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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팬픽] 번역/ 에반게리온 제노사이드 8-3

ㅇㅇ(14.6) 2021.08.08 02:04:41
조회 789 추천 25 댓글 14
														

저녁약속도 파토난김에 많이 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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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신 요코즈카는 산전수전 다 겪은 눈에도 유별나게 난장판이었다. 말인즉슨, 미사토에게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은, 지구상 어떤 최신식 항만도 해외원조 선단을 출항시키면서 동시에 두 척의 슈퍼탱커 화물선과 호위선단을 입항시키면 이런 난장판을 피할 수는 없을거라는 것이었다. 정부에서 하는 일이 다 그렇지만, 정말 난잡하기 짝이 없었다.


8호기를 수송해온 미국 선단은 이제 거의 이틀째 입항해 있었지만, 항만청장은 절대 다른 작업을 중지하지도, 이쪽에 더 많은 자원을 할당하지도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미사토는 12시간 교대근무라는 극약조치를 해야했고 그 결과 현재 이 근방에서 미사토는 가장 악명높은 인물이 되어 있었다.


8호기 기체 자체는 이미 하역되어 네르프가 가져온 특수 화물차량에 실려 있었다. 에바를 옮기는건 다른 작업에 비하면 오히려 쉬운 일이었다. 스페어 파츠들, 보급품, 그외 각종 잡다한 화물들은 전부 따로 내려서 재분류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원조 선단과 크레인을 돌아가며 써야하는 것도 작업 속도에 영향을 줬다.


거기에 언어장벽의 문제도 있었다.


미국에서 파견된 인원의 대부분은 군인 혹은 네르프 3지부 직원들로, 일본어를 읽거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본부 인원 중 영어 구사가 가능한 사람은 직급과 역량에 상관없이 통역으로 바쁘게 불려다니고 있었고 모두가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짜증의 한계치에 빠르게 근접하고 있었다. 미사토 포함.


지금 미사토가 플라잉 뱅가드호의 함교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와중에도 이동 중인 지게차 앞에 누가 크레이트를 떨어트려 난리가 났다.


예상대로, 크레이트 앞에 모여든 사람들은 물건을 줍기는커녕 서로 손가락질해대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미사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지난 며칠간 거의 쉴 틈도 없이 일해온터라 하역 작업이 끝나가는 것이 정말 다행처럼 느껴졌다. 현재 입항해 있는 선박 중 가장 덩치가 큰 플라잉 뱅가드호는 미국 장교들의 본부처럼 사용되고 있었지만, 함교는 지금 필요 최소한도의 인원만 남아 있었다.


지금 미사토의 바로 뒤에 서있는 사람도 미국 장교였다. 호위나 뭐 그런건 아니었지만, 미사토가 승선한 이후 쭉 감시역 비슷한 역할로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동이랍니까," 바로 그 인물, 윌리엄 D. 포터 중위가 영어로 말했다. "기획 단계에선 훨씬 매끄러웠는데 말입니다."


"원래 그런거에요." 상대가 일본어를 알아듣는 몇 안되는 인원 중 하나였기에 미사토는 일본어로 대답했다. 그렇게 기분이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했다. "제가 그런건 또 많이 겪어봤거든요."


"물론 그러시겠죠." 포터가 씩 웃어보였다. "그.. 이전 작전들 모두 브리핑 받아봤습니다."


미사토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도 그렇게 임기응변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아래쪽 혼돈의 도가니를 엄지로 가리켜보인다. "최소한 일정은 따라잡아서 다행이에요."


"예, 그나마 다행이죠. 항만청장도, 당신네 정부도 조용했으니 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 정부하니 생각난건데, 내무성쪽 친구는 오긴 했대요? 가만히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나카지마 말씀하시는거라면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겁니다. 별로 도움은 안되는 친구더군요."


"방해라도 된단 말인가요? 우리, 사실 정부랑 사이가 좋진 않거든요."


"그렇진 않습니다. 악의보단 무관심에 가까워보이던데요. 형식상 문서에 사인이나 해주는 정도의 역할이니까요. 저쪽에서 망칠 수 있는 껀덕지도 없을겁니다." 그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아니, 그럴 여지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냥, 예상했던 것보다 정부쪽 반응이 뜨뜻미지근해서 그래요. 네르프와 일본 정부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거든요. 내무성쪽에서 훼방이라도 걸어올줄 알았는데, 뭐, UN도 이 일엔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으니 갈등은 피하려는거겠죠. 중국에서 그런 일이 있은 뒤론.."


"네르프가 원하는건 그대로 이뤄진다. 아주 멋진 신세계 아닙니까."


