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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팬픽] 번역/ 에반게리온 제노사이드 9-4

ㅇㅇ(14.6) 2021.08.14 22:03:00
조회 971 추천 24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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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만화 파트

(만화 9-4)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잔뜩 화난 것 같은 주황색 석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스카의 기분과 똑같잖아, 하고 생각하는 신지였다.


뒤통수를 노려보는 눈빛이 따갑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아스카는 매우 화나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인상쓰고 소리치고 공격적으로 행동하면서. 그러곤 점심시간 뒤론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어 침울하고 조용해졌다. 신지는 혹시 심기를 거스를까, 이미 타고 있는 불에 기름을 끼얹을까 두려워 쭉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는 해보지 못했지만, 사실 아스카가 왜 저러는지 신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새 파일럿에 대해 들은 것이다. 네르프쪽에서 연락이 왔거나 아니면 학교에서 뭔가를 들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레이에게 어떻게 해서 들었거나. 세번째 시나리오는 조금 현실성이 없어보였지만, 생각해보면 신지는 산성 용액을 내뱉는 거대 거미와도 싸워본 사람이었다. 뭐가 이상하고 현실성이 없고 하는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경위는 상관 없었다. 아는게 분명하다. 신지가 알고 있다는 사실도 아는게 또 분명하다. 그말은 신지가 알면서 아스카에게 말하지 않았다는걸 안다는 말도 됐고. 아마 상당히 짜증이 났을 것이다.


비밀을 지켜야한다는 부담감이 계속 신지의 속을 갉아먹고 있었고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런걸 아스카에게 숨기는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카가 자신을 믿어주길 바란다면 신지쪽에서도 언제나 아스카에게 정직해야하는 것이다. 문제는 잠시 아스카에게 숨기는게 낫다는 미사토의 말도 옳았다는 것이다. 신지는 미사토와의 약속도 지킬 책임이 있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한명은 배신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스카가 이미 알고 있으면 그건 비밀도 아니지않을까?


지금까진 신지에게 물어보는 것도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딱히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지겠지만. 점심시간에 위원장과 말싸움하는건 얼핏 들었지만, 그걸 제외하면 아스카는 하루종일 분노를 터트리지 않고 잘 넘긴 편이었다. 그것도 조만간 끝나고 신지가 혼쭐이 날 때가 올 것이다. 어쩌면 다시 예전처럼 신지를 미워할지도 모른다. 그러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신지였다.


전철역 계단에 도달했을때 신지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아스카가 화내는걸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자기가 뭔가 해서 화나게 만드는게 속이 편할 것이다. 뭔가를 하지 않아서 화나게 만드는 것보단. 신지는 자리에 멈춰서서 아스카가 옆으로 올때까지 기다렸다.


"넌 또 뭐가 문제야?" 아스카가 중얼거렸다. "왜 멈췄어?"


"아스카." 오늘 이름을 불러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말할게 있어."


아스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황빛 석양을 받자 머리카락이 금속을 녹여놓은 것처럼 빛났다. 이것도 석양 때문인지, 눈에서는 파란색이 지워져 있었다. "이렇게 길을 막아야할만큼 중요한 일이야?"


"그..렇다고 생각해." 신지는 옆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아스카가 뒤따라왔다. "미사토씨가 해준 얘기야. 아스카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아스카의 얼굴에 분노가 깃들었다. "미사토가 내 욕 한거지? 그렇게 저녁 식사다 뭐다 연극은 다 해놓고." 그러곤 뭔가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혹시 그날 밤 얘기 미사토한테 한거면-"


"아니야!" 신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날 밤 얘기 전부 한게 사실이긴 했지만. 아니 그것보다 심하다. 미사토가 눈으로 직접 봤지 않은가. "그 얘기 아냐."


"거짓말 하지마!" 아스카의 목소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미사토가 내 얘기 한거지? 그래서 오늘 하루 내 눈도 못쳐다본거지? 뭐라고 했어?"


