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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역사)서원에 대한 오해를 풀어보자모바일에서 작성

ㅇㅇ(223.38) 2020.12.04 17:34:05
조회 2051 추천 40 댓글 21
														
몇몇 문붕이들은 문6 한국-특히 서원이 도당췌 왜 과학을 주는 특수지구인지 이해하지 못 하고, 한국의 특성은 과학이랑 비적합하다고 까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예 유닛은 화차(조선)인데 지도자는 선덕이 나왔으면서 건물은 서원이라고 미스매치를 주장하는데, 애초부터 한국은 특성이란게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문명4(왕건-고려)때부터도 서원 때문에 과학트리 타기 좋은 문명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독일도, 일본도, 미국도, 중국도 없는 과학 특성을 한국이 받은 걸까? 한국이 인류과학사에서 한 것들이 아무것도 없는데 왜?

일단 거기에 대해 가장 유력한 답변은 아마

1. 문명과 지도자의 특성 디자인은 역사의 기여와는 큰 상관이 없다. 강대국이더라도 무조건 강대국이기만 해선 안 되니깐.
2. 가끔 가다 역사의 기여와 큰 상관이 있는데(스코틀랜드-산업혁명 주도) 그건 그 문명이 내세울 아이덴티티가 극히 적은 경우에 속한다.

그렇다. 한국은 스코틀랜드와 비슷한 입지에 있는 거다. 문6 스캇의 특성인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가장 유명한 인물은 제임스 와트. 즉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기술의 점진적/수렴적 발전의 아주 극명한 사례를 문명 특성으로 끌어올려 만들어버린거다.

정작 그나마 역사를 조금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한테 영국의 산업혁명과 제임스 와트를 물어보면 스코틀랜드는 커녕 그 동네가 엄연히 독립된 국가이고 자치가 보장되어 있는 의회를 지녔지만 그저 연방에 소속되었다는 건 모르고 있을걸?

한국의 서원도 마찬가지야. 서원으로 대표되는 한국 특유의 정체성을 하나의 특성으로 끌어올린 것 뿐이지 그거 가지고 고증오류네 역사에 기여한게 없네 주절거릴 필요가 없어요.

한국 특유의 정체성? 그건 지나치게 발달한 관료제와 관리 감독, 선발 체계지. 참고로 그 대단하다는 로마 제국-비잔틴 제국 시대 관료선발 체계도 동시대 중국, 그리고 그 영향을 그대로 받은 한반도에는 못 미쳤음. 로마는 1453멸망할 때 까지도 공화정의 전통이 오래 남아 있어서 고위 관료들은 이른바 명문가(비잔틴 시대에는 군벌)가 독점했고, 궁정가신들은 황제의 최측근 낙하산으로 이루어졌음.

물론 중국도 고위 관료들은 명문가들이 독점했었고, 그건 한반도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조조의 관료 능력위주 선발 천명 이후에(조조는 삼국지때문에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역사적으로 인재선발에 대한 기준의 변화. 즉 통치상에서의 변환을 내걸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됨), 진나라가 쫓겨나고 북방 유목민 출신들이 대거 그 유산을 이어 받으면서 양상이 많이 달라졌음.

쫓겨난 진나라 세력들이 여전히 명문가를 중심으로 자리 해먹고 오히려 황제보다도 더 한 권력을 갖는데 비해, 북방 유목민 출신 국가들은 남쪽의 '적성세력'인 명문가들이 아니라. 피지배민들 중에서 유목민 정권에 호의적인 충성파들을 직접 대거 양성해 국가 통치에 중점을 두게 되는거임.

그리고 그런 경향이 하나의 제도로 정착하게 되는게 바로 수나라의 과거제야. 수나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당나라 황실은 유목민 베이스+영향력 있는 현지 지배자(한족이라 불리는 그거)들의 혼혈이야. 그리고 그 과거제는 당나라때 곧바로 한반도로 전해져서 국가의 정체성이 되어버려.

그럼 똑같이 과거제를 도입한 중국, 일본은 뭐냐?
물론 걔네들도 똑같은 문화가 있고 강한 영향을 받아서 국가 정체성에 기여하기는 했지만, 결정적으로 왕조가 크게 바뀌면서 (우리 입장에서)뭔가 이상하게 자꾸 변해버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신라 이후로 왕조가 두 번 바꾸긴 했지만 실질적인 통치 이념이나 제도가 확 바뀌진 않고 그대로 들고간게 많아서 일종의 국가 정체성이 되어버린거야.