미사토는 그 멋진 신세계는 50만명의 시체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생각해보면 그보다 이전의 15년은 30억명의 시체 위에 세워진 것이다.


"카츠라기 소령님?"


미사토와 포터 모두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무성의 검은 제복을 입은 나카지마 준이치가 함교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매우 지친 모습이었다. 갈색 피부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슬링으로 고정해놓은 팔이 뻣뻣했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무슨 일이죠, 나카지마 요원?" 미사토는 억지로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차라도 한잔 하시겠어요?"


나카지마는 두 레이더 콘솔의 사이를 비집고 통과하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레이더 통제요원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봤다.


"죄송합니다만 그럴 여유는 없겠습니다. 잠시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미사토의 앞에 도착하자 하는 말이었다. "밖에서, 둘이서만?"


미사토와 포터는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곤, 미사토는 어깨를 으쓱했다. "예. 어차피 바람 좀 쐬고 싶었던 참이라. 낮은데로 내려가면 저격 위험도 줄고."


농담에도 나카지마는 웃지 않았다.


둘은 밖으로 나갔다. 갑판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둘의 발걸음 소리가 함교를 둘러싼 금속 외부통행로에 시끄럽게 울려퍼졌다. 플라잉 뱅가드호는 에반게리온의 수송을 위해 임시 개조된 상태로, 일반적으로 컨테이너들이 실려있을 전면 갑판엔 고정용 핀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8호기를 싣고 온 관이 아직도 그대로 놓여 있었다. 에바 기체가 꺼내진 지금 관에는 안정을 위해 물이 주입되어 있었다.


나카지마는 계단의 바닥 끝에 멈춰서더니, 미사토보고 지나가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미사토는 왼쪽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섰다. 둘은 이제 배의 좌현, 부두를 내려다보는 위치까지 와 있었다. 밑으로는 형형색색의 차량들이 오합지졸처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못해도 백명은 될 정도의 사람들이 제각기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눈 닿는 곳 어디에도 콘크리트와 강철과 선박들로 가득했다. 군함들, 화물선들, 작은 예인선들. 저 멀리에는 거대한 방수천막 셋이 8호기를 가리고 있는데 어이없을 정도로 서커스 천막처럼 보였다.


평소 입고 다니던 붉은 재킷도 없는차라, 햇살이 맨 어깨에 따갑게 내리쬐었다.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캡 모자를 쓴 것이 어느정도 도움이 됐다. 아버지의 유품 십자가가 가슴 사이에 놓여 검은 바다 위의 하얀 섬이었다. 제공된 작업복을 거절한터라 짧은 검은 드레스에 갈색 앵클 부츠를 차려입은 상태였다.


공기 중의 소금기가 얼마나 짙은지 입에 짠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온갖 중장비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제멋대로 외쳐대는 일본어와 영어의 소용돌이가 아주 혼란스러웠지만, 밑에서 벌어지는 혼란에 맞먹을만한 무언가가 지금 앞에 선 요원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의 온 몸이 뻣뻣했다. 이 날씨에 팔도 많이 불편할 것이다.


"대화가 하고 싶으시다고요?" 미사토가 먼저 운을 뗐다. "저 오늘 많이 바쁜것만 알아두세요."


"알고 있습니다. ...아마 정직하게 말하는게 낫겠지요." 그의 목소리엔 불안감이 섞여 있었지만, 그는 떨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 임무에 네르프를 염탐하는게 포함되어 있는건 아마 소령님도 아실겁니다. 별로 비밀이랄 것도 없죠. 그래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 아무 이유없이 보내지는 스파이는 없겠죠. 정직하게 말씀하신다 했으니 한번 들어나봅시다."


나카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 오랫동안 내무성은, 별 근거는 없이, 이카리 겐도를 위험인물로 간주해왔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자라고요. 그러니 내부에 누군가를 심어놓는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일본 국민에 대한 의무나 다름없는 일이었죠. 유감스럽게도 기만책을 동원해야하긴 했습니다만."


"걱정마세요. 아무도 안 속았으니까. 당신이 첩자인건 누구나 다 알고 있었어요. 실력이 영 아마추어 같으시던데."


"그게 문젭니다. 전 정보원 훈련 같은건 일절 받아본적이 없습니다. 제 입장에서도 갑자기 떠맡은 일인겁니다. 아무래도 윗선에선 카지를 잃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갑자기 나온 이름에 미사토는 가슴을 뭔가로 찔린 것 같았다.


"카지랑 아는 사이였어요?"


