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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세 기사도의 이상과 자크리의 난

prevo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9.07 0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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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계급 탄생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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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귀족 계급을 만들었다.


언젠가 이방 민족의 족장들은 전장에서 앞장서서 싸울 전사를 선발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석공, 목수, 대장장이 같은 수공업자들을 전장으로 보내자. 그들은 강하게 후려치는 일에 익숙하며, 거대한 바위를 부수고, 굵은 나무를 쪼개고, 단단한 쇠를 두드려서 부드럽게 만드는 자들이다. 그들을 전열 앞에 세워서 강하게 내지르고 후려치게 하면 우리의 적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수공업자들에게 좋은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준 채 싸움터로 보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행군 도중 지쳐 쓰러졌고, 또 일부는 겁에 질려 도망쳤고, 남은 이들 역시 두려움 때문에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수공업자들의 군대는 전투에서 패배했다.


족장들은 실수를 인정하고, 이번에는 도살업자들을 장수로 삼았다. 도살업자들은 강한 산짐승과 거대한 황소를 도축하며, 잔혹하고 무자비하고 피를 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족장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후려쳐서 지난 일의 복수를 완수할 것이다."


그들은 도살업자들에게 좋은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준 채 전열 앞에 세웠다. 하지만 도살업자들 역시 용기를 잃고 도망가버렸고, 족장들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다음번 전투에서 족장들은 높은 곳에 하인들을 보내서 전장을 관찰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며 강하게 후려치는 용사들을 찾아오게 시켰다.


전투가 끝났을 때 족장들은 용사들을 불러모았고, 모두에게 전공에 걸맞은 칭찬과 명예를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군대로 편성하면서, 무기와 갑옷을 정비하고 말을 돌보는 것 외에는 관심 갖지 말고, 군인으로서의 일 말고 다른 일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들을 위해 세금이 징수되기 시작했고, 이 제도가 아주 훌륭한 것이라는 사실이 곧 입증되었다. 모든 백성들은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했고, '의인(義人: good man)들'이라고 불렀다. 의인들은 자기 일에만 전념하며 그 일에 능숙해졌다.


의인들 중 한 명이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했을 때는 동료들이 다 함께 애도하고, 죽은 이의 자식들을 거두어서 훌륭하게 길렀다.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어머니에게 원래 그들의 아버지에게 속했던 특권과 다른 모든 것을 돌려주어 죽은 아버지와 똑같은 삶의 방식을 따르게 했다.


훗날 그들은 '의인의 아들', 또는 '좋은 집안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반면에 불명예를 안거나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누구의 아들도 아닌 자'라고 불렸다.


의인으로 선택된 자들은 소수였고, 이들은 전장에 나갈 때면 각자 열 명의 병사를 맡았다. 이들은 부하들이 더 잘 싸울 수 있도록 이끌었고, 실제로 한 명의 의인의 용기와 지휘 덕에 전투에서 승리하거나 요충지를 방어하거나 점령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의인 열 명을 이끄는 대장도 있었고, 이들은 백 명의 대장이었기에 백인대장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백인대장 열 명의 대장으로 선출된 사람도 있었으며 밀레스 또는 기사라고 불렸다. 그리고 60명의 백인대장과 600명의 의인과 6,000명의 병사를 이끄는 자는 공작이라고 불렸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와 다른 방식으로 기사들을 선발했다.


어느 날 기드온은 두려움에 빠졌다. 왜냐면 전투에 데려갈 수 있는 병력이 적었고, 나머지는 의인들을 배반하고 전장에서 도망칠 것이 분명한, 염치도 용기도 없는 겁쟁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삿 7:3]


기드온은 전투에 데려갈 병사를 고르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전투 당일에는 해가 높이 뜨고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서 날씨가 무척 더울 것이다. 이때 강가에서 병사들이 물을 마시는 모습을 잘 살펴보아라. 그런 다음 강물에 고개를 처박고 물을 마시는 놈들은 후방에 두고,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자들만 골라서 함께 전장에 나가라."[삿 7:4-7]


이 말은 절제 없이 먹을 걸 탐하는 자들은 짐승과 같다는 뜻이다. 이들은 먹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식욕 외에는 어떤 명령도 따르지 않는다. 이런 이들이 적을 물리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오히려 나약한 인내심으로 자기 자신에게 불명예를 안길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은 두 손으로 강물을 떠 마신 병사들을 데리고 전장에 나갔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때 그를 따른 이들 중에서 공작과 백작과 기사와 신사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모두 명예를 위해 고된 일을 견디며 무시무시한 공포를 극복하고, 훌륭하게 처신하며 천하고 비열한 짓은 전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직 진실한 말과 행동만을 보였다. 때문에 위대한 군주들은 신사들이 바친 경의와 맹세 외에는 아무런 보증도 없이 그들에게 아내와 자식들과 집과 요새들을 맡겼다.

