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마이너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정보] 황태자 암살 사건부터 오스트리아군의 첫 포격까지

대폭풍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10.06 13:57:25
조회 458 추천 6 댓글 3
														

viewimage.php?id=2ca8c332f7db39&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a1b75178ff347cab1421ffd62cadd3fe8a337db28a8d63cc9a217ba4f65d1b6ef



6월 28일 늦은 오후, 세르비아의 수상 니콜라 파시치는 사라예보에서 날아온 황태자 암살 소식에 적잖이 당황한듯 보였다.


발칸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스트리아와 관계 개선을 꾀하던 세르비아 정부는 신속히 애도를 표하며 암살 사건은 세르비아 정부가 관여하지 않은 단순 범죄행위임을 밝혔다.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거리에는 기쁨에 취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두달 뒤 있을 총선을 의식한 파시치도 이런 반 오스트리아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프린치프를 포함한 테러범들의 심문 끝에 이들이 "검은 손"조직과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세르비아 정부와의 연관성은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에게 있어서 언젠가는 손을 봐야 했던 존재였으니까.



viewimage.php?id=2ca8c332f7db39&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a1b75178ff347cab1421fb33f90b034e0a93cdac01d93b3a0c9d1e5083b797c60ddc4dcf6



오스트리아 참모총장 콘라드는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의 발꿈치에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로 묘사하며 강경 대응을 주장했다. 이번 사건을 방치할 경우 보스니아마저도 통제 불가능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그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의원은 거의 없었다. 다만 온건파였던 베르히톨트 외교장관만이 테러 용의자 투옥 및 세르비아 내 반 오스트리아 단체들의 해산 등 온건책을 주장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강경파가 힘을 얻는 듯 하던 빈은 헝가리 수상 티사가 암살 사건이 전쟁 구실이 될 수는 없다며 반대 의견을 제시하자 난항에 빠졌다. 티사는 세르비아 병합으로 인한 발칸 국가들과의 관계 악화와 제국 내 슬라브족 비율의 향상으로 마자르족이 위축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이중제국의 한 축을 담당하는 헝가리의 수장이자 오스트리아의 정치 결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티사의 뜻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었다.





빈의 정치인들은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단 한가지 사실에는 대체로 동의했다. 바로 세르비아에 대한 무력 행사가 러시아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독일의 개입 여부가 중요했고, 7월 5일 베르히톨트의 비서실장 알렉산더 호요스가 세르비아의 처벌을 역설하는 황제의 친서를 들고 독일의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전달했다.


호요스는 독일의 짐머만 차관과의 면담에서 편지의 내용을 조금 각색해서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포함한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원한다는 뉘앙스를 전달했다. 독일의 황제 빌헬름은 처음에는 확답을 꺼렸으나, 오찬이 끝나자 입장을 바꿔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약속했다. 유럽 한복판에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동맹국을 저버릴 수는 없었으며, 무엇보다 빌헬름은 혁명, 파업, 폭동으로 작살난 러시아가 한 나라의 왕실 인사를 살해한 사람을 옹호하면서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믿지 않고 있었다.





7월 7일, 독일 정부의 공식 입장이 빈으로 전달됐다. 그 내용은 "독일 제국의 완벽한 후원을 믿어도 된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지금과 같은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였다. 그동안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던 독일이 예상외로 너무 강경하게 대답하자 베르히톨트는 당황했다. 그는 곧바로 베를린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빌헬름은 이미 전날 스칸디나비아로 여름 휴가를 떠난 상태였다.