"지금 이렇게 온 것도 카지 때문입니다. 아는 사이였다고 하긴 부족하죠. 깊은 사이 같은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여러번 같이 일해봤습니다. 이것저것 평범한 현장 일들. 서류 작성하고, 연락선 유지하는 것들 말입니다. 특별한건 아니였지요. 몇번인가 소령님의 이름도 들었습니다. 사무실에 사진도 한장 갖다놓고 있었어요.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미사토는 경고하는 눈빛을 보냈다. 이 주제에 대해 얘기할땐 단어 선정에 주의하라는 신호였다.


"카지가 소령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고만 말해두죠. 그는 그렇게 쉽게 남을 믿는 부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아마 둘 사이의 관계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을거라 생각합니다."


"사랑했어요." 갑자기 밀려오는 기억들에 미사토는 저항하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나카지마 따위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었지만 그런건 이미 상관 없었다. 카지에 대한 감정을 부정하고픈 생각도 없었고.


"유감입니다."


어째선지 미사토는 그가 진심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괜찮아요. 사랑을 기억하는 대가가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으니까."


"소령님은 강하시군요."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라고 미사토는 거의 말할뻔했다. 가슴속에서 뭔가 무거운 것이 밀치는 느낌이었지만, 미사토는 감정을 다스리고 나카지마를 차갑게 쳐다봤다. "그러니까, 카지가 날 믿었으니 당신도 날 믿겠단건가요?"


"그 비슷합니다." 나카지마는 심호흡을 하고, 시선을 돌렸다. "전 요즘 화를 많이 자초했습니다. 군에 있을땐 쉬웠지요. 명령만 따르고, 쏘라면 쏘면 됐으니까요. 이건, 내무성에서 일하는건 다릅니다. 명령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명령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럼 군에 남았으면 됐잖아. 하고 생각하는 미사토였다. "웬지 중국 사건이 언급될 차례라고 느껴지네요."


"그렇습니다." 나카지마는 침울해보였다. "클루게 무사시는 그 일의 책임이 이카리 겐도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그렇게 보고하지 않은게 잘못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는 이를 악물고 어깨를 치켜들었다. 고통이 역력했다. "그래서 이렇게 된겁니다."


미사토의 속이 요동쳤지만 몸은 여전히 차분했다.


"당신을 쐈다고요?"


"제 총으로요. 사도가 공격해오기 직전 아침에. 어떤 증거도 없었는데, 어쨌든 이카리가 벌인 일이라고 합디다. 결과를 그렇게 정해놓고 증명하려고 지금도 애쓰고 있죠."


미사토는 그런 부류들을 알고 있었다. 클루게 무사시 같은 인물이 평판 그대로 행동하는건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사실 의문이 생기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건데, 왜 당신을 그냥 죽이지 않은거죠?"


"제게 무슨 친구가 있다고 그러더군요." 멀쩡한 쪽 어깨를 으쓱하는 나카지마. "무슨 소린지는 저도 모릅니다, 정말로. 그렇게 강한 친구가 있었으면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을거에요."


"친구가 고통 받길 원하는 부류도 있는 법이죠. 뭐, 당신 상황이 안좋은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인데, 그럼 왜 도망치지 않은거죠? 아니.. 왜 아직 네르프에 정식으로 배치되어 있는거죠?"


"이카리 때문입니다."


미사토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카리는 당신 목표물 아니었어요?" 몇가지 가설이 동시에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말이 되는건 하나밖에 없었다. "아. 전향하셨구나?"


나카지마는 조금 불안한 모습이었다. "예. 대충 비슷합니다. 뭐, 대강은. 사도 공격 며칠 뒤에, 저를 터미널 도그마에 데려가서.. 제안을 하나 했습니다. 그를 위해 일하면 해고되지 않게 도와주겠다더군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쪽 업계에서 해고라는건 직장에서 잘린다 정도에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카리도 별로 나을건 없었습니다. 총을 들이밀고 한 제안이었으니."


"잠깐만요." 미사토는 손을 들어올렸다. "터미널 도그마? 그럼 당신..."


나카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봤습니다. 대체 뭐였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다 봤습니다."


"눈이 몇 개였죠?"


"일곱개."


진짜로 본거잖아. 젠장.


미사토는 뭐라고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이카리 겐도가 심심풀이로 그런 비밀을 이 자에게 보여줬을 것 같지는 않았고, 이 자가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다면 굳이 터미널 도그마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에게 와서 털어놓을 이유도 없어보였다. 정말로 내무성과 네르프 사이에 끼어 오갈곳 없는 처지라면 자신에게 이렇게 온 것도 이해가 됐다.


"그래서, 사령관의 제안을 받아들였단거죠?"


