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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팬픽] 번역/ 에반게리온 제노사이드 2-1

ㅇㅇ(14.6) 2021.06.03 23:03:49
조회 992 추천 22 댓글 13
														

여기부턴 정식 개정본 연재가 안됐기 때문에 그림쟁이가 아직 개정본 작업 합류하기 전에 그려서 인터넷에 올린 사설 일러밖에 없으요. 당연히 질도 전자쪽이 좋음


챕터 1 개정본 정식 일러가 14개고 사설은 4개라서 챕터 1 핫산할때 18개를 올렸거등


챕터 2도 사설은 4개뿐임. 뒷챕터로 가면 그림쟁이가 더 많이 그리거나 심지어 일부분 코믹스화해놓은 부분까지 있는데 초반은 그래.


그니까 여러차례 공지했듯 정식 개정본 연재되면 추가된 삽화들이랑 텍스트 수정내역 같은거 싹 정리글 하나 쓰고, 예전 핫산된 물건은 따로 수정도 한번 할거임


그리고 글쟁이가 푸쉬킨 인용을 서두에 해놨던데 이거 정식으로 번역된거 아는 에붕이 있냐. 각운이고 지랄이고 남이 해놓은 번역 있으면 그냥 그거 가져올래 싯팔


"I've lived to bury my desires,

And see my dreams corrode with rust;

Now all that's left are fruitless fires

That burn my empty heart to d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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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평생 가슴에 묻어놓은 욕망의 열화,

꿈들은 그렇게 녹슬어 무너져;

남은 것이라곤 덧없이 타오르는 염화

텅 빈 가슴이 재가 되어 흩어져."

--알렉산드르 푸쉬킨








제노사이드 0:02 / 다시 한번.








저녁 식사는 지난 몇 달 동안 먹어본 중 가장 맛있고 배가 찼지만, 딱히 아스카의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미사토가 신경 연결기가 담긴 박스를 선물로 내민 순간 아스카는 밀려오는 감정을 더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제 아무도 볼 수 없는 방에 혼자 남아, 아스카는 드디어 피로감에 몸을 내줬다. 침실 문에 기댄채 바닥에 주저앉아, 손에 쥔 신경 연결기를 노려본다.


이걸 다시 갖게 되다니 기분이 묘했다. 고통스럽거나 한건 아니고 정말 이상한 느낌, 마치 가슴속에서 아직 슬퍼야할지 행복해야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 같은. 사실 지난 몇시간 동안 벌어진 일 전부가 그랬다. 아스카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에바를 조종하지 못하게 된 순간, 아스카는 자신이 아마 독일로 치욕스럽게 쫓겨나거나 아님 그냥 버려지게 될거라고 생각했었다. 2호기가 없으면 아스카에겐 아무 가치도 없었다.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줄 것이 없어진 순간 아스카는 죽은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왜, 아스카를 버리지 않고 둔걸까? 왜 다시 데려왔을까? 왜 그냥 ... 그만해, 아스카. 쓸모 없어진 물건이 어떻게 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잖아.


처음 진정상태에서 깨어났을때, 아스카는 그저 가만히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지냈다. 학대당한 마음은 더이상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신경쓰지 않았다. 아스카는 완전히 부러졌었다. 죽거나 살거나. 어느쪽이든 딱히 다를 것도 없었다. 간호사들이 나름 아스카를 격려해주겠다고 노력하긴 했다. 옷을 갈아입혀주고, 씻겨주고, 가끔씩은 농도 걸고 아기 달래듯 달래는 말투로 얘기도 하고.


바로 그런 굴욕적인 취급이 아스카의 생기에 어느 정도 불을 붙였다. 아스카는 싸우기 시작했다. 때리고 걷어차고 비명지르면서.


간호사들은 아스카가 자기들 행동에 고마워하길 기대한 모양이었다. 전혀 고맙지 않았다. 몇 번의 발작 끝에 아스카는 간호사들이 더 이상 주변에 다가오지 못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가끔은 상황이 너무 위험해져서 병상에 구속당하기까지 한적도 몇차례 있었다. 아스카에게 남은 것은 분노뿐이었다. 분노와 눈물.


