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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년전쟁. 프랑스 정부의 위기와 푸아티에 전투

prevo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9.04 21: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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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레 습격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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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에드워드 왕은 이렇게 말했다. "조프루아 경! 내가 싸워서 손에 넣은 것, 지금까지 많은 돈을 쏟은 것을 그대가 밤을 틈타 내게서 빼앗으려 했으니 내가 경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하오. 그러니 경을 이리 한가하게 만든 것이 몹시 기쁘오. 경은 이곳을 나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그러니까 2만 에퀴로 손에 넣으려고 했소.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도우셔서 경이 실패하고 말았군.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마음이 내키신다면 나의 더 커다란 사업을 도와주실 거요."

-장 르 벨의 연대기



1350년 1월 2일 새벽, 프랑스군 원수 조프루아 드 샤르니가 특공대를 이끌고 칼레를 습격했다.

샤르니는 2만 에퀴를 써서 칼레 성채의 수비를 담당한 롬바르디아인 기사 아이메릭 디 파비아를 매수했다. 100여 명의 특공대가 아이메릭이 열어준 문을 통해 칼레 성채에 침투해서 망루를 점령한 뒤, 은밀하게 칼레 시내를 가로질러 도시의 남서쪽 성문을 점령한 다음 근처 습지대에서 대기 중인 군대에게 문을 열어준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아이메릭의 배신으로 프랑스군은 함정에 빠졌다. 에드워드 3세가 직접 지휘하는 칼레 주둔군의 반격에 맨앳암즈 200명 이상이 전사하며 샤르니 자신을 포함해 3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이때 파리에서는 필리프 6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왕의 총신들과 왕세자의 파벌 사이의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프랑스 왕실은 권력이양과 왕위 계승을 준비하기 위해 2월부터 교황의 중재로 협상을 진행한 끝에 1350년 6월 13일 잉글랜드와 다시 휴전을 체결했다.

하지만 휴전은 그저 이름뿐이었다. 이전의 휴전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는 더 노골적으로 조약 내용이 무시되었다. 가스코뉴와 브르타뉴 방면에서는 소규모 전투와 습격이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필리프가 고용한 카스티야 갤리선 함대는 자신들은 프랑스 왕의 신하가 아니라는 이유로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계속 약탈했다.

8월 29일 징발된 상선들로 구성된 잉글랜드 함대가 기적적인 확률로 요격에 성공했고, 윈첼시 인근 해안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에드워드 3세가 직접 지휘하는 잉글랜드 함대는 치열한 싸움 끝에 카스티야 함대를 격퇴했다. 하지만 갤리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대부분 놓쳤고 이후에도 해안 습격과 약탈은 계속 이어졌다.



2. 몽라벨 습격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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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해 1350년, 프랑스의 필리프 왕이 죽었다. 곧 아들인 노르망디 공작이 랭스에서 즉위해 프랑스의 장 왕으로 명명되었다.

새 왕은 즉시 화폐 가치를 조작하기 위해 1/3이 구리인 새로운 에퀴 금화를 주조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에게 성직자 보조세와 다른 특권들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곳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낸 그는 몽펠리에와 나르본을 거쳐 카르카손에 도착해 한동안 머물렀고, 가스코뉴와 리무쟁과 푸아투를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여정에서 그가 지나온 모든 지역이 불타거나 폐허가 되어 있었고, 한때 그의 왕국에 속했던 도시와 성들은 잉글랜드인들이 점거한 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는 괴로워하며 기사들과 남작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1350년 8월 22일 필리프 6세가 사망하면서 그 뒤를 이어 장 2세가 즉위했다.


랭스에서 대관식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지 한달 뒤인 11월 17일, 장 왕은 대귀족인 외 백작 라울 드 브리엔을 반역죄로 처형했다. 외 백작은 4년 전 캉 포위전에서 포로로 잡혀 잉글랜드로 끌려갔다가 몸값 8만 리브르를 구하기 위해 가석방된 상태였다. 끝내 몸값을 마련할 수 없었던 그는 에드워드 3세에게 자신이 소유한 긴느 성을 양도하기로 합의했으나, 파리고등법원의 법학자들과 국왕 자신의 해석에 따르면 이는 모든 프랑스 영토의 주권자인 국왕에 대한 반역이었다.


이후 장 왕과 군사 고문들은 남부 전선에서의 전략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우선 전쟁을 단번에 끝낼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보르도 공략을 포기했다. 대신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해서 잉글랜드가 내부 정비에 집중하는 동안 미리 공세 역량을 꺾어놓기 위해 가스코뉴 국경의 전초기지에 해당하는 요새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잉글랜드군은 북부 프랑스를 위협해서 가스코뉴에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하려 했다.


첫 해는 프랑스에 운이 따랐다. 1351년 4월 프랑스군은 보르도와 베르주라크 간의 조운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몽라벨 성을 기습해서 점령한 반면,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북부에서 벌인 기마약탈은 모두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거나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9월 11일 장 왕은 생장덩주엘리의 요새를 할양받는 등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한다.




3. 모롱 전투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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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별빛이 흐릿해지다가 섬뜩한 그림자에 가려졌다.

