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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에반게리온 : 팅커, 트레이터, 솔저, 스파이 - 094

ㅇㅇ(220.87) 2024.05.12 17:55:10
조회 538 추천 12 댓글 9
														

* * *



  원정을 떠날때만 해도 내심 온천을 꽤 기대했는데, 어째 몸을 담그지도 못하고 이모양 이꼴로 뒹굴고 있다. 예상보다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그것을 용케도 꽤 성공적으로 극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예상치못한 데미지가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냥 피곤하기만 한 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따뜻한 온천에 몸을 푹 담가서 늘어져있으면 딱이었을텐데.’


  애석하게도 그럴수가 없으니 상대적 박탈감이 더 심할 수 밖에. 어쩔 수 없긴 하다. 별다른 보호장비 없이 에바의 기본 사양이 제공해주는 제한적인 보호만 받는 상태로 용암에 다이빙했으니, 이 정도로 그친거에 감사해야할지도.


  눈이 뒤집혀서 각오하고 자시고 할것도 없이 뛰어들은 후에는, 너무 성급하게 용암에 입수했는지 후회해야하나 살짝 고민이 들 뻔 했다. 제 5사도전에서 사도가 가슴을 지지고 LCL용액이 달궈져 끓어오르던 순간 만큼은 아니었지만, 분명 엄청난 고열의 통각이 순화돼서나마 전신을 자극한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신지는 후회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리저리 재지 않고 냅다 뛰어들기 잘 한 일이었다. ‘다짜고짜 뛰어들었는데도 손을 간신히 잡을 수 있었어. 정말 아슬아슬했지.’


  한 끝 차이. 찰나의 순간. 하지만, 엄블리컬 케이블 단선 상황은 신지에게 전투에서 1초는 목숨이 오갈 수 있는 너무나도 큰 시간임을 가르쳐줬다. 그 찰나의 순간을 머뭇대지 않아 간신히 쟁취한 기회. 그랬기에, 너무나 뜨거워 온 몸을 발버둥치고 싶었지만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신경회로가 차단되고, 초호기의 움직임이 정지되며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제일 먼저 확인한것은 역시 그 고통을 감내하는 여유조차도 사치라고 생각해 곧바로 뛰어들게 만들었던 목표. 


  에바 2호기의 한 손을 꼭 잡은 상태 그대로 기동을 멈췄다. 그래서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 상태 그대로 계속 신경이 연결되고 에바의 조종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아스카를 놓쳤을지도 모르겠다. 가라앉는 아스카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악의적인 농담처럼 받아들여도 할 말이 없었겠지.


  돌발사고에 앞뒤 재지 않고 생각없이 달려든 자신을 전력으로 뒷받쳐준 미사토상과, 리츠코상과, 수많은 네르프 스탭들에게 다시한번 마음 속으로 감사를 올리며, 불과 몇 시간 전에 불과한 과거를 오랜 추억을 돌이켜보듯 되뇌이고 곱씹어본다. 


  터무니없이 위험했