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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팬픽] 번역/ 에반게리온 제노사이드 7-5

ㅇㅇ(14.6) 2021.08.03 01:31:05
조회 678 추천 23 댓글 10
														

예전에 좀 무리해서 길게 했던 분량들처럼 하면 이번화에 7장 아예 끝내버릴 수도 있겠던데


죠금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어. 오늘은 어드바이스 앤 트러스트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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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카츠라기 소령이 미국인들을 만나러 간다는군." 후유츠키가 이카리 겐도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한 말이었다.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장대한 내부공간에 울려퍼졌다. "정보 2과에서 확인했네. 선적 일정도 마무리 됐어."


"그럴줄 알았다." 겐도가 말했다. 그는 입구 반대쪽 벽의 대형 유리창 곁에 서서 어둑해지는 바깥 경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후유츠키만큼 키가 크진 않았지만 어깨는 더 넓었고, 검은 제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꽤 인상깊었다. "아마 정식 항의서한을 제출하거나 그 비슷하게 무의미한 관료적 제스쳐를 취해오겠지."


"물론일세." 후유츠키는 이카리의 뒤까지 가 뒷짐을 지고 어린 상관과 똑같이 꼿꼿한 자세로 섰다. "순전히 작전적 차원에서의 항의를 시도해보겠지, 아마. 논지에 별 메리트는 없겠지만."


명목상 우리의 작전부장임에도 말이지. 후유츠키는 속으로 조용히 덧붙였다.


"여기까지 온것만 해도 사실 놀랍다 하겠지." 꽤 솔직하게 말하는 이카리였다. "여태껏 들쑤시고 다니면서 알아냈을 것들을 생각해보면, 지금쯤이면 뭔가 시도해볼 때도 됐다고 생각했거든."


둘은 이전에도 카츠라기 소령의 충성심에 대해 논한적이 있었다. 후유츠키는 그녀에 대해 의심을 품은지 오래였으나, 지금 이렇게 협조적으로 나오는 것도 놀랍진 않았다. 명령을 듣는 것은 쉬운 일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카츠라기에게 이건 습관처럼 된 일이기도 했고. 솔직히 후유츠키는 카츠라기를 비난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굳이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세상은 살기 어려운 곳이다.


"천성이 무모하진 않으니까." 후유츠키가 말했다. "어설픈 분노로 어리석게 행동할 것 같지도 않고. 이미 알고 있겠지만, 몇 주 전에 아카기 박사와 상당히 흥미로운 대화를 했더군, 카츠라기 소령. 충성심에 관해 언급했다지."


이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성심은 영원한 법이지."


"그렇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다루면 될걸세."


후유츠키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요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카츠라기는 위협을 보이지 않고 명령에만 따른다면 굳이 신경쓸 필요가 없는 상대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딱히 의구심을 가질 이유도 주지 않았고, 저번 전투에서 증명됐듯 위기 상황이 오면 아직 신뢰할 수 있다.


"다른 문제는 어떻게 됐지?" 이카리가 물으며 몸을 살짝 틀었다. 후유츠키쪽으로 드러난 오른손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후유츠키는 잠시 궁금증을 억눌렀다. "러시아쪽에서 다 처리해뒀네. 마르둑 기관 없이 잘도 처리했더군. 넘겨 받은 정보를 보아하건대 유용한 결과를 예상할 수 있을거야. 일처리가 상당히 성실하더군. 그쪽에서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협력해올줄은 몰랐네. 하지만 마르둑을 거른 것은-"


"마르둑은 신뢰할 수 없다. 사고의 재발은 감수할 수 없지. 그쪽은 후보자까지 미리 지명해뒀던건가."


"우리쪽 자원이었네. 1총국 제2부에서 에바의 도착 이후 10시간 내로 코어가 준비 가능한 대상 하나를 지명하더군. 그런건 불가능할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었어. 허나 난 이것이 암시하는 바가 우려스럽네. 저들이 독자적으로 에바를 건조 완료 했을때 그 파일럿을 확보하려 동원했을 방법은, 아무래도, 우리쪽에 좋지는 않았겠지. 법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아마 납치였겠지, 후유츠키는 생각했다. 네르프라면 그렇게 했을거니까.