-리샤르 레스코의 연대기



1352년 1월 6일 장 왕은 생투앵에서 별 기사단 창설식을 개최했다. 이는 브르타뉴 내전과 노르망디에서 연이어 발생한 재난으로 분열된 동부와 서부 귀족 파벌을 통합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 해는 시작부터 끝까지 프랑스가 처절하게 굴욕을 당한 해였다.


1월에는 한 잉글랜드 향사가 휴전 조약을 위반하고 북프랑스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중 하나인 긴느 성을 기습해서 점령했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인들은 긴느 성을 포위하고 수개월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7월 중순 어느 날 밤중에 늪지대를 가로질러 기습을 걸어온 잉글랜드군의 공격에 포위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8월 14일 브르타뉴의 모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잉글랜드군이 승리하면서 별 기사단원 중 상당수가 전사했다.


잉글랜드군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여 10년 전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가스코뉴의 요충지인 블레유를 탈환했고, 10월 초에는 타른 강의 조운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라 프랑세즈를 점령했다.


한편 전쟁이 재개된 이후 장 2세는 거의 모든 왕실 부채의 상환을 중단해야 했고, 전황까지 나빠지면서 급격히 인기를 잃어갔다. 새 국왕과 총신들의 무능에 불만을 품은 개혁가들과 어수선한 상황에서 기회를 찾는 야심가들은 카페 왕가의 후손이자 뛰어난 정치가인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를 중심으로 정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크레시 전투의 그림자는 장 왕의 치세에도 프랑스 정부를 족쇄처럼 얽매고 있었다. 군사전문가가 아닌 대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은 잉글랜드군이 무섭도록 강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3배 이상의 전력을 가진 프랑스군을 압살할 정도로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필리프 6세와 군사 고문들이 크레시 전투 이전에 4번이나 전투를 포기한 사실은 신중한 전략적 결단이라기보다는 겁쟁이의 행태로 인식되었다. 크레시 전투도 비겁하고 무능한 총신들이 강행군으로 지친 군사들을 조급하게 밀어붙여서 벌어진 어이없는 졸전이었다는 해석이 당대에 널리 인정받았다.


정부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숨김없이 드러낸 1347년 삼부회의 발언처럼, 귀족이든 평민이든 프랑스인들은 국왕이 기사들을 이끌고 용감하게 전투에 나서서 명예로운 승리를 거두길 원했다. 나중에는 심지어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힌 장 왕마저도 용감하다고 칭송하며 왕을 배신하고 도망친 기사들을 대신 욕했다.


하지만 국왕과 원수들의 생각에 잉글랜드군과 야전을 벌이는 것은 위험하고 멍청한 짓이었다. 장 왕 자신과 그의 아들인 샤를 5세가 한 것처럼 국민들로부터 막대한 조세를 거둬서 복잡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쟁 전문가인 직업군인들을 많이 고용해 끊임없는 전초전으로 전선을 밀어내고, 적들이 마지막 발악으로 벌이는 기마약탈을 청야전술로 막아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응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렇게나 많은 세금을 이미 걷었으면서도 전비가 부족하다며 돈을 더 내라고 하고, 막상 적군이 침공해 오면 도망만 치는 국왕과 원수들의 뻔뻔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장 왕은 불만을 가진 신하들을 설득하거나 타협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말재주나 인간적인 매력도 없었다. 그렇게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이 납세에 소극적이 되자 이제는 대규모 야전군을 소집해 정면대결을 벌이는 도박을 감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이 끝없는 악순환을 끝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군이 다시 참패하고 장 왕이 끝까지 남아서 싸우다 포로로 잡힌 푸아티에 전투였다.




4. 생앙토냉 포위전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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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은 슬픔에 잠긴 채 빵을 먹는다.

그들은 쉴 때조차 지쳐있고 땀을 흘린다.

그들은 한 번의 좋은 날을 보낸 다음 수많은 나쁜 날을 보낸다.

곰팡이 핀 빵이나 비스킷, 조리되거나 조리되지 않은 고기들.

오늘은 먹고 내일은 굶고. 포도주는 없거나 거의 없고.

연못이나 수통의 물. 나뭇가지나 천막으로 만든 형편없는 숙소.

갑옷을 입은 채 누운 불편한 잠자리.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

"경계태세!" "거기 누구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졸고 있을 때 경보가 울림; 동틀녘에 트럼펫 소리.

"말에 타!" "집합! 모두 집합!"

순찰하고, 보초를 서고, 밤낮으로 감시하고. 징발하고, 약탈하고, 정찰하고.

경비를 서고, 또 경비를 서고. 임무 다음에는 또 임무.

"저기 온다! 수가 너무 많아!" "아니. 그렇게 많지 않아."

"이쪽!" "너는 저쪽으로 돌아!" "이쪽 측면으로!" "넌 저쪽으로 몰아붙여!"

"새로운 소식! 그들이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그리고 포로를 잡아왔어." "아니야. 포로는 없어."

"자, 어서 가자!" "물러서지 마!" "가자!"

안락함이라고는 없는 고단한 생활. 이것이 그들의 소명일지니.

