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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년전쟁. 오를레앙의 처녀 (1429-1431)

prevo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1.19 19: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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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흔히 보고되는 것처럼, 자신을 장느 라 퓌셀이라고 불렀던 그 여자는 거짓 예언자로서, 신의 섭리와 자신의 성별에 반하여 두 해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며 이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우리의 주적에게 가서 그의 당파에 속한 성직자, 귀족, 평민들과 함께 자신이 주님의 사명을 받았다고 여러 번 주장하고, 오만하게도 성 미카엘과 천국의 많은 천사와 성인들, 그리고 성 카타리나와 성 마가렛과 자주 개인적이고 명백한 교제를 했다고 자랑했다. 또한 마치 기사와 향사들처럼 갑옷을 입고, 전투 깃발을 세우고, 매우 큰 악의와 자만과 오만으로 가장 고귀하고 우수한 프랑스 왕의 문장기를 요구하고 얻어내 많은 전투와 포위전에서 그것을 직접 휘둘렀고... 그런 모습으로 그녀는 전장에 나가 군인들을 이끌고 큰 부대를 지휘하여 살상을 하고 광범위한 소요와 혼란을 일으켰으며, 그들을 위증과 반역과 거짓되고 미신적인 믿음으로 선동했고,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방해하고 죽음의 전쟁을 다시 일으켰으며, 많은 이들에게 성스러운 여성으로 숭배받고 존경받는 것을 즐겼고, 그밖에 너무 많아서 다 설명하기 어려운 저주받은 일들을 저질렀으며, 이는 많은 곳에서 거의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큰 불쾌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1431년 6월 잉글랜드 정부의 포고문



1. 루브레 전투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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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년 1월 말, 동레미의 농민 소녀 잔 다르크가 보쿨뢰르 요새의 수비대장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와 세 번째 만남을 가졌지만 여전히 냉담한 반응만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뒤, 소녀 예언자의 등장에 흥미를 느낀 로렌 공작 샤를이 잔에게 안전통행증을 발급하고 그녀를 직접 만난다. 공작은 어린 소녀가 프랑스를 구원하리라는 오래된 예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잔의 모험을 응원하며 말 한 필과 여비를 주었다. 강력한 후원자의 등장에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도 생각이 바뀌었는지 잔을 위해 추천서를 써주었으며, 장검과 말 한 필을 더 사주고 호위대까지 제공했다.


2월 9일, 존 파스톨프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보급대가 파리에서 출발했다.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첩보를 통해 이를 알아냈고, 오를레앙과 블루아에서 총 3500여 명의 병력이 출격해 요격에 나섰다.


2월 12일 오후, 라 이르가 지휘하는 오를레앙 출격부대가 루브레 마을 남쪽 평원에서 잉글랜드 보급대와 대치했다. 라 이르는 곧 도착할 예정인 블루아 부대를 기다렸다. 올바른 결정이었지만 이 때문에 잉글랜드군은 짐수레를 묶어 임시 방벽을 만들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자 조바심을 느낀 프랑스 병사들은 수레 방벽 바깥에 배치된 잉글랜드 궁수들과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궁수들이 방벽 안으로 후퇴하자, 스코틀랜드 부대의 지휘관인 존 스튜어트가 라 이르의 명령을 무시하고 스코틀랜드 맨앳암즈들에게 도보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 맨앳암즈들이 말을 탄 채 황급히 뒤따랐지만 모두 잉글랜드군의 반격에 격퇴당했다. 뒤늦게 도착한 블루아 부대는 이미 전투가 끝난 것을 보고 후퇴했고, 잉글랜드 보급부대는 5일 뒤 오를레앙 포위군 진영에 무사히 도착한다. 우세한 전력을 가졌으면서도 야전에서 패배하고 작전도 실패한 프랑스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2월 13일, 잔 다르크 일행이 보쿨뢰르에서 시농으로 위험한 여행을 떠났다. 잔은 보쿨뢰르 시 주민들과 호위병들의 조언에 따라 머리를 자르고 남자 옷을 입었다. 잔의 예언과 여행에 대한 소식은 오를레앙과 프랑스 전역으로 빠르게 전해졌고,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일행이 시농에 도착하기 전부터 샤를 7세의 추밀원에서는 그녀가 진짜 예언자인지 아니면 사기꾼인지를 놓고 이미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2월 말, 잔 다르크 일행이 시농에 도착했다. 300명의 궁정인으로 가득 찬 홀 안에서 샤를 7세는 잔과 첫 만남을 가졌다. 샤를 7세는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며 궁정에 머무르게 했다. 그곳에서 잔은 점성술과 미신에 관심이 많은 알랑송 공작, 샤를 7세의 고해사제 제라르 마셰 등 대귀족과 고관들을 친구로 사귀고 함께 식사를 했다.