-구티에레 디아즈 데 가메스, '돈 페로 니뇨 연대기'. c.1448




기사 신분은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귀한 혈통을 가졌기에 기사가 된 것이 아님을 이해하라.

모든 사람은 한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질투와 탐욕이 자라나고,

무력이 정의를 억누르기 시작했을 때도,

모든 사람들의 집안과 신분은 동일했다.


하지만 약자들이 더 이상 강자들에게 저항할 수 없게 되자,

공동체는 약한 사람들과 온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강한 사람들의 범죄와 잔학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수호자 계급을 만들었고,

자신들 가운데 가장 평판이 좋은 사람들을 선출했다.


그들은 크고, 강하고, 잘생기고, 민첩하고, 충실하고, 용맹하며,

정신과 육체가 모두 우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기사 신분은 장난삼아 헛되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것을 받은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이 지워졌다.


그게 무엇인지 아는가?


최초로 기사 신분이 만들어졌을 때,

기사가 되기를 희망했고, 선거에 의해 그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비열하고 잔혹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관대하고, 예의 바르고, 친절할 것을 맹세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도우며,

강도와 살인자들을 무찌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을 요구받았다.


그들은 사심 없이 공정하게,

편애에 의해 옳은 것을 배척하며 잘못된 것을 지지하거나

증오에 의해 악을 도우며 선을 방해하지 않고,

공정한 재판관이 되어야 했다.


기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수치스러운 행동을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죽음보다는 수치를 겪는 것을 더 두려워해야 했다.


기사 신분은 성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왜냐면 그녀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되며,

원수에게 무력으로 보복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기사 신분은 오른뺨을 맞았을 때 왼뺨을 갖다 대야 하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작자미상, '랑슬로', 13세기초.




비록 현대에는 여러 신분들이 있지만,

태초에 모든 인간은 똑같은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었다.

우리 모두가 한쌍의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고,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지나친 자만심과 질투로 인해 원한과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위대한 군주라고 생각한다면 평화롭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해서 군주로 삼았다. 그리고 법을 만들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를 처벌할 권력을 주었다.

또한 왕이 공동체의 적들과 사악한 관료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신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강하고, 현명한 자들을 선출해서 봉신으로서 왕을 도우며 평화를 지키는 영주들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귀족이라고 불리는 신분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자신들 가운데서 귀족을 선출한 사람들 중 남은 이들은 비귀족 자유민이 되었다.


농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런 예속인 신분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힘으로써, 몸값 대신이거나 감옥에서 풀려나는 대가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재정적 이익을 얻거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팔아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왕이 왕국의 방어를 위해 외국인들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무장을 한 채 같이 전장에 나갈 의무가 있는 자들을 전부 소집했을 때 안전한 후방에 남은 대가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전장에서 도망친 죄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 교회가 설립된 시기에 경건한 의도로 성인들에게 자신을 바침으로써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부당하게 예속을 강요하는 영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노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 농노가 되었든, 농노들에게 자유를 주고 예속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영주들이 할 수 있는 선행 중에서도 훌륭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누구도 예속된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필리프 드 보마누아르, '보베 지방 관습법', 1283




14세기 기사도 이념에서 군인. 밀레스. 기사는 본질적으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고된 노동과 공포를 견디는 수호자 계급이었다. 그것이 기독교 공동체든 아니면 13세기쯤 서유럽에서 부활한 국가 공동체든.


이런 사회계약론적인 계급 탄생 설화는 완전히 중세인들이 창작한 것은 아니고,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 기원설에 기독교적인 색채를 입힌 것이었다. 대표적인 차이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불변의 자연법칙으로 여겼지만 13세기 중세 사회계약론은 기독교 신자를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고 농노제를 언젠가 사라져야 할 필요악으로 봤다.


여담으로 구티에레 디아즈 데 가메스는 페로 니뇨의 연대기의 또다른 대목에서 기사들이 감당하는 고난과 두려움을 꽤 실감나게 묘사하기도 했다.




모든 신분 가운데 이처럼 명예로운 신분은 없으며,

또한 없어야 한다.


하찮은 신분의 사람들은 끼니를 거르지 않으며,

부드러운 옷을 입고 맛좋은 고기를 먹는다.


깨끗한 침대에 누워 편히 잠들고,

두려움 없이 아침에 일어난다.


아내와 아이들과 많은 친구들과 함께,

아름다운 집에서 기쁨을 즐긴다.


그들은 배가 나오고 목이 두꺼워진다.

자신들의 작은 몸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가꾸며,

즐겁게 살아간다.


이들이 명예와 보상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

아니. 전혀. 절대 아니다.


전쟁에 나선 기사들은 슬픔에 잠긴 채 빵을 먹는다.


그들은 쉴 때조차 지쳐있고 땀을 흘린다.

그들은 한 번의 좋은 날을 보낸 다음 수많은 나쁜 날을 보낸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고난을 견디기로 맹세했다.