이 부분도 후유츠키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렇게 뻔한 얘기는 할 필요도 없었고, 그런 것들이 사실이라는 점도 굳이 말로 하지 않는게 약간은 기분이 나을거니까.


"그래, 우리측 자원을 노리고 있었다는건 상황이 달랐으면 우려할 필요가 있는 문제겠지." 이카리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1총국이라고 했나?"


고개를 끄덕이는 후유츠키. 러시아 연방 1총국은 소련의 몰락 이전까진 조금 더 음험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세상에서 잔혹한 탄압과 동음이의어로 통용된 그 이름. 후유츠키는 그 시절을 기억할 정도의 나이는 됐다. 사려 깊고 세심한 사람들은 국가보안위원회라는 말로 그들을 불렀다. 나머지 사람들에겐 짧은 약어로 충분했다. KGB.


"나도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네." 잠시 생각 끝에 입을 여는 후유츠키였다. "이 사안을 우리 생각보다 훨씬 무겁게 다루고 있는 것 같더군. 아마 그쪽 정보당국 최고위급까지 올라가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후보자도 확실히 쓸모 있겠지." 이카리는 의자에 앉고는 신음소리와 함께 손을 부여잡았다. "더이상은 요구할 생각 없어. 미국 에반게리온에 탑재할 것만 확보되면 끝이니까."


"저쪽에서도 우리가 약속한걸 원하겠지."


"물론이다." 이카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동의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왼손으로 안경을 밀어올렸다. "그정도면 충분할거야."


"정부나 UN은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


"그러니 더더욱 비밀로 해야지. 만약 알아내도 별 일은 없을거다만." 이카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해봤자 화난 어조로 편지나 좀 보내고 연설 한두번 정도겠지. 이 시점에서 우릴 막으려면 무력행사 밖에 수단이 없다. 그렇게 나오진 않을거야."


"2호기 문제는?"


"작동한다. 그거면 돼." 이카리의 대답은 짧았지만, 이 주제에 대해 딱히 고려해보지 않아서 그러는거란 기색은 아니었다. "현재로선 우려할 필요가 없다. 아카기 박사가 테스트 결과를 모두 점검할거니까. 여태까진 박사의 조치가 먹혀들고 있어."


그가 지금은 옳을지 몰라도, 후유츠키의 관점에서 봤을때 네르프는 조금 과할 정도로 한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정신없이 넘어가곤 했던 것이다. "지금은 먹히고 있을지 몰라도 그런 임시처방에 장기적으로 의존해도 된다는 확신이 없네. 지금 우리에겐 실책의 여지가 거의 없어, 아니 있기나 한지 모르겠군. 거기에 미국 일이랑 러시아 일까지..."


이카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오래 의존할 필요는 없다. 필요할 때까지만 버텨주면 돼. 레이를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그래, 후유츠키는 생각했다. 레이...


"언제 말해줄텐가?" 후유츠키는 이카리의 붕대 감은 손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을걸세. 무의식적으로라도. 알거야. 어쨌든, 미국쪽에서 이렇게 예상치 못한 움직임을 보인 것을 기회로 삼아야해. 저쪽 기준으론 불합리한 판단도 아니겠지. 신설 에바 기체들은 워낙 기록이 안좋으니까. 미국산은 더더욱. 왜 원래 계획대로 제레에 보내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보내는건지가 의아하지만."


후유츠키는 거의 웃을뻔했다. "알고 있는 악마가 모르는 악마보단 낫다는거 아니겠나."


이카리는 동의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후유츠키는 알 수 있었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아스카의 얼굴이었다. 어쩌면 단순히 그런 표정을 아스카에게서 처음 본 것 때문에 인상이 남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신지는 아스카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대화하고 싶었다. 그 표정이 어떤 의미였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아스카의 분노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길이었다. 모욕과 싸움이 이어질것이다. 


왜 아스카는 매번 그러는걸까. 신지의 생각이었다. 왜 꼭 그렇게 일을 어렵게 만들어야하는걸까.


신지는 지금 거실의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공책과 수학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숙제로 지정된 열다섯 문제 중에 지금 겨우 한개를 어영부영 처리한 참이었고, 아마 풀이 과정에서 뭔가를 놓쳤을 것도 확실했다. 신지의 마음은 완전히 딴 곳에 가 있었으니까.