아스카가 나한테 화났다고 생각해서 못본거야.


신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불편한 얘기를 해야할때마다 나오는 습관 비슷한 것이었다.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만약 아스카가 다 알고 있었던거면 미사토가 자기 욕을 했네마네 하진 않을건데.. "아스카... 몰랐어?"


발을 쾅 구르는 아스카였다. "미사토가 너한테 한 얘길 내가 어떻게 알아? 나 슬슬 화나려고 하거든? 뭐라고 했는데?"


신지는 가방 끈을 꽉 쥐었다. 실수했다는 자각이 슬슬 찾아오고 있었다. "아스카 얘기한거 아냐." 어떻게 말해야하나 고민해봤지만 제대로 말을 짜내는 것이 아스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신지는 고개를 바닥으로 쳐박았다.


아스카는 놀란 기색이었다. "그럼 왜 그러고 있어? 너 그날 밤에 그런 얘기까지 다 해놓고, 그럼 나한텐 말 좀 해도 되는거잖아."


"나도 알아. 미안해. 아스카 얘기는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일이라 그래." 신지는 다른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미사토의 말대로 비밀을 지키는 것은 쉬울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아스카가 자신에게 그렇게 마음을 열어 보였는데, 지금와서 아스카에게 뭔가를 숨기는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스카가 알았어도 몰랐어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말해주는게 옳은 결정이었다.


"고통스러워?" 아스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아스카에겐 알 권리가 있어, 신지는 자신에게 상기시켰다. 어차피 곧 알게될거야.


신지는 심호흡을 하고, 뱃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도 무시하고, 모든 것을 말했다. 그러곤 아스카가 폭발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스카의 반응은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눈이 좀 커지고, 놀란 표정이 조금씩 분노와 당황으로 바뀌는 정도였다.


혹시 이 사태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거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신지였다. 아님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거거나.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이전 신입을 죽이고, 그 전 신입을 불구로 만든 것은 아스카는 아니지않은가. 신지가 어떤 기분일지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걸지도 모른다. 아스카도 신지를 이해해주지 못하면 세상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일테고.


신지가 이야기를 끝내자 아스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바보, 이런 일로 거짓말 하는거야?"


"내가 한 말은 사실이야." 신지는 최대한 의연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며 고개도 다시 들었다.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나도 좋겠어. 정말이야. 저번에 무슨 일 있었는지 아스카도 알잖아. 내가 무슨 짓 했는지."


아스카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눈빛에는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에반게리온이 더 필요할 이유는 뭐래? 지금 그렇게 급한 상황도 아닌데. 우리한테도 휴가 비슷한거 줘놓은 상황이잖아."


신지는 불안불안하게 말을 이었다. "나도 몰라. 미사토씨 말로는 미국인들이 겁먹어서 보낸거래."


갑자기 아스카가 어깨를 밀쳤다. 신지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나도 미국 시민이야. 아빠가 미국인이니까. 나도 겁쟁이란거야?"


신지는 허리를 펴고 균형을 되찾으며, 최소한 이번엔 아스카가 수건을 두르고 있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안, 몰랐어."


"그러시던가." 아스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비죽였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새 에바가 온다는거지. 그럼, 보자, 아마 메사추세츠 지부겠지? 파일럿은 누구래? 미국인인가?"


"미사토씨도 아직 모른댔어." 신지가 말했다. "아마 학생이겠지. 그, 토우-"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파지려 해서 신지는 말을 돌려야했다. "아님, 카오..."


두 기억에 결부된 고통은 너무 끔찍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토우지는 살아 있기라도 했지만 카오루는 아니다. 카오루는 신지의 손에 죽었다.


생각해보면 아스카가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지 여부도 신지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모르는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아스카의 눈에서 조금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는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아~ 아이다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스카는 짜증난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 오타쿠놈 거기가 빨딱 서서 심장마비 걸려버릴걸. 히카리일 수도 있으려나. 그럼 좋겠는데."