3월 초, 잔은 귀족 여성들에게 신체 검사를 받은 뒤 제라르 마셰를 비롯한 궁정 사제들과 면담했다. 그들은 그녀가 정통 교리를 믿고, 독실하고, 침착하고, 자제심 있고, 순결하다고 평가했으며, 그녀의 대답이 교육받지 못한 여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명확하고 적절해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분명하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들은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녀를 더 철저히 조사하기 위해 푸아티에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이후 잔은 푸아티에로 가서 1418년 파리 함락 이후 그곳에 망명해 있었던 파리 대학 신학자들의 엄격한 조사를 받는다.


같은 시기, 오를레앙 북서부 잉글랜드 포위군 진영의 방벽과 참호와 포대가 강화되었고, 동쪽 강둑의 생루 교회 폐허에도 새로운 요새가 건설되면서 도시의 식량 사정이 더 악화되었다.




2. 오를레앙 포위전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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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년 4월 27일, 장 드 부삭과 질 드 레가 지휘하는 프랑스 보급부대가 블루아에서 출발했다. 루아르강 남쪽에서 강을 따라 행군해 상류에서 바지선을 띄워 오를레앙으로 보급품을 보낸다는 계획이었다. 잔 다르크는 도시 북서쪽의 포위군 지휘본부를 직접 공격할 것을 주장했지만 지휘관들은 그녀에게 목적지를 알리지 않고 원래 계획대로 행군을 계속했다.


4월 28일 밤, 보급부대 지휘관들이 오를레앙 인근 강변에서 수비대장 장 드 뒤누아를 만났다. 그제서야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잔 다르크는 화를 냈지만, 뒤누아는 자신보다 현명한 군인들이 조언하고 동의한 계획이라며 그녀를 달랬다.


다음날 아침, 잔 다르크가 수레 500여 대 분량의 보급품과 200명의 맨앳암즈와 함께 강을 건넜다. 30년 뒤 장 드 뒤누아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아침 강풍이 불어서 바지선이 상류까지 올라올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잔이 기도를 드리자 바람이 잦아들었다고 한다. 오를레앙 방어군이 출격해 생루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묶어놓는 동안 잔 다르크와 지원군이 동쪽 성문을 통해 도시에 입성했고, 장 드 부삭과 질 드 레는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블루아로 돌아갔다.


그날 밤, 소문이 자자한 '오를레앙의 처녀'의 도착에 오를레앙 주민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보급품을 호송하는 것이 작전의 전부였고 대부분의 부대가 블루아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곧 알려지면서 주민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5월 1일, 장 드 뒤누아는 황급히 블루아로 가서 그곳에 모인 프랑스군 지휘관들과 회담했다. 그는 당장 포위군 진영을 공격해서 오를레앙을 해방하지 않으면 주민들이 항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5월 4일 아침, 뒤누아는 블루아에서 포병대가 포함된 상당한 규모의 지원군을 이끌고 오를레앙에 도착했다. 라 이르와 잔 다르크가 이끄는 기병 500기의 엄호하에 지원군은 무사히 도시에 입성한다.


그날 정오 무렵, 1500명의 방어군이 출격해 생루의 포위군 진영을 기습했다. 잔 다르크는 이 작전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고, 숙소에서 쉬고 있다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듣고서야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잔이 시종과 집주인의 도움으로 갑옷을 입고 깃발을 든 채 생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의 반격에 후퇴하는 중이었다. 잔은 도망치는 프랑스군을 자신의 깃발 아래로 집결시켜 공격을 재개했다. 몇 시간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이 생루를 점령한다.