"그러지 않았으면 여기 와있지도 못했을겁니다. 대단한 특수요원 같은건 못되는 몸입니다만, 총을 들이밀고 '제안'을 하는게 무슨 의미인지는 저도 잘 압니다. 거절하면 죽음뿐이죠. 전 죽고싶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구석에 몰렸단 사실도 잘 알고 있고요."


"보호해달라는건가요?" 들은 말에 기반해 결론을 내려보는 미사토. "지금 하는 말이 그건가요?"


나카지마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부담을 지우려는게 아닙니다. 그래도 제가 살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단건 압니다. 제 뒤를 봐줄 사람 같은것 말이죠. 믿을 수 있는 사람."


"신뢰는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뭔가가 아니에요. 특히 나에게선." 미사토는 난간을 밀어내며 팔짱을 꼈다. "훈련은 못 받았어도 대충 상황 파악은 할 수 있겠죠? 한번 보여봐요. 당신이 내게 뭘 제공할 수 있는지."


나카지마는 잠시 망설였다. "제가 인맥이 화려한건 아니지만, 정부쪽에 아는 사람이 없는건 아닙니다."


"말단 공무원들한텐 관심 없어요." 미사토의 목소리가 냉담했다. "더 내놓을거 없어요?"


미사토는 잠시 기다렸다. 완전한 무표정으로 나카지마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무자비하게 내리쬐는 태양에 둘의 피부에 땀이 맺혔다. 부두쪽에서는 시원한 해풍이 불고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배의 금속 표면이 빛을 굴절시켜 난로처럼 만들어버리는 것 같았다. 윤활유와 휘발유와 소금 냄새가 마구 뒤섞여 공장에서 날법한 악취가 풍겼다. 그것은 모종의 자백제 같았다.


"없습니다." 나카지마는 손을 펼쳐보였다.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제스쳐. 항복 선언. "제 몸뚱아리뿐." 미사토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한발짝 물러났다.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가 몸을 돌려 계단 방향으로 몇 걸음 간 시점에서, 미사토가 불러세웠다. 


"진심인거죠?" 미사토는 팔짱을 풀고 한걸음 다가섰다. "내가 돕지 않으면, 죽는다는거?"


나카지마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심입니다."


미사토는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신뢰성을 증명한 적이 없는 사람을 믿어줄 이유가 없다는건 알고 있었다. 여러번 순진한 이상에 기대를 걸었다가 배신 당해본게 미사토였다. 여러번, 사람들은 미사토를 기만하고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해먹었다. 미사토가 저지른 실수에 주변인들이 대신 대가를 치뤘다. 세상은 그렇게 잔인하고 용서가 없었다.


미사토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미 실망을 안겨줬다. 앞으로도 계속 이고 가야할 죄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그 경험들이 그녀를 잔인한 여자로 바꿔놓지는 않았다고 세상에 증명할 기회였다. 어쩌면 정말 함정일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른다. 그걸 알 방법은 하나뿐.


"좋아요. 난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믿어야 할 이유도 조금도 없어요. 최소한 한가지 사안에 대해선 거짓말이 아니란건 알지만. 그래도, 내가 거절해서 죽었다 같은건 용납하지 않겠어요. 지금으로선, 한가지만 경고해두겠어요. 내가 당신에게서 뭔가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오면 반드시 받아낼거란거. 아무것도 공짜로 주는건 아니에요."


"해볼 수 있는대로 해보겠습니다."


"그걸론 부족해요. 당신 총 쓸 줄은 알죠?"


"네. 원래 육군에 있었으니까요."


"아." 미사토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머리가 그래서 그 모양인가보네. 그 외 몇가지도 설명이 되고. 뭐, 어떻게든 쓸모는 있겠죠. 현직 관료보단 전직 군인이 더 나으니까."


나카지마는 미사토의 유머를 공유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일단 작게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전형적이기까지 했다. 미사토는 군에 있던 시절 자신도 똑같이 진지하고 비장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렇게 비난할거리는 못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이 대화는 전부 비밀이에요." 덧붙이는 미사토. "최고기밀 취급. 이카리 사령관이나 에반게리온에 대해서도 묻지 말고. 그런건... 당장은 말해줄 의향 없어요. 첩자 문제가 좀 심각했으니까."


"이해합니다." 나카지마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고맙습니다."


미사토는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솔직히 내게 뭘 바라는건지도 모르겠으니까." 차라리 정직하게 말해주는쪽이 나을 것이다. "내가 뭘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작전부장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이미 어지간한 사람들 이상은 해주셨습니다." 나카지마는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눈에 띄게 기분이 나아진 모습이었다. "혹시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조금 사적인겁니다."