전투에 관해선 아스카의 말이 맞았다. 신지는 사도에게 패배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지쳤고 마지막엔 의식을 상실하기 직전이었다. 아스카가 구해준거였다. 사도의 목에 2호기의 팔이 감기고, 곧 끌고 가는 것까지는 흐릿하게 기억했다. 그 다음 순간, 신지는 의식을 잃었다.


"그거 당장 놔! 죽이게 놔두진 않겠어!" 분노에 찬 날카로운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졌었다. 아스카는 아마 자신이 통신 채널을 켜놓고 있었고 그래서 신지가 그 말도 들을 수 있었단걸 몰랐을 것이다. 신지는 그 전에 미사토가 아스카에게 간청하는 것도 다 들었다.


아스카는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신지를 상대로는 더더욱 그랬다. 한번도 그런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엔.. 무슨 의미가 있는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날 미사토와의 점심식사를 망친게 아마 잔뜩 화가난 모양이었는지, 신지는 오늘 아침까지 쭉 아스카를 한번도 보지 못한 참이었다. 그때 말이 무슨 의미가 있었던거면, 그럼 아스카쪽에서 먼저 말을 거는게 정상 아니었을까? 그러긴커녕 아스카는 몸은 어떻냐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 아침의 논쟁 이후 신지는 결국 설득당해 교실로 돌아왔지만 그 후로 쭉, 아스카는 신지쪽으론 아예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신지가 망상에 빠진 것이었고 아스카의 목소리에서 무언가가 들렸던 것은 그저 한계에 몰린 정신이 의식을 유지하려고 벌였던 절박한 시도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논리적인 설명은 그것뿐이었다.


눈을 감자 아스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중하다고 말한 바로 그 순간의 모습. 아스카는, 다른건 둘째치고, 놀란 기색이었다. 신지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아스카가 그렇게 반응할 것을 신지가 예상하지 못한 것과 똑같다. 아스카의 내면 무언가가 흔들린 것은 확실했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아스카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때 신지는 너무 흥분해있어서 그런 생각은 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아스카의 그 모습을 뇌에 불로 새겨서 영원히 잊지 않고 싶었다.


눈을 뜨며 신지는 다시 수학 문제에 집중했다. 한자들이 모조리 파자되서 다른 글자로 조합되는 것 같았다. 숫자들 사이에 아무 연관관계가 보이지 않았다. 아스카는 수학을 잘했더랬다. 신지는 아니었다. 만약 집에 있었으면 이렇게 간단한 문제를 놓고 끙끙댄다고 놀려댔겠지. 물론 도와주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 재미 없으니까.


입술을 앙다물고, 신지는 혹시라도 집중력이 되돌아올까 종이 위에 연필을 가져다대고 기다렸다.


돌아온 것은 따로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 왔어." 미사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지군?"


"거실이에요."


미사토가 주방을 거쳐 거실에 들어섰다. 피곤한 얼굴로 오른쪽 어깨에는 붉은 재킷을 들쳐메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미사토는 억지로 미소지어보였다. 


"안녕. 학교는 어땠니?"


신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 질문에 언제나 하곤하는 답을 했다. "괜찮았어요."


미사토는 별로 만족한 눈치가 아니었다. 눈썹이 살짝 모여드는게 걱정처럼 보였다. "몸은 좀 어떻니?"


"괜찮은 것 같아요." 질문 자체에 조금 부끄러워져 신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뭐, 잘됐네. 리츠코가 주말에 검사 좀 하자고 그러더라. 어디 메모해둬."


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사토도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사토의 걱정은 진심인 것 같아보여서, 그렇지 않은 경우를 너무 많이 겪은 신지는 미사토에 대해 새삼 다시 호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미사토는 어머니가 아니었지만, 이런식의 제스쳐들 때문에라도 신지는 미사토를 대충 그 버금가는 것 정도로는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미사토에게 큰 상처를 줘놓고도 ...


"야근하러 가세요? 저녁 식사라도 준비할까요?"


"아냐, 괜찮아. 나 바로 짐 싸야해." 뒤쪽, 자신의 침실 방향으로 미사토가 엄지를 까딱해보였다.


신지는 호기심이 동했다. "왜요?"