독일의 지원이 확실시되자 베르히톨트를 포함한 온건파들도 결국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날 강경 대응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여전히 전쟁을 확실시할 수는 없었다. 헝가리 티사 수상은 여전히 입장을 바꾸지 않았고, 요제프 황제 역시 제국의 위신과 무력 개입의 확산 위험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티사는 외교적인 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지금 당장은 세르비아의 사후처리에 대해서도 제대로 논의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점령한 이후의 대책을 전혀 내놓지 않았다. 세르비아를 완전 합병할 것인지, 혹은 일부만을 제국령에 편입시킬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물러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틀 전 베를린에서 짐머만이 호요스에게 이에 대해 물었을 때 호요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근시안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던 호요스는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로 3분할해 통치할 것이라고 답했고, 이는 오스트리아의 영토 확장이 러시아의 개입을 초래할 것을 걱정하던 티사를 격분케 했다. 반면,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각료들은 세르비아의 손발을 잘라내지 않을 것이라면 처음부터 전쟁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르비아를 잘게 쪼개고 싶어했지만, 헝가리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을 결정하기 위해서 굳이 이 문제로까지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문제점은 또 있었다. 7월은 여름철 수확기였기에 오스트리아는 이 시기에 병사를 징집하지 않았다. 만약 동원령을 내려서 농민들을 징집하고, 이미 농촌으로 임시 휴가를 보낸 군인들을 불러모으는 것은 국내 여론의 악화는 물론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또한 러시아의 참전이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세르비아와 러시아 국경에 동시에 동원령을 내리는 것 또한 군사작전의 중심이 명확치 않아 혼선을 줄 수 있었다.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의원들은 외교적 명분을 먼저 쌓기 위해 먼저 최후통첩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물론 그들은 외교적 승리에 만족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르비아가 절대 수용하지 못할 요구를 보내 전쟁을 정당화시킬 속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7월 19일 세르비아에 대한 10개항의 최후통첩 문서가 작성되었다.





세르비아 왕국은 아래와 같은 사항을 실천에 옮긴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에 대한 증오심, 경멸감을 조장하거나 반대하는 경향을 띤 출판물을 금지한다.


2.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단체들을 즉시 해체하고 선전 수단들을 몰수한다.


3.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공공 교육 활동을 제거한다.


4.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가담한 인물들을 군대 및 행정조직으로부터 축출한다.


5.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전복 활동의 제거를 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표의 세르비아 내 활동의 협조를 수락한다.


6. 6월 28일의 음모에 가담한 방조자들에 대한 사법절차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의 대리인들의 참석을 허용한다.


7. 사라예보에서의 정부 조사단의 결과를 손상시킨 보야 탄코비차, 밀란 치가노비치의 관리를 지체 없이 체포한다.


8.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국경을 넘는 무기 및 화약류의 불법거래를 근절하고 사건 당시 무기 거래를 방치/방조한 관리들을 처벌한다.


9. 6월 28일 이후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적대적 발언을 자제시키지 않은 고위 관리들의 발언에 대한 설명을 촉구한다.


10. 앞서 제시된 조치들의 집행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에게 즉시 보고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7월 28일 저녁 6시까지 세르비아의 답변을 기대한다.






이제 최후통첩 문서를 전달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때마침 비비아니 수상이 프랑스 대통령 포앵카레가 러시아를 방문하고 있었고, 프랑스와 러시아가 세르비아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베르히톨트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떠난 후인 7월 23일 저녁 6시에 최후통첩을 전달하라고 전했다.


그러나 그 시간에 파시치 수상은 선거 유세차 지방에 있었기에, 재무대신 파추가 대신 오스트리아 대사 바론 기즐을 접견했다. 기즐은 최후통첩을 전달하며 48시간 이내에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추는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장관들이 베오그라드를 비워서 힘들다고 답변했다. 기즐은 "철도와 전화의 시대에 이 정도 크기의 나라에서는 몇 시간 안에 장관들을 불러모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파추는 끝까지 문서를 접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기즐은 최후통첩 편지를 테이블에 놓고 알아서 하라며 떠나 버렸다.


파추는 급히 파시치 수상에게 돌아와 달라고 전보를 보냈지만, 파시치는 선거 유세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리스로 휴가를 떠났다. 파시치가 베오그라드로 돌아온 시간은 7월 24일 새벽 5시로, 그리스로 가는 기차 안에서 왕실로부터 긴급 소환 전보를 받은 뒤에야 황급히 정부로 복귀한 것이다. 세르비아 정부는 강대국 오스트리아와의 싸움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 최후통첩을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다.