어깨를 으쓱하는 미사토. "선만 넘지 않는다면."


"대답 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전.. 알고 싶습니다. 이 일, 왜 하시는겁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할때, 이 모든게," 부두와 배와 모든 혼란에 손을 가리키는 나카지마. "견딜 가치가 있다고 결심하는 것, 어떻게 하시는겁니까?"


"왜 묻는거죠?"


"왜냐하면.. 총에 맞은 뒤로, 저 스스로에게 계속 그 질문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삶은 언제나 구조적이었습니다. 의무만 다하면 됐습니다.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 명령들에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저는 그런 것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버지. 피흘리는 자신을 탈출 포드에 뉘어주던 그 모습. 신지와 아스카의 미소 짓는 모습. 제발 그렇게 되어줬으면 하고 미사토가 바라는 모습으로.


미사토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꼭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 직접 말로 표현함으로서 자신의 결심도 다시 한번 굳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카지마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원래는 아주 이기적인 이유였어요." 미사토가 말했다. "복수였죠. 개인적인 원한. 그래도 요즘은, 그것들에 의문이 가게 만드는 것들을 새로 알았어요." 미사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틀렸던거에요. 그래서 지금은, 생각해보면, 이 모든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건 따로 있어요."


"어떤겁니까? 아니면, 어떤 누군가?"


"누군가." 미사토는 순순히 인정했다. "아주 소중한 두 아이."


나카지마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딱딱히 굳은 그 얼굴이 방금 미사토가 한 고백의 중대성을 인지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제서야, 미사토는 깨달았다. 그가 말한 모든 것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어쩌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은걸지도 모른다는 것을.


미사토는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려다, 한가지 생각이 떠올라 발을 멈췄다. "나카지마씨, 영어 할 줄 아세요?"


"조금이요."


"그럼 저 아래 미국 친구들 좀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미사토는 비장의 무기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부탁이에요."


"왜 함정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거죠?"


미사토의 미소가 커졌다. "그거야, 함정이니까 그렇죠." 그의 괜찮은 쪽 어깨를 두드려준다. "가서 일본식 효율성이 뭔지 한번 보여줘봐요. 정부에서 나왔단 말만 하지말고. 사기 떨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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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 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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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본 정식 일러





















이틀 연속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아스카는 눈을 빤히 뜬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리도 채 가리지 못해 두 발이 다 드러나는 이불을 부여잡고, 어둑한 방을 쳐다본다. 보통 이 시간대에 창문을 통해 들어오곤 하는 시가지의 불빛도 오늘은 다 꺼져 있었다. 오직 침묵과 암흑뿐.


텅 빈 느낌이야. 방이, 주변 공기가, 뭔가 잘못됐다. 달랐다. 아스카 자신만 그대로 남고 나머지 모든게 다 바뀌어버린 것처럼. 2호기의 느낌과 똑같았다.


아스카는 반대편으로 돌아누우며 마치 고치처럼 몸에 이불을 둘렀다. 몸을 꽉 움츠리고, 발을 안쪽으로 구부리면서 두 팔로 가슴을 꽉 껴안는다. 어째선지 눈이 감기지 않았다. 정신이 잠에 굴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한시간 동안 그렇게 있던 아스카는 결국 이불을 걷어차고 등으로 누웠다. 배꼽까지도 오지 않는 짧은 민소매 셔츠에 팬티만 입은 지금 사실상 벗고 있는거나 다름 없었는데도 온 몸이 땀범벅이었고 머리카락이 얼굴에 마구 달라붙었다. 그런데도 또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에바에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건 전투 이후 쭉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하기 쉬웠다. 다시 조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뻤으니. 한동안은 그냥 짧은 악몽 같이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테스트 시점에서 그 이상한 느낌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그 느낌은 이제 더이상 에바 안에서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짚을 수도 없는 느낌이었다. 테스트가 끝나고 아카기 박사에게 불려가 옷을 다 벗고 검사 받을때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전까지는 비밀을 지켰던 아스카였지만, 이번에는 다 털어놨었다. 그 이상한 느낌에 대해. LCL의 바다와 죽은 나무와 이상한 대화에 대해. 전부. 아카기 박사는 전부 다 듣더니, 질문 몇개를 하고는, 그저 스트레스 때문에 본 환각이었다는 처방을 내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아스카는 스트레스에 익숙했다. 이건 스트레스 따위가 아니었다. 마음의 뒤편 어딘가에, 피부의 바로 아래 어딘가에 기생충처럼 달라붙어있는 무언가였다. 가끔은 꿈에도.