"네 아버님이 요코즈카로 보내셔서. 그.. 수령할 장비가 있어."


"요코즈카요?" 미사토의 묘한 말투를 곱씹으며 신지는 느릿느릿 되물었다. 미사토가 굳이 자신에게 이런 일을 숨길 이유도 없어보였고, 실제로 딱히 숨기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평소 네르프 관련 업무를 얘기해줄때만큼 깔끔한 느낌이 아니었다.


"그래. 지금 말해줄 수 있는건 그게 다야. 너도 알잖아, 사령관 같은 사람들, 비밀 엄수다 뭐다.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냐. 며칠이면 돌아올거야."


무슨 일이 있는거야. 분명해.


"그래도..."


"며칠이면 돼." 네가 반대할 일도 너무 캐물을 일도 아니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미사토였다. "그동안 혼자 지내면 되는거야. 어차피 매일 그러잖아."


"뭐, 그렇죠." 신지는 조금 묘한 느낌을 받으며 답했다. 사실 이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미사토가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게 그리 희귀한 일도 아니었고 신지는 제3 신동경시로 오기 전부터도 혼자 있는 것엔 이골이 나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스카에 대한 생각으로 혼란스럽고 레이를 볼 수 없는게, 마치 카오루가 죽은 직후와 상황이 그렇게 다를 것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었다.


"괜찮은거 맞지?" 미사토는 걱정하는 투였다. "혹시 안되겠으면 하루나 불러줄 수도 있어. 아니다, 걘 너무 시끄러우려나. 아님 마야를.."


왜 하필 다 여자야?


"괜찮아요." 신지는 아까보다 조금 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진짜에요."


"그래, 괜찮을거라 믿어. 다 큰 남자잖아, 신지군." 미사토가 미소지어줬다. 신지는 저게 아마 순전히 자기 때문에 지어준 웃음일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하자. 갖다오면 맛있는 저녁 사줄게."


"아, 고마워요."


"나 없는 동안 친구들 불러서 파티하거나 그러는거 없기다, 알았지?"


신지가 절대 그럴 일은 없을거라고 재차 확인해준 뒤에야 미사토는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신지는 문이 닫힐때까지 기다렸다가 자기 숙제를 내려다봤다. 펼쳐져 있는 공책이 마치 시선을 되돌려주는 것 같았다. 숙제에 완전히 관심을 잃은 신지는 연필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책상을 지나 거실을 가로질러, 신지는 두 방으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섰다. 자신의 문 앞까지 왔다가, 마치 뭔가가 뒤에서 옷을 잡아끄는 것 같은 느낌에 신지는 멈춰섰다. 어깨 너머로 돌아보면 자신의 방 문과 하나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문 하나가 있었다. 한동안은 신지의 문이었다. 복도 반대편으로 쫓겨나기 전까진. 아스카에게 쫓겨나기 전까지는.


아스카의 침실은 언제나 일종의 성역이었다. 자물쇠를 걸어놓긴 했지만 딱히 그게 없어도 신지는 그 안에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신지는 그렇게 모순된 구석이 있었다. 빨래 더미에서 팬티를 꺼내 만지작대는 염치없는 일도 하면서, 아스카의 다른 영역은 프라이버시를 절대적으로 존중해야한다고 느끼는 것.


그게 신지가 감히 넘지 못하는 선이었다.


아스카의 침실은 밖으로는 닫혀있는, 아스카만의 내밀한 공간이었다. 거의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그 내밀함을 배신하는 것은 아스카 본인을 배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신지군, 혹시 내-" 미사토의 목소리가 뚝 끊기고 발소리가 이어졌다. "신지군?" 미사토가 거실쪽 모서리에 나타났다. "숙제는 끝난거야?"


신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아스카의 방 문을 쳐다봤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스카가 그립니?" 잠시 후 묻는 미사토의 말이었다.


신지의 마음 속 한 부분은 그게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아스카가 그립다는건 곧 괴롭힘 당하고 맞는게 그립다는 말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부분은, 오늘 아스카의 표정을 보고 놀란 부분은, 센트럴 도그마로 강하하는 사도를 따라 뛰어내리게 만든 그 부분은, 아스카를 그리워했다. 정말로. 많이.


