인 1500명 · 한국인 200명 · 중국인 300명 · 일부 헝가리 국제주의자 · 현지 원주민을 이끌고 있었다.5 트랴피친은 니콜라옙스크로 오기전부터 자신들을 의심하는 지식 인이나 부유한 농민들을 살해를 하며 6 니콜라옙스크로 다가오고 있었다.


트랴피친의 유격대는 니콜라옙스크로 내려오면서 하얀군대와 충돌했고 그 중 중 하나가 비츠 대령의 파견대였다. 트랴피친은 비츠 대령에게 항복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 찾아갔다. 트랴피친은 비츠에게 미리 자신이 도착할 것임을 전보로 알렸고 저녁 7시쯤에 비츠를 찾아왔다. 트랴피친은 자신을 “아나키스트"라 소개하며 "기존 권위에 반대"하며 "소비에트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트랴피친은 비츠 대령에게 항복할 것을 제안했다. 비츠는 그것은 논의조차 하지 않겠다고 했다. 트랴피친은 "그럼 끝내자. 서로 죽이면 어떻게든 인민들이 스스로 일을 해결할 지도 모르지."고 말했다. 트랴피친은 대령과 다른 장교들과 저녁을 먹고는 떠났다.7


트랴피친 측은 내려오면서 일본군과 협상하기위해 협상가 2명을 보냈는데 일본군은 그 둘을 하얀군대에게 넘겼고 하얀군인들은 그 둘을 처형한 사건이다. 그러자 트랴피친 측은 본인들이 데리고 있던 포로를 학살하여 보복하였다.8


이시다 영사는 이런 상황에서 도쿄에 본인의 우려를 담은 전보를 보냈지만 그 전보는 소용없었다. 해협이 얼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철수도 못하고 군인들을 보강할 수도 없었다. 9


트랴피친 부대는 점점 숫자가 불어났고 트랴피친 부대를 막기위해 일부 백군 병사들과 일본군 병사들이 상대했으나 패배하였다.10 현지 주둔 일본군은 1920년 1월 24일·26일에 도쿄에 무전을 보내 일본군 수비대를 강화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르 강 유역의 군사활동과 지역이 얼음으로 막힌 상태 였기때문에 보내지 않았다.11 그 뒤 트랴피친 부대는 니콜라옙스크 외곽을 포위하고 전선을 끊어버렸다. 일본군은 트랴피친 측과 협상을 하였다. 일본인들이 무기를 유지한다는 전제로 마을로 유격병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12 트랴피친 측은 니콜라옙스크를 들어온 후 하얀군대 진영의 관리·장교·자본가를 체포한 후 처형하였다.13 마을의 지식 인들 역시 체포당해 감옥에 갇혔다. 14 하얀 정부와 관련이 있거나 관련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 상인들, 어업, 금광, 제재소 주인과 직원, 카데트 당의 지역위원회 위원들, 공무원 등 여러사람들이 체포당했다. 15 심지어는 붉은진영과 화해를 주장하고 환영했던 사회주의자들까지 학살했다. 트랴피친은 멘셰비키 당원과 사회주의자혁명가당원까지 무차별로 체포하고 체포된 사람들의 가족들까지 잔인하게 고문하고 살해하였다. 16 마을 전체에는 무차별 수색과 체포, 처형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체포는 사형 선고와 맞먹는 것이고 아무도 풀려나올 수 없었고 수감자들은 끔찍한 고문과 학대를 받았다.17


다른 주둔지에는 비츠가 지휘하는 하얀 파견대 군인들 30여명이 있었는데 군인들이 항복하자 이 포로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18 비츠 대령(Colonel Vits) 측은 항복하기전에 항복을 해야하는지 논했다. 많은 군인들은 내전의 참상을 잊고 다시 평화로운 삶을 살고싶었다. 니콜라옙스크에 평화협상을 위한 대표단을 보내기로 했다. 모든 게 잘될 경우 주둔지에 암호에 맞는 전보를 쳐서 항복하기로 하였다. 그런 전보가 없으면 투쟁은 계속하기로 하였다. 하얀 대표단은 붉은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잡혀가서 고문을 당해 암호를 말했고 그 뒤 살해당했다. 트랴피친 측은 주둔지에 전보를 쳤다. 하얀 군인들은 그게 진짜라고 믿고 투항했다. 붉은 유격병들은 거기서 무기와 물자를 받았다. 그리고 하얀 군인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살해했다. 19


하얀 파견대의 지휘관(Colonel Vits)은 죽기전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20


『이것이 아마 내 인생의 마지막 편지일 것이다. De Kastri 근처에 있는 포위된 등대에서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따. 나는 장교 10명, 군인 35명, 공무원 몇명으로 구성된 내 파견대 잔당과 함께 이곳에 왔다. 우리는 두 달동안 빨갱이들에게 포위당했고 먹을 것이 거의 없다. 1파운드 짜리 검은 빵, 차 대신 물, 하루 한번 격차 스프.



겨우 3월 9일에야 니콜라옙스크가 빨갱이들에게 점령당하여 일본인들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고, 마침내 받아들인 게, 그것 은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에게 넘어갔다는 거야.



항복하지 않으면 안 돼. 우리의 안전은 보장되었지만 붉은 군인들이 약속을 지킬지 모르겠다.

그래서 2, 3일 후에 우리는 De Kastri에서 니콜라옙스크로 보내질 거야.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어.….…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하다. 여기 등대에서? 아니면 빨갱이와 함께 온갖 시련을 걲고 고통받고, 하나님이 진리를 보고 듣게 된다면 나는 해방되어 블라디보스톡으로 갈 수 있을 거야.