신지는 그 말에 기겁했다. "아스카...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아스카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왜? 어차피 우리가 최곤데. 누가 새로 와봤자 조수 역할이나 더 하겠어. 뭘 해볼 기회도 없을걸. 그리고, 누가 됐든 우등생보다 못하기야 하겠어? 걘 터지는게 일이잖아."


"레이 흉보지 마." 신지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발."


"그래. 그냥 못들은걸로 해. 그래도 너랑 나만 있으면 아무도 더 필요 없는건 사실이잖아. 신입 파일럿이고 뭐고 다 보여주기용 이상은 못될걸."


아스카는 이해하지 못하는거야. 암담한 생각이었다. 세상에 신지를 이해해줄 가능성이나마 있는건 아스카뿐이었다. 에반게리온 파일럿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고통, 상실, 그리고 고난을 이해할 수 있는게 아스카다. 하지만 아스카는 그래주지 않았다. 신지는 거의 원망이 생기려 했다. "그런게 아니라, 이건 ..."


"미사토가 이걸 숨기려고 했다고?" 아스카가 툴툴거렸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러는거야?"


"아스카, 지금 중요한게 그게 아니잖아."


신지는 대체 뭘 바란걸까? 아스카는 원체 자아가 비대해서 골목길 같은 곳에 낑기지 않고 지나가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또, 신지는 무슨 근거로 아스카가 자기를 이해해줄거라고 생각한걸까? 생각해보면 카오루와 있었던 일에 대해 아스카에게 얘기해준적도 없는데. 지금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고. 아스카는 카오루의 존재조차 모를 것이었다.


신지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화가나서 험한 말을 하고 후회할 것 같았다. 아스카는 신지의 변화를 보고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왜 그러는데?" 아스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한테 화내는건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도 알아. 그냥 ..." 신지는 더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집에 가자." 신지는 대충 그렇게만 말하고, 고개를 푹 숙인 다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스카가 앞장섰다. 계단을 올라 승강장으로 가고, 거의 텅 빈 전철에서 서로 마주하고 앉는 동안 아스카가 곁눈질로 계속 쳐다봤다. 아스카가 왜 그러는지는 신지도 몰랐다. 조금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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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쳐다보냐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지는 감히 그럴수는 없었다. 아스카도 딱히 별 말은 없었다. 얼마 후 집에 들어선 뒤에도 둘은 침묵을 지켰다. 신지는 자기 방으로 가 교복을 벗고, 반바지에 빨간 태양이 그려진 민소매 셔츠로 갈아입었다.


숙제는 좀 미뤄도 될 것이었다. 대신 신지는 책가방에서 SDAT를 꺼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곡들을 건너뛰다 신지는 마침내 베토벤 9번 교향곡에 도달했다. 환희의 송가. 카오루의 노래였다. 처음 만났을때 흥얼거리고 있던 곡.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했다. 천천히 해가 기울며 방이 어두워졌다.


신지는 눈을 감고, 여태 수백번은 품었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인류를 말살하려던 존재가 왜 이렇게 아름다운 곡을, 인간의 창조물을 즐겼던걸까하는 의문을. 카오루가 인류에게 기회를 준 것에는 음악의 존재가 작용했던거 아닌가 언제나 의심했던 신지였다. 이런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종이라면 살아갈 가치도 있다는 것이었을까. 카오루 본인은 끝까지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모호하고 암호에 가까워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남겼을뿐. 하긴 그것도 어울렸다. 카오루의 존재 자체가 그랬으니까.


그가 너무 그리웠다. 매일 매일, 너무 그리웠다. 카오루는 정말 특별한 존재였다. 알고 지낸 기간은 짧았지만 그럼에도 많은 것을 공유했다. 신지에게 생명의 가치를 가르쳐줬다. 끝내는 신지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했지만.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상념을 뚫고 들어왔다.