예를들어 볼까? 신라의 뒤를 잇는 포지션인 태봉도 처음에는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했다가 바꿨지만, 결국 통일을 한 건 태봉을 무너뜨리고 '신라의 제도로 복귀를 한' 고려였었고.

고려의 뒤를 잇는 조선은 아예 조선이라는 국가의 이데올로길를 총 정리한 경국대전부터가 원나라의 법전을 그대로 가져다 참고한 데에서 시작한 것임. 그 물꼬를 반고려파 개혁가였던 정도전이 텄고, 그가 죽자마자 조준이 그리고 하륜이 이어 받아 어느정도 완성된걸 세종이 한글로 다시 번역하고. 이어서 시대에 맞는 변경점을 명대 경전과 비교조율하며 완성한게 예종 그리고 세조때의 경국대전임. 당장 세종때 까지만 하더라도 고려의 법제가 상당히 남아 있었지.

그리고 거기에서 가장 큰 맥락은 바로 관료 육성과 관리체계의 유지임. 애초에 조선의 정치기구는 정승을 중심으로 하는 의정부와 실무기관인 육조인데, 이것부터가 고려의 삼성육부와 크게 다를 바 없음.

관료 선발 및 감독 체계에서 왕조가 유지되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 왕조가 교체된다는 것은 곧 기득권을 바꾼다는거고, 이걸 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기득권들이 그걸 유지하는 수단을 파괴하거나 바꿔버리는 것임. 그게 바로 관료시스템의 변화지.

이건 전세계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어. 예를 들면 기존 로마의 공화정 관료체제가 주교를 중심으로한 기독교 행정 체계로 바뀐다던지, 유력가문이 다스리는 도시 중심에서 방위를 위해 변경지역에 점차 요새와 성을 쌓고 주변 농촌을 장악해 다스리는 봉건-장원제도라던지.

역사에서 정치구조의 헤게모니가 외부요인으로 변경될 때마다 물갈이를 하는 순간이 오고(역으로 물갈이를 위해 내부요인으로 헤게모니를 바꾸는 경우가 있음. 조선초가 대표적), 그럴때마다 관료제를 비롯한 통치체계는 당연히 씹창나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은 그걸 국가적 아이덴티티라 말 못 하는 것임.

그에 비해 서원은 조선시대에 딱 생겨난게 아니라, 그 유래를 따지고 보면 고려시대의 호족이야. 역사에서는 호족세력이 향촌세력으로 넘어갈 때를 보통 광종때라고 보는데, 실제로는 몽골의 침입 때 친몽/반무신정권과 다수 결합하면서 권문과 세족이라는 두 집단으로 수렴되었음.

여말선초 정도전과 대립했던 온건파 개혁세력들이 따지고 보면 그 권문, 세족들과 다를 바 없었던 출신들이고 이들이 정도전을 족치고 친왕파(정확히는 이성계 및 이방원 쿠데타 세력)가 된게 훈구파고, 거기에 반발(+명분적으로는 쿠데타, 실질적으로는 실권 없음)해서 지방으로 내려가버린게 향촌세력.

그리고 여러 이유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자 지방에 은거하는
향촌세력을 다시 불러세워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3사를 중심으로(+이조전랑) 힘을 주면서 국왕 친위군 만든게 사림세력임. 그리고 이 사림의 근거지가 곧 서원을 비롯한 향촌의 교육기관이었고, 서원이라는 유교적 표상 없이도 그 이전에는 향촌(호족)의 세력으로 이름만 안 정해졌었지 거의 동일한 집단은 분명 있었음.

그러니깐 서원은 이름이 그게 대표적이라서 그렇지 실제적으론 '지방 사립 교육 기관(문6 백과 참조)' 정도고 현대식으로 따지면 대치동 입시학원 정도임. 실제로 사림들이 줫망한게 18~19세기 수도 한양 집중화 되면서 인거 생각하면.. 그때 이전 당시 서원들 위상은 종로니 대치동이니 목동이니 하는 유명 학원들이나 마찬가지였다는거임.

