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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방과 후 상왕 라이프 -44-

ㅇㅇ(61.99) 2021.06.22 21:47:55
조회 695 추천 22 댓글 3
														


******


'나 원 참! 살다살다 별 일을 다 겪는구만...!'


이방과는 헛웃음을 흘렸다. 토벌해야 할 적이라고만 여기고 죽일 기세로 싸워댔던 상대가 사실은 전혀 싸울 이유가 없었던 아국의 관리였다면 누구나 맥이 빠질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이방과야 대상왕의 자리에 있으니 이같은 감상을 늘어놓을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지, 또 다른 당사자인 이징옥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 자체가 죽을 맛이었다.


"대상왕 전하! 소관 함길도도절제사 이징옥, 감히 전하를 알아뵙지 못하고 생사결을 내고자 하였으니 이 죄를 씻을 길이 없나이다! 부디 죽여주시옵소서!"


오해니 뭐니 하는 변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는 감히 대상왕의 목숨을 빼앗으려 든 대역죄를 범한 셈이었다. 평생을 나라와 왕실에 충성하는 것을 제 1의 사명으로 여기고 이를 실천해왔던 이징옥으로서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징옥이 엎드려 죄를 청했지만, 이방과는 그저 입맛만 다셨다. 애초에 이번 소동 자체가 일방적으로 누구 한 명만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지 않던가? 상황이 너무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탓도 있었지만, 명색이 대상왕이란 사람이 피아식별도 제대로 안 하고 관원이랑 드잡이질 했다는 게 알려지면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또 없을 터였다.


'아니,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이런 뛰어난 인재를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서는 안 되지!'


직접 싸워본 결과, 이징옥의 무용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방과가 이제껏 만나봤던 무장들 중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이름난 장사였던 이방과 자신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압도적인 용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 힘을 기반으로 한 초식 하나하나가 위협적인 무예 실력. 그뿐이던가? 어떤 돌발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임기응변에 이쪽이 파놓은 함정을 간파하고 이를 역이용할 책략까지 세웠던 걸 보면 병법에도 능하다는 걸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거나, 칼 한 자루만으로 육진을 평정했다는 전설적인 무용담들이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님을 몸소 보여주는 이징옥의 재주에 반한 이방과는 가급적이면 이번 일을 그냥 덮고 넘어가고 싶어졌던 것이다.


'뭐 좋은 방법 없을까? 그럴싸하게 이번 일을 무마하면서도 나와 이징옥의 체면도 살려줄 핑곗거리가...'


이방과 딴에는 묘안을 찾느라고 고민에 잠겨 있었던 것이었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까부터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대상왕이 이징옥을 치죄하려나 보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이방과의 눈치만 살피던 박문헌은 급히 달려나와 엎드려 있는 상관의 옆에 나란히 엎드렸다.


"전하, 소관은 함길도도절제사의 부관인 박문헌이라고 하옵니다. 비록 도절제사가 참람한 죄를 범했다곤 하나, 이는 곁에서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소관의 잘못이 크옵니다! 청컨대 소관도 벌하여 주시옵소서!"


'음? 그런 거 아닌데...?'


아무래도 자신의 침묵이 이상한 오해를 샀음을 알아차린 이방과는 얼른 일을 마무리 짓고자 의견을 구하기 위해 좌우에 서 있는 효령대군 이보와 신숙주를 돌아보았다. 원래라면 이럴 때마다 탄피대사가 조언을 아끼지 않았겠으나 그는 마을 주민들을 보살피느라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두 사람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반응은 생각보다 적극적이지 않았다.


"제게는 이번 사안을 판결할 권한이 없사옵니다. 만일 제 사견을 앞세운다면 자칫 공정치 못하다는 뒷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오니 백부님께서 처결을 내리셔야 한다고 사료되옵니다."


"소관의 생각도 그렇사옵니다. 다만, 전하께 무기를 들이대고도 아무 처벌이 없다면 감히 전하의 권위를 얕잡아보는 자들도 생길 수 있으니 함길도도절제사에 대한 처우를 내리실 때 이 점만은 감안하셔야 하옵니다."


******


효령대군 이보야 원래부터 조정대사를 비롯한 공적인 사안에 연루되길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신숙주가 그답지 않게 두루뭉실한 반응을 보인 것에는 다 남다른 속셈이 있었다.


'이참에 이징옥을 숙청해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지. 흐흐흐!'


이징옥이 누구던가. 자타가 공인하는 김종서의 오른팔이 아니던가?


계유화변에 적극 참가하진 않았지만, 또 그렇다고 아예 무관하진 않았던 애매한 입장 탓에 김종서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신숙주의 입장에서 이징옥은 껄끄럽기 그지없는 상대였다.