"신지?" 문이 열리고 아스카가 복도에 비치는 햇볕을 받으며 서있는 것이 보였다. 짧은 반바지에 느슨한 톱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문에 아스카가 자기 방에 한것처럼 잠금장치를 걸어놓지 않은게 후회됐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런 것 따위로 아스카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신지는 황급히 일어나 앉았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눈이 쨍했다. "아스카? 왜?"


"너 이상한 짓 하고 있었던건 아니지?" 아스카는 부정할 틈도 주지 않고 초대도 받지 않고 신지의 침대까지 걸어와 몸을 기울였다. 적금발이 맨어깨 너머로 흐드러졌다. 신지가 고개를 들자 아스카가 손을 뻗어 신지의 오른쪽 이어폰을 뽑았다. "리모콘 어딨어?"


신지는 당황해 아스카의 가슴골만 바라봤다. "응?"


"너 대체 왜그래?" 아스카는 몸을 펴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상당히 짜증난 기색이었다. "TV 볼거야. 리모콘 마지막으로 쓴거 너잖아. 내놔."


"펜펜이 냉장고에 들고갔을걸." 그렇게까지 우울한 목소리는 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게 생각처럼 되는 일은 아니었다. "부탁인데 나 좀 혼자 있으면 안될까."


아스카의 입이 비틀렸다. 이마에 주름이 지는 것과 어울렸다. "신입 파일럿 문제 때문에 그러는거지?" 신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마디 덧붙인다. "얘기해볼래?"


신지는 고개를 저었지만 속으로는 확신이 없었다. 아스카는 이 문제를 더 밀어붙여야할지 고민하는 듯 엄한 표정으로 신지를 내려보고 있었다. 어째선지, 조금 이상하게, 신지는 아스카가 그래줬으면 했다. 그날 밤 베란다에서 신지는 아스카에게 그렇게 쉽게 밀려나주지 않았다. 아스카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지금 아스카도 자신에게 그렇게 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이 주제를 생각하고 대화하는 것은 너무나 아픈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무렵 아스카는 이미 몸을 돌려 떠나고 있었다. 문간까지 걸어간 아스카는, 거기에서 갑자기 멈춰 돌아섰다. 아주 단호한 표정이었다.


"내가 지금 나가버리고 그럴 정도로 배은망덕할줄 알았어?" 아스카의 파란 눈이 격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격렬함이야말로 아스카의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이었다. "얼마 전에 난 그냥 비참하게 몸부림치고 싶었어. 혼자 있고 싶었어. 자해하고 싶었어." 아스카가 손을 들어올리자 아직도 멍이 푸르게 들어있는 손등이 보였다. "내가 그랬을땐 혼자 놔두지도 않았으면서! 그래놓고 이젠 혼자 있고 싶어?"


자신이 도움이 됐다는 고백에 기분이 조금은 좋아지는 신지였다. 하지만 그때랑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아스카, 꼭 이럴-"


"날 바보로 알아?!" 아스카가 으르렁거렸다. "뭘 그럴 필요가 없다는거야!"


"내 생각엔-"


"닥쳐. 생각 같은건 다 상관없으니까, 내가 뭘 아는지 말해줄게." 아스카가 허리에 손을 갖다댔다. "너 뭐 때문에 이러는지 알아. 이유를 모르겠는거지. 그러니까 순순히 말하거나, 아님 말할때까지 두들겨패버릴거야."


아무 선택권도 주지 않겠다는건지, 아스카는 아예 방 불까지 켜버리고, 신지가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눈을 깜박이는 동안 성큼성큼 다가와 SDAT를 뺏어가버렸다. 그러고는 침대 옆자리에 앉아, 빤히 쳐다보며 기다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항의해봤자 아무 소용 없을거란 사실을 신지는 깨달았다.