-구티에레 디아즈 데 가메스의 연대기



1353년 1월 툴루즈의 세네샬이 라 프랑세즈를 탈환했다.


같은 시기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선종과 인노첸시오 6세의 즉위를 계기로 장 2세가 종전 협상을 위한 휴전을 제안하자 에드워드 3세는 일단 받아들인다.


국경 요새들을 차지하기 위한 더럽고 치사한 진흙탕싸움과 끝없이 늘어나는 재정 문제에 질린 장 왕은 반역죄를 사면하고 아키텐 공작위 몰수를 취소하며 생사르도스 전쟁 이전의 영토를 돌려주겠다는 나름대로 관대한 제안을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 주장을 그만두는 대가로 가스코뉴 지방의 주권을 요구한다. 그는 애초에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었고, 협상에 응한 목적은 그저 다음 침공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한 기선제압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와 거만한 태도에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장 왕은 5월 8일 신민소집령을 선포한다. 그렇게 휴전이 사실상 종료된 채 무의미한 종전 협상이 계속되었다.


가스코뉴 국경에서의 전초전이 재개되었고, 아르마냑 백작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7월부터 생앙토냉을 포위해 9월 말 도시를 점령했다.




5. 레글 습격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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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장 왕은 에스파냐의 샤를 경이라는 훌륭한 기사를 무척 좋아했다. 샤를 경은 장 왕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고, 왕의 충실한 동반자이자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였다. 장 왕은 샤를 경의 모든 바람과 욕망을 들어주었다.

장 왕은 마침내 그를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나바라 왕이 오래 전부터 권리를 요구했던 지방의 땅을 그에게 하사했다. 이 일로 젊은 나바라 왕은 샤를 경에게 큰 원한을 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바라 왕과 그의 동생 펠리페가 새벽에 한 거대한 성채에서 샤를 경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나는 그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떻게 살해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날 이후 나바라의 두 형제와 프랑스의 장 왕 사이에 평화 조약이 여러 번 맺어졌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적대감과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장 르 벨의 연대기



1354년 1월 노르망디 남부의 소도시 레글의 한 여관에서 카를로스 2세와 그의 지지자들이 장 2세의 측근이자 프랑스의 총사령관인 샤를 드 에스파냐를 암살하면서 파국이 시작되었다.


나바라의 카를로스는 며칠 뒤 랭커스터 공작에게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는 모호한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동시에 프랑스의 주요 자치도시들, 파리 대학, 그리고 교황에게도 서신을 보내 자신이 '프랑스 왕국 공동체의 공익'을 위해 잉글랜드와의 종전 협상을 방해하는 간신 샤를 드 에스파냐를 살해했음을 밝혔다.


카를로스는 잉글랜드 왕과 교황을 한 번에 낚는 데 성공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를 내전으로 분열시킬 수 있다는 장밋빛 희망에 빠져 즉시 협상을 진행했다. 교황은 두 강대국을 중재해서 전쟁을 종식했다는 업적을 원했기에 나바라 왕을 용서하라며 장 2세를 설득했다. 내전 도중 잉글랜드의 침공을 당할 위험성과 교황의 권고에 굴복한 장 왕은 결국 나바라의 카를로스에게 화해를 제안한다.


3월 4일 카를로스는 파리고등법원 대회의실에 불로뉴 추기경과 함께 출석해서 결국 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에드워드 3세가 보낸 동맹 제안을 거부하면서 그의 도움으로 폭력사태 없이 화해가 이루어져서 다행이라며 조롱하는 내용의 서신을 돌려줬다.


한편 카를로스의 트롤링이 의도치않게 종전을 주장하는 여론에 힘을 실어주면서 양국의 종전 협상이 크게 진전되었다. 4월 6일 긴느 조약에서 장 왕은 에드워드가 프랑스 왕위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생사르도스 전쟁 이전의 가스코뉴 영토에 더해 푸아투, 리무쟁, 루아르 지방의 영토와 주권을 양도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한다. 10월 1일 아비뇽에서 조약이 확정되는 동시에 교황이 그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길고 길었던 '17년 전쟁'에서 드디어 승리한 에드워드는 기쁨과 조바심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8월경 나바라파의 주요 인사였던 아르쿠르 백작이 장 왕에게 용서를 구하며 카를로스의 계략과 그동안 있었던 사건의 전말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에 따르면 시종관이자 잉글랜드와의 종전 협상을 주도한 로베르 드 로리스를 포함해 장 왕의 측근 중 일부는 나바라 왕 카를로스의 첩자이며 추밀원 회의 내용을 그에게 비밀리에 누설하는 등 반역 행위를 저질렀다. 진실을 알게 된 장 왕은 격노했고 로베르는 며칠 뒤 아비뇽으로 도망쳤다.


위기를 감지한 카를로스도 11월 초 아비뇽 교황청으로 피신했다. 그러자 장 왕은 곧바로 나바라의 카를로스의 모든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표면적인 명분은 그가 국왕의 허가를 받지 않고 프랑스를 떠났다는 것이었다.


왕의 군대가 도착하자 노르망디의 도시와 성들은 바로 항복했다. 하지만 나바라인 수비대가 주둔한 여섯 성채만은 자신들은 나바라 왕의 명령에만 복종한다며 항복을 거부한다.


