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xli 여명

그는 칼날에 묻은 붉은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작업에 들어간다.

“나는 로갈 돈이다.”

목청에서 먼지를 털어낸 그는 몇 시간 전, 혹은 몇 세기 전 중단했던 일을 다시 시작한다.

“아주 긴 세월 전, 한 철학자(각주 1)가 있었다. 간혹 그는 리멤브란서의 범주에 드는 일을 하기도 했지. 그는 전쟁을 수행하는 길에서 하나의 틀을 제시했다. 전쟁이 안전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전쟁이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었지. 하지만 외부인들을 상대로 벌어지는 정의로운 전쟁과 내부자들을 상대로 벌어지는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란 개념이 제시되면서 그 제안은 손상되었지.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구분한다. 외부의 위협을 진압하거나 멸절시키기 위한 전쟁, 즉 제노를 상대로 한 전쟁은 안보 수단으로서 정당한 전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내전은 정의롭지 못한 혐오물일 뿐이지. 그렇기에 모든 피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전장의 소음이 점점 더 커진다. 벽이 가볍게 흔들리며 그의 손 위로 붉은 먼지가 떨어진다.

그의 손이 핏빛으로 물든다.

그는 무시한다.

한 걸음 물러선 그는 자신의 최신 도해를 살핀다. 벽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자 강렬한 햇빛이 작렬한다. 고개를 든 그는 한 세기, 어쩌면 두 세기만에 처음으로 하늘에 비치는 태양을 확인한다. 벽, 사막, 하늘, 먼지, 모든 것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지만, 이제 저 위에 태양이 비친다. 그리고 그 빛은 별 이상으로 느껴진다. 단 하나의 굳건한 별. 작조, 하얗고, 밝고, 강렬한 빛이다. 그가 여기 갇힌 동안, 색이 변한 것 외에 하늘이 토해낸 유일한 변화다.

눈을 감은 그는 피부에 쪼이는 빛과 열기를 느낀다. 빛이 그를 씻어내린다.

그냥 포기해라.

다시 붉은 벽의 그늘 아래로 돌아간 그는 작업을 재개한다. 너덜너덜한 칼날이 탈출과 방어를 위한 새로운 선을 긁어낸다. 그의 암송이 다시 시작된다.

“그 후대의 한 철학자(각주 2)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전쟁의 기초가 되는 주요 기준을 공식화했다. 정당한 명분과 공식적인 권위, 이 두 가지가 그것이지. 오직 왕이나 황제만이 전쟁을 선포할 수 있으며, 한 문화를 보호하는 것처럼 법적인 정당성을 가진 경우에만 전쟁을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들에게조차 그 전쟁은 불법적이자 금지된 전쟁이었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전장의 소음은 확연한 노호가 된다.

포기해라. 단념해라. 모든 걸 놓으란 말이다. 그냥 말해라. 피의 신께 피를.

“신은 없다.”

로갈 돈이 말한다. 

벽에 바짝 기댄 그의 입이 거의 벽에 맞닿는다.

“너 역시 신이 아니다.”

그가 속삭인다.

각주 1 : 암브로시우스/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따 온 것으로 보임. 특히 전쟁은 평화를 위해 선포되어야 한다는 지점에서 그렇게 판단했음.

각주 2 : 아우구스티누스/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따 온 것으로 보임. 특히 전쟁이 합법적 권위를 가진 정부가 선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그렇게 판단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