아, 지금 이 순간 얼마나 힘든지.….…

희망의 빛도 없고.….…

점점 더 많은 농민들이 소비에트 정부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어.….…』


비츠(Vits)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쓴 뒤에 스스로 총으로 쏴서 자살했다. 그래서 트랴피친 측에게 희생되지 않았다. 21그 편지는 등대지기 1급(N. N. Ovodov)에게 보냈다. 그러나 등대지기는 편지를 배달할 수 없었다. 붉은 유격병들은 등대지기를 고문하고 죽인 뒤 들판으로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22



트랴피친을 본 사람들은 트랴피친을 "무감각한 괴물"이라고 묘사했다. 트랴피친의 연설은 "끔찍한 분노"로 가득찼고 당시 교육받지 못한 군중들의 마음을 자석같이 끌어들였고 복수에 대한 열정을 일깨웠다.23 트랴피친은 대담할정도로 의지가 강하고 결연한 사람이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문맹) 러시아 사람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했는지 여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트랴피친의 연설은 "진절머리"가 나는 것이었는데 트랴피친은 "그를 쏴버려!", "그를 아무르강과 함께![수장]", "스컹크!", "반혁명군!"따위 표현들을 즐겨 사용했다.24


트랴피친은 니콜라옙스크에 들어온 후 선언했다. “반혁명 스컹크, 자본가 계급, 장교들을 파괴” 할 것. 그리고 “도쿄에서도 같은 일을 할 계획”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트랴피친의 힘찬 연설에는 “처형”, “스컹크”, “부숴버리자”, “섬멸”같은 표현― “공산주의 어휘에선 표준용어” ―들이 산재해있었다.25 트랴피친은 “이 모든 쓰레기, 자본가 계급은 파괴되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니콜라예프스크나 하바로프스크를 잡는 것 뿐만이 아니라 도쿄로 가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와 전 세계의 대표들을 파괴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뉴욕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라 말하였다.26그리고 유격병들은 본인들이 니콜라옙스크에 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예를 들면 어느 사업가(P. M. Avshalumov and N. A. Slav)를 체포해서 쏴죽이고 물품을 압수한 일을 자랑했다.27


니콜라옙스크 교도소와 고문실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대량처형, 무역과 산업에 끼친 대혼란, 마을 생활의 마비 따위들은 일본군에게 불안을 일으켰다. 28


그러다 3월 10일에 유격병 대표들은 일본군 측에 요구했다. 일본군들은 전부 무기를 내놓아야한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모든 무기 양도요구를 받자 생명에 두려움을 느꼈다. 29 이시카와는 트랴피친을 습격하기로 결정하고 모든 일본군 병력과 민병대를 동원해서 트랴피친 측에 기습공격을 하였다. 일본군의 선제공격은 3월 12 새벽 2~3시에 벌어졌다. 수백명의 병사들이 건물을 에워싸고 기름과 휘발유를 붓고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과 총을 퍼부으며 불을 질렀다. 하지만 트랴피친은 살아남아서 반격을 했고 일본인 대다수를 죽였다. 트랴피친의 붉은 유격대는 전투 중에 마주친 일본인은 남자 여자 아이 구분없이 모두 죽였다. 30


붉은 유격병들은 일본인들이 점령한 집부터 공격하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방비되지 않은 채 일본 여성들만이 남은 집부터 들어갔다. 그리고 일본 여성들을 괴롭히고 베어 죽였다. 일부 일본여성들은 옷을 반쯤 입은 채 거리로 뛰쳐나왔으나 유격병들은 쫒아가서 총검으로 찔렀다. 거리는 여자시체들이 흩어져있고 온통 피바다로 뒤덮였다. 31 많은 일본 여성과 아이들이 아무르 강으로 끌려가서 도살됐다. 시체는 눈의 구덩이 던져졌다. 유격병들은 몇몇 아이들, 더욱이 3세 미만의 아이들은 차마 죽이지 못 했다. 대신 산채로 버렸다.32


많은 붉은 유격병들은 그후 죄책감에서 살았다. 붉은 유격병들은 악몽속에서 어린아이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작은 눈,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 눈 속에서 작은 팔과 다리가 경련하며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유격병들은 그런 심리적 고통에서 끊임없이 음주와 방탕을 하며 그 기억에서 멀어지려 하였다. 33


일본인들은 여성·어린이·부상병들 136명이 죽지않고 투옥됐다.34


일본 수비대가 무너지자 붉은유격병과 노동자는 일본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붉은유격병과 노동자들은 집에 뛰어들어가 남자는 물론 여자들과 아이들도 무자비하게 죽였다. 길에서 아기를 안은 일본인 어머니를 보면 아기를 품에서 떼어내고 그 어머니를 죽인 다음에 아이를 죽였다. 중국인이나 러시아인 노동자와 동고하고 있던 일본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본 민간인들은 전멸했다. 한 일본인 의사들은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을 진료하다가 살해당했다. 일부 유격병들은 양심에 찔려서 아이들과 여자들을 죽이지 못 하고 감옥으로 보냈다. 35


일부 붉은 유격병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죽이는 걸 망설였는데 이들과 달리 여자나 아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죽이던 유격병들이 있었다. 그건 한국인(한국독립운동가)과 중국인 유격병이었다. 한국인(한국독립운동가)유격병과 중국인 유격병들은 여성과 어린이까지 포함해 일본인을 죽이는데 적극적이고 “악랄”했다. 일부 유격병들은 한국인 중국인 유격병들을 자랑하였으나 일부 유격병은 분개하였다. 36


니콜라옙스크 전투 당시 일본군은 전투도중 많은 유격병들을 체포했는데 이들 상당수는 살해되지도 않고 부상을 당하지도 않았다. 당시 유격병들이 보고한 내용에 근거하면 일본인은 무기를 빼앗아 풀어줬다고 한다. 나중에 무기를 수색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잠깐 체포한 후 무기가 있느냐며 추궁한 뒤 부정적인 답변을 받으면 러시아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자리를 떴다.37


트랴피친 측에겐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니콜라옙스크에는 두개의 감옥이 있었는데 트랴피친은 니콜라옙스크를 점령한 후 여러 사람들을 정치범으로 감옥에 집어넣었는데 이탓에 감옥엔 정치범으로 가득찼다. 트랴피친은 13~14일에 정치범들을 모두 죽였다. 38