다음 해인 1355년 1월 장 왕은 아비뇽에 사절을 보내 긴느 조약을 파기했다.


한편 나바라의 카를로스는 잉글랜드측 사절로 아비뇽을 방문해 있던 랭커스터 공작을 만나서 이번 휴전이 끝나면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기로 합의한다.




6. 나르본 습격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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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의 군대는 가론 강을 건넌 다음 대대들을 편성했고, 툴루즈 시 너머의 모든 지방을 불태웠다. 그날 밤은 몽기스카르에서 숙영했고 다음 날 카스텔노다리로 진격해 성을 점령하고는 전부 약탈했다. 그다음 날은 카르카손까지 진격해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부를 발견했고, 모든 것을 약탈하며 도시의 아름다운 부녀자들과 그녀들의 딸들을 강간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1355년 7월 5일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가 군사 2000명을 이끌고 노르망디 셰르부르에 상륙했다.

하지만 무력충돌이 일어나기도 전인 9월 초, 카를로스는 또다시 장 왕과 타협하고 사면을 받는다.

자연스럽게 동맹은 파기되었고, 카를로스에게 또다시 낚인 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 원정 계획을 취소한다. 대신 그가 남기고 간 나바라 군대를 용병으로 고용해서 브르타뉴 방면을 교란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은 직접 칼레에 상륙해 피카르디를 공격하며 장 왕을 도발한다.

장 왕이 청야전술로 대응하자 에드워드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칼레로 퇴각했다. 한편 프랑스에서 보낸 보조금 4만 에퀴가 도착하자 스코틀랜드군이 휴전 조약을 무시하고 북부 잉글랜드를 침공해 베릭을 점령한다.

하지만 그렇게 북쪽에서 조공으로 시선을 끄는 동안 주공인 남쪽에서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10월 5일 보르도에서 출정해 11월 말까지 가스코뉴와 랑그독을 횡단하는 기마약탈로 남부 프랑스를 불태우고 돌아왔다. 이 원정으로 총 40만 에퀴(약 6만 파운드)에 달하는 조세 부담 능력을 가진 거주지와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랑그독에서 세금 징수가 당분간 중단된다.




7. 베릭 포위전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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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올의 에드워드가 마치 포효하는 사자처럼 왕을 찾아왔다. "군주 중의 군주이시여! 내가 알기로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폐하이십니다. 그러므로 부디 폐하께서 가장 사악한 종족이자 항상 나를 배신하고 다스리지 못하게 거부한 나의 원수 스코틀랜드인들을 처벌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증거로 발리올은 한 손에 왕관을 벗어 들고 다른 손으로 흙과 돌을 바닥에서 집어 들어 같이 내밀었다. "이 전부를 계약의 증표로 받아주시길. 부디 남자답고 강하게 행동하셔서 본디 내 것이었어야 할 왕국을 폐하의 손으로 정복하십시오."

이 상황에서 지적해야 할 점은 그에게는 처음부터 스코틀랜드의 왕위에 대한 권리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포둔의 존의 스코틀랜드 연대기



1356년 1월 에드워드 3세가 다시 브리튼섬으로 돌아와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고 1월 13일 베릭을 탈환한다.


1월 20일 늙고 지친 발리올이 에드워드를 찾아와 스코틀랜드 왕위 주장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에드워드는 그의 빚을 갚아주고 연금을 하사해 마지막 존엄성을 지켜준다.


에드워드는 20년만에 젊은 시절로 돌아와 로우랜드를 철저히 불태우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야전술과 악천후 때문에 에든버러에서 멀리 나가지 못하고 회군한다.


같은 시기 가스코뉴에서는 흑태자와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이 네 방향으로 동시에 공세를 가해 많은 거점을 점령하고 전선을 크게 밀어낸다.




8. 루앙 습격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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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눌 도드랭 경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움직이는 놈은 모두 죽는다!"

장 왕은 나바라 왕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붙잡고 큰 식탁을 가로질러 끌고 가면서 울부짖었다. "이 더러운 반역자놈!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아, 폐하!" 노르망디 공작이 말했다.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거에요? 그는 내 손님이라고요."

장 왕은 아들에게 용서하라고 말하며 나바라 왕을 걷어찼다.

-장 르 벨의 연대기



1355년 12월 나바라의 카를로스와 왕세자 샤를이 연루된 국왕 암살 음모가 발각된다. 장 왕은 국내외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문제들에 대처할 시간을 벌기 위해 일단 왕세자와 타협하고 노르망디 공작위를 수여한다.


1356년 3월 말 새로운 암살 음모가 발각된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장 왕은 4월 5일 루앙 성채를 습격해 그곳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었던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와 측근들을 체포했다.


샤를 드 에스파냐 살해 등에 연루된 자들 중 일부는 바로 그날 저녁 루앙 시 교외의 시장에서 공개처형당했고, 나머지는 고문을 받은 끝에 모든 음모와 악행을 자백했다. 카를로스 자신은 파리의 샤틀레 감옥에서 신문을 받은 뒤 구출 시도를 방지하기 위해 다른 지역의 감옥들로 옮겨졌다.