"빨리 말해." 아스카가 신지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명령했다. "말하기 전까진 아무데도 안갈거니까."


"아-아스카..." 신지의 뺨이 뜨거워졌다.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불까지 켜진 지금 아스카가 얼마나 헐벗고 있는지가 노골적으로 다 드러나고 있었다.


아스카는 신지가 얼굴을 붉히는 것도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잔뜩 찡그린 모습 그대로 재촉한다. "말해봐."


물러날 곳이 없어진 신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번에 있었던 일 때문이야." 이제 몰려올 슬픔과 죄책감에 대비하며 신지는 천천히 털어놨다. "저번 파일럿, 카오루, 핍스 칠드런을... 내가... 싸워야 했어. 사도였으니까. 그래도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 내가.. 내가 죽여버렸어. 친구였는데, 죽여버렸어. 그게 너무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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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에게 이런 말을 하는게 어색했다. 하지만 웬지 말을 할수록 여태껏 가슴을 짓눌러오던 부담감도 함께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아스카에게 여태 카오루의 이름도 한번 언급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생각하면 정말 놀랍기까지 한 일이었다.


아스카는 조용히 듣고 있다, 평소처럼 날카롭지는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죽인것 때문에 슬프단 말이야?"


답은 뻔한 얘기였지만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의 기억은 신지의 뇌리에 너무 깊게 새겨져 지금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순간들을 다시 느낄 수 있을 정도였고 가끔은 의도치 않은 순간에도, 꿈에서도 떠오를 정도였다.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내 운명이야, 카오루가 말했었다. 초호기의 손에 꽉 쥐인채로. 신지의 손에 쥐인채로. 그 결과 인류가 멸망하게 되더라도. 하지만 난 이대로 죽을수도 있어. 내게 생과 사는 별 차이가 없는 일이니까. 내 존재를 가치있게 만들어준건 너였어. 고마워.


"신지?" 다리를 쓰다듬는 감촉에 신지의 마음은 현실로, 옆에 앉아 있는 적금발 소녀에게로 돌아왔다.


신지는 몸을 떨며 무릎을 껴안았다. "으-응."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로 답하는 신지였다. "내 손으로 죽인게, 슬퍼." 더는 묻지 않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카, 제발 그-"


"그게 다야?" 아스카가 말했다. "그놈은 사도였어. 너도 알잖아. 죽여야했던거. 어쩔 수 없었던거야."


"내 친구였어." 그거면 다 설명된다는 듯 짧게 대답하는 신지였다. "사도였어도, 그래도 내 친구기도 했어."


아스카는 짜증난 표정이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거야? 옳은 일 한거 맞잖아? 사도는 친구 같은게 아니야. 그렇게 될 수도 없어. 사도는 사도라고. 놈이 죽거나 우리가 죽거나 둘 중 하나야. 중간 같은건 없어. 나.. 그때 병원에 있었잖아. 그놈이 살았으면 나도 죽었을거야. 네가 원하는게 그런거야?"


신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그것보다 싫은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아스카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억울한 일일 것이다. 입원해서 혼수상태로 싸워볼 기회도 없이 죽는 것은.


"그렇지?" 아스카가 말했다. "넌 옳은 일을 한거야."


"아스카라면 그렇게 했을거야?"


"사도를 죽였을거냐고? 당연하지. 에반게리온 파일럿의 의무인데." 아스카는 신지쪽으로 어깨를 휙 돌리고, 한쪽 무릎을 침대 위로 올렸다. 신지는 고개를 돌려 아스카의 시선을 피했다. 아스카의 몸이 더 가깝게 다가와 옆구리가 신지의 다리에 와닿는 것이 느껴졌다.


신지는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목소리도 속삭임처럼 나왔다. "아니, 그런걸 물은게 아니야. 가까운 사람을 죽였을거냐는거야. 친구라고 해도 죽였을거야?"