그들은 영원히 두려움을 안고 있다.

그들은 모든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킨다.

그들은 목숨을 건 모험에 몸을 내맡긴다.


곰팡이 핀 빵이나 비스킷,

조리되거나 조리되지 않은 고기들.


오늘은 먹고 내일은 굶고.

포도주는 없거나 거의 없고.

연못이나 수통의 물.


나뭇가지나 천막으로 만든 형편없는 숙소.

갑옷을 입은 채 누운 불편한 잠자리.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


"경계태세!"

"거기 누구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졸고 있을 때 경보가 울림; 동틀녘에 트럼펫 소리.


"말에 타!"

"집합! 모두 집합!"


순찰하고, 보초를 서고,

밤낮으로 감시하고,

징발하고, 약탈하고, 정찰하고,

경비를 서고, 또 경비를 서고.

임무 다음에는 또 임무.


"저기 온다! 수가 너무 많아!"

"아니. 그렇게 많지 않아."

"이쪽!"

"너는 저쪽으로 돌아!"

"이쪽 측면으로!"


"넌 저쪽으로 몰아붙여!"

"새로운 소식! 그들이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그리고 포로를 잡아왔어."

"아니야. 포로는 없어."


"자, 어서 가자!"

"물러서지 마!"

"가자!"


안락함이라고는 없는 고단한 생활. 이것이 그들의 소명일지니.


그러나 바다에서 전쟁을 벌이는 자들의 고난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

나는 그들의 불행과 노고에 대해 하루 종일도 이야기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기사들은 마땅히 명예를 얻어야 하며,

군주들도 그들에게 커다란 호의를 보여야 한다.

-구티에레 디아즈 데 가메스, '돈 페로 니뇨 연대기'. c.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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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런 설화들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많이 다르거나 심지어 맞는 말이 하나도 없을 수도 있는, 말 그대로 설화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현실의 귀족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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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 시기(11~13세기)에 기사의 군사적 봉사의 기본적인 대가는 돈이 아니라 땅이었다고, 주로 둠스데이북에 근거해서 생각되어 왔다. 즉 주군에게 수여받은 봉토(일부는 재분봉할 수 있는)에 대한 대가로 왕의 군대에서 복무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왔다.


그러나 봉신 기사들은 오더릭 바이탈리스, 맘스베리의 윌리엄, 그밖의 다른 연대기 작가들의 글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오더릭은 군대의 조직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음에도 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노르만 왕조와 앙주 왕조의 왕들은 봉토를 받은 신하들보다는 돈으로 고용된 전문 군인 집단에서 군사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실전에서는 고도로 훈련된 가신 또는 용병 기사들이 덜 훈련받은 비직업군인 기사들보다 항상 더 큰 가치를 지녔을 것이다. 현실의 중세 봉건제는 교과서의 이론과 거의 공통점이 없었다.

-Nigel Saul, For Honour and Fame: Chivalry in England, 1066-1500



14세기의 기사는 기사가 되는 의례적인 절차들을 통과한 사람이었고, 로드(lord) 또는 도미누스(dominus)로 호칭될 사람이었다. 잉글랜드에서 기사는 세습되는 신분이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기사의 아들은 기사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기사의 기원은 군인이었고, 따라서 군인의 무장을 갖추고 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며, 1320년대에 존 스토너는 '왕의 재판관이며, 군인의 무장을 갖춘 사람이지만 그것들을 사용한 적이 전혀 없었다'고 알려졌다.

-Michael Prestwich, Plantagenet England 1225-1360



이때 왕의 군대에 복무한 병사들 중 많은 이들은 이전까지 전쟁에서 싸워본 경험이 없었다. 프랑스인들에게 무기를 판매하는 것이 주력 사업이었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다티니(Francesco di Marco Datini)의 아비뇽 지점장은, 1386년 여름 잉글랜드 침략에 참가하기 위해 슬뤼스로 향하는 남부 프랑스인들에게 갑옷과 투구를 공급하는 사업이 현재 대호황이라고 보고했다. 이들은 신사 계급이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군사 장비조차 없었던 것이다.

-Jonathan Sumption, Hundred Years War 3: Divided Houses



툴루즈의 세네샬이었던 장 라르슈베크는 세 차례 이어진 가스코뉴 원정에서 복무한 82명의 귀족들을 명부에 올렸다. 이 중 세 번의 원정에 모두 참여한 사람은 11명에 불과했고,15명은 한 번씩만 참전했다. 대다수인 56명은 두 번의 군사작전에 참가하는 것으로 자신의 명예와 왕에 대한 의무를 충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선에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살고, 많은 임금을 받는 반면에 위험은 적은(가스코뉴 전쟁에서 전투는 거의 없었고 사상자도 매우 적었다) 전쟁에 참전하는 귀족들의 반응이 이러하다면, 더 먼 지역에 살거나 더 치열했던 플랑드르 전쟁에 참전할 귀족 장교들을 찾으면서 프랑스 정부가 직면할 어려움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왕국의 모든 신체 건강한 성인 남자들은 왕국의 방어를 위해 군복무를 해야 하는 법적인 의무가 있었다. 이것은 필리프 4세의 치세 초기에는 암묵적으로 요구되었고 1300년 이후의 군사 소집령에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었다.