하지만 나바라의 카를로스가 프랑스에 대해 꾸민 거대한 음모와 두 왕 사이의 갈등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노르망디의 유력자들은 국왕의 성급하고 잔혹한 행동을 보며 불안에 빠졌다.




9. 푸아티에 전투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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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많은 사람들 중에 국왕은 전투 중이네

무척 용감한 군주가 단검과 장검을 내리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맞아 죽어 한 치도 잡히질 않네.

국왕이 말하길 "기사들 해보시게, 잔챙이들에 불과한 것들!"

……

국왕이 붙잡히게 되었을 때 잉글랜드인들은 끈질기게 외쳤네

"이 자는 장 드 발루아이지 프랑스 왕은 아니다!"

-작자미상, 홍용진 역, '푸아티에 전투에 대한 한탄'. 1356년경



장 2세가 루앙 성에서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를 체포하자 카를로스의 동생 펠리페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는다.


그렇게 잉글랜드군의 침공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부족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1355년부터 장 왕이 시도한 개혁들은 전부 실패했거나, 성공했어도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보지 못해서 당장은 쓸모가 없었다.


프랑스군은 랭커스터 공작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인 6월에 에브뢰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흑태자 에드워드의 주공은 장 왕과 군사 고문들이 예상한 목표인 랑그독이 아닌 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에 장 왕은 랑그독에 배치된 야전군을 국왕군에 합류시키는 동시에 소규모 분견대를 파견해 흑태자의 진군을 방해했다. 그리고 랭커스터 공작의 지원군이 합류하지 못하도록 루아르 강의 다리들을 파괴했다. 흑태자는 투르 시를 점령하고 그곳의 다리를 통해 루아르 강을 건너려 했으나 결국 도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다.


그동안 장 왕은 크레시 이전의 국왕군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가용한 모든 전력을 긁어모은 최후의 야전군 편성을 가까스로 끝냈다. 프랑스군의 진군 소식을 들은 흑태자는 주저 없이 군을 돌려 다시 남쪽으로 행군을 시작했으나 보병을 해산하면서까지 기동성을 높인 장 2세에게 결국 퇴로를 차단당한다. 흑태자는 프랑스군이 푸아티에에 집결하기 전에 기습을 시도했지만 절반의 성공만 거두고 궁지에 몰렸다. 당시 프랑스군의 병력이 잉글랜드군보다 세 배나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크레시 전투에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은 뒤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진영을 정찰했으며 맨앳암즈들은 잉글랜드군의 참호 앞에서 하마한 채 도보로 진격했다. 그 덕분에 더 오랜 시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은 결국 패배했다.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본대를 제외한 모든 대대가 패주한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전장에 남아서 싸우다 붙잡힌 장 왕을 비롯해 프랑스군 지휘부가 대거 포로로 사로잡히고 만다. 프랑스 제일의 기사로 칭송받는 조프루아 드 샤르니는 왕의 기수로 임명되어 성 드니의 붉은 전투깃발 오리플람을 지키다가 전사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장 왕은 스스로 결백을 증명함으로써 왕권에 드리운 크레시 전투의 그림자를 떨쳐냈다. 용감하고 고결한 군주인 프랑스 왕들은 지금껏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그동안의 모든 재난은 왕에게 잘못된 조언을 한 측근들과 사치에 젖어 군기가 빠진 기사들에게만 책임이 있었다.




10. 렌 포위전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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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한때 학문, 기사도, 상업 등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의 샘터이자 꽃이었으며, 고결함, 우아함, 도의심 등 모든 미덕의 모범이 되는 왕국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푸아티에에서 끔찍한 패배를 당한 후 포로로 잡히거나 죽지 않고 도망친 기사들은 자치도시에는 감히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모든 평민들의 경멸을 받았으며 왕국에 끊임없이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왕세자나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도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국왕마저 끌려가자 왕세자 샤를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1년여에 걸친 협상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일단 장 왕의 총신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전부 숙청한다는 공동의 목적이 달성되고 나자 귀족들과 평민 대표들은 이제 국정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여기에 나바라의 카를로스를 프랑스 왕으로 지지하며 장 왕의 폐위를 요구하는 나바라파까지 가세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357년 3월에는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경악한 장 왕이 프랑스로 포고문을 써 보내, 왕세자의 이름으로 발표된 법령이나 삼부회에서 의결된 정책을 따르지 말라고 모든 프랑스 국민들에게 호소하기까지 했다. 장 왕은 욕심 많고 독선적이며 자기와 똑같은 성격의 총신들만 편애했기 때문에 제후들과 도시 유력자들에게 인기가 없었지만 푸아티에 전투에서 보인 용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한편 1356년 10월 3일부터 랭커스터 공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 군대가 브르타뉴의 대도시 렌을 포위했다. 이때 잉글랜드군을 물리치고 포위를 풀기 위한 왕세자 정부의 노력은 전부 실패로 끝났으나 브르타뉴인 향사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포위군 진영의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활약한 끝에 도시를 구했다.