『13~14일 밤, 이 사람들은 트랴피친의 명령에 의해 감옥에서 끌려나와 눈 덮인 땅위인 아무르의 얼음 위를 맨발에다 허리까지 벗겨진 상태에서(이때 날씨는 영하 15도) 행진하다 도살됐다. 총탄은 발사되지 않았고 모두 총검, 칼,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살해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죽인 방식을 묘사하는데 어떤 단어도 쓸 수 없다.』39


일부 사람들은 마당에서 살해당했다. 지방의 행정관(F. F. von Bunge)은 뒷통수에 총을 맞고 나머지 사람들은 칼, 총검, 도끼, 장작 등 같은 물건들에 살해됐다. 어떤 사람들은 마당으로 끌려가서 머리를 얻어맞고 총검에 찔리거나 칼에 베여서 죽었다. 몇명만이 총탄에 맞아 죽었다. 시체들 중 일부는 눈으로 덮인 마을 쓰레기장에 옮겨졌고 다른 일부는 아무르 강으로 옮겨져서 얼음 구멍에 던져졌다. 살인은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금광업자(Akkerman, Eremkin, and Zimenkow)들이 잔인하게 살해됐다. 한 유대인 낚시 사업가(Veinerman)의 늙은 아내는 유격병들에게 마굿간으로 끌려갔고 유격병들은 그 아내를 쏴죽였다. 한 공증인(Kozlov)은 마굿간에서 옷이 벗겨지고 총탄에 맞았다. 한 금광업자(Akkerman)의 여동생은 마당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살해됐다. 40


시베리아 주둔 일본군은 니콜라옙스크에 주둔하던 일본군과 이뤄지던 연락이 끊기도 말았다. 일본군은 니콜라옙스크를 향해 구호군을 파견했다. 41 그리고 일본군들은 여기에 복수를 하기로 하였다. 4월 4-5일 밤에 붉은 진영의 조직들을 공격했다. 일본제국군의 습격으로 기존 항일세력은 파괴되고 무너졌다. 일제군은 연해주를 장악하고는 투옥된 하얀군 세력을 석방하고 무장해제된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체포했다. 군인 중 러시아 사람은 하얀군대 진영에게 넘겼다. 4월 9일, 라조, 루츠키, 시비르체프, 안드레예프 같은 사람들이 일제군에게 체포됐다. 5월 말에 일제군은 라조 일행을 하얀군인부대에 보냈다. 하얀군인들은 이 일행들을 무라비요프-아무르스카역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 일행을 살아있는 채로 기관차 화실에 던져 불태워죽였다. 42 하얀군인들이 라조측을 과격하게 살해한 배경이 있다. 라조 측은 이미 우익진영(Grand Duke Mikhail Aleksandrovich, his English secretary, and his chauffeur)의 인물들을 1918년 6월 13일에 산채로 공장 용광로에 쳐넣어 죽여버린 일이 있다. 43


일본군의 기습공격에 따른 양측의 충돌 이후 일본인측 1천명, "볼셰비키" 진영은 3천명이 사상자가 됐다. 44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선 250~300명의 한인들이 살해당했다. 45


일본군이 이런 보복공격을 하자 러시아 소비에트 외무부는 "무허가 조치"에 사과하고 블라디보스톡에 "러시아-일본 화해 위원회"를 설립했다. 그 이후 일본군은 본인들이 주도하여 블라디보스톡에 정부를 설치했다.46


레닌 측은 트랴피친 측에게 연락해서 러시아 극동에 러시아-일본 사이의 완충국(극동 공화국)을 세운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트랴피친 측은 항의하였다. 트랴피친은 "레닌이 그만큼 큰 바보였고, 지역주민들이 아나키를 맞을 준비가 되었을 때, 그는 완충 국가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떠올렸다”며 분노했다. 47 트랴피친은 “아나키”를 준비하는데 레닌이 완충국인 극동공화국을 생각하자 분노하였다. 이건 다른 아카니스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나키스트 참모들은 완충국인 극동공화국을 소비에트 대의에 대한 배신으로 보았다. 48


일본군들은 병력을 파견해서 니콜라옙스크로 다가오고 있었다. 트랴피친 측 내부에선 “하얀 '파충류'들이 일본인들의 접근을 감지하고 고개를 들고 있다.”, “준비를 해야한다”는 반응이 나왔다. 49 트랴피친 측은 5월 말에 일본인 136명을 처형했다. 50 유격병들은 교도소에 남아 있던 일본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나머지는 헛간 맞은편 강둑으로 끌고가서 총검에 찌르거나 칼로 베거나 도끼로 내려쳐 죽이고 물속으로 떠밀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일본인 17명도 살해대상이 됐다. 이들은 강둑으로 끌려가 살해됐다. 51


러시아 사람들도 차별없이 살해대상이 됐다. 트랴피친의 붉은 유격대는 러시아 남성은 물론 러시아 여성 · 아이들 까지 포함해서 4000명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52 무차별 사형집행은 5월 21일 밤부터 시작됐다. 가족들까지 포함한 대규모 체포가 벌어졌다. 5월 22일에는 트랴피친 측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체포했다. 죄수들은 차별없이 사형됐다. 사형집행자들은 체포와 사형집행을 위해 사람들의 집으로 갔다. 날마다 새로운 피해자들이 몰려들고 "정리"됐다. 검사, 변호사, 은행 직원들과 은행의 관리자, 상업 은해의 대리인, 기술자, 마을 시장, 80세 노인, 어린 아이들, 엔지니어 등등과 그 사람들의 가족들이 무차별로 살해됐다. 또한 폴란드인들도 살해대상에 벗어나지 못 했다. 군인 엔지니어 우체국 직원 라디오 방송국 직원 의사 등등 여러 폴란드인이 살해됐다. 영국인도 살해됐다. 53 교도소에선 총소리, 총소리에 가려진 부상자들의 비명소리와 신음소리, 유격병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54 5월 24일엔 손이 묶인 사람들이 배에 실려서 아무르 강 한가운데로 끌려갔다. 거기서 사람들은 총 개머리판에 맞거나 총검에 맞아 물속에 던져졌다. 55