5월 6일 새벽, 라울 드 고쿠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선발대가 바지선을 타고 몰래 강을 건너 생장르블랑의 포위군 진영을 점령했다. 곧이어 라 이르와 잔 다르크가 이끄는 후속부대가 합류해 레 투렐 근처의 요새화된 수도원을 점령했다. 잔은 이 전투에서 마름쇠를 밟아서 발에 부상을 입었고, 지휘관들의 설득 끝에 오를레앙으로 돌아갔다. 라 이르와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그날 회의 끝에, 이대로 레 투렐을 공격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며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도 당분간은 주민들의 사기를 유지하기에 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다음날인 5월 7일 아침, 잔 다르크가 수도원 요새로 돌아와 당장 레 투렐을 공격하자고 지휘관들을 설득했다. 결국 그녀의 바램대로 공격이 개시되었지만, 잔은 사다리를 타고 방벽을 오르다가 목에 쇠뇌 화살을 맞고 후송되었다. 잔 다르크의 깃발이 후방으로 물러나자 프랑스군의 사기가 꺾였고, 지휘관들은 포병대의 증원을 기다리기로 결정하고 후퇴를 명령한다.


그러나 그때 잔 다르크의 호위병인 장 돌롱이 그녀의 깃발을 들고 전방으로 돌격했고, 다시 사기가 오른 프랑스군이 방벽을 공격했다. 이때 또 다른 프랑스군이 남쪽 성문에서 출격해 끊어진 다리를 건너 반대편에서 레 투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잉글랜드군은 방벽을 버리고 레 투렐로 후퇴하려 했지만, 포격에 의해 손상된 도개교가 무너져내리면서 레 투렐의 수비대장 윌리엄 글래스데일과 그의 부관 윌리엄 몰린스를 포함한 주요 지휘관들이 강에 빠져 익사했다. 곧이어 프랑스군이 요새 안으로 밀려들며 수비대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레 투렐이 탈환됨으로써 오를레앙 시의 봉쇄가 풀렸다. 결국 서퍽 백작과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은 더 이상 도시를 점령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포위 공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인 5월 8일 아침, 잉글랜드군은 포위 진영을 불태운 뒤 오를레앙 북쪽 평야에 집결했다. 이에 프랑스군도 전부 성벽 밖으로 나와서 잉글랜드군과 대치했지만 감히 먼저 공격에 나서지는 않았다. 잉글랜드인들은 그렇게 마지막으로 체면을 살린 뒤 멍으로 후퇴한다.




3. 파테 전투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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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년 6월 초, 약 5000여 명의 프랑스군이 셀에 집결했다. 공식적으로 지휘관은 알랑송 공작이었고, 잔 다르크에게는 지휘권이 없었지만 샤를 7세는 알랑송 공작에게 항상 그녀의 조언에 따르라고 지시를 내렸다.


6월 11일 오후, 알랑송 공작과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치열한 전투 끝에 자르고 시의 교외를 점령했다. 다음날 아침 포격과 함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고, 4시간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이 도시 성벽을 점령하고 서퍽 백작과 그의 동생 존을 포로로 잡는다.


6월 15일, 기세가 오른 프랑스군은 멍을 손쉽게 점령하고 보장시로 향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또다시 야전에서의 승리로 프랑스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존 파스톨프의 지휘하에 장빌에 집결시켰다.


다음날인 6월 16일,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브르타뉴군 1000여 명이 보장시 인근에서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알랑송 공작은 이미 샤를 7세에 리슈몽의 군대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잔 다르크의 설득에 결국 받아들였다. 잔은 리슈몽을 용서하고 그가 샤를 7세와 화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약속한다.


그날 저녁, 장빌에 모인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은 당장 보장시를 구원하러 가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존 파스톨프는 파리에서 지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장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탈보트의 주장이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6월 17일 오후, 잉글랜드군 3500명이 멍을 포위했다. 알랑송 공작과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보장시를 공격하는 것보다 멍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보장시의 잉글랜드 주둔군을 후방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에 사절을 보내 파스톨프의 군대가 구원을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거짓말을 했고, 이에 속아넘어간 주둔군이 항복하면서 보장시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6월 18일, 보장시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은 곧바로 장빌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작전이 이미 실패했는데도 두 배나 되는 프랑스군과 결전을 벌이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대포와 보급품 때문에 행군 속도가 느려졌고, 생시지몽과 파타이 마을 사이의 도로에서 라 이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기병대가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았다.