물론 필리프는 모든 신민의 징병을 원하지 않았다.그는 수십만 대군을 기동하거나 보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충분한 돈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고, 대부분의 귀족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하지만 일부 귀족들은 전쟁 경험(그리고 봉급)을 원했고, 비록 돈을 내고 군역을 면제받았더라도 지역 공동체들은 여전히 일정한 수의 군대를 모집하거나 유지비를 지불할 의무가 있었다.

-Joseph R. Strayer, The Reign of Philip the Fair



기사가 공동체의 수호자 계급과 동일시되기 시작한 것은 서유럽에 국가공동체, 삼신분, 기사도 개념이 자리잡은 12세기 후반쯤부터인데, 여러 증거로 볼 때 정작 이 시기 '기사' 또는 '귀족' '신사' 계층의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부동산 경영하면서 지방 정치에 참여하는 상류층 지주계급이지 흔히 생각하는 오직 전쟁을 위해 준비된, 먹고자고 전쟁만 생각하는 인간흉기 전사귀족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을 가능성이 높다.


중세의 삼신분과 봉건피라미드도 애초에 보편적이고 일관적인 제도로서 존재한 적이 있었을지 의문인것이, 기록이 부족한 11세기와 12세기에도 이미 농노가 무장하고 전장에 나가서 기사로 인정받거나 기사가 은퇴하고 농민이 되는 사례들이 나타난다.


기사도의 시대인 중세 후기에도 현실에서는 많은 기사들이 전투와 죽음의 공포에 굴복해서 명예를 버렸고 전쟁의 고난을 그저 ㅈ같게 여겼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 왕과 그의 군대는 더운 날씨와 주둔지 근처의 도축장에서 풍기는 악취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왕의 도시인 투르네를 지켜냈으며, 적의 거대한 군세가 많은 시간과 비용만 소모하고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났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과 그의 동맹들은 스스로 프랑스 왕국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프랑스 왕의 눈앞에서 그의 영토를 불태우고 파괴하는 동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고, 그들이 지역의 가장 훌륭한 도시 중 하나를 포위한 채 주변 마을들을 유린한 뒤에야 비로소 프랑스 왕이 휴전을 간청했기 때문에 그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고 파리로 돌아갔으며 따라서 자신들이 이겼다고 주장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에든버러로 돌아온 프랑스 기사들과 영주들은 생필품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와인은 거의 없었고 질 나쁜 에일과 귀리빵과 보리빵밖에 없었다. 말은 대부분 굶어 죽거나 지쳐서 죽었고, 말이나 마구를 처분하고 싶어도 돈을 내고 사갈 사람이 없었다. 기사들은 이런 비참한 상황을 오래 견딜 수 없다고 지휘관들에게 항의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스코틀랜드는 겨울 동안 지낼 만한 나라가 아니었고, 여름이 오기 전에 모두 굶어 죽을 터였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여러 지방으로 흩어진다면 외국인을 악독하게 다루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무방비로 습격당할 것이 분명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웨일스 공의 부대가 빠른 속도로 닥쳐오는 것을 본 왕세자의 수하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왕자들인 노르망디 공작, 푸아티에 백작, 투렌 백작은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렸고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쉽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 오직 푸아티에 백작의 수하인 기샤르 드 앙글 경과 장 드 상트 경만이 도망치지 않고 가장 치열한 전장의 한 가운데로 달려갔으며, 거의 800명 이상의 중장병들이 그날 단 한 번도 무기를 휘둘러보지 않은 채 왕자들과 함께 전장을 벗어났다.


왕세자의 군사 고문들은 왕세자를 안전한 장소까지 호위한 뒤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그들은 오를레앙 공작과 그가 이끄는 수많은 군사들을 마주쳤는데, 그들은 적과 교전을 시작하지도 않고 상처 하나 없이 전장을 벗어나서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휘관들이 도망치는 상황에서도 치욕을 감내하기보다는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한 훌륭한 기사들과 향사들도 많이 있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하지만 기병대가 선형진으로 배치된다면, 비록 소수의 정예 기병들이 적진에 충돌하기 위해 힘차게 진격하더라도, 의욕이 부족한 나머지 기병들은(이들은 코에서 피가 터지고, 등자가 망가지고, 말굽에서 편자가 벗겨진 것처럼 가장한다) 옆에서 따라가지 않고 멈춰서며, 그 결과 200보도 못 가서 우리의 긴 선형진 안에 연약한 유리창들(glasse windowes)이 만들어지고, 그곳에 커다란 구멍들이 생겨날 것이며, 그것을 본 적들의 사기가 크게 오를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기병 100명 중 고작 25명이 돌격에 끝까지 참여할 것이다.

