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그렇듯이, 기다림은 지루하다.

 기다리는 대상이 올지 오지 않을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면 지루하면서 불안한 이중적인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냥 '그 부탁'을 하지 말 걸 그랬나. 그냥 나와달라고 부탁만 해도 약속이 무사히 성사될 확률이 반타작도 채 안되는 그에게 '그런 것'을 차고 나와달라고 하면 당연히 나오지 않는 쪽을 택하겠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미련 가득한 상태로 눈 앞의 거리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금발을 찾았지만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물하며 약속을 잡은 것은 나름대로 그를 겪으며 분석했던 결과 내린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화를 내거나 멸시하거나 실력 행사로 나섰겠지.

 하지만 그는 가는 눈썹을 꿈틀거리면서도 무표정을 가장했다. 그동안 겪고 분석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분명 흥미 있지만 그것을 들키기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평소에 호언하던대로 그는 재미 없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고 새로운 경험에 항상 목말라있었다. 그런 그이기에 도리어 이번에는 약속을 제대로 지킬 가능성이 있다.

"야."

 ....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일기예보보다 춥게 느껴지는 날씨가 점점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래 기다릴 것 같아서 따뜻하게 입고 양 주머니에 손난로도 넣어왔지만 그럼에도 날씨는 싸늘했다.

 그러고보니 그때 '그것'을 확인한 그의 시선은 어땠지?

 정말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나?

 실은 차가운 눈빛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날씨처럼?

 변태새끼는 부위별로 해체라도 하기 좋게 얼어 죽으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기왕 해체당할거면 일단 해체당할만한 짓을 해두는게 낫지 않을까?

 불손한 생각의 대가일까. 갑작스럽게 정강이에서 격한 고통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웅크렸다.

"아이쿠 종강이얏!"

"정강이겠지. 요즘엔 대학생도 하지 않는다는 말장난을 고민하느라고 무시했냐?"

 이젠 익숙하기까지 한 시큰둥한 말투에 절로 고개가 올라갔다. 그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외관은 기억과는 많이 달랐다.

"머리...가?"

"뭐. 왜. 뭐"

평소의 땋은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만큼 단발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거겠지. 후드가 달린 재킷까지 입고 왔으면서 그 위에 모자를 비스듬하게 눌러 쓴걸 보니 얼굴도 가리고 싶어하던 것 같았다. 약속했던 그, 어윈 아크라이트는 평소와는 다른 모습인데다 모자로 얼굴도 가리고 있으면서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고개를 돌리며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때마다 목도리 틈으로 광택 있는 원색이 희끗희끗 보였다.

"늦었군요."

"제 때 나왔어. 네녀석이 알아보는지 확인해보려던거지."

 먼저 알아보지 못해서 불만인건지 자신의 변신이 성공적이라 즐거운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일단, 밀어붙여보기로 했다.

"저도 확인할 게 있죠. 보여주지 않으시면 제대로 하고 왔는지 알 수 없잖습니까."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느슨하게 맨 파란 목도리 아래, 미리 약속했던대로 빨간 목줄을 매고 왔다는 걸.

 아마 나올 때는 보이지 않게 잘 여미고 출발했겠지. 하지만 서둘러 오다보니 단단하게 매여있던 목도리가 조금씩 헐거워졌고, 도착할 즈음이 되어서는 각도에 따라서는 약간이지만 보이는 지금의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오는길부터 느슨했다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봤을 것 아닌가.

"일단 저기로 가자."

 그가 가리키는 곳은 건물 벽이었다. 정확히는 평평한 벽이 아니라 건물쪽으로 우묵하게 패여들어가 있는 장소로 아래에 작은 화분이 놓여 있지만 두 사람 정도는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건물 벽으로 세 면이 가려져있다. 확실히 이 장소라면 내가 잘 가리기만 하면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눈에 어윈의 모습은 보이지 않겠지.

 어윈은 목도리에 손가락을 걸고 조금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살짝 끌어내렸다. 작은 틈이지만 선명하게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였지만.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어윈은 빠르게 목도리를 단단히 여몄다. 여전히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를 지켜보는 대신 가만히 눈을 감고 방금 본 것을 되새겼다. 하얀 목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빨간 목걸이.

 검은 색은 패덕적일 것 같고 빨간 색은 배덕적일 것 같아서 한참 고민했지만 역시 옳은 선택이었다. 기왕이면 다음번에는 검은 색도 부탁해볼까.

"약속 지켰으니까 너도 지켜."

"물론이죠."

"그러면 일단 '산책'부터 해볼까."

 목도리로 목을 철저하게 감싼 어윈이 앞서 걸어갔다. 목줄을 하고 있는건 그지만 산책 당하는 건 나라는 거겠지. 그 정도는 예상한 바다.

 각오를 다지고 따라가려는데,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뭔가 이상한게 보이는 것 같았다. 멍하게 보다가 눈을 부비고 보니 역시나 헛것이었다.

"빨리 안따라와?"

그럴 리 없지. 그의 엉덩이에서 가느다란 꼬리 따위 나와있을 리 없다.

저 꼬리로 쥐어짜이고 싶은 토요일 밤입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