참호를 파거나 전열을 갖출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후위의 잉글랜드군은 길가의 도랑과 덤불숲에 의지해 돌격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공격이 개시된 지 고작 몇 분 만에 대열이 무너지고 탈보트가 포로로 잡힌다. 이런 상황에서도 파스톨프는 전위 부대를 집결시켜 반격을 가하려 했지만, 그가 파테 마을 방향으로 황급히 말을 달리는 것을 본 병사들은 지휘관마저 도망치고 있다고 오해하고 전의를 상실했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추격전 끝에 2200여 명이 전사하고 주요 지휘관들을 포함해 5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히는 대패를 당한다.


파스톨프는 간신히 탈출했지만 장빌의 주둔군은 비겁한 도망자인 그를 도시 안에 들여보내길 거부했고, 베드퍼드 공작도 처음에는 격노하며 그를 가터 기사단에서 추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파스톨프는 이후로도 대중의 기억 속에서 파테 전투의 도망자로 남게 되었다. 파스톨프가 도시 성문에서 쫓겨나고 얼마 되지 않아 장빌의 주민들이 잉글랜드 주둔군을 추방하고 프랑스군에 항복한다.




4. 트루아 포위전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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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년 6월 24일, 7000여 명의 프랑스군이 지앵에 집결했다. 오를레앙 포위전에서 큰 손실을 입고 파테 전투에서 전멸한 잉글랜드 야전군은 노르망디의 도시와 요새들에서 주둔군을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감축하면서 긁어모은 병력이었고, 이제 교황의 분노를 사면서 취소한 후스파 십자군과 잉글랜드 본국에서 새롭게 모집된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가용 병력이 없었다.


그러나 당장 랭스로 진군해야 한다는 잔 다르크의 주장은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우선 오를레앙 포위군에 병력을 지원하기를 거부하는 등 다시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고 있는 부르고뉴 공작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우려가 있었다. 이에 대해 잔은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리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반박했고, 여러 전투에서 그녀가 일으킨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 예언을 믿었다.


하지만 그전에 랭스에 도착하는 것부터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루아르 강에서 랭스까지 가려면 수많은 강과 개울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수천 명이 먹을 식량은커녕 랭스를 점령하는 데 필요한 대포조차 충분히 가져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잔은 샹파뉴의 도시들은 감히 주님의 뜻에 맞서려 하지 않을 것이라 예언했고, 샤를 7세는 결국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인다.


6월 29일, 프랑스군이 지앵에서 출정해 오셰르로 진군했다. 부르고뉴 공작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샤를 7세는 오셰르를 무력으로 점령하지 않고 도시에서 보급품을 공급받는 조건으로 협정을 맺는다.


7월 5일 아침, 프랑스군이 트루아를 포위했다. 귀족 가문과 부유한 상인들로 구성된 과두제 시 정부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충성했지만 대다수의 일반 시민들은 오를레앙의 처녀가 일으킨 기적들에 대한 소문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잔 다르크가 제안한 작전에 따라 프랑스군이 마치 도시를 공격할 것처럼 참호를 파고 해자를 메우자 겁에 질린 주민들은 시 당국과 전문 군인들의 통제를 무시하고 교회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이에 트루아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중재에 나섰지만 그들은 노골적으로 주민들 편을 들었고, 7월 10일 아침, 결국 여론의 압력에 시 정부가 항복하면서 트루아 시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7월 14일, 프랑스군이 샬롱에 무혈입성했다. 잔 다르크의 예언대로 트루아에서 또다시 기적이 일어나자 샹파뉴의 도시들은 감히 프랑스 왕과 예언자에게 맞서지 못하고 성문을 열었다.


하지만 랭스 진군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동맹을 강화할 수 있다는 샤를 7세와 고문들의 우려 또한 현실이 되었다. 아르투르에 머무르고 있었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황급히 파리로 돌아와 베드퍼드 공작과 회담을 가진 뒤, 부르고뉴 가문이 파리 시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동원해 모든 저명한 시민들에게 베드퍼드 공작 앞에서 공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도록 요청했다.


7월 16일, 프랑스군이 샬롱에서 출정해 랭스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랭스의 시민들은 대회의를 소집해, 수비대장에게 만약 그들이 저항하기로 결정한다면 부르고뉴 공작이나 베드퍼드 공작이 구원군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비대장이 6주 정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답하자 시민들은 곧바로 대표단을 보내 샤를 7세에게 항복한다.