이런 상황에 도망치던 사람들도 있었다. 트랴피친의 군인들을 태운 배들은 아무르 강으로 오르내리며 마을과 숲속에 있는 도망자들을 찾아다녔다. 붙잡힌 사람들은 간단하게 처리됐다. 56


남아있는 마을 주민에 대한 몰살은 5월 28일부터 시작했다. 다른 마을 주민들도 손이 묶인 채 20~30명씩 배를 타고 아무르강 한복판까지 끌려갔다. 피해자들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고 물속으로 던져졌다.57


5월 28~29일이 되자 유격병들은 마을 자체를 파괴하는 일을 진행했다. 유격병들을 마을에 불을 붙혀 태워버리고 폭탄으로 터트렸다.58


마을을 파괴하면서 피신하지 않은 사람들이 발견되면 무차별로 살해됐다. 에반젤리스트(Evangelists)의 한 종파는 마을에 남기로 하고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 모였다. 유격병들은 그 사실을 알게됐다. 유격병들은 문을 잠그고 건물에 불을 붙였다. 예배 드리는 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죽을뻔했으나 유격병 중 한 사람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돌아와서 문을 열었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다른 경우는 그런 사람도 없었다. 다른 곳에선 피해자들이 건물 밖으로 나오려하면 유격병들이 총을 쏘았다.59


부두에는 배에 타기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이 사람들은 노인, 여성, 어린이 등 500여명이었다. 유격병들은 그 사람들을 배애 태우고 강 한가운데까리 데려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배에 탄 채 침몰했다.60


6월 1일과 2일에도 부두에 집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 수백명이 부두로 몰려들었다. 트랴피친의 군대는 그 부두에 폭탄을 설치하고 부두를 폭파시켰다. 부두에 모여있던 사람들을 몰살했다. 61


6개의 정교회도 트랴피친 측에 태워져버렸다. 교회 주변의 있는 무덤은 쓰레기로 뒤덮였다. 신부와 사제들도 고문과 살해의 대상이 됐다. 이 사람들은 체르니크( Chernykh) 신부 일행이었다. 그런데 체르니크( Chernykh) 측에 대한 사형집행에 문제가 생겼다. 종교와 관련된 문제 때문에 [러시아]유격병들은 사형하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이들을 없애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소집됐다. 그리고 집행했다. 신부들은 익사당하거나 익사당하기전에 살해됐고 거의 모든 사제들은 알몸으로 고문을 당했다. 62


니콜라옙스크 학교와 교사들도 제거대상이 됐다. 학교는 튼튼하게 지어져서 화재로는 파괴할 수가 없고 폭탄으로 터트려버렸다. 교사들중 많은 사람들도 살해됐다.63


체육관에는 여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막사로 끌려갔다. 이들중 다수가 성폭행("violate")을 당했다. 저항하면 그 자리에서 살해됐고 저항하지 않은 여학생들은 나중에 살해됐다.64


강에는 사람들의 시체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불에 탄 채 익사했고, 어떤 사람들은 살아있는 채로 손발이 잘려나갔다.65


살해되지 않은 많은 주민들은 억지로 트랴피친의 유격부대에게 도시밖으로 끌려나갔다. 66 일본군은 1920년 6월 3일 쯤에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을 장악했다. 67 트랴피친 부대는 케르비로 이동해 왔을 때 내부에선 반란이 일어났고 트랴피친은 1920년 7월 9일 체포됐다. 트랴피친과 주요 간부들은 7월 11일 케르비(Kerbi, 껠비)에서 처형당했다. 68이 처형에 대해 아나르히체스키 베스뜨니크(아나키스트 신보)라는 아나키스트 저널에서는 레닌 측을 비판했는데 아나키스트 신보는 트랴피친 처형을 "러시아 공산당이 묵인하고 승인한 위험한 살인사건"이라고 썼다.69


1920년 7월 13일 블라디보스톡에는 비볼셰비키 위원회가 있었고 그들이 니콜라옙스크에 도착해서 사건을 조사했다. 이 때 블라디보스톡 기자인 E. Ech (V. Chilikin)가 같이 따라왔다. 그 기자는 거기서 현장을 조사하고 기사로 내보냈다. 다음이 그중 일부다. 70


『“어디나, 눈이 닿을 수 있는 곳에는 주택의 폐허밖에 없다. 여기저기 외로운 집 굴뚝들, 폭파된 전기 공장의 높은 굴뚝, 반쯤 가라앉은 그릇들……마을 변두에서만 다행히 살아남은 집들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을 안에 있는 모든 건물 중에서 무역학교와 교도소만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대부분의 주민들은 보이지 않았따. 기선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비로소 외로운 형상이 나타났는데, 모두 검은 옷을 입고, 모두 웅크리고 구부러져 있었다..……우리중 누구도 도시의 파괴가 그만큼 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진정으로 즐기지 못했다.

(……)

나는 생존자들에 대한 단편적인 조사를 통해 그가 도시에 들어오기 전부터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명단이 모두 소진되었을 때 트랴피친은 또 다른 명부를 발행했다.……유격병들은 아버지가 형제나 아들이 이미 살해된 그 모든 가족들을 죽이기 시작했다..……그후 그들은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살해하기 시작했다..……그들이 심지어 본인들의 부하들까지도 죽였다. 불복종, 반역 등을 이유로. 츠니라흐 요새에서 뜨랴피친은 두 명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유격병 두 사람을 쏘았다...……뜨랴삐친의 세력에서 지배적인 요소는 지방 농민과 지역 농민, 노동자와 중국인과 조선인이었다.

한 생존자가 말했다.