-Francois de la Noue, Discours politiques et militaires



하지만 여기서 다시 반전이 있는데,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사도의 이상 자체는 일부 귀족들이나 미는 자기포장 억지밈이 아니었고 귀족이든 평민이든 당대인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1346년 크레시 전투: 정부에 대한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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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대표들이 말했다. "폐하. 우선 전쟁을 하시는 동안 가까운 신하들에게 들은 조언들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 조언에 따른 결과 폐하께선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뷔렁포스, 툰 레베크, 부빈, 에귀용과 그밖의 모든 전장에서 폐하를 따른 군대가 얼마나 크고 훌륭했는지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폐하께선 항상 막대한 비용을 들여 모집한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진군하셨으나 매번 굴욕적인 휴전을 구걸한 뒤 비겁하게 물러났습니다. 심지어 적은 수의 적군이 왕국의 심장부에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347년 파리 삼부회 회의 기록



1339년 10월 22일, 1만이 조금 넘는 잉글랜드-독일 연합군과 약 2만 5천의 프랑스군이 프랑스 북동부 국경의 소도시 라 카벨 인근에서 대치했다. 잉글랜드군이 전장에 강력한 야전 진지를 구축해놓은 것을 본 필리프 6세는 군사 고문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한다.


1340년 9월 잉글랜드-독일-플랑드르 연합군에 포위당한 도시 투르네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의 대군이 도착했지만 필리프 6세는 또다시 전투를 포기하고 휴전을 체결했다.


1343년 1월 중순, 왕세자 장이 지휘하는 프랑스 대군이 브르타뉴 말레트르와에서 잉글랜드군과 대치했으나 마찬가지로 전투를 포기하고 휴전을 체결했다.


1346년 8월 13일 잉글랜드군이 결국 파리 시에서 하루 이내 거리인 푸아시까지 진군했다. 이에 필리프 6세는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푸아시의 다리를 부쉈다. 잉글랜드군이 고작 하루만에 임시교량을 설치해 센 강을 건너 파리 남쪽 교외에 이르자 필리프는 다시 생클루 다리를 부수며 센 강 북쪽으로 도망쳤다. 파리 시 앞에서마저 프랑스군이 전투를 회피하자 잉글랜드군은 동맹인 플랑드르 국경으로 후퇴한다. 필리프는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해서 함정으로 몰아넣지만 잉글랜드군은 운 좋게 길잡이를 찾아서 저지선을 돌파한다.


잉글랜드군이 솜 강을 건너자 필리프 6세는 추격을 포기했다. 마침 플랑드르군이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호응해 남하하고 있었으므로 두 군대가 합류해서 다시 남쪽으로 역습을 가해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필리프와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즉시 방어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때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국경 지역의 소도시 베뒨의 주민들의 결사항전에 플랑드르군의 진격이 저지되면서 잉글랜드군은 보급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필리프는 8월 26일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강행군을 시작해 오전 중 크레시 마을 근처에서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크레시 전투는 잉글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필리프는 먼저 제노바 쇠뇌수들을 투입해서 장궁병들을 견제하게 했지만, 급하게 행군하느라 대형 방패인 파비스 없이 쇠뇌를 장전하기도 어려운 미끄러운 바닥이라는 악조건에서 교전을 시작한 쇠뇌수들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패주한다. 이 모습을 본 필리프와 몇몇 프랑스 지휘관들은 임금이 밀리면 전투를 거부하고 파업하기로 악명이 높은 제노바 용병들이 이번에도 또 배신했다고 오해하고는 쇠뇌수들을 공격해 학살했다.


이제 보병이나 궁병의 지원도 없이 기병만으로 적의 야전 진지를 공격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아마도 5번이나 적 앞에서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는 치욕을 감당할 수 없었을 필리프와 프랑스 기사들은 그대로 공격을 개시한다. 결국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중세 전쟁사에 유명한 크레시 전투는 1만여 명의 잉글랜드군이 3만여 명의 프랑스군을 패퇴시키며 잉글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크레시 전투의 그림자는 필리프 6세의 아들 장 2세의 치세에도 프랑스 정부를 족쇄처럼 얽매고 있었다. 군사전문가가 아닌 대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은 잉글랜드군이 무섭도록 강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3배 이상의 전력을 가진 프랑스군을 압살할 정도로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필리프 6세와 군사 고문들이 크레시 전투 이전에 1339년 라 카벨, 1340년 투르네, 1343년 말레트르와, 1346년 파리까지 총 4번이나 전투를 포기한 사실은 신중한 전략적 결단이라기보다는 겁쟁이의 행태로 인식되었다. 크레시 전투도 비겁하고 무능한 총신들이 강행군으로 지친 군사들을 조급하게 밀어붙여서 벌어진 어이없는 졸전이었다는 결론이 당대에 널리 인정받았다.