파시치는 우선 러시아의 입장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25일 오전 4시에 오전 10시에 날아온 두 편의 전보는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을 비난하며 주권국가라면 이를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세르비아 장관들은 5항에 대해서는 어정쩡한 입장을, 그리고 6항에 대해서는 반대하되 나머지 조항은 모두 수용할 것을 밝히는 입장문을 마련했다. 수없이 많은 퇴고를 통해 25일 오후 5시 45분에 문서가 완성되었다. 파시치는 직접 오스트리아 대사관까지 걸어가서 5시 55분이자 최후통첩 시한 만료까지 5분 남은 시간에 문서를 전달했다.


문서를 읽은 기즐 대사는 전면 수용이 아님을 확인하자마자 미리 준비해 둔 외교 단절을 선언하는 노트를 파시치에게 건넨 후 작별 인사를 하고 베오그라드를 떠났다. 이미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비밀문서를 모두 파쇄하고 짐도 싸 둔 상태였다. 대사 일행은 6시 30분에 헝가리행 기차를 탔다.


군사보좌관실로부터 세르비아의 거절 소식을 들은 요제프 황제는 "그래, 결국은..."이라며 중얼거렸다. 황제는 애써 낙관적으로 상황을 보려 하며 외교관계의 단절이 전쟁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베르히톨트 역시 황제에게 동원령 발령을 건의하면서도 전쟁이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7월 28일 세르비아군이 오스트리아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요제프 황제는 전쟁선포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총격 사건은 사실이 아니었고, 베르히톨트가 보고를 정정하지 않았기에 결국 황제는 전쟁선포를 재가했다.


viewimage.php?id=2ca8c332f7db39&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a1b75178ff347cab1421ffd62cadd3fe8a337db28fc803ccba615bc4e65cba8ef


이제 마지막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선전포고할 것인가였다. 외교관계가 단절되어서 직접 전달할수가 없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7월 28일 오후 1시 전보를 통해서 선전포고를 전달했다. 전보를 받은 파시치는 이것이 세르비아의 선제공격을 유도하려는 오스트리아의 기만 작전이 아닌가 의심했고, 곧바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서 전쟁 선포가 사실인지를 확인했다. 잠시 후 돌아온 답변은 한결같이 "그렇다"였다.



오후 2시 베오그라드에서는 전쟁이 선포되었다는 긴급 뉴스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도시의 남자들은 군대에 징집되었고, 나머지는 황급히 지방으로 피신했다. 파시치와 장관들은 기차를 타고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니스로 피신했다.


29일 새벽 1시 세르비아는 베오그라드와 세믈린을 연결하는 사베강 교각을 파괴했다. 날이 밝은 후, 오스트리아군의 베오그라드를 향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낙엽이 지기 전에>(김정섭 지음, MID 출판) 참고-

추천 비추천

6

고정닉 4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말머리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2863 설문 시세차익 부러워 부동산 보는 눈 배우고 싶은 스타는? 운영자 24/05/27 - -
719 일반 (수정완료)개인적으로 각 시대별 갤주님에 대한 잡생각들 [15] Österreich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1.03 177 0
632 사진/ 브륀, 오헝 시절의 풍경 [8] Österreich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0.29 108 1
631 일반 [빅토2 연재]HPM 오스트리아-오헝-다뉴브 64.에필로그 및 후기 [5] SeaRoad(222.112) 18.10.29 347 8
612 정보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칭호와 대략적인 설명 [14] Österreich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0.28 482 9
597 일반 트리에스테가 오헝해군에 미쳤던 영향.jpg [7] ㅇㅇ(223.33) 18.10.28 275 2
563 정보 윌슨새끼가 좆도 모르고 싸지른 똥들 [10] Österreich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0.28 230 4
438 정보 로마 황제의 실권 정도 [8] Österreich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0.19 237 2
359 정보 로마 제국의 선제후들 [2] Österreich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0.16 242 5
332 일반 팔츠 마이너 갤러리에서 지지선언 하러왔습니다 [3] 空母赤城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0.15 134 5
190 정보 오스트리아 제국의 확장역사 (2. 외부 영토) [3] Österreich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0.10 382 6
정보 황태자 암살 사건부터 오스트리아군의 첫 포격까지 [3] 대폭풍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0.06 458 6
117 정보 [위키번역]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상) [5] 모루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09.30 1341 7
12345

게시물은 1만 개 단위로 검색됩니다.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