병실엔 카메라가 달려있어 아스카는 언제나 누군가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외로웠다. 외롭고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오면 할 수 있는 것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우는것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또 한번의 발작 중에, 아스카를 병상에 구속하던 간호사 하나가 그렇게 착한 남자애가 뭘 보고 이런 애를 면회 왔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흘렸다. 그제서야 아스카는 다시 심장 박동을 느꼈다. 다시 감정이 느껴졌다. 지금 같은 느낌은 싫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변했다. 아스카는 더 협조적이 됐다. 면회를 받을 수 있게 회복하고 싶었다. 신지도 그런걸 원했을거니까. 그러니까 온거 아니겠는가?


그 작은 희망도 날이 계속 지나고 아스카도 계속 홀로 남으면서 들끓는 분노와 씁쓸함으로 변해버렸다. 아무도 와주지 않았다. 차라리 예전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다른 모든 일에 실패한 것처럼 그것마저 실패했다. 아스카는 다시 우울함의 심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날 전까진 ...


병원에서 미사토와 함께 온 신지의 모습을 보자 가슴 속에서 뭔가가 다시 일어났다. 기분 좋으면서도 기묘하게 역겨워서 잘라내버리고 싶은 뭔가가. 왜? 세달 동안 와주지 않았으면서 왜 지금 왔을까? 어째서 신지가 오지 않은 것에 아스카는 그렇게까지 화가 날까?


답은 아주 뻔하고 고통스러웠다. 사도가 그녀의 마음에 침입 했을때 캐낸 것은 단순 기억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 망할 인형을 안고 있는 동안 무시당하며 서 있었을 때의 아픔도 다시 떠올랐다. 아스카의 가슴이 산산조각났다. 


다른 것들, 여태껏 아스카가 속에 가둬두려고 애써왔던 유독한 감정들도 전부 그때 함께 밖으로 쏟아져나와 아스카를 난도질 당한 잔해로 만들고 다신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었다.


신지가 그렇게 망가진 여자를 원할리가 없었다. 그곳에 온 것도 미사토 때문에 끌려온 것이다.


속에서 분노가 타오르기 시작하며 아스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을 유린한 사도에 대한 분노, 자신을 싸움으로 내몬 미사토에 대한 분노, 자신을 버린 신지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패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아스카는 힘을 얻기 위해 분노에 매달렸다. 지금이야말로 힘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분노가 희미해져가는 아스카의 존재에, 결의에 장작이 되어줄 것이다. 힘없는 아이처럼 우는 것보단 백배 나을 것이다. 


아스카가 불려온 이유는 에바를 조종하기 위해서였다. 그 모든 약함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네르프는 아스카를 병원에 내버려둘 수도 있었지만 지금 다시 불러들였다.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간에 아직 아스카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였다. 사령관이든, 리츠코든, 미사토든. 남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아스카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이유는 또 어디 있겠는가?


아스카는 고개를 들었다. 방은 열려 있는 커튼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제외하면 어두웠다. 하지만 그 어두움조차도 그녀가 뒤에 남기고 온 장소들만큼 어둡진 않았다. 아스카는 의지를 다졌다.


이제 중요한건 에바를 조종하는 것 하나였다. 미사토의 말대로면 뭔가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2호기를 다시 조종할 수 있게. 아스카가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살아야 할 단 하나의 이유가 그것이었다. 이 곳에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아스카는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건 선택조차 아니었다. 인간이 살아있는게 딱히 선택이 아닌 것처럼. 이건 아스카의 사명이었다.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는 다시 에반게리온 2호기의 조종사가 되거나, 아니면 죽을 것이다.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감히 아스카를 저평가한 것이 실수였단걸 보여줄 것이다. 모두에게. 특히 신지에게.


내가 남은 평생 계속 실패작으로 남을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그 생각과 함께 아스카는 문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패션 잡지와 옷가지 기타 등등 지난 세 달 동안 방치되어 있던 잡동사니들을 피해 발을 내딛으며 침대로 향했다. 침대만은 깔끔한 새 시트와 베갯잇이 깔려 방의 나머지 부분과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침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무는 아스카. 앞길을 수용하는 최종 단계이자 자존심을 되찾는 첫 단계일 행동을 하기 위해 아스카는 의지를 다졌다. 심호흡을 하고, 부스스하고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하기 시작한다. 씻고나서 아직도 마르지 않아 축축하고 곳곳이 뭉쳐 있었다.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한쪽 어깨에 늘어져 있던 머리칼을 손으로 빗질하고 들어올려 머리 측면에 신경 연결기로 고정했다. 평소의 풍성함도, 구릿빛으로 빛나던 광택도 모두 잃은 상태였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아스카는 머리카락을 들어올린 다음 손에 들린 신경 연결기로 고정했다. 오랫동안, 아주 많이 해온 동작이라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아스카는 미소를 지었다. 이것 하나만은 아직 문제가 없었으니까.