다음해인 1357년 7월 결국 에드워드 3세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지자, 랭커스터 공작은 왕세자 정부에게 10만 리브르를 보상금으로 받고 렌 시가 명목상으로 항복하면서 잠깐동안 성벽에 자신의 깃발을 세우는 조건으로 포위를 풀고 물러나기로 합의한다. 오베로슈의 영웅이자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인 잉글랜드 최고의 기사가 처음으로 당한 큰 패배였고, 이 일로 이전까지 무명에 가까웠던 게클랭이 명성을 얻었다.




11. 아를뢰 습격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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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회는 또한 나바라 왕이 감옥에서 풀려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가 프랑스를 위해 봉사한다면 왕국이 더 강해지고 더 잘 방어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왕국이 의지할 만한 지도자는 대부분 죽거나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프랑스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노르망디 공작에게 그를 풀어주자고 요청했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왜 체포되었는지도 모르고 단지 억울하게 갇혔다고만 생각했다.

……

파리에 도착하자 그는 성직자, 귀족, 평민 등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당한 일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자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은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 모두 프랑스 왕가의 후손이기 때문에 의무대로 프랑스 왕국을 수호하며 살다가 죽기를 원한다고 설득력 있게 연설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그동안 노르망디에서는 나바라파가 코탕탱 반도를 거의 장악했다.


결국 1357년 11월 9일 나바라의 카를로스가 아를뢰 성의 감옥에서 탈출했다. 그는 나바라파의 추종자들에게 구출된 즉시 아미앵 시로 향했다.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도시에 영웅처럼 입성한 그는 프랑스 왕국 공동체의 공익을 위하는 마음과 장 왕이 씌운 누명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감동적인 연설 끝에 자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이끌고 파리로 진군했다.


심지어 파리에서도 나바라의 카를로스는 아침부터 정오까지 몇 시간에 걸쳐 쏟아낸 열정적인 연설로 파리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제 왕세자의 국왕 대리인 지위는 이름뿐이었고 프랑스 정부는 나바라파에 의해 장악되었다.


하지만 반쯤 잊고 있었던 희대의 트롤러 카를로스의 재등장에 당황한 에드워드는 런던에 포로로 잡혀 있는 장 왕과 몸값을 합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왕이 곧 풀려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카를로스는 파리 시의 모든 감옥을 열어 죄수들을 석방한 뒤 노르망디로 도망친다.




12. 파리 시민 봉기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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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귀족들과 성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삼부회의 입장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들은 삼부회가 자신들이 바랐던 것보다 더 멀리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상인조합장에게 모든 책임을 맡겼다.

그러던 어느 날 노르망디 공작이 기사, 귀족, 성직자들과 함께 파리의 궁전에 있었는데, 상인조합장이 자신의 편에서 의견을 같이하는 파리 시의 악당들을 잔뜩 모아서 궁전으로 찾아왔다.

-장 르 벨의 연대기



잉글랜드 왕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왕세자 샤를은 파리 개혁파 부르주아들이나 아직도 남아있는 나바라파 잔당들에 맞서기 위해 왕실에 충성하는 귀족 세력을 결집했고, 1358년 1월에는 일드프랑스에서 약탈을 벌이고 있는 잉글랜드 출신 용병 겸 도적들을 물리친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소집했다.


하지만 나바라의 카를로스는 왕세자의 발악을 비웃듯 그 명분을 진짜로 만들었다. 그는 장 왕의 폭정에 희생된 노르망디 귀족들의 복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잉글랜드 용병들을 고용해서 일드프랑스를 약탈하게 했다. 용병들은 자신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이 아닌 왕세자와 나바라 왕의 분쟁에서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며 휴전 조약을 무시했다. 왕세자의 군대만으로는 이들의 약탈을 막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라 파리 시를 장악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에티엔 마르셀과 개혁파 부르주아들도 도적들을 물리친다는 명분으로 민병대를 모집했다. 이들은 왕세자의 군대를 도시 성벽에서 쫓아내고 파리 시의 상징색인 붉은색과 파란색이 섞인 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세력을 과시했다.


군대를 잃은 왕세자는 얼마 전 나바라의 카를로스가 썼었던 술수를 모방했다. 그는 1월 11일 아침 수행원 여섯 명만 이끌고 레 알르 시장에 나왔다. 그리고 높은 연단 위에 올라서 연설을 시작했다. 자신이 세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쓰고 있다거나 지금 성벽 밖에 진을 치고 있는 군대가 파리 시민들의 적이라는 소문은 모두 '정부를 장악한 자들'이 퍼트린 거짓말이고 이들이 오히려 조세를 횡령하며 도적들을 돕고 있다고 왕세자는 주장했다.


왕세자 일행이 시장을 떠나자 즉시 에티엔 마르셀이 단상 위에 올랐다. 그리고 앞서 왕세자가 했던 주장을 반박하며 왕세자가 개인적으로 유용한 세금의 정확한 액수와 그 돈을 받은 유력자들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언급했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이 왕세자가 포고꾼에게 칙령을 읽게 하는 대신 시민들 앞에 직접 나와서 연설했다는 사실 자체에 감명을 받았다.