이방과에게 줄을 서서 북방 땅까지 온 이상 신숙주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큰 공을 세워야만 했다. 그 김종서조차 섣불리 그를 건드릴 엄두를 못 내게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공적 말이다.


하지만 지척에 김종서의 칼이 함길도도절제사로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이상, 신숙주는 북방에서 그의 포부를 마음껏 펼치기는커녕 오히려 활동에 상당한 제약이 생길 터였다. 그가 아무리 여러 학문에 능통하고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다지만 몇 십 년을 현장에서 구른 무장에 비하겠는가?


'물론 북방의 정세에 밝을 이징옥을 죽이는 게 무리수일 수도 있겠으나...내게는 대상왕 전하가 계시지 않는가? 대상왕께서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여진족을 복종케 만드는 분이시니 굳이 이징옥의 도움이 필요치가 않지! 거기다 행정 업무는 내가 관장할 터이니 장차 북방의 대소사는 바로 이 신숙주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걸리적거리는 김종서의 최측근을 치워버리고, 대상왕과 더불어 북방의 새로운 실세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신숙주였지만 그가 대놓고 이징옥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하나. 아직 이방과의 의중을 알지 못해서였다.


이방과가 이징옥을 벌할 마음만 있다면야 앞장서서 거수기 역할을 자처했겠지만, 만에 하나 그렇지 않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대상왕의 눈밖에 나는 것은 물론 이징옥의 원한까지 살 수도 있었다. 때문에 신숙주는 은근히 이징옥의 죄목을 들먹이되, 직접적인 판단은 이방과에게 떠넘기는 교묘한 수를 쓴 것이었다.


******


'끄응! 결국은 나 혼자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가...?'


결국 돌고돌아 바통을 다시 넘겨받은 셈이 된 이방과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이 있을까 싶어 물어본 거였는데 둘 다 답변을 회피해버리면 어쩌라는 말인가? ...사실 그가 두 사람의 입장이었어도 괜히 귀찮은 일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똑같이 행동했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뾰족한 수가 없었던 이방과는 그냥 막 지르기로 했다.


"도절제사 이징옥과 그 부관 박문헌은 고개를 들라."


"예, 전하."


이징옥과 박문헌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이방과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자네들이 죄송스러워 할 게 뭐가 있나? 자네들은 그저 내가 미리 내려준 밀지의 내용대로 충실히 따라줬을 뿐 아니던가?"


"...예?"


순간 대상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던 이징옥과 박문헌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보게, 도절제사. 이제 연기는 그만해도 된다네. 모의 훈련도 다 끝났으니 이쯤에서 모두에게 진상을 밝히도록 하세."


'언제 밀지를 내리셨다고...? 게다가 모의 훈련은 또 무슨 말씀이신지...?'


이징옥은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지만, 이럴 땐 토 달지 말고 얌전히 대상왕의 말에 편승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기에 이내 능청스럽게 화답했다.


"예, 전하. 오직 전하와 소관만이 알고 있던 기밀이오니 모두들 혼란스럽기 그지없을 것이옵니다. 이 자리에서 일의 진상을 알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사료되옵니다."


'역시 임기응변이 좋은 자로군. 갈수록 마음에 들어.'


이징옥이 적절하게 장단을 맞춰주자 흡족한 미소를 지은 이방과는 슬며시 이 자리에 모인 모두를 둘러보았다. 마을 주민들과 함길도 군사들, 조선인과 여진인들 등 다양한 출신들로 구성된 일동들 역시 지금 이게 뭔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가는 표정들이었다.


이방과는 씩 웃고는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이어갔다.


"그렇다! 도절제사는 지금껏 남몰래 내 지시에 따르고 있었을 뿐이니라. 내가 이 북방 땅에 온 것은 북도의 군정을 돌보고 번호의 장정들을 뽑아 정병으로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하나 이를 위해서는 우선 변방을 방비하는 아조의 병력들이 어느 정도의 실력들을 갖추고 있는지 미리 알고 싶었느니라. 따라서 나는 일부러 함정을 파고 기다렸으며, 도절제사가 이를 잘 돌파하는지 시험을 해봤던 것이다."


잠시 말을 멈춘 이방과는 더없이 자애로운 눈길로 이징옥을 내려다 보았다.


"도절제사는 훌륭하게도 내 매복진을 파훼하고 내 앞까지 당도했으니 과연 소문대로 고금에 보기 드문 명장이라 아니할 수 없도다!"


"마, 망극하옵니다. 전하."


'대상왕 전하께서 이 못난 놈을 살려주시려고 일부러 거짓말까지 하시다니...!'


이방과가 너그러이 관용을 베풀고 있음을 깨달은 이징옥은 감격했으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어딘가 차게 식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게 모의 훈련이었다는 건 좀 무리가...'