처음에 빨갱이들에게 도시를 내주다는 이야기가 시작됐을 때, 우리 모두는 여전히 빨갱이들이 그림처럼 끔찍하지는 않다고 믿고 싶어했다. 그러나 우리는 첫날부터 우리가.… 갇힌 것을 보았다. 빨갱으들의 마을 입구는 내 기억에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곳에는 붉은 깃발이나 검은 깃발에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있었다.: "부르주아지와 장교들을 함께 쓰러뜨리자" "노동자의 기생충을 쓰러뜨리자", "복수는 우리의 의무다" 등등. 체포는 그들이 들어온 후 첫날 밤동안에 시작되었다.….…체포되는 모든 사.…람들은 끔찍하고,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유격병들은 모든 것을 약탈하고, 훔치고, 낭비했따. 일본군의 공격 이후 체포된 사람들이 모두 살해당하자 공포는 극에 달했다...….…도시가 불타기 전날, 유격병들은 모든 목조 가옥에 등유 항아리와 등유 통을 가지고 와서 신호가 가면 뜨랴삐친의 끔찍한 계획인 곧바로 실행될 수 있도록 하였다.….…의무가 된 노동은 주로 바위를 바지선에 적재한 다음 아무르 강 수로에서 침몰시켜 일본인이 항구에 들어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유격병은 아이들을 죽이고 어미니의 면전에서 질식시킨 다음 어머니와 아이들을 함께 묶어 아무르 강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어머니는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감옥의 우두머리인 Jemaitis는 특별한 자신함으로 자신을 구별하게 하였다.


유격병들은 항상 술에 취해 마을을 돌아다니며 여성을 쫒았습니다.….…

5월 말에 유격병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암군 강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6월 1일과 2일, 주민들은 암군에 있는 케르비에 보내지기 위해서라고 알려진 Alekseevskaia 부두로 몰리기 시작했다.….…이들은 대부분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며칠동안 이 부두 밑에 숨어있던 한 남자는 밤 11시부터 새벽까지 40~70명의 사람ㄷㄹ이 부두로 끌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부두에서 그들은 소총 개머리판, 기병도(sabers), 총검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후에 특별한 나무"knocker"가 발명되었다. 한사람이 한대 얻어맞고 의식을 잃고 나서 아무르강으로 던져졌다.….…하루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날 밤에도 '일'은 계속되었다.


이 생존한 증인은 엿새째 되는 날에야 부두 밑에서 살금살금 도망쳤다. 그는 부두에 지뢰가 깔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뒤에 그것들은 전기로 폭발했다. 선창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볼셰비키 진영 내부에서도 이 사건을 문제삼았다. 케르비 읍의 군사회의 전권위원 베즈드닌은 니콜라옙스크 학살사건을 알게 됐고, 윗사람들을 상대로 이 사건이 어찌된 것인지 제대로 된 해명을 요구하였다.71

『군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도시에 주민들을 남기지 않았으며, 일본 포함들의 접근으로 야기된 후퇴 때 도시는 불탔고 큰 건물들과 치니라흐 요새는 폭파되었습니다. 마지막 부대들과 남은 주민들은 6월 2일 타이가로 퇴각하였으며, 3주간 유랑 끝에 우딘스크 창고 쪽으로 나갔습니다. 5월 22일 니콜라옙스크 시에서 군사혁명재판소가 해산되었고, 이 날부터 6월 2일까지 대중 테러가 전개되어 수많은 부르주아 및 반(半)부르주아 가족들과 우익사회주의 활동가들, 심지어 소비에트 권력의 지지자들까지 희생되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테러가 암군 강변 부락들에서도 전개되었으며, 아이들도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 사건들은 지금 완전히 해명되지 않고 있으며, 길고 세밀한 해명을 요구합니다.

(……)

1920년 9월 8일 케르비 읍에서.

군사회의 전권위원 베즈드닌 』



7월에 구조 임무를 위해 적십자 분대가 파견됐다. 그 때 일원 중 하나(V. A. Chilikin. 위의 블라디보스톡 기자와 같은 사람이다.)가 있었다. 72 칠리킨(Chilikin)은 7월에 니콜라옙스크에 와서 현장을 보았다. 도착한 날에 그 사람은 “소름끼치는 장면”을 보았다. 젊은 여성의 시체가 해안가로 떠밀려왔는데 네명의 아이들은 그 여성의 팔과 다리에 묶여있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았다. 어떤사람은 8명의 아이를 잃고, 어떤 5명은 아내가 살해되고 세살배기 아들이 참수되는 것을 목격했다. 한 여자는 거의 벌거벗은 몸위에 낡은 남자 망토를걸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중국 요리사가 도와줬기에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 여성은 아버지와 함께 덤불 속에 숨어있었고 친구들과 지인들이 어떻게 도살당하는지를 목격했다.“그 여성의 아버지와 누이동생 모두 제정신을 잃었다. 이제 그 사람들은 그저 앉아서 크게 웃기마 한다. 그리고 여기 그 여성은 전에 살던 집의 폐허가 있는 거리에 나와 함께 앉아 있다. 앉아서 후느껴 울고 있다.” 73

"오늘 날 많은 역사가들은 트랴피친의 행동을 전례없고 근거없는 잔인함으로 묘사하는 동의한다."74

이 때 최고의 사형집행자가 바로 한국인이었다. 심지어 명백한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볼셰비키 측은 마을을 점령하고 한국인들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트랴피친 측은 한국인 "박"씨에게 연락했다. "박"씨는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해방시키는데 도울테니 볼셰비키 활동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 구호에 "민족주의 구호에 감염"됐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일제의 압제에서 한국 국민을 해방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선동에 응했다. 그리고 트랴피친 측은 한국이 독립국이 될 때 까리 붉은군대의 지원을 받기로 약속을 하고 조약에 서명했다.