반대편도 똑같이 고정한 다음, 아스카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베개를 끌어당겼다. 부드럽고 포근했다. 병원 침상의 소독제 악취에 익숙해진 차에 뽀송한 시트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섬유유연제 향이 반가웠다.


바보 신지가 해놓은거겠지. 아스카는 생각한다. 그래도 괜찮네. 눈을 감고 집의 촉감과 냄새에 몸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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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중이 아닐때면, 그러니까 점심 시간이든 방과후든, 아야나미 레이는 언제나 혼자 앉아 있었다. 가끔씩은 책을 들고 있었지만 더 많은 경우 그저 멍하게 멀리 있는 무언가를 붉은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둘 중 어느쪽이든, 혼자서.


여태 누구도 레이에게 다가와 말을 건적은 없었다. 누구도, 예를 들어 아스카나 다른 여자애들에 대해 하는 것처럼, 레이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하지 않았다. 마치 레이란 사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았다. 레이 본인은 그런 것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지만 신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문일까. 막 청소 당번을 마치고 나온 신지는 레이가 운동장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차마 못 본척 할 수가 없었다.


신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건 단순히 레이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싶어서 그러는건 아니었다. 이건 어쩌면 지난 몇 달 동안 레이를 멀리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의무감 때문에 이러는 것일지도 몰랐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신지가 뒤에서 다가오자 레이가 한 말이었다. 시선은 보고 있는 책에서 떼지도 않았다.


"아, 그게, 난-" 신지는 놀라움에 버벅거렸다. 어떻게 이렇게 조용한 애가 감각은 그렇게 좋은건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신지가 접근해오는걸 보지 않고 느낀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레이가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말하고 싶은게 있으면 말을 해야해. 그렇지 않으면 방해가 될뿐이야."


"난 그냥 ... 걱정되서 그래." 신지는 우물쭈물하며 중얼거리다, 지금 상대하는게 아야나미 레이지 어떤 잘 폭발하는 적금발 소녀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잘 지내고 있는거지?"


"응. 고마워. 뭐가 걱정되는데?" 레이는 아직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톤의 변화가 없었다. 다른 여자애였다면 무관심의 표시처럼 들렸을 것이다. 레이가 할때는 아니었지만. 이건 그냥 레이의 평소 목소리였다. 예전의 그 레이도 아니었지만.


"그건, 그게, 사람은 혼자 있으면 안되는거니까. 내가 아야나미를 보러 오는데 이유라도 필요한거야?" 신지의 귀에 자신의 말은 뭔가 공허하게 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지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본인부터가 오랫동안 혼자 살았던 차라 방금 한 말은 거의 거짓말 같은 수준이었다. 그러고는 또 아스카를 홀로 내버려뒀지 않은가. 레이도. 사람은 가끔 혼자 있는게 최선일 때도 있는 법이고.


난 역겨운 위선자야. 신지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아야나미가 날 필요로 했을때 난 아야나미를 내 인생에서 잘라냈어. 겁먹었으니까. 그래놓곤 이제 아무도 아야나미한테 말걸지 않는다고 걱정해주는거야?


"세상에는 홀로 있을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어서 혼자 남길 선택하는 사람도 있어. 나는 외로움이 두렵지 않아. 주변에 아무도 없을때 생각하기도 편해."


"그,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데?"


깊은 질문 같은걸 의도한게 아니었다. 신지는 그런 생각 같은건 하지 않았었다. 이건 그냥 어떻게든 대화를 잇고 레이가 말을 하게 만드려는 시도였다. 신지는 이게 자신이 여태껏 레이에게 물어본 것 중 가장 복잡미묘한 질문이란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죽음에서 되돌아온 사람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까?