'그럼 저 격렬한 결투의 흔적들은 뭔데...?'


그들의 시선이 가닿은 곳은 좀 전까지 이방과와 이징옥이 격돌하면서 남겨진 참상들이었다.


부러진 창들. 목에 환도가 박힌 채 죽어있는 말.


누가 봐도 서로 진심으로 죽이려고 싸워댔던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 이들의 반응을 눈치챈 이방과도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커흠! 다들 오해하지 말라. 내 도절제사의 기량을 가늠코자 일부러 실전을 방불케 하는 비무를 벌였을 뿐이니라.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도절제사의 말이 죽고 말았으니 안타깝고 또 미안할 뿐이로다."


"아니옵니다, 전하. 본디 군마는 무장을 태우고 적과 대적하는 것이 본분이옵니다. 소관의 말은 분에 넘치게도 전하의 어마와 더불어 비무에 어울리는 광영을 누릴 수 있었으니 필시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옵니다."


당사자인 말이 들었더라면 "뭐 임마?!" 라고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을지도 모를 망발이었으나, 최대한 이방과의 주작질에 편승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이징옥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술술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속아주기에는 너무도 허술한 거짓말이었기에 여전히 일동의 눈초리는 게슴츠레하기만 했다.


"뭐, 뭐냐? 다들. 마치 안쓰러운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그 표정들이라니!"


"......"


"아, 글쎄! 모든 건 다 계획대로였다니까!"


"......"


안 되겠다 싶어진 이방과는 강경수단을 쓰기로 했다.


"그럼 뭐냐? 설마 이 나라 제일의 정예라는 북방군이 대상왕을 화적패로 오인해서 죽이려 들었단 말이냐? 응? 그렇게 알려지고 싶은 건가?"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여, 역시 대상왕 전하께서는 항상 몇 수 앞을 내다보시옵니다!"


"아무렴요! 설마 고작 오해 때문에 아군끼리 자중지란을 일으켰을 리가 없지 않사옵니까? 하, 하하하!"


"대상왕 전하와 비무까지 해보셨다니, 무장으로서는 일생일대의 광영이 아니옵니까? 부럽습니다, 도절제사 영감!"


이방과의 거짓말은 눈 뜨고 못 봐줄 만큼 허술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나, 아무렴 단체로 대상왕 살해를 모의한 대역죄인이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있지도 않은 화적패를 때려잡겠답시고 하마터면 아군끼리 내전을 벌일 뻔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보다는 모든 게 철저하게 계획된 연극이었다고 납득하는 게 목숨과 체면, 정신건강을 비롯한 그들 자신에게도 이로운 것이었기에 일동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비로소 일동이 모두 수긍(?)하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띈 이방과는 손을 들어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불의의 사고였다곤 하나, 도절제사가 말을 잃게 된 것은 분명 내 책임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미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구나. 하여 내 이 자리에서 명마 한 필을 하사하겠노라! 여봐라!"


이방과가 지시를 내리자 최승이 가라말(털빛이 온통 검은 말) 한 마리를 끌고 나왔는데, 덩치가 크고 근육이 골고루 잡혀 있어 한눈에 봐도 명마임을 알 수 있었다.


"도절제사가 비무에 어울려 준 것에 대한 보답이자 내 사과의 표시라네. 받아주게나."


"오오, 전하! 망극하옵니다!"


무장에게 있어 명마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징옥 역시 군문에 든 이래 한 번도 본 적 없던 명마를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됐다는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참으로 아름답사옵니다..."


가라말의 부드러운 갈기를 쓸어보며 황홀한 표정으로 이징옥이 중얼거리자 이방과는 하하 웃었다.


"나도 한두 번 타봤는데 과연 천하에 비길 데 없는 명마더군. 이제야 그놈이 제 주인을 만난 듯 하여 나도 기쁘다네."


이징옥이 이방과에게 군례를 올려 사의를 표하자 일동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군신 간의 훈훈한 정을 축하해줬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신숙주 뿐이었다.


'한 소열제가 한중으로 들어갔을 당시 위무제의 기분이 어땠을지 비로소 알 것 같구나...'


그야말로 다 잡은 고기를 놓친 셈이었으니 아쉽기 그지없었으나, 어쨌든 이징옥이 이방과에게 은혜를 입음으로써 주도권이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온 것이나 다름없게 된 걸 한 줄기 위안으로 삼기로 한 신숙주였다.


신숙주의 아쉬움과는 별개로 일동의 박수소리는 더욱 드높아져 청명한 겨울 하늘에 메아리쳤다.


여담으로 이방과가 상황을 무마하려고 서툰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이징옥에게 가라말을 선물해준 일화를 계기로 조선군 내에서는 '대충대충 요령피우며 일을 처리한다'는 뜻의 은어인 가라친다는 말이 시나브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


"아우님, 이거 가져가시게. 겨우내 말려놓은 곶감이라네."