아스카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신지의 질문만이 둘 사이의 공기에 기묘한 냄새처럼 어색하고 불편하게 걸려 있었다. "난..." 아스카는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그러고 또 잠시 망설였다. "알고보니 사도였다면. 그렇게 할거야."


신지는 아스카의 솔직함에 감명받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만약 그게 친구라도? 위원장이라도? 소중한 누군가여도? 나라도?"


"그게 대체 뭐야."


"제발, 아스카. 대답해줘. 아스카라면 그런 상황에서 죽일 수 있어?"


아스카는 잠시 입술을 앙물고 생각에 잠겼다. "응. 그렇다해도." 마침내 대답하는 아스카의 표정이 너무 씁쓸하고 혐오로 가득해 신지는 질문한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에바 파일럿으로서 우린 의무를 다해야 해. 결국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이건 전쟁이니까. 우리 아니면 적이 죽는거야."


신지는 그래도 납득할 수 없었다. 아스카는 한번도 그런 결정을 내려야하는 입장에 서본적이 없으니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친구를 손에 쥐고 짜부라트려 죽여야하는 상황에 처해본적이 없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야." 신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말이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카오루군이 죽어선 안되는거였어. 뭘 위해서? 대체 왜? 다들 살아봤자 서로 미워하고 상처만 줄 뿐인데. 고작 그런걸 위해서 카오루군이 죽어야 했던걸까? 아스카... 카오루군이 죽는다고 해결된건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나아진게 없다고.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희생해줬는데, 그래서 내가 뭘 했어? 미사토씨한테 상처 주고, 아스카에게 상처를 주고, 레이에게 상처를 주고.. 카오루군의 희생을 아무 의미 없는 일로 만들어버렸어. 차라리 내가-"


"그만해!" 아스카의 고함소리가 어찌나 크고 급작스러웠는지 신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너 딱 거기서 멈춰, 바보 신지! 그딴 말은 절대 허락 안해줄거니까!"


신지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잖아."


"그만하라니까 좀!" 아스카는 몸을 돌리더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좀 너무 가까이. "그런 소리 하지마! 어떻게 감히 그런 소릴 할 수 있어! 넌 지금 살아있고 그놈은 죽었어, 네가 그놈 때문에 고통 받아야할 이유도 없는거야. 넌 사도를 죽인거고 그건 옳은 일을 한거야. 안 죽였으면 그놈이 우릴 죽였을거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뻔히 아는 일이라고."


"아스카..."


"너 바보야?" 아스카는 이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얼굴이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죽고 싶으면 그냥 베란다에서 뛰어내려버려! 그렇게 뛰어내리면서 뒤에 남을 사람들 목소리를 들으며 고통받아보라고! 널 생각하는 사람들 신경은 하나도 안쓰는거지! 그렇게 힘들어서 더는 너 자신을 위해 살 수 없다 싶으면 남을 위해서라도 살란 말이야! 널 그리워해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아스카의 눈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딱히 숨기려고 들지도 않는 것 같았다. "바보야, 나랑 약속 했잖아!"


아스카에게 다시는 상처주지 않기로.


"...미안해, 아스카." 신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아스카의 말이 옳았다. " 그런건.. 아스카한테 상처줄 의돈느 아니었어. 난 그냥.. 아무도 이런 일을 겪어선 안된다고 생각해. 언제나 끝이 안좋으니까. 그럴때마다 또 내가..." 이번에는 신지도 입을 다물고, 머릿속의 어두운 생각을 떨쳐내고 눈 앞의 아스카에게 집중하는데 성공했다. "정말 미안해. 용서해줘."


"너 잘못한거 한개도 없어. 우릴 지켜준거잖아. 그러니까 죽고 싶다 같은 말은 하지도 마. 농담도 안되니까 그냥 절대 입에 담지도 마." 아스카의 목소리는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표정은 아직도 엄했다. "나, 그날 일 아직도 고맙다고 안했지. 그것봐. 그렇게 고맙단 말 한마디 못하는 끔찍한 인간도 있는데 네가 그렇게 자기비하할 일도 없는거야."