레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어. 여기 온 김에 물어보는게 낫겠지. 어째서 에바를 거부하는거야?"


가슴이 텅 빈 느낌이었다. 레이가 그 사안에 대해 알고 있어서 놀랐거나 한게 아니었다. 신지가 초호기 조종을 거부했다는게 딱히 비밀이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신지가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이 질문이 꽤 오랫동안 신지를 뒤따라다니고, 슬픔을 줬기 때문이었다. 이 주제로 아스카에게 험한 소리를 들은 뒤론 누구에게도 같은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투정을 부리고 있는거라는 아스카의 말은 아직도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것과, 신지 자신이 미사토에게 했던 말들까지 생각해보면, 신지는 이 질문에 대해 차마 입을 열어 답할 수 없었다.


"내가-" 레이가 입을 열었다.


"부탁이야. 하지마. 이것 때문에 아스카가 많이 화났어. 미사토씨도. 아야나미까지 나한테 화나게 만드는건 싫어."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 속에서, 신지는 앞에 앉은게 자신이 그렇게 좋아했던 그 아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이젠 죽어버린 그 아이. 신지의 아야나미 레이. 그저 닮았을뿐이지 다른 사람인 눈 앞의 소녀와는 다른.


"내가 왜 에바를 조종하려는지 이유를 말해줄게." 레이가 끊긴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책을 덮고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신지와 눈을 마주쳤다. "목적 없는 삶은 죽음보다 나쁘기 때문이야."


"조종?" 신지는 충격속에 다시 되물었다. 가슴속의 뭔가를 차가운 손이 꽉 잡은 느낌이었다. "무슨 소리야? 영호기는 완파됐어."


"지금 복구 작업 중이야." 레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난 에바 파일럿이야. 그게 내 사명이야."


신지는 떠오르려는 기억과 공황을 억누르려 애썼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안돼. 안돼. 안돼. 이 아이만은. 다시는.


"아야나미, 이건 옳지 않아. 아야나미는..." 신지는 자기 목소리가 바보 같다고 느꼈다. 이 상황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레이가 에바 조종을 강요 당하는게-신지는 이게 강요됐다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리고 레이 본인이 거기서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게 얼마나 잘못된건지 신지의 목소리는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어."


"그럴 수 있어. 난 건강해."


"건강 문제가 아니야!" 신지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아야나미, 너한테 그런걸 요구해선 안되는거야! 저번 같은... 저번 같은 일 이후에 또... 넌...넌 죽었다고! 어째서 다시 그런 일을 하겠다는거야! 그럴 수는 없어!"


"난 죽지 않았어. 죽었다면 여기에 있을 수 없어." 신지와 대비되는 차분한 태도로 레이는 말했다. 신지는 그 모습이 거의 미워지려고 했다. "그 아이가 억지로 죽거나 한 것도 아니었어. 내가 지금 선택을 하는 것처럼, 그 아이도 선택을 한거지. 나는 영호기의 준비가 완료되는대로 파일럿이 될거야."


"그건 선택이 아니잖아!" 신지의 목소리는 통제하지 못한 감정에 마구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죽는건 선택이 아니야."


레이는 에바와 함께 죽었었다. 신지를 지키려고 죽었었다. 다시 에바를 조종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레이가 그런 선택을 한다면, 그럼 신지는 뭐가되는걸까? 레이도 에바 때문에 끔찍한 고통을 겪었는데, 신지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신지보다 더더욱 에바를 거부할 이유가 있을텐데. 그럼에도 조종을 거부하지 않는다. 신지는... 겁쟁이인 것이다.


"그 아이의 죽음은 선택이었어." 레이가 말했다.


말로 이길 수 없는게 확실해지자 신지는 간청하기로 결심했다.


"제발, 그래선 안돼." 신지는 잠깐 추정을 해봤다. 답은 뻔했다. "아버지가 시킨거지? 그렇지? 아야나미, 만약 날 조금이라도 신경 쓴다면 그러지마. 아버지 말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너도 내게 신경 쓴다면," 레이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해할 수 있을텐데."


신지는 이대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아야나미 레이가 그를 보호해줬으니, 신지에게도 그녀를 보호해줄 의무가 있었다. 신지는 손을 뻗어 레이의 어깨를 붙들고 자기쪽으로 돌려세웠다. 거친 손길에 레이는 벤치에서 반쯤 일으켜세워졌다. 레이는 놀란 표정이었다. 평소보다 살짝 커진 눈에 꾹 다문 입술. 