"잘 먹겠소, 형님. 형님도 몸 건강하시구려."


금동이 곶감이 들어있는 보따리를 건네주자 박눌어치도 환하게 웃었다. 그 사이에 정이 많이 든 두 사람은 이별을 아쉬워하며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굳게 약조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군사들과 마을 사람들도 아쉬운 표정으로 인사들을 나누고 있었다. 10일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머무르며 한솥밥을 먹은 덕에 이들 사이에는 돈독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개중에는 눈이 맞은 청춘남녀들이 장래를 약속하기도 하고, 아들의 원수를 갚아준 병사를 마치 친아들처럼 안아주며 몸 건강하라고 격려해주는 노인도 있는 등 저마다 사연은 다양했지만 보는 이들을 저절로 훈훈하게 하는 소박한 정이 물씬 느껴지는 광경들이었다.


"그간 폐를 끼쳤구먼. 덕분에 잘 지내다 가네."


"폐라니 그 어인 말씀이신지요? 전하를 모실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크나큰 광영이었사옵니다."


몸에 걸치고 있던 화적패 복장을 벗어던지고 평상시의 검은색 무복으로 환복한 이방과 역시 촌장 최중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주민들을 위해 일부 군량미를 남겨두고 가겠네. 겨울을 나는 데 요긴하게 쓰도록 하게나."


"전하 덕분에 소인들이 원수를 갚을 수 있었는데, 이젠 식량까지 베푸시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몰라 송구스럽기만 하옵니다."


마을에 잡아뒀던 11명의 화적들은 잔당들이 모두 토벌된 시점에서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이방과에 의해 마을 주민들에게 넘겨졌고, 그간 복수의 기회만 노리던 주민들은 그들을 참혹하게 단죄함으로써 가족과 이웃들의 넋을 달래줄 수 있었다.


"예전에 누군가가 그러더군. 무릇 왕실의 일원으로서 백성과 더불어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눌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이야. 나는 그 덕목을 따랐을 뿐이네."


전생 시절 정도전이 해줬던 가르침을 인용한 이방과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방과 역시 세자 책봉을 비롯한 여러 사안에서 마찰을 빚었던 정도전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진 않았으나, 지나고 보니 적어도 민본의 사상에 있어서는 그가 한 말 중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싫어도 저절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삼봉의 후손들을 복권시키고 등용하기까지 한 걸 보면 방원이도 마찬가지 생각이었을 테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이방과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전하, 도절제사 영감이 출발 준비를 마쳤다고 하옵니다."


붉은색 무복을 입고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성효옥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자 이방과는 씩 웃었다.


"알겠다. 곧 가마. 중치, 이만 가보겠네."


"예, 전하. 혹여나 근방에 들리실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희 마을에 오시옵소서. 비록 누추하긴 하나 전하를 위한 환영 연회를 열어드리겠사옵니다."


"하하하, 거 기대가 되는구만! 알겠네. 자네의 권유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네."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이방과는 손을 뻗어 최중치의 어깨에 얹었다.


"그럼 건강하게나, 전우여."


가별초 무사 한 명 한 명을 격려할 때마다 이성계와 이방과가 취하던 낯익은 동작과 미소를 접한 최중치는 순간적으로 그가 가별초에 소속되어 용맹을 뽐내던 한창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아 저절로 목이 메였다.


"예, 전하. 옥체 강녕하시옵소서..."


눈에 눈물이 고인 최중치가 힘겹게 말을 마치자, 이방과는 흐뭇함과 안쓰러움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두어 번 그의 어깨를 토닥여준 뒤 말에 올랐다.


생각지도 않았던 또 다른 과거의 인연과의 재회는 그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줬다.


'나와 중치처럼 옛 일을 직접 겪었던 자들에게 있어 가별초는 한낱 과거의 일이 아니다. 아니, 과거여서는 아니 된다. 그 승리! 그 영광! 결코 그 위대한 업적이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 그의 아버지가 이끌던 것보다 더 강력하며, 세세연년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위대한 군대. 이홍위와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다스릴 조선을 떠받들 강인한 주춧돌.


이방과가 재건하고자 하는 가별초는 바로 그것이었다.


"자, 가자! 함흥이 지척이니라!"


새삼 결의를 다진 이방과의 호령 소리는 더없이 우렁찼다.


때마침 그의 지시에 따라 새로 지어진 마을 이름인 신라촌(新羅村)이 새겨진 비석의 옆에 무성하게 자란 마른 풀들이 겨울 바람을 맞아 좌우로 요란하게 흔들렸다.


마치 그 옛날, 출정을 알리는 이성계의 호령에 함성으로 화답하던 가별초의 용사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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