그 다음에는 신지에게 물어봤지만, 예상한 그대로 아무 쓸모도 없었다. 껴안아주는 느낌? 아스카는 누가 자기에게 손대는걸 혐오했다. 무슨 어리광쟁이 아이처럼 누가 자신을 안아준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부끄러움에 죽을 것 같았다.


그냥 입 다물고 있었어야했다. 신지와의 대화는 불안감과 걱정만 더했다. 신지의 에바는 아직 멀쩡하다는 것이다. 그럼 2호기에, 혹은 아스카에게, 혹은 둘 다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 밖에 안됐다. 무슨 이유에선지 아스카는 신지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신지가 이해해줄거라고 생각했었다. 신지도 어쨌든 아스카처럼 에바 파일럿 아닌가. 하지만 신지에게 솔직해진다는 것은 신지를 자신에게 더 가깝게 끌어오는 것이었다. 아스카는 그 부분에 확신이 없었다. 자신이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신이 없었다. 다가오는걸 허락해주면 반드시 아스카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아스카의 인생 내내 모든 사람들이 그래왔다.


멍청이. 자기 자신을 꾸짖는 아스카.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했을때 이미 신지를 가까이 끌어들인거 아냐. 이제 신지도 알아. 모를리가 없어. 근데도 이해를 못해.


그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져 몸을 꿈틀거리는 아스카. 아스카는 신지가 알아차리는건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원했다. 뭔가를 원했다. 이 공허감을 가져가줄 무언가를.


어느순간 꾸벅꾸벅 존 모양이었다. 눈을 깜박이자 한번은 방이 회색이 됐다가, 다음 순간엔 색깔이 조금씩 돌아와 있었다. 햇볕이 두통을 불러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스카는 움칫 몸을 움츠렸다.


"아스카!" 신지의 목소리가 얇은 나무판 너머로 망치 같이 두들겨왔다. "아침 준비 다 됐어."


아스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있으면 제발 가버리길 바라면서.


신지의 목소리가, 이번엔 살짝 더 크게, 또 들려왔다. "아스카, 일어나. 월요일이야. 이러다 늦겠어."


"5분만!" 아스카는 고함치며 일어나 화난 시선을 문에 던졌다. 밤이 힘들었던게 신지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원래 아스카에게 신지 탓만큼 쉬운 일도 없었다.


일어나려고 하니 몸이 잘 말을 듣지 않아 팔과 다리를 몇번 쭉쭉 펴줘야했다. 그렇게 하면 마치 얼굴에서 피로가 지워질 것마냥 손으로 눈을 좀 비비고, 바지를 찾아 입은 다음 셔츠 옷매무새를 적당히 정리했다.


어떻게 일어섰는지 스스로도 의문일만큼 피곤하고 힘없이 방을 나오던 아스카는... 문 바로 밖에 누워 잠들어 있던 펭귄에게 걸려 넘어질뻔했다.


아스카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발로 펜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펜펜은 노란 부리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하품하곤 천천히 일어났다. 자기 냉장고가 따로 있긴 했지만 이녀석은 원래 제멋대로 살았다. 미사토가 여러번 같이 데리고 잤고, 아스카도 히카리 집에서 비록 침대에는 못올라오게 막았지만 같은 방에서 여러번 잤으니 두 여자를 자기 짝이나 그 비슷한 뭔가로 생각하는걸지도 모른다. 지금도 주방으로 향하는 아스카의 뒷꽁무니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


신지는 이미 교복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을 홀짝이고 있었다. 아스카와 펜펜이 입장하자 고개를 든다. "좋은 아침."


"왁!" 펭귄이 화답했다.


"그래, 그러시던가.." 손을 내젓는 아스카. 원래도 인사치레에 신경쓰지 않는데 몸도 좋지 않은 지금 그런걸 챙기면 그게 이상할 것이다. "아침은?"


신지가 손가락을 펴보였다. 방향을 따라가보니 가스레인지 위 후라이팬에 스크램블드 에그가 담겨 있고 근처에는 토스트가 올려진 접시가 있었다.


"가져다줄까?"


"아니." 아스카는 그르렁거리며 레인지로 향했다. "직접 가져다먹을 수 있어. 나 그렇게까지 쓸모없진 않거든."


신지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알았으니까 적당히 해."


"난-"


아스카는 고개를 돌려 신지를 쏘아봤다. 신지는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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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 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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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본 




















"사도의 기억 저장고는 복구 불능급으로 손상됐습니다." 강화 유리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이카리 겐도에게 조언하는 리츠코였다. "습득할 수 있는건 거의 없을겁니다."