7월 17일 일요일 아침,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이 화려하게 치러졌다. 얼마 뒤 랑, 수아송, 프로뱅 등 주요 도시들에서 주민들이 주둔군을 쫓아내고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프랑스군은 이 도시들의 무기고에서 대포와 화약을 충분히 보급한 뒤 서쪽으로 진군했다.




5. 파리 포위전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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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년 7월 23일, 샤를 7세가 프랑스군을 이끌고 수아송에 입성했다.


그러나 7월 말, 잉글랜드 본국과 부르고뉴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파리에 5000여 명의 야전군이 집결했다. 이에 베르뇌유 전투의 악몽이 되살아난 프랑스 지휘관들은 파리 공략을 포기하고 루아르 강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8월 2일, 프랑스군이 프로뱅에 입성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프랑스군이 브레에서 센강을 건널 것이라 예상하고 분견대를 보내 퇴로를 차단한 뒤 믈룅으로 향한다. 이에 프랑스군은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진군했다.


8월 5일 아침, 프랑스군이 낭지에 도착했다. 이 지역은 중기병 전력에서 우위에 있는 프랑스군이 유리한 평탄한 지형이기 때문에 베드퍼드 공작은 맞서 싸우러 나가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군이 허세를 부리고 있으며 여전히 센강을 건너서 후퇴할 계획이라고 짐작하고는 몽트뢰유로 남하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정반대인 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고, 베드퍼드 공작은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황급히 달려갔다.


8월 11일, 프랑스군이 크레피를 점령했다. 다음날 아침 프랑스군은 도로를 따라 파리로 진군한다.


8월 15일 아침,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이 상리스 인근에서 대치했다. 격렬한 전초전으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양측 모두 상대편 진영을 공격하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고, 프랑스군은 해질 무렵 크레피로, 잉글랜드군은 다음날 아침 파리로 퇴각했다. 하지만 이는 베드퍼드 공작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프랑스군이 무방비 상태가 된 일드프랑스 북부와 보베지로 진격하자 주요 도시인 보베, 콩피에뉴, 상리스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다.


같은 시기,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브르타뉴군이 노르망디를 기습적으로 침공해 콩슈와 에브뢰를 점령했다. 노르망디 동부와 피카르디에서도 지역 귀족들이 주도한 의병이 일어나 오말과 에트레파니를 점령하고 루앙 일대를 약탈하며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8월 말, 마른 강의 요충지인 라니 시가 샤를 7세에게 항복했다. 한때는 무적처럼 보였던 잉글랜드의 지배가 순식간에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본 부르고뉴 공작은 샤를 7세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샤를 7세와 외교 고문들은 이에 환호하며 부르고뉴 공작과 휴전을 체결했지만, 알랑송 공작과 잔 다르크는 국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한다.


9월 8일, 프랑스군이 파리 시를 공격했다. 잔 다르크는 다른 도시들에서 그랬듯 파리 시민들이 싸우지 않고 항복하기를 기대했지만, 1418년 파리 학살 이래로 파리 시에 남아있는 유력자들에게 있어 왕세자 샤를은 증오스런 아르마냑파의 수장에 불과했다. 항복 요구에 대한 대답으로 조롱과 모욕만 돌아오자 잔 다르크는 직접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파리 시의 성벽은 너무 튼튼해서 포격에도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고, 해자는 너무 깊고 넓었다. 잔은 해자를 넘으려 하다가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잔 다르크가 후송된 뒤에도 프랑스군은 포기하지 않았고, 해자가 좁고 성벽의 각도가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합한 마르셰 오 포르소의 성벽을 찾아내 집중 공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격퇴되었고, 500여 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부상자만 남기고 생드니로 퇴각한다.


다음날 아침, 잔 다르크와 알랑송 공작은 생드니에서 배다리를 건설하고 센강을 건너서 파리 시 남쪽의 낡고 약한 성벽을 공격한다는 대담한 작전을 계획한다. 위험한 임무였지만 잔 다르크의 명성에 많은 병사들이 자원했다. 그러나 다른 지휘관들은 회의 끝에 파리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작전을 중단하라고 두 사람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잔 다르크와 알랑송 공작은 반발했지만, 왕명으로 배다리가 강제 철거되자 어쩔 수 없이 샤를 7세를 따라 루아르 강으로 철수한다.