트랴피친 측에서 활동하던 한국인들은 조국을 사랑했고 볼셰비키들만이 본인들을 도울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고 그 도움이 있어야만 한국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인들은 니콜라옙스크 파괴 과정에서 트랴피친 측에게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인과 함께 최고의 사형집행자였다. 트랴피친은 5월 초부터 더 이상 [러시아인]농민 빨치산을 믿지 않았다. 러시아 농민들 사이에서 모집된 유격병들은 언제나 어느 순간이라도 강한 쪽으로 건널 준비를 했었다. 5월 1일 이후, 트랴피친은 러시아 유격병들의 충성심을 의심했다. 그래서 오직 한국인들한테만 책임 있는 의무를 부여했다. 여기서 책임 있는 의무를 부여받은 주체는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75


사형과 마을 파괴는 한국인만 한 게 아니고 중국인도 같이 하였다. 그러나 트랴피친이 신뢰하고 책임있는 의무를 부여한 주체는 분명 한국인이었다. 76


유격대에서 중국인은 한국인과 경우가 달랐다. 유격병에 가담한 중국인들은 사회적 부적응자, 강도, 살인자, 모르핀과 아편 중독자 출신이 많았고 중국 기업들은 유격병에 있는 동포들에게 반감과 적개심을 보일정도였다.77 그에 비해 트랴피친에 들어간 한국인들은 멀쩡한 사람들이었다. 경비를 할 때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자리를 마음대로 떠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책임있는 자리는 한국인들이 맡았다. 그리고 한국 유격대들은 징발, 몰수, 약탈을벌이지 않았다. 단지 최고의 사형집행자였다. 한국인 유격병들은 민족주의, 조국에 대한 사랑, 조국의 독립이라는 목적의식이 매우 분명한 집단이었다.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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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랴피친의 사진

(http://kraeved.info/file/349_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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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localCode=cis&contentsId=GC95300195')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세계한민족문화대전에 니항부대가 "1920년 3월 조직되어 러시아 연해주 니항 전투에 참여한 재러 한인 독립군 부대."로 정의되어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교육부 산하 기관으로 정부기관이다. 정부기관에서 독립군으로 인정하였다.


당시 트랴피친 군대엔 한국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그저 종족(족류 ethnic)만 한국인인 게 아니었다. 한국인 민족주의(내셔널리즘) 성향이 분명하였고 한국을 일본한테서 해방시키겠다는 목적과 조국인 한국에 대한 애국심이 명백한 집단이었다.


다음 글을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요약 있으니 억지로 읽을 필요 없다.)

『It is true that many Chinese joined the partisan forces. But they were from the lowest classes, social misfits, robbers, murderers, and morphine and opium addicts. The Chinese businessmen expressed disapproval and hostility toward their compatriots in the partisan ranks.


* * *


The Koreans living in Nikolaevsk and its environs were primarily vegetable gardeners. Only a few were engaged in commerce, while some worked as unskilled laborers in wealth-ier households. Some Koreans carried on clandestine distilling. The Russian people, according to their usual practice, were friendly toward the Koreans; there were no clashes or misunderstandings. Hard-working by nature, they were indifferent to Russian political events and had no interest in bolshevism.


Like the Chinese, the Koreans did not participate in the volunteer force protecting the town, except for one or two individuals from among the businessmen.


After occupying the town, the Bolsheviks set out to attract the Koreans to their side. They contacted a Korean teacher, Pak, who, taking advantage of his influence among the Koreans, persuaded them to participate in the activities of the Bolsheviks who promised in exchange to help liberate Korea from the Japanese.


Korean youths, infected by nationalist slogans, res-ponded to the inflammatory speeches of Pak, who promised that Soviet Russia would help to liberate the Korean people from the yoke of Japanese oppression. As a result, a Korean Society was organized, whose aim was to free Korea and to spread the ideas of bolshevism throughout the Korean population. The Society entered into negotiations with Red Army Headquarters and signed a formal treaty, which permitted the Korean Society to organize military detachments and acquire arms. These detachments were to be sent eventually to Korea. Until then they were to take part in Triapitsyn's struggle against the opponents of the Bolsheviks and be at the disposal of the Red Army Headquarters as a separate Korean detachment. Red Army assistance would not cease until such time as Korea became an independent state.


The treaty was signed by Triapitsyn, Nina Lebedeva Kiashko, and Sluchainyi for the Red Army Headquarters and by the head of the Korean Society.


As soon as the treaty was concluded, the newly formed Korean detachment began signing up volunteers. Three hundred joined during the very first week. The Korean detachment, along with the Chinese, represented the main force with which Triapitsyn and the people surrounding him were able to dominate Nikolaevek, boldly and without fear. The partisans recruited from among the peasants were a less stable element, because they were always ready to crossover to the side which was strongest at any given moment, a situation that made it necessary for Triapitsyn to consider their moods and wishes.


At Triapitsyn's command, the Korean and Chinese detachments could always suppress discontent among the partisans. This is exactly what happened around 20 April. The Korean detachment was considered to be the most reliable military unit of the Red Army. Discipline was very strict.


After 1 May, the guards at the prison and the guardhouse were recruited from the Korean and Chinese detachments, because Triapitsyn had become suspicious of the loyalty of Russian partisans.


Responsible posts were also filled by Koreans, and, to be fair, they carried out their guard duties excellently. They did not permit any indulgences to the prisoners. Contrary to the practice of the peasant partisans, they never left their posts and were always sober when on duty.


The attitude of the Koreans toward performing the duties which they took upon themselves is explained by the fact that the detachments consisted exclusively of young Koreans, who loved their motherland and sincerely believed that only the Bolsheviks could help them and that only with that help could Korea obtain its freedom.


Korean partisans did not take part in requisitioning, confiscating, plundering, or coercing. They were unquestioning pawns in the hands of Triapitsyn.