대충 임진왜란 이후 정치체계가 싹 바뀌며 통치구조도 의정부육부가 아니라 비변사 위주로 돌아가는거 보면 임란 전후로는 거의 나라 자체가 바뀌었다고 봐도 무방한데(학계의 시선이 그럼) 그 와중에도 관료 시험용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은 끝끝내 살아남은거 보면


서원으로 대표되는 '관료제의 지속과 유지를 위한 국가 및 백성(국민)의 열성'은 한국 문명의 고유한 특징이라 봐도 된다고 봄.

중국일본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으나, 얘넨 상술했듯이 왕조가 끊기면서 중간중간 없어지기도 했음. 하필이면 그 시기가 청나라(만주/몽골/중화/티베트 점령)의 제국시기와 에도의 반중앙집권봉건시기라서 그 나라 정체성을 결정짓지 못 하는 경우인게 문제고.

아 그리고 참고로 서원은 대부분 기존의 절터를 부수고 들어갔음. 그리고 기존의 절들은 딱 서원하고 동일하게 지방의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고려를 창건한 왕건은 아예 스승이 도선대사였고, 라이벌의 견훤은 도선의 제자였던 경보였음. 비슷한 시기의 꿍예는 아예 스님이었고, 최측근인 종간은 아마 경보나 도선 비슷한 포지션이었을 거. 아마 꿍예가 최종 승리자가 되었었으면 종간대사라고 불렸겠지.

마지막으로 '(사립)관료 교육기관'인 서원이 왜 과학을 주는지 궁금할텐데 이건 꽤 명확함.

근대와 전근대 상관없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 즉 정보의 저장이었음. 윗대에서 아무리 가르쳐줘도 다음 세대가 그 정보를 전수받지 못 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교육기관은 1. 정보의 저장이 용이한 시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따로 모아넣는 공간, 2. 그것을 활용하고 전수할 수 있는 사람, 3. 그런 자료들을 통해 새로운 정보들을 창출할 수 있는 연구기관, 4. 그런 연구들을 인적, 물적으로 지원하고 관리할 수 있는 체계, 5. 이런 것들을 종합하여 만든 관리체계를 통해 특정 과정을 교육 받았다고 인정해줄 수 있는 제도.

이런 것들이 필요함.

도서관은 1
대학은 1 2 3 5
연구소는 1 2 3 4 5 임

서원은 그럼 어디에 있을까? 1하고 2임.
실제로 서원들 파보면 고서들 존나 튀어나온다
애초에 서원 구조 자체가 서적들 있는 서재+교육공간임

그리고 자연과학을 가르치지 않고 공자왕 맹자왈 정치놀음하는데 왜 과학주냐고 고증오류라고 하는 놈들은 걍 입을 열지 말아라

옥스퍼드 대학, 파리 대학, 볼로냐 대학, 콘스탄티노플 고등 관리 교육소 등등 내로라 하는 '최초의 서양식 학부 체계'들은 죄다 신학, 정치학, 윤리학이 먼저였고 그 다음이 수학과 의학이었다. 애초에 생물학이니 물리학이니 자연과학에 포함되는 영역들은 실험과 사고의 영역이 아니라 신이 만든 세계의 법칙. 즉 '신학'의 영역이었음.

그래서 서원이 과학이 아니라 신앙을 줘야한다는 의견엔 동의한다. 근데 그렇게 치면 대학교(우니베르시따뜨=유니버시티)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성소피아 대성당, 노트르담 등등의 시설과 다를게 거의 없을 정도의 성능이 되어야 함.

아니 애초에 제네바가 왜 과학도국인지 생각해보면 답 나온다니깐? 칼뱅이 살면서 통치하던 개신교 도국이었는데 왜 신앙이 아니라 과학이냐고. 애초에 신학을 비롯한 고등사고를 다루려면 언어에서의 통달이 필요하고 그런 것들을 위한 기초 교육에서 이미 과학이라고 불리는 연구체계를 최소한 전근대적 수준에서는 수행되는 정도임. 제네바 시절은 참고로 근대다.

다만 서원 주변 농장에서 식량주는건 유교 및 사농공상 이념에 딱 맞는거라 할 말이 없는데

ㅆㅂ 광산과학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그건 ㄹㅇ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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