6. 루비에 습격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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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일드프랑스를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베드퍼드 공작은 파리 시와 샤르트르, 믈룅, 상스 등 주요 도시들의 행정권을 부르고뉴 공작에게 위임하고 루앙으로 정부를 이전했다. 이로써 부르고뉴 공작은 북부 프랑스의 대도시들의 수입을 거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거의 끝나가는 듯 보였던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동맹이 다시 강화되었다.


1429년 9월 25일, 프랑스군이 마옌강의 요충지 라발을 기습해 점령했다.


11월 6일, 헨리 6세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올렸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군이 에트레파니를 탈환했다. 프랑스군이 베르뇌유를 점령하지만 잉글랜드군이 한 달 만에 탈환한다.


12월 8일, 라 이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센강 하류의 요충지 루비에를 기습해 점령했다. 프랑스군은 여세를 몰아서 보몽, 베르네, 샤토가야르를 추가로 점령했고, 이로써 루앙과 파리 사이의 수운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샤를 7세는 라 이르를 루비에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12월 12일, 잉글랜드 하원은 왕실의 간청에 따라 약 9만 파운드에 달하는 2회분의 전쟁세를 승인했다.




7. 믈룅 시민 봉기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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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초, 상스의 시민들이 잉글랜드 주둔군을 쫓아내고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월 말, 보제 전투에서 전사한 클래런스 공작의 사생아이자 헨리 6세의 사촌인 존 클래런스 경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토시를 포위했다.


3월 중순, 상당한 규모의 프랑스군이 생드니를 기습해 파리 시의 부르고뉴 주둔군을 격파하고 지휘관 필리프 드 사뵈즈를 포로로 잡았다.


같은 시기, 파리 시에서 샤를 7세 지지자들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돼 150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파리 고등법원의 고위 관료들과 서기를 포함해 6명이 처형되었다.


이후 요충지의 도시와 요새 주둔군에는 오직 잉글랜드인만이 복무해야 하며 현지인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내용의 칙령이 선포되었다. 저명한 지휘관인 존 파스톨프마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의 지배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는지 프랑스의 토지를 청산하고 잉글랜드의 토지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3월 말, 에드먼드 보퍼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샤토가야르를 포위했다.


4월 23일 아침, 헨리 6세가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리기 위해 칼레에 상륙했다. 워릭 백작이 이끄는 국왕군 5000명을 포함해 수많은 관료들과 시종들이 그와 동행했다.


4월 말, 센강의 요충지 믈룅의 시민들이 잉글랜드 주둔군을 쫓아내고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8. 슈와시 습격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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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년 5월 7일,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결국 베드퍼드 공작의 강요에 못 이겨 콩피에뉴를 점령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부르고뉴군은 우선 와즈 강의 요충지 슈와시를 포위하고 포격을 퍼부었다. 포격을 저지하기 위한 출격대마저 격퇴당하자 수비대장은 한밤중에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친다.


5월 13일, 잔 다르크가 이끄는 1000여 명의 지원군이 콩피에뉴에 입성했다.


5월 15일 새벽, 잔 다르크가 지휘하는 상당한 규모의 출격대가 누와용을 기습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격퇴당했다. 다음날 슈와시가 부르고뉴군에 항복한다.


5월 18일, 잔 다르크는 수아송에서 엔 강을 건너 슈와시를 북쪽에서 기습하려 했다. 하지만 수아송의 수비대장 기샤르 부르넬은 부르고뉴군과 항복 협상을 진행중이었고, 프랑스군의 입성을 거부한다. 이에 대부분의 프랑스 병사들이 콩피에뉴 방어를 포기하고 상리스로 퇴각했다.


5월 20일, 부르고뉴군이 콩피에뉴를 포위했다.


5월 23일 저녁, 잔 다르크가 이끄는 500여 명의 기병대가 출격해 보도 드 느와예가 지휘하는 포위군 진영을 기습했다. 부르고뉴군은 갑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상태였지만 서둘러 무기를 챙겨서 완강히 저항했고, 클레르와에 주둔해 있던 부대가 교외를 가로질러 지원을 올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프랑스 기병대는 세 차례나 돌격했지만 끝내 부르고뉴군 진영을 돌파하지 못했고, 다른 포위군 진영들에서도 지원군이 도착하기 시작하자 뒤늦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출격대는 도시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잔 다르크는 부하들이 강제로 끌고가기 전까지 후퇴를 거부하는 바람에 뒤처졌다. 추격해오는 부르고뉴군이 도시 성문을 점령할 것을 우려한 콩피에뉴의 수비대장 기욤 드 플라비는 결국 잔 다르크가 들어오기 전에 성문을 닫고 도개교를 올렸다. 잔 다르크는 남자 형제인 피에르와 충성스러운 호위병 장 돌롱과 함께 포로로 잡혀서 보뤼유 성으로 끌려간다.