* * *


During the evacuation of Nikolaevsk and the destruction of the town, the Chinese and Korean detachments were of great service to Triapitsyn. The Koreans and the Chinese were the chief executioners in carrying out the mass death sentences. From the beginning of May, Triapitsyn no longer trusted the peasant partisans and gave responsible duties only to the Koreans. They left with Triapitsyn for Kerbi, where some of them scattered into the taiga, while others went along with the Red detachments to Blagoveshchensk, where they joined the Red Army.』

79


볼셰비키는 한국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는데 이에 따라 한국인 박씨와 만났다. 박씨는 한국이 일본에서 해방되는 걸 도와줄테니 볼셰비키 활동에 참여하라 설득했다. 한국 청년들은 "민족주의 구호"에 "감염"됐고 "일본의 억압에서 한국 국민을 해방하는데 소비에트 러시아가 도움이 될 것"이란 연설에 응했다. 그에 따라 "한국을 해방"시키고 볼셰비키 사상을 한국에 확산시키는 것이 목표인 한인단체가 조직됐다. 한인단체는 붉은 군대와 교섭해 조약을 맺었다. 조약에 따르면 이 단체는 군사조직을 조직할 수 있었고 그 파견대는 한국으로 보내질 예정이다. 그 때까지 한국인 군인들은 트랴피친의 활동에 참여하며 한국이 독립국가가 될 때까지 붉은군대는 지원을 멈추지 않기로 약속했다. 이 조약은 트랴피친, 니나 레베데바 등이 한국인단체가 서명하였다. "한국인 파견대"는 "중국인과 함께 트랴피친 군대의 주요세력을 대표했다". "[러시아]농민들 사이에서 모집된 유격병들"은 안정성이 떨어졌다. 농민들 사이에서 모집된 유격병들은 기회가 주어지면 항상 가장 강한 쪽으로 건너갈 준비를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트랴피친은 5월 초부터 더 이상 러시아인농민 빨치산을 믿지 않았다. 러시아 농민들 사이에서 모집된 유격병들은 언제나 어느 순간이라도 강한 쪽으로 건널 준비를 했었다. 5월 1일 이후, 트랴피친은 러시아 유격병들의 충성심을 의심했다. 그래서 오직 한국인들한테만 책임 있는 의무를 부여했다. 여기서 책임 있는 의무를 부여받은 주체는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한국인 파견대는 붉은 군대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군사부대로 간주되었다."


"본인들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한국인의 태도는, 그 파견대가 오로지 조국을 사랑하고 오직 볼셰비키만이 자신들을 도울 수 있고 그 도움으로만 한국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던 젊은 한국인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 의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니콜라옙스크 파괴 과정에서 트랴피친 측에게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인과 함께 최고의 사형집행자였다. 살인과 파괴는 한국인만 한 게 아니고 중국인도 같이 하였다. 그러나 트랴피친이 신뢰하고 책임있는 의무를 부여한 주체는 분명 한국인이었다. 한국인 유격병과 중국인 유격병은 성격이 달랐다. 유격병에 가담한 중국인들은 사회적 부적응자, 강도, 살인자, 모르핀과 아편 중독자 출신이 많았고 중국 기업들은 유격병에 있는 동포들에게 반감과 적개심을 보일정도였다. 그에 비해 트랴피친에 들어간 한국인들은 그런 인간들이 아니었다. 경비를 할 때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자리를 마음대로 떠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책임있는 자리는 한국인들이 맡았다. 그리고 한국 유격대들은 징발, 몰수, 약탈을 벌이지 않았다. 단지 최고의 사형집행자였다. 한국인 유격병들은 민족주의, 조국에 대한 사랑, 한국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목적의식이 매우 분명한 집단이었다. 트랴피친 측은 그런 한국인 유격병들을 특별히 신뢰했다.


B. 자유시 참변과 관련성


같이 읽기: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272164


자유시 참변을 주도한 건 제2군이었다. 자유시 참변 당시 무장 해제는 인민혁명군 2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요청을 한 건 칼란다리쉬빌리였다. 80


제2군 사령관 쇼리쉐프는 무장해제를 한 후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총사령관 귀하.

하바롭스크. 1921년 6월


자유시 지역의 사태에 관해 보고합니다. 6월 28일 5시 제29연대 연대장 말라호프와 정치위원이 전화로 보고하기를, 한인부대가 칼란다리쉬빌리 사령부에 복종하지 않은 까닭에 27-28일 밤 긴장 속에서 시간이 지났으며 이에 칼란다리쉬빌리 자신이 무장해제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관해 7시에 총사령부로 보고되었으며, 또한 한인부대가 재편성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가운데 수라제프카 부락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고서는 자신들의 미워하는 4명의 인물이 칼란다리쉬빌리 사령부에서 제거된 후에야 복종할 것이며 그것도 군사령관 쇼리쉐프에게만 복종할 것이라고 통첩하였다는 것도 제4단장에 보고되엇습니다. 본인은 지금 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첫째, 내 이름으로 반도들과 대화를 시작할 것, 둘째, 부대를 동원해 반군과 대치하면서 그들을 위협하고 장갑부대원들을 집결시킬 것, 셋째, 2항이 실행되고 그래도 반도들이 저항하면 그들에게 포사격을 가할 것, 넷째,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반란을 완전히 진압할 것. 명령 제39호. 명령을 받은 직후 제4단장 파데예프는 제29연대장 말라호프에게 그것을 전달하였습니다. 명령 1147호. 그와 동시에, 제3호 장갑열차에 대한 본인의 명령이 보츠가료보로 하달되었으며, 칼란다리쉬빌리는 기병중대에 즉각 수라제프카 부락으로 그 다리 쪽을 향해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제29연대장은 수라제프가에 집결한 모든 한인부대에 무장해제할 것을 요구하며 최종적으로 대답할 시간은 10분 주었습니다. 한인부대 지휘부는 그렇게 단호한 최후통첩에 놀란 것 같았고 동의를 표명하였습니다. 하지만 한인부대의 대표들은 전체집회를 열게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그것은 필시 무장해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명령 039호 및 바로 결정적 행동을 개시하자는 칼란다리쉬빌리의 제4단장에 대한 요청을 실행하는 차원에서 제29연대장 밀라호프는 공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15시에 우리 전선이 흔들렸습니다. 왜냐하면 칼란다리쉬빌리 부대가 공세를 멈추었는데 제29연대는 계속 힘차게 진격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칼란다리쉬빌리 부대의 정체로 인한 우익에서의 전세 역전 가능성을 보면서 제29연대장은 그곳으로 자신의 마지막 예비대를 투입하였으며, 우익의 지지를 위해 쉬마놉스크로부터 또 한 대의 장갑열차를 불렀습니다. 그때 29연대는 공격해 들어갔고 적들은 부락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칼란다리쉬빌리 부대가 기력을 회복하였고 전선은 균등해졌습니다.(……) 오늘 6월 29일 한인 포로들을 칼란다리쉬빌리 등이 이동시킨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칼란다리쉬빌리 부대는 수라제프카 부락에서 약탈행위와 폭력을 자행하고 있으며, 게다가 칼란다리쉬빌리 동무는 무기 몰수의 불법성에 관해 항의하였습니다. 수라제프카에서의 추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즉각 29연대의 중대가 배치되었으며 약탈행위를 중지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반란은 진압되었습니다. 본인의 의견입니다.: 현 상황은 본인으로 하여금 인민군 말단 병사에서 최고 지휘간부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큰 긴장을 요구하도록 강요합니다. 그것은 소강상태를 이용하고 군조직의 핵심에 있어 많은 결함을 봉합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군대에는 사상적 위험분자들에 더해 이 한인 부랑배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유사한 폭동을 반복케 할 것입니다. 치타에 있을 때 본인은 무장한 한인대중 더하기 트랴피친파가 누구인지를 귀하께 알려드렸습니다. 이 폭동을 진압할 때 전사한 인민군 병사 각 1명은 한인-파충류 수천명의 가치가 있습니다. 폭동 진압 명령을 내리면서 본인은 폭동의 수괴들과 적극 선동자들이 모두 박멸되어야 한다고 사단장 파데예프와 칼란다리쉬빌리에게 분명히 지시하였습니다. 지금 고려혁명군사회의가 개입하면서 이 파충류들을 아마 옹호할 것 같습니다. 칼란다리쉬빌리에게 반란 수괴들을 제4사단 지휘부로 인계하라는 명령을 내리시길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점에서 미래가 그들을 제거함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제1035호