어느새 침묵마저 아스카의 부재를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아스카의 시끄러움이, 아스카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미사토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미사토는 아스카에 대해 의견이 달랐고 신지보다 냉엄했다. 가만히 있으면 불편한 질문들로 신지를 지금보다 더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신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거짓말.


"아니요."


미사토는 잠시 신지의 말이 진심일지 아닐지 재는 듯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겠지." 미사토의 어깨가 눈에 띄게 쳐졌다.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지는 미사토가 떠난 뒤에도 잠시 복도에 어물쩡거리다, 뭔가에 압도됐다. 호기심인지, 그리움인지,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느끼고 싶은 절박한 욕망인지, 어쨌든 무언가에 압도됐다. 신지는 걸음을 내딛고 마치 밤도둑처럼 조심스럽게 아스카의 방 문을 열었다.


방은 엉망이었다. 아스카는 원래 깔끔함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한번은 신지가 대신 청소해주겠다고 제안한 적도 있었지만 아스카는 거절했었다. 신지는 무의식적으로 문간을 넘어섰다. 묵은 공기는 뜨뜻했고 텅 빈 냄새가 났다. 반대편 벽에 붙은 창문이 어두운 방에 달빛을 비추고 있었다. 바닥에 옷가지가 널려 있었고, 접시와 컵 몇개, 다 먹은 과자 봉투, 잡지들, 누워 잘때 쓰는 줄무늬 베개가 보였다.


신지는 천천히, 마치 위험한 정글을 가로지르는 탐험가처럼 나아갔다. 아직도 열지 않은 박스 몇개가 외국어로 된 라벨이 그대로 붙은채로 주변에 쌓여 있었다. 머리와 발판이 금속으로 된 커다란 침대까지 왔을때 고데기가 발에 밟혔다. 몸을 숙여 고데기를 들어올리려다가, 신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잡지가 거의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지는 고데기는 내버려두고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몇장은 아예 뜯겨나가 있었고, 나머지는 모델들의 얼굴에 낙서를 해뒀거나 잔뜩 화난 필치로 새카맣게 칠해져 있었다. 몇몇 장은 뚫린 자국으로 보아하건대 펜으로 찌른 것 같았다. 곳곳에 독일어 문장들이 휘갈겨져 있었다. 삐뚤빼뚤한 필체는 아스카의 것이라 알아볼 수 있었지만 문장들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그제서야 신지는 아스카의 분노가 잡지에만 표출된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고데기에는 눈에 띄게 패인 곳이 있었다. 마치 그걸 집어들고 뭔가를 세게 내리친 것처럼. 다른 잡지들도 찢겨져 있는게 보였다. 베개는 찢어져 열려 있었다.


신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스카의 분노가 온갖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을 봐왔지만, 이건 단순한 분노 이상의 뭔가가 있었을거라는 느낌이 가슴에 무겁게 와닿았다. 아스카는 소유물에 집착하는 성격이었다. 단순히 화났다고 자기 물건을 망치진 않았을 것이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건 누군가가 단순히 화가 나서 보인 행동이 아니었다. 이건 고통이었다. 많고 많은 고통. 이 짓을 한 사람은 정말로 아프고 외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신지는 이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무시해왔다.


아스카를 만난 뒤 처음으로, 어쩌면 아스카가 자신을 증오할 권리가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지는 그런 취급을 받아 쌌다. 아스카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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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에에전 챕터에서 러시아 외무장관한테 겐도가 요구했던 '스페어'는 코어를 말하는거였음. 뭔 수를 쓴건지 러시아쪽에서 코어를 확보해놓고 있었던 모양임. 미국에서 건조되던 양산형기를 미국이 어맛 뜨거라 하면서 겐도한테 떠넘기니 마침 예비 전력이 필요했던 겐도가 그 일환으로 러시아쪽에서 약속 받은 코어를 거기에 집어넣어서 전력화하는 것.


미사토에 대해 하고 있는 평가가 미사토 챕터에서의 모습과 대비되는 것도 재밌는 부분


신지는 처음으로 아스카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알게되고... 미사토가 어떤 결정을 염두에 두고 묻는건지는 꿈에도 모른채 잘못된 사인을 준다


아스카는 이제 돌아오고 싶은데


7장은 이제 한 에피소드 남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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