"제발, 내 말 들어줘, 아야나미." 신지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는걸 느끼며 말했다. "네가 마지막으로 에바를 탔을때 넌 사도한테 붙잡혀버렸어. 나는 도와줄 수도 없었고. 너 많이 아팠어. 비명지르는거 들었어. 근데도 그게 날 공격하려고 했을때, 넌 ... 난 네가 죽는걸 봐야했단 말이야!"


레이의 눈꼬리가 살짝 쳐졌다. 이게 아마 레이 나름 최대한의 동정을 표한 것일테다. "에바를 조종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그거야? 두려워서?"


신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두려워. 뭔가를 또 잃는게 두려워."


아야나미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게 어려웠다. 신지는 자기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게 매번 어려웠다. 그럴때마다 언제나 일이 악화되기만 했다. 특히 아스카 상대로. 하지만 지금 아야나미는, 신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에바로 돌아가 다시 다칠 것이었다. 신지는 그게 걱정되고 또 두려웠다.


레이의 얼굴이 풀어지고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신지를 이해한 모양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데도, 주변 사람들이 네게 의지하는데도, 네가 두려워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미 모든걸 잃어버린거나 마찬가지야."


신지는 레이를 놓아주고 물러나며 고개를 저었다. "아야나미, 넌 몰라서 그러는거야."


"날 그렇게 부르지 마. 그 아이를 부를때 그렇게 했잖아." 마지막 말은 신지의 표정을 보고 덧붙인 말이었다. "부를거면 레이라고 불러줘. 난 다른 존재니까." 레이는 심장 위치로 손을 들어보였다. "네 말처럼 같은 사람일지 몰라도. 그리고, 난 두렵지 않아. 아직 잃고 싶지 않은게 있으니 난 계속 움직일거야."


신지는 팔로 눈을 문질렀다. "잃고 싶지 않은 것?"


"너."


신지는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며 레이를 바라봤다.


신지가 여태 한 모든 말보다 그 한마디에 더 무게가 있었고, 숨쉬는 것도 잊어버리게 만들만큼 충격이 있었다. 레이-신지의 머릿속에서 정말 완벽하다고 느껴지는 그 이름-는 신지가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게 신지가 무시할 이유는 못됐다. 레이가 신지를 위해 한 일이 없어지는게 아니었다. 그리고 레이가 스스로 위험에 뛰어든다면, 신지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신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스카에게 상처를 줬다. 이해해보려 하지 않아 미사토에게 상처를 줬다. 미사토가 카지의 마지막 메세지를 받고 무너졌을때, 신지는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물러나버렸었다. 신지는 너무나 어렸었다. 자기 자신의 상처를 넘어서 볼 수 없었기에 남들에게 상처를 줬다. 신지는 언제나 겁에 질려 있었다.


이제서야 마치 뺨을 때리듯 실감됐다. 두려움에 굳어짐으로서 신지는 자신이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상처만이 중요한게 아닌데. 이제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 뻔한 얘기라, 아스카에게 바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남의 칭찬을 바라고 살아왔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욕구를 넘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번도 진실을 보지 못했었다.


다른 사람들도 신지를 필요로 했다. 이전에는 아스카와 미사토가, 지금은 레이가. 아야나미 레이, 신지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그녀가. 그녀를 위해서라도 신지는 결단해야했다. 설령 싫은 일이라도 옳은 일이니까 해야했다. 그게 성숙한 사람들이라면 할 일이었다. 미사토의 말 그대로. 그때 미사토가 그렇게 말 했을때 신지는 어떻게 보답했었던가?


신지는 자신이 미사토에게 사과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사토는 그저 돕고 싶었을뿐이다. 그게 약속을 깬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그때처럼 반응해선 안되는 일이었다.


"거기 미안한데!" 아스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신지의 생각에 마치 망치처럼 치고 들어왔다. "밀회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거기 계신 바보는 지금 나랑 집에 가야하거든!"


운동장 모서리에서 아스카가 노려보고 있었다. "아스카?"


"집에 가자고, 당장!"