1월 24일 왕세자의 재무관 장 바이예가 거리에서 습격받아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왕실에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불만을 품은 채권자였다. 살인범 페렝 마르크는 생마리 수도원으로 피신했지만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이 체포해서 재판 없이 교수형에 처했다. 로베르가 사형을 집행하면서 파리 시의 유력자들도 곧 이렇게 될 거라고 외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바이예와 마르크의 장례식이 같은 날 진행되었고, 왕세자 파벌은 모두 바이예의 장례식에, 개혁파는 모두 마르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제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분명해지면서 도시에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2월 초가 되자 나바라의 카를로스가 다시 파리 정계에 개입했다. 그가 파견한 사절단은 노르망디에 남아있는 요새들을 전부 양도하라는 요구를 왕세자에게 전한 뒤 파리 거리에 나와서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자 왕세자에게는 절망적이게도 그동안 나바라 왕의 포고문과 연설에 담긴 지성에 감명을 받은 파리 대학 교수들이 지지를 표했다.


카를로스는 개혁파가 장 왕과 그의 총신들에게 품은 두려움과 적대감을 이용했다. 국왕은 외국에 끌려갔고 측근들은 숙청되었지만 상황은 언제든 반전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다시 나바라파와 개혁파에게 장악된 파리 삼부회는 잉글랜드와의 종전 협상을 거부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는 상태인 장 왕의 칙령은 무시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마지막으로 이를 위한 명분을 강화하고자 모든 권력을 잃은 왕세자를 국왕 대리인이 아닌 허울뿐인 '섭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2월 21일 삼부회가 해산되자마자 왕세자는 생드니 평야에 주둔한 자신의 군대에게 파리 시내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도시 성벽과 성문은 전부 개혁파 민병대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서쪽 문 바로 옆에 루브르궁이 있었다. 그곳에 집결해 있는 왕세자 파벌이 내부에서 호응하면 성문이 돌파당할 수 있었다.


결국 2월 22일 아침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에티엔 마르셀이 선수를 쳐서 민병대 3000명을 이끌고 왕궁을 습격했다. 샹파뉴 원수 장 드 콩플랑과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이 눈앞에서 반란군에게 살해당하자 왕세자는 겁에 질린 채 마르셀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이에 마르셀은 '이들은 전하의 보호자입니다'라고 답하며 자신이 쓰고 있었던 파리 시의 상징 모자를 왕세자의 모자와 바꿔 썼다. 그리고 그레브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자신이 프랑스 왕국 공동체의 공익을 위해 반역자들을 죽였다고 밝힌 뒤 왕세자에게 사면을 받았다.


3월부터 왕세자는 공식적으로 섭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공문서에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허수아비 섭정이라는 버프 아이템은 파리에 가둬놓은 채로는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왕세자를 지지하는 북부 프랑스의 귀족들은 파리 삼부회 참석을 거부하며 상리스와 프로방스에서 지방 삼부회를 개최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나바라의 카를로스가 왕세자의 '호위'를 자처했지만 출발 직전 갑자기 병으로 앓아누웠고, 왕세자의 삼촌인 오를레앙 공작이 급하게 대신 호위를 맡게 되었다. 3월 25일 왕세자는 그대로 수행단과 함께 상리스로 출발하면서 허망하게 탈출에 성공한다.




13. 멜로 전투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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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잉글랜드인들과 이러한 협정을 맺었네

"우리 서로 죽이지 말자, 전쟁을 질질 끌자"

이렇게 배신으로 국왕은 속았네

……

프랑스에서 우리의 국왕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가 조언을 잘 받는다면 그는 전혀 잊지 않을 것이리라

그의 대원정에 선량한 자크들이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들은 왕이 생명을 잃도록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작자미상, 홍용진 역, '푸아티에 전투에 대한 한탄'. 1356년경



1358년 5월 왕세자는 에티엔 마르셀과 개혁파를 물리치고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농촌 공동체의 관습적인 특권도 무시하는 강화된 징발령을 선포한다. 이에 불만이 폭발한 보베지의 농민들이 봉기하면서 자크리의 난이 일어났다.

농민군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국왕이 포로로 잡힌 것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매수된 귀족들이 왕을 배신했기 때문이라며 귀족들을 학살했다. 그러는 동시에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왕세자 샤를과 북부 프랑스 귀족들을 적대하고 있는 파리 부르주아들과 연합을 시도했으나, 에티엔 마르셀과 파리 개혁파는 센강의 수운을 봉쇄한 요충지의 요새들을 공격하는 계획에만 동조하고 그 이상의 협력은 철저히 거부했다.

프랑스의 모든 귀족들을 적으로 삼은 농민군은 이제 '같은 평민'인 도시 세력과 연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개혁파 부르주아들에게는 이미 나바라파 귀족들이라는 연줄이 있었으므로 애초에 서로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다. 결국 6월 10일 나바라의 왕 카를로스 2세는 멜로 고원에서 농민군에게 거짓으로 협상을 제안한 뒤 그 말에 속은 농민군을 기습해서 무참히 짓밟는다. 같은 날 모 시를 점령하러 떠난 분견대도 수비군에게 패배하고 흩어지면서 봉기가 완전히 진압되었다.