1347년 삼부회에서 발언한 평민 대표들은 정부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이처럼 귀족이든 평민이든 프랑스인들은 국왕이 기사들을 이끌고 용감하게 전투에 나서서 명예로운 승리를 거두길 원했다. 나중에는 심지어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힌 장 왕마저도 용감하다고 칭송하며 왕을 배신하고 도망친 기사들을 대신 욕했다.


하지만 국왕과 원수들의 생각에 잉글랜드군과 야전을 벌이는 것은 위험하고 멍청한 짓이었다. 장 왕 자신과 그의 아들인 샤를 5세가 한 것처럼 국민들로부터 막대한 조세를 거둬서 복잡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쟁 전문가인 직업군인들을 많이 고용해 끊임없는 전초전으로 전선을 밀어내고, 적들이 마지막 발악으로 벌이는 기마약탈을 청야전술로 막아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응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렇게나 많은 세금을 이미 걷었으면서도 전비가 부족하다며 돈을 더 내라고 하고, 막상 적군이 침공해 오면 도망만 치는 국왕과 원수들의 뻔뻔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장 왕은 불만을 가진 신하들을 설득하거나 타협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말재주나 인간적인 매력도 없었다. 그렇게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이 납세에 소극적이 되자 이제는 대규모 야전군을 소집해 정면대결을 벌이는 도박을 감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이 끝없는 악순환을 끝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군이 다시 참패하고 장 왕이 끝까지 남아서 싸우다 포로로 잡힌 푸아티에 전투였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 모든 귀족 계급으로 확대된 책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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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한때 학문, 기사도, 상업 등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의 샘터이자 꽃이었으며, 고결함, 우아함, 도의심 등 모든 미덕의 모범이 되는 왕국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푸아티에에서 끔찍한 패배를 당한 후 포로로 잡히거나 죽지 않고 도망친 기사들은 자치도시에는 감히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모든 평민들의 경멸을 받았으며 왕국에 끊임없이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왕세자나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도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또다시 패배했다. 국왕 장 2세는 끝까지 전장에 남아서 싸우다가 잉글랜드군의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장 왕은 스스로 결백을 증명함으로써 왕권에 드리운 크레시 전투의 그림자를 떨쳐냈다. 용감하고 고결한 군주인 프랑스 왕들은 지금껏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그동안의 모든 재난은 왕에게 잘못된 조언을 한 측근들과 사치에 젖어 군기가 빠진 기사들에게만 책임이 있었다.


전투에서 패배하고 왕까지 끌려가자 장 왕의 아들인 왕세자 샤를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1년여에 걸쳐 협상 끝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일단 장 왕의 총신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전부 숙청한다는 공동의 목적이 달성되고 나자 귀족들과 평민 대표들은 이제 국정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여기에 나바라의 카를로스를 프랑스 왕으로 지지하며 장 왕의 폐위를 요구하는 나바라파까지 가세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357년 3월에는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경악한 장 왕이 프랑스로 포고문을 써 보내, 왕세자의 이름으로 발표된 법령이나 삼부회에서 의결된 정책을 따르지 말라고 모든 프랑스 국민들에게 호소하기까지 했다. 장 왕은 욕심 많고 독선적이며 자기와 똑같은 성격의 총신들만 편애했기 때문에 제후들과 도시 유력자들에게 인기가 없었지만 앞서 설명했듯 푸아티에 전투에서 보인 용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1358년 에티엔 마르셀의 난: 배후중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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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베, 브리, 랑 그리고 수아송 인근에 사는 소작농 중 일부가 보베로 모여들었다. 처음에 그들은 지도자 없는 무리였고, 숫자도 백 명을 넘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 왕국의 제후와 기사와 향사들이 왕국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므로 이들을 전부 죽여 없애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 이 제안에 동의했고, 다 함께 이렇게 외쳤다. "세상의 모든 귀족을 멸망시키려 하지 않는 자들은 수치를 안으리라!"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이들은 잉글랜드인들과 이러한 협정을 맺었네

"우리 서로 죽이지 말자, 전쟁을 질질 끌자"

이렇게 배신으로 국왕은 속았네

……

프랑스에서 우리의 국왕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가 조언을 잘 받는다면 그는 전혀 잊지 않을 것이리라

그의 대원정에 선량한 자크들(Jacques Bonhome)이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들은 왕이 생명을 잃도록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작자미상, 홍용진 역, '푸아티에 전투에 대한 한탄'. 1356년경