유리 반대편에는, A호기의 코어 파편 중 가장 큰 조각이 거대한 크레인으로 들려 있었다. 매끈한 표면에 거미줄처럼 금이 퍼져있는 갈색 구체였다. 2호기의 프로그레시브 나이프가 찔러 들어왔던 곳들이 숭숭 비어 있었다. 측면에는 간체자 한자로 '실험용 코어 알파 마크 8'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루는 대상이 대상이니만큼 반대편 실험실은 완전히 밀봉되고 공기조차 모조리 빼 진공상태였다. 어떤 인력도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다. 원격 조종되는 로봇 팔만이 코어의 표면을 왔다갔다하며 스캔하고 있었다.


"상관없다." 겐도가 말했다. "코드의 변이만 확인할 수 있으면 다른건 아무 상관 없어. 그 부분에 대해선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가?"


"코드가 변이된건 사실입니다. 사도는 A호기가 아니라, A호기를 기동시키는 프로그램이었죠. 파형 분석을 할 수 없었던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게 사도가 아니었단건 자네도 잘 알텐데." 그는 몸을 곧추세우고 얼어붙은 시선을 리츠코에게 돌렸다.


"확실히 해두기 위해 쓰는 용어일뿐입니다." 리츠코는 고작 그런 것 때문에 트집을 잡는것이 짜증났다. "자주 말하다보면 거짓말도 쉬워지겠죠."


겐도가 웃은것 같기도 했지만 아마 조명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 그럴지도."


그래,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라고 생각하는 리츠코였다. 이 동네 최고의 거짓말쟁이는 너잖아. "그거야 그렇다치고, 변이가 벌어진 과정은 여전히 조사해보고 싶습니다. 변이의 속도와 심각성을 예측하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하니까요."


"예측불가능성은 복잡한 시스템에는 필연적으로 내제된 일이다." 겐도가 말했다.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어."


리츠코는 유리쪽에서 몸을 뗐다. 초록색 눈이 주변의 멸균된 공기만큼이나 차가웠다. 둘 다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하얀 전신 방호복을 입은 모습이 마치 외계인 같았다.


"그런건 유언으로나 어울릴 말입니다."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여는 리츠코. "아직 알지 못하는게 너무 많습니다. 코드의 변이가 에반게리온을 유전자 단계에서 변화시키는건 확인했지만 그 기전에 대해선 아는게 거의 없습니다."


"정보의 부족은 마기가 어느정도 보완해줄 수 있을거다."


"어느정도는 그렇죠. 하지만 모든 사례가 제각기 너무 특수합니다. 중국 파일럿에 대해 정보가 없는 이상 정신적 상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신체적 상태에 대해서도 분석할 기반이 없습니다. 부검으로는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정보만 확보했을뿐입니다."


리츠코는 이전에도 에바 파일럿의 부검을 해본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몸에 따라붙는 이름이라도 알고 있었다. 이번 소녀는 완전한 미스테리였다. 어린 것은 당연했다. 일단은 건강해보였다. 키와 무게는 쉬운 부분이었다. 시신이 이미 많이 부패해 있어서, 붉은색과 노란색이 섞인 플러그슈츠에서 시신을 꺼냈을때는 냄새가 너무 역해 마스크를 써야했다. 하지만 진짜로 리츠코의 주의를 끈 것은 그 아이의 얼굴이었다.


아마 예쁘장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한때는. 죽은 뒤로는 이제 검게 부어올라 있었고 이마로부터 턱까지 길고 얇은 자국들이 쭉 패여 있었다. 리츠코는 반사적으로 시신의 손부터 확인했지만, 손톱 밑에 끼어있는 피부 조각을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 일이 벌어졌을때 플러그슈츠를 입고 있었으니까. 맨손이었든 플러그슈츠 차림이었든 어쨌든 결론이 달라지지는 않는 일이었다. 손톱으로 얼굴을 뜯어내려고 했다는 것은 서판에게 정신이 침식 당할때도 파일럿의 의식이 유지되었음을 의미했다.


맞서 싸웠던거지. 그때, 리츠코가 한 생각이었다. 한톨의 기회도 없는 절망적인 싸움이었지만 어쨌든 이 파일럿은 싸웠어.


알아낼 것은 모두 알아내고 부검을 마무리한 리츠코는 나머지 물건들과 함께 시신을 가방에 넣고 소각했다. 겐도에게 제출하는 보고서에서 이름 부분은 공란으로 뒀다.


"우려하는 것도 옳은 판단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겐도. "하지만 산 자들이 죽은 자들보다 중요한 법. 지금은 2호기와 그 파일럿에 더 집중하도록."