9. 콩피에뉴 포위전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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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힌 다음날인 1430년 5월 24일, 부르고뉴군이 콩피에뉴 다리의 방어탑을 공격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격퇴당했다.


이후 두 달 동안 포위군은 다리와 방어탑에 포격을 퍼부으며 참호와 땅굴을 파기 시작했고, 이에 방어군이 맞땅굴을 파면서 지하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6월 11일, 도피네 지방을 침공한 부르고뉴군이 프랑스군의 매복에 당해 전멸했다. 이 소식을 들은 리에주 시민들이 부르고뉴 공작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7월 말, 콩피에뉴 다리의 방어탑이 마침내 부르고뉴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다리가 포격으로 끊어진 바람에 주둔군은 도시 안으로 후퇴하지 못하고 대부분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부르고뉴군은 방어탑에 포대를 설치하고 도시 성벽과 그 안의 민가에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350채에 달하는 건물이 파괴되었고 몇몇 구역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8월 중순, 브라반트 공작 필리프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다른 친족들을 제압하고 브라반트 공국을 장악하기 위해 콩피에뉴 포위군 진영을 떠나 메헬렌으로 향했다.


9월 중순, 끝내 콩피에뉴의 성벽을 돌파하지 못한 부르고뉴군은 직접 공격을 포기하고 도시를 봉쇄해 굶겨 죽이기로 결정했다.


10월 25일 아침, 방돔 백작이 이끄는 1200여 명의 프랑스 기병대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콩피에뉴 인근에 도착했다. 1000명이 남쪽에서 포위군 진영을 공격할 것처럼 가장해 시간을 끄는 동안, 포통 드 생트레유가 지휘하는 분견대 200명이 몰래 콩피에뉴 숲을 통과해 동쪽 성문 앞의 부르고뉴군 진영을 기습했다. 도시 방어군이 때맞춰 출격해 진영을 포위했고, 부르고뉴군 절반 이상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잡혔다. 기세가 오른 방어군은 곧바로 서쪽 성문으로 출격해 잉글랜드군 진영 하나를 점령하고 불태운다. 밤이 되자 나머지 기병 1000명도 대치를 풀고 야음을 틈타 콩피에뉴에 입성했다.


다음날 아침,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은 포위 진영을 불태우고 수많은 보급품과 대포를 남겨둔 채 누와용으로 퇴각했다. 이렇게 해서 콩피에뉴 포위전은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11월 20일, 잉글랜드군 600여 명이 부쇼아르 마을 인근에서 포통 드 생트레유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매복에 당해 전멸했다.


12월 13일, 아르노 기욤 드 바르바장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부르고뉴군 2500명을 야전에서 격파하고 센강 상류의 요충지인 샤프 시를 점령했다. 이로써 부르고뉴 북부 전체가 프랑스군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12월 23일, 잔 다르크가 루앙으로 끌려가 루앙 성의 감옥에 갇혔다.




10. 잔 다르크 화형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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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년 1월 25일, 잔 다르크의 첫 번째 후원자인 로렌 공작 샤를이 사망했다. 사위이자 후계자인 앙주의 르네는 부르고뉴 공작이 언제나 그랬듯 트집을 잡아서 상속권을 빼앗으려 할 것이라 예상하고, 더 강한 세력의 보호를 받기 위해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3월, 베드퍼드 공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라니를 포위공격하지만 점령에 실패하고 퇴각했다. 결국 베드퍼드 공작은 랭스에서의 대관식을 포기하고 파리에서라도 대관식을 올리기로 결정한다.


4월, 4000명 이상의 잉글랜드군이 루비에를 포위했다. 라 이르는 구원군을 모집하기 위해 도시 밖으로 나갔다가 운 나쁘게도 정찰대와 마주쳐 포로로 잡혔다. 라 이르의 동생인 아마독이 낙담한 부하들을 격려하며 포위 공격에 맞섰다.