1358년 1월 24일 왕세자의 재무관 장 바이예가 거리에서 습격받아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왕실에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불만을 품은 채권자였다. 살인범 페렝 마르크는 생마리 수도원으로 피신했지만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이 체포해서 재판 없이 교수형에 처했다. 로베르가 사형을 집행하면서 파리 시의 유력자들도 곧 이렇게 될 거라고 외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바이예와 마르크의 장례식이 같은 날 진행되었고, 왕세자 파벌은 모두 바이예의 장례식에, 개혁파는 모두 마르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제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분명해지면서 도시에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2월 초가 되자 프랑스 왕위를 노리고 있었던 나바라의 국왕 카를로스 2세가 파리 정계에 개입했다. 카를로스는 개혁파가 장 왕과 그의 총신들에게 품은 두려움과 적대감을 이용했다. 왕은 외국에 끌려갔고 측근들은 숙청되었지만 상황은 언제든 반전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바라파와 개혁파에게 장악된 파리 삼부회는 잉글랜드와의 종전 협상을 거부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는 상태인 장 왕의 칙령은 무시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마지막으로 이를 위한 명분을 강화하고자 모든 권력을 잃은 왕세자를 국왕 대리인이 아닌 허울뿐인 '섭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2월 21일 삼부회가 해산되자마자 왕세자는 생드니 평야에 주둔한 자신의 군대에게 파리 시내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도시 성벽과 성문은 전부 개혁파 민병대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서쪽 문 바로 옆에 루브르궁이 있었다. 그곳에 집결해 있는 왕세자 파벌이 내부에서 호응하면 성문이 돌파당할 수 있었다.


결국 2월 22일 아침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에티엔 마르셀이 선수를 쳐서 민병대 3000명을 이끌고 왕궁을 습격했다. 샹파뉴 원수 장 드 콩플랑과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이 눈앞에서 반란군에게 살해당하자 왕세자는 겁에 질린 채 마르셀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이에 마르셀은 '이들은 전하의 보호자입니다'라고 답하며 자신이 쓰고 있었던 파리 시의 상징 모자를 왕세자의 모자와 바꿔 썼다. 그리고 그레브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자신이 프랑스 왕국 공동체의 공익을 위해 반역자들을 죽였다고 밝힌 뒤 왕세자에게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3월 25일 왕세자는 우연한 계기로 탈출에 성공한다. 5월 왕세자는 에티엔 마르셀과 개혁파를 물리치고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농촌 공동체의 관습적인 특권도 무시하는 강화된 징발령을 선포한다. 이에 불만이 폭발한 보베지의 농민들이 봉기하면서 자크리의 난이 일어났다.


농민군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국왕이 포로로 잡힌 것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매수된 귀족들이 왕을 배신했기 때문이라며 귀족들을 학살했다.






*자크리의 반란과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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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 백작과 뷰슈 대장,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군대는 시장의 성문을 열고 나와서 형편없는 무장을 갖춘 소작농들을 기습했다. 선두에 있던 폭도들은 수는 적지만 잘 무장된 군대가 맹렬한 기세로 진격해오는 것을 보고 물러나기 시작했고, 중장병들이 푸아 백작과 오를레앙 공작과 뷰슈 대장의 깃발을 앞세운 채 계속 진군하면서 창과 검을 휘둘렀다.

공격을 당한 폭도들은 공포에 질린 채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 시작했고, 너무 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서로 뒤엉켜서 넘어졌다. 그러자 요새의 모든 중장병이 밖으로 나와서 공황에 빠진 폭도들 사이로 뛰어들어 짐승 잡듯이 때려잡았고, 도망치는 자들도 추격해서 죽이거나 강물에 던져넣었다.

모 시를 공격한 무리가 궤멸당한 이후 폭도들은 다시는 그렇게 많은 수가 한자리에 모이지 못했다. 젊은 앙게랑 드 쿠시 경과 그가 이끄는 군사들이 남은 잔당을 무자비하게 토벌하며 보이는 대로 다 잡아 죽였기 때문이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농민군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왕세자 샤를과 북부 프랑스 귀족들을 적대하고 있는 파리 부르주아들과 연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에티엔 마르셀과 파리 개혁파는 센강의 수운을 봉쇄한 요충지의 요새들을 공격하는 계획에만 동조하고 그 이상의 협력은 철저히 거부했다.


프랑스의 모든 귀족들을 적으로 삼은 농민군은 이제 '같은 평민'인 도시 세력과 연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개혁파 부르주아들에게는 이미 나바라파 귀족들이라는 연줄이 있었으므로 애초에 서로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다. 결국 6월 10일 나바라의 왕 카를로스 2세는 멜로 고원에서 농민군에게 거짓으로 협상을 제안한 뒤 그 말에 속은 농민군을 기습해서 무참히 짓밟는다. 같은 날 모 시를 점령하러 떠난 분견대도 수비군에게 패배하고 흩어지면서 봉기가 완전히 진압되었다.