제2군 사령관 쇼리쉐프

군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쉬코미

확인: [판독불가] 』

81


여기서 제2군 사령관의 보고에 따르면 무장해제의 배경중 하나로 분명 “트랴피친파”를 거론하고 있다.


“우리 군대에는 사상적 위험분자들에 더해 이 한인 부랑배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유사한 폭동을 반복케 할 것입니다. 치타에 있을 때 본인은 무장한 한인대중 더하기 트랴피친파가 누구인지를 귀하께 알려드렸습니다. 이 폭동을 진압할 때 전사한 인민군 병사 각 1명은 한인-파충류 수천명의 가치가 있습니다. 폭동 진압 명령을 내리면서 본인은 폭동의 수괴들과 적극 선동자들이 모두 박멸되어야 한다고 사단장 파데예프와 칼란다리쉬빌리에게 분명히 지시하였습니다. 지금 고려혁명군사회의가 개입하면서 이 파충류들을 아마 옹호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 보고를 낸 쇼리쉐프는 무장해체 요청측과 이해관계가 달랐다.


여기서 제2군 사령관은 무장해제 당한 독립군뿐 아니라 무장해체에 참여한 군인들도 매우 문제삼고 있다. 칼란다리쉬빌리 부대는 수라제프카 부락에서 약탈행위와 폭력을 자행하고 있으며, 또한 한국 독립군의 무기를 몰수하는 게 불법이라며 항의를 하였다. 29연대는 한국 독립군뿐만 아니라 칼란다리쉬빌리 부대도 제재해야했다. 그리고 고려혁명군사회의[이르쿠츠크 공산당]82 가 한국독립군을 옹호하려 하자 이것도 문제삼고 있다.


보면 알겠지만 자유시 참변을 명령한 제2군 사령관은 한국인 독립군뿐만 아니라 이르쿠츠크 공산당과 칼란다리쉬빌리와도 대립했다. 논리학적으로 출처의 신뢰성을 따질 때 “이해관계”여부가 중요한데 83 제2군 사령관은 자유시 참변 당시 이르쿠츠크 진영과 이해관계가 달랐다.

현지군인들은 한국인 독립군과 ‘이르쿠츠크 공산당’진영과 칼란다리쉬빌리 모두를 문제 삼고 있었다. 한국인 독립군과 칼란다리쉬빌리 모두 주민들을 향해 폭행과 약탈을 벌였고, 칼란다리쉬빌리는 한국인 독립군을 옹호했다. 제2군 사령관은 칼란다리쉬빌리도 제재하기를를 원했다.

『총사령관 귀하

하바롭스크 1921년.


한인의 폭동, 우리 부대에 의한 그들의 무장해제, 대포가 동원된 12시간의 전투 및 인민군 지휘간부 및 병사의 손실은 칼란다리쉬빌리 동무에게 아주 답답한 기분을 조성하였습니다. 자신의 행동과 지시들로 우리 지휘부의 조치에 완전한 무정부상태를 주입한 칼란다리쉬빌리 동무는 폭도들로부터 압수한 무기를 그들에게 돌려줄 것을 몰두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방금 진압된 폭동이 칼란다리쉬빌리 동무 덕분에 다시 시작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그들의 재무장은 아무르 주민들이 이미 충분히 겪은 반란과 강도행위를 다시 야기할 것이며, 향후 자기 지역에서 칼란다리쉬빌리 부대 같은 것의 주둔을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각 칼란다리쉬빌리를 제2군 사령부에 완전히 복종케 하거나 아니면 그를 군의 관할에서 완전히 제거하여, 그럼으로써 주민과 군이 폭동과 전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를 요청합니다.


제2군 사령관

군정치위원

군참모장』

84

자유시 참변은 한국인 독립군과 공산당 사이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주변엔 러시아 농민들이 있고 그 농민들이 대부분이다. 러시아농민들은 한국인 독립군과 칼란다리쉬빌리 양쪽에게 폭행과 약탈을 당했지만 이런 점은 한국 인터넷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또한 한국인 독립군이 니콜라옙스크 학살이란 대규모 학살을 벌인 사실도 인터넷에서 주목받지 못 했다.


참고: 자유시 참변 당시 다수의 간도독립군은 현장에 없었다. 홍범도 측은 6월 2일, 안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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