5월 중순, 앙주의 르네,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 아르노 기욤 드 바르바장이 지휘하는 6000여 명의 프랑스 기병대가 부르고뉴 공국을 침공해 보데몽 성을 포위했다.


5월 24일, 잔 다르크는 결국 생트웽 수도원 경내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그동안의 이단적인 주장들을 철회하고 교회의 지시에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교회법에 따르면 참회한 이단자에 대한 처벌은 최대가 무기징역이었기 때문에 화형이 취소되었다.


5월 28일, 잔 다르크가 다시 남성복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잔은 간수들이 강제로 여자 옷을 빼앗고 남자 옷을 입혔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러 증언들 중 법정의 공식 기록에서 채택된 설명은 간수들이 자신을 강간할까 두려워서 스스로 남자 옷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얼마 뒤 잔은 가장 무거운 형벌인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런 환경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며 생트웽 수도원 경내에서 했었던 참회 선언을 취소한다.


5월 30일, 루앙의 시장 광장에서 잔 다르크의 화형이 집행되었다.




11. 루비에 포위전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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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년 6월 초, 잉글랜드군이 샤토가야르를 탈환했다.


7월 2일, 보데몽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부르고뉴군 4000여 명이 뷜녜빌 인근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숫적 우세로 자신감을 가진 앙주의 르네는 맨앳암즈들을 하마시키고 도보로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정예병 위주로 모집된 부르고뉴군 전열은 공격을 간단히 격퇴했고, 프랑스군은 추격전 끝에 2000명 이상이 전사하고 수백 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패를 당한다. 바르바장은 전사했고 앙주의 르네는 포로로 잡혀서 부르고뉴 공작에게 끌려갔다.


7월, 잉글랜드군이 오말을 탈환했다. 이로써 잉글랜드 지휘관들은 루앙 일대가 충분히 안전해졌다고 판단했고, 7월 29일 헨리 6세가 루앙에 입성한다.


8월, 장 드 부삭과 포통 드 생트레유가 지휘하는 상당한 규모의 프랑스군이 루비에를 구원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그러나 워릭 백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보베 시 인근의 집결 장소를 기습해 프랑스군이 참패하고 포통 드 생트레유가 포로로 잡힌다.


10월 22일, 결국 루비에 방어군이 항복하면서 루비에 시가 잉글랜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2월 2일, 헨리 6세가 파리 시에 입성했다.


12월 16일, 헨리 6세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수운 봉쇄로 인한 파리 시의 물자 부족,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관식을 주관한 잉글랜드인들에게 파리 감수성이 부족한 탓에 행사는 엉망으로 치러졌다.


파리 주교가 집전해야 하는 미사를 보퍼트 추기경이 대신 집전했고,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국왕의 손에 쥐어줘야 하는 검은 잉글랜드인인 스태퍼드 백작이 대신 건넸다. 국왕이 성찬주를 마신 뒤 대성당에 보관되어야 하는 금잔을 시종이 그냥 가져가 버렸다. 프랑스 대귀족 6명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잉글랜드 귀족들이 대신 배치되었다. 연회에서 상석에 앉아야 하는 파리 시의 유력자들과 고등법원 관료들, 파리 대학 대표들은 평범한 상인들과 함께 말석을 배정받아 나흘 전에 요리된 딱딱한 고기를 먹었다. 의식에 참석한 빈민들에 대한 자선도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다. 죄수들에 대한 사면과 세금 면제도 없었다. 어린 국왕은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짧게 연설했다.


크리스마스 직후, 헨리 6세와 수행단은 파리 시를 떠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대관식이 프랑스 전통이 아닌 잉글랜드 대관식 절차대로 진행되었다는 루머까지 퍼졌고 동군연합의 환상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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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년전쟁이 시작된 과정 (1259-1340)

2. 사우샘프턴 습격 (1338)

3. 라 카벨 대치 (1339)

4. 투르네 포위전 (1340)

5. 잉글랜드의 역습과 크레시 전투 (1340-1348)

6. 프랑스 정부의 위기와 푸아티에 전투 (1350-1360)

7. 장기 휴전 (1389-1415)

8. 헨리 5세의 정복과 죽음 (1415-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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