"2호기가 직접적으로 침식되기 시작하면 상황이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리츠코가 말했다. "지금도 이미 미묘한 균형 상태고 어떤 작은 요소도 재앙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벌써 작지만 원인 불명의 신호 불일치가 관측되는 판입니다."


"세컨드 칠드런은 조사해봤나?"


이미 두번이나 했다. 한번은 일주일도 더 전에. 혈액 검사, CT 스캔, 뇌파 검사에 심지어 부인과 검사까지 완전한 정밀 검사를 실행했었다.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다. 서판과의 접촉에서는 어떤 즉각적인 반응도 없었고, 세컨드 칠드런의 심리 파라메터들은 극히 일부 작은 차이점들을 제외하면 독일에 있던 시절 관측됐던 수치들로 복귀되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이부키 중위가 쭉 세심하게 관찰해왔었다. 아스카가 마지막 싱크로 테스트 이후 두통과 설명할 수 없는 '뭔가'를 토로했을때, 리츠코는 또 검사를 해봤다. 결과는 이전과 다를게 없었다. 스트레스와 호르몬 수치가 눈에 띄게 상승한 것 정도를 제외한다면.


검사는 그렇게 문제가 없었지만, 같은 날, 리츠코 앞에서 알몸으로 문진에 응하면서, 아스카는 나무를 언급했다.


2호기를 추가적으로 검사해본 결과 뇌파 불일치 정도의 상승이 확인됐다. 의미 있는 차이를 발생시키기엔 여전히 너무 작은 수치였다. 하지만 그 전 주에 관측됐던 수치에 비하면 확실히 상승한 수치였고, 기준점과도 너무나 달라 마기가 향후의 악화 예측치까지 그래프를 그려 내놓을 수 있을 정도였다. 마기의 분석에 따르자면 대략 1년 후에는 싱크로가 완전히 붕괴되고 2호기와 파일럿 모두 망가져버릴 것이었지만 물론 그 부분은 아스카가 알아야 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 와서는 아스카가 알아봤자 악순환만 배가되어 더 나쁜 결과만 나올 것이다. 정말로 모르는게 약인 상황인게다.


"네.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화도 났고, 속으로만 조용히 덧붙이는 리츠코. "효과는 최소한도입니다. 신체적으로는요. 정신적으로는 아직 버티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게 어떻게 급변할 수 있는지는 이미 아시겠죠."


겐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작동하는 에반게리온을 얻는 대신 지불하는 대가 같은 것이지, 오염의 위험은. 초호기를 노출시키는 것보단 2호기쪽으로 하는게 더 낫다."


당연하지. 리츠코는 생각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기함할만한 일이었지만 이정도면 네르프에서는 일상이었다. 리츠코가 논쟁할 처지도 아니었고. 어차피 본인도 한 배를 탄 입장이었으니.


"파일럿 얘기하니 생각 났는데, 레이는 어떻게 할까요?" 반응이 나올거라 생각해서 꺼낸 말이었지만 리츠코의 예상은 틀렸다.


"내버려둬." 겐도는 차분하고 무감정하기가 조각상 같았다. "영호기는 임무 해제한다. 필요하다면 해체해서 부품을 활용해. 레이는 이미 아담과 융합된 상태다. 지금부터는 내가 직접 나아가야할 길을 인도해줄거야."


리츠코는 충격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걸 줬다고요?"


"그래." 조금의 망설임도, 리츠코의 우려에 대해 조금이라도 신경 쓴다는 기색도 없었다. 리츠코는 스스로도 이 자에게 뭐 다른 것을 기대했나 궁금할 지경이었다.


"제게 아무 말도 없이요?" 충격이 녹아내려 새빨간 분노가 되었다. 목소리에 실려나오지 않게 주의해야했다.


"그래."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몸을 돌려 다시 유리창 너머를 봤다. "이미 레이의 터미널 도그마 출입권을 말소했다. 자네 말대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예상할 수 없지. 레이는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야. 언제든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어야해."


네 마지막 희망이겠지. 리츠코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희망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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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딴 애미뒤진걸 아스카 대가릿속에 넣어놨죠?ㅋㅋ


나카지마가 군 출신이라는 말엔 별 반응 없다가 육자대 출신이라니 아 그럼 그렇지ㅋㅋ 이러는 미사토 반응이 눈에 띔


아스카는 슬슬 정신 오염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거기에 신지를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는 스트레스까지 더해지고


이것저것 코멘트 붙일게 많은 에피소드들인데 시간 늦어서 못하겠다 자러감


내일은 만화 딸린 에피소드다. 그 다음 날에 또 짧은 파트들 묶으면 8장 클라이막스가 그 다음날 나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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