아스카랑 옥신각신해봤자 좋을거 하나 없다는건 신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레이와, 또 자기 자신과 큰 문제 하나를 해결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스카가 지금 와서 이런다고 그게 바뀌는건 아니었다. "레이, 이제 가야겠어. 대화해줘서 고마워. 다음에 보자."


"응. 안녕."


신지는 그렇게 레이와 작별했다.


"뭐한건데?" 아스카는 둘이 운동장을 벗어날때까지 기다렸다 물어왔다. 아주 기분이 좋지 않아보였다.


"아스카, 나한테 말할거 있으-"


"말? 나 너한테 말할거 아무것도 없거든." 아스카는 그 말과 함께 자기 몸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블라우스에 붉은 얼룩이 져있는게 보였다. "그 멍청한 나가라년이 내 옷에 뭘 쏟았거든. 당장 가서 빨래 좀 해라 이 말이야. 너 이제 에바도 안탈거면 그런거라도 해야할거 아냐?"


틀린 말은 아닐지도. 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서 처리할게." 신지는 제발 이걸로 아스카의 화도 풀리길 기대했다.


둘은 함께 학교 정문을 통과해 전철역 방향 인도를 걸었다. 신지는 앞만 보고 가려고 노력했지만 지나가는 남자애 몇이 아스카를 빤히 쳐다보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스카는 딱히 노려보거나 하지도 않고 그저 무시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아스카 성격에 그런 무례에 무반응으로 대하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래도 신지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 일이라도 있냐고 물었다간 또 혼쭐날거라는것 정돈 알고 있었으니까.


웬일로 아스카쪽에서 먼저 침묵을 깼다. "그래서 너랑 우등생이랑 사귀기라도 하는거야? 응?" 조롱하는 목소리에 독기가 가득했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너보다 재미 없는 인간은 걔 밖에 없잖아."


신지는 정말로 설명이 하고 싶었다. "사귀거나 그런거 아냐. 레이는 ..." 신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생각해보면 아스카가 아야나미 레이의 진상을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레이는 나한테 관심 없어."


"아, 적당히 좀 해. 너가 붙잡았을때 걔 표정 다 봤어." 아스카는 자기 몸을 껴안고 허공에 키스를 하며 레이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오, 이카리군, 손길이 너무 남자다워. 날 가져. 명령은 뭐든 들을게, 뭐든 시키기만 해줘, 날 순종적인 인형처럼 다뤄줘."


"레이는 인형이 아니야." 신지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스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네 여자 취향이잖아. 아냐?" 아스카는 다시 아까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순종적이고? 굽실거리고? 아무 생각 없이 팔다리에 달린 끈 가는대로 춤추고?"

신지는 아스카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둘은 마지막 석양의 황금빛 속에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무 말 없이. 학교로부터 두 블록 떨어진 지점까지 오자 거리에 꽤 인파가 있었다. 주변 가게들에 기웃거리는 학생들도 보였다. 10분 정도 지나 학생들과 수십명의 직장인으로 북적거리는 승강장에 도착했다.


벤치에 책가방을 놓고 털썩 앉는 신지. 아스카는 그대로 서있었다. 아마 신지를 위에서 내려다보려고 그러는게 아닌가 신지는 생각했다. 죽어가는 태양이 아스카의 머리칼에 불을 붙였지만 눈의 푸른색은 가리고 있었다. 


"너 같은거랑 남다니." 갑자기, 아스카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우울한 어조였다. "여기 카지씨가 있었으면 좋았을건데."


신지가 절대 아스카와 논의하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도 않은 주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미사토가 자동 응답기를 끝없이 돌려보며 울고 있는 광경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신지는 직접 듣진 못했어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만약 아스카가 신지의 말을 아직도 믿기 거부한다면 차라리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진실을 거부하는 것이라도 그렇게 하는게 아스카에게 쉬운 일이라면 상관 없을 것이다.


신지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여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이상하거나 무심한 반응으로 보일거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나도." 신지는 조심스럽게 말한 다음 아스카의 반응을 살폈다.


아스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지의 말을 들었다는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스카는 고개를 돌려 선로를 바라봤다. 뭔가 불가능한 것을 생각하는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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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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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본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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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파트는 1-5에서도 나온 아스카 복귀 첫날밤 시점일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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