나바라 왕 카를로스가 자크리 반란군 진압에 가장 먼저 나섰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는 북부 프랑스 귀족 난민들과 자경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멜로에서 농민군을 전멸시킨 이후 카를로스는 봉기를 일으킨 마을마다 주동자 4명씩을 골라내 처형하고 약탈과 방화를 벌인 대가로 보상금을 걷으라는 지시를 내리는 등 귀족들을 통제하고 이끌면서 상황을 주도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 귀족들도 자크리 못지 않게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나바라 왕의 명령은 거의 무시되었고 어떤 이들은 일드프랑스의 농촌 마을과 농민들을 마치 잉글랜드군이 하는 것처럼 불태우고 학살했다.

농민들에 대한 보복을 어느정도 끝내자 귀족들의 분노는 이제 도시민들에게 향했다. 마침 에티엔 마르셀과 파리 개혁파는 자크리의 난의 배후로 의심받기에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파리 삼부회에서 귀족들과 대립했고, 농민군과 같은 비귀족 평민이며 똑같이 왕세자를 적대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에티엔 마르셀에게나 그의 동맹인 카를로스에게나 전혀 달갑지 않은 결과였다.




14. 파리 포위전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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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 백작은 영지로 돌아갔지만, 대장과 나는 계속 나바라 왕에게 고용돼서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특히 피카르디에서 치열하게 싸워서 보베와 아미앵의 주교령의 수많은 도시와 성을 점령했습니다. 우리는 들과 강의 주인이 되었고, 그곳에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습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1358년 6월 14일 카를로스는 다시 환호를 받으며 파리 시내로 입성했다. 그리고 그레브 광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프랑스 왕국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고 자신이 카페 왕가의 후손임을 강조했다. 그러자 에티엔 마르셀은 왕국을 다스릴 지도자가 없는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며 나바라 왕을 파리 시의 수비대장으로 추대한다. 카를로스는 결국 귀족들을 버리고 도시 세력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실망한 귀족들은 나바라 왕 대신 왕세자 샤를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왕세자는 자크리 반란 진압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지만 가장 큰 이득을 누렸다. 6월 말 그는 1만이 넘는 맨앳암즈를 이끌고 파리 시 교외에 도착했고, 7월 14일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포위군 진영을 잇는 센 강의 임시교량을 파괴하기 위해 수비대가 출격하면서 시작된 한 번의 짧고 격렬한 전투가 있은 뒤, 개혁파와 왕세자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파리 시민들은 분노한 귀족들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항복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도시가 함락되는 순간 누구도 귀족들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아마도 협상 도중 깨달은 왕세자 샤를은 도시의 포위를 풀고 야전군을 대부분 해산한 뒤 소규모 호위대만 이끌고 모 시로 철수한다.


그렇게 파리 포위전은 일단 에티엔 마르셀과 개혁파의 승리로 끝이 났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파리 시의 일부 유력자들과 대부분의 중하층 시민들이 나바라파와의 동맹에 대해 품고 있었던 불만이 폭발했다. 나바라파건 왕세자파건 상관 없이 모든 귀족들에게 적대감을 품은 이들도 있었고, 자크리 반란군을 동정하는 이들도 있었고, 나바라 왕이 손바닥 뒤집듯 편을 바꾸는 모습을 보고 불안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잉글랜드 출신 용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결국 7월 21일 오후 파리에서 반잉글랜드 폭동이 일어나 잉글랜드 용병 400여 명이 폭도들에게 붙잡혀 감금당한다. 에티엔 마르셀은 이들을 살려둬야 잉글랜드에 잡혀간 프랑스 포로들과 교환할 수 있다고 설득한 끝에 간신히 용병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카를로스는 노르망디에 있는 부하들에게 서신을 보내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의 잉글랜드군 주둔지를 샅샅이 뒤져가며 용병들을 모집하게 하고는, 다시 한번 그레브 광장에 모인 군중 앞에 나가서 연설을 했다. 하지만 분노한 시민들은 나바라 왕과 상인조합장이 당장 잉글랜드인들을 처형하고 자신들을 지휘해서 센 강의 수운을 봉쇄한 요새 주둔군을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곧 이성을 잃은 시민 수천 명이 그들을 반강제로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카를로스와 에티엔 마르셀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폭도들을 따라 파리 시를 나와서 왕세자의 군대의 주둔지로 향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용병들이 그렇게 행군하고 있던 시민군을 기습해 600여 명을 죽이고 카를로스를 구출했다.


에티엔 마르셀은 남은 생존자들과 함께 파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결국 7월 31일 아침 생드니구의 성문을 순찰하던 중 분노한 시민들의 습격을 받아 죽는다.


이 소식을 들은 왕세자는 8월 2일 파리에 입성한다. 개혁파 지도층 일부는 처형되었으나 나머지 시민들과 자크리 반란군은 곧 사면을 받았다.




=======


0. 백년전쟁이 시작된 과정

1. 사우샘프턴 습격 (1338)

2. 라 카벨 대치 (1339)

3. 투르네 포위전 (1340)

4. 잉글랜드의 역습과 크레시 전투 (1340-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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