"아스카는 끔찍하지 않아." 신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몇 달 전이었으면, 아스카가 막 퇴원해 둘이 하루하루 갈등만 가득하던 시절이었으면 방금 아스카의 말에 동의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아스카는, 미움과 분노로 가득해있던 아스카는 절대 지금처럼 신지에게 와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아스카는 여기 와줬다. 그렇게 있어주며 유발하고 있는 어떤 감정이 신지의 가슴 속 공허한 부분을 채워주고 있었다. "좀 복잡할 수는 있어도. 아니, 많이 복잡할지도.. 그리고 아스카, 나한테 하나하나 고맙다고 할 필요 없어. 난.. 그냥 그러고 싶어서 아스카를 돕는거니까."


신지는 지금 자신이 제대로 말한 것인지도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이게 옳다는 느낌은 있었고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했다. 어째선지 아스카의 얼굴이 붉어졌다.


"바보 신지," 아스카가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넌... 나도 이러고 싶어서 하는거니까."


진지한 표정은 아스카의 진정성에 논쟁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진지한 얼굴에는 아마 이 세상 누구도 아스카에게서 본 적이 없었을 부드러움 역시 담겨 있었다. 아스카의 그런 표정을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권 같은 것이었다.


아스카와 약속했어. 잊어선 안돼. 이제 난 나 하나만 생각해선 안돼.


뭐라도 대답은 해야할 것 같아서, 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아스카가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스카도 아주 살짝 고개를 기울여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알겠다고,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마치 뭔가가 일어나길 기대하는 것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아까처럼 어색한 종류의 무언가는 아니었다.


마침내 아스카쪽에서 먼저 몸을 빼고, 자기 팔을 내려다보더니 손에 쥐고있던 SDAT를 내밀었다. 신지는 그걸 받아들고 시선을 떨궜다. 벌써부터 아스카의 감촉이 그리웠다. 머릿속 일부는 지금이라도 당장 손을 뻗어 아스카를 만지라고, 가깝게 끌어와 자신이 얼마나 고마운지 의심의 여지도 남지 않게 다 알려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직 카오루가 남긴 상처가 아프긴 해도, 언제나 아플 것 같긴 해도, 이제 네 덕분에 피는 멎었다고 말해주라고 하고 있었다.


"이제 괜찮은거지?" 아스카는 신지가 SDAT를 가슴에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응.. 그럴 것 같아." 신지의 대답은 직접 목소리로 전달된 질문에 향한 것이 아니라, 말로 하지 않은, 무언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신지는 다시 눈을 들어 아스카를 똑바로 바라봤다. 자기 감정을 직접 표현할 용기 같은건 없었지만, 그래도 아스카에게 보여주고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 아스카는 미소지으려 해봤지만 잘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어, 이제 부탁 좀 들어줄래? 미사토가 내 욕 했다고 생각한거 미사토한텐 말하지 마. 그거 갖고 또 놀릴거야."


"응. 아스카도 내가 새 파일럿 얘기 해준거 미사토씨한테 말 안하면." 신지는 별로 웃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노력은 해봤다. "부탁이야?"


"그래." 아스카는 꽤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기분도 많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이제 따라와서 리모콘이나 좀 찾아봐." 그 말과 함께, 아스카는 신지의 손목을 낚아채 끌고 가기 시작했다. "같이 TV나 보자. 대신 네가 채널 고르게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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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말미에 각각 아라엘전이랑 카오루 사태 겪으면서 꺾여버린 애들이 그 문제로 드디어 소통하고 서로에게 기대기 시작하는게 너무 감동적인 전개야. 진짜 24화 기반 팬픽을 어떻게 끌고가야할지 정석을 보여주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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