나바라 왕 카를로스가 자크리 반란군 진압에 가장 먼저 나섰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는 북부 프랑스 귀족 난민들과 자경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멜로에서 농민군을 전멸시킨 이후 카를로스는 봉기를 일으킨 마을마다 주동자 4명씩을 골라내 처형하고 약탈과 방화를 벌인 대가로 보상금을 걷으라는 지시를 내리는 등 귀족들을 통제하고 이끌면서 상황을 주도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 귀족들도 자크리 못지 않게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나바라 왕의 명령은 거의 무시되었고 어떤 이들은 일드프랑스의 농촌 마을과 농민들을 마치 잉글랜드군이 하는 것처럼 불태우고 학살했다.






*반란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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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회는 또한 나바라 왕이 감옥에서 풀려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가 프랑스를 위해 봉사한다면 왕국이 더 강해지고 더 잘 방어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왕국이 의지할 만한 지도자는 대부분 죽거나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프랑스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노르망디 공작에게 그를 풀어주자고 요청했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왜 체포되었는지도 모르고 단지 억울하게 갇혔다고만 생각했다.

……

파리에 도착하자 그는 성직자, 귀족, 평민 등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당한 일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자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은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 모두 프랑스 왕가의 후손이기 때문에 의무대로 프랑스 왕국을 수호하며 살다가 죽기를 원한다고 설득력 있게 연설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농민들에 대한 보복을 어느정도 끝내자 귀족들의 분노는 이제 도시민들에게 향했다. 마침 에티엔 마르셀과 파리 개혁파는 자크리의 난의 배후로 의심받기에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파리 삼부회에서 귀족들과 대립했고, 농민군과 같은 비귀족 평민이며 똑같이 왕세자를 적대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에티엔 마르셀에게나 그의 동맹인 카를로스에게나 전혀 달갑지 않은 결과였다.


1358년 6월 14일 카를로스는 다시 환호를 받으며 파리 시내로 입성했다. 그리고 그레브 광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프랑스 왕국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고 자신이 카페 왕가의 후손임을 강조했다. 그러자 에티엔 마르셀은 왕국을 다스릴 지도자가 없는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며 나바라 왕을 파리 시의 수비대장으로 추대한다. 카를로스는 결국 귀족들을 버리고 도시 세력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실망한 귀족들은 나바라 왕 대신 왕세자 샤를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왕세자는 자크리 반란 진압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지만 가장 큰 이득을 누렸다. 6월 말 그는 1만이 넘는 맨앳암즈를 이끌고 파리 시 교외에 도착했고, 7월 14일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8월 2일 왕세자는 결국 파리에 입성한다. 개혁파 지도층 일부는 처형되었으나 나머지 시민들과 자크리 반란군은 곧 사면을 받았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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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도는 중세 후기의 주류 이념이었지만 현실은 기사도의 이상과 많이 달랐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애초에 전문 군인도 아니었고 어쩌다 한번 참전해도 전쟁의 고난을 그저 ㅈ같이 여겼다. 기사들은 전략적 이득을 위해, 아니면 그냥 이득을 위해, 또는 그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주 명예를 버렸다.

하지만 기사도는 분명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졌고 중세 사회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죽거나 포로로 잡히지 않고 도망친 프랑스 귀족들은 겁쟁이나 반역자라고 불리며 모든 평민들의 경멸을 받았고, 2년 뒤 농민들은 결국 봉기를 일으켜서 귀족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이들 농민들은 기사도를 허구로 여기거나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국왕이 포로로 잡힌 것은 기사도를 저버리고 잉글랜드인들에게 매수된 귀족들이 왕을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타락한 기사들의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했다.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는 아마도 기사도 이념에 따른 불명예를 감당할 수 없었던 프랑스 왕과 기사들이 일으킨 참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기사도를 단순히 공허한 명분 또는 비실용적인 허세로 치부하거나 이때부터 기사도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두 전투는 스코틀랜드 전쟁에서 쌓은 실전 경험으로 잉글랜드군이 가진 전투력 우위에 더해 10년치 전쟁세에 달하는 대출을 당겨서 짧은 기간에 4번이나 프랑스를 침공한 에드워드 3세의 집요함과 노르망디 상륙, 솜강 저지선 돌파 같은 운빨 등이 합쳐져 만들어진 기적이었다.


우리는 중세 세속 귀족 계층의 중심 이념인 기사도가 받은 조롱과 같은, 무지에 바탕을 둔 비판을 경계해야 한다.

한때 위선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이제 우리는 기사도적 이상이 당대인들 사이에서 순수하게 수용되었으며 전사들의 훈련과 동기부여, 그리고 사회적 응집력의 원천으로서 유용한 기능을 제공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비록 그러한 이해가 우리를 과거의 이상에 대한 무비판적인 존경으로 이끌거나, 현대의 삶에 부활시키려는 운동으로 이끌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은 낯선 사고방식들을 무지에 근거해 배척하는 실수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Christopher Dyer, Standards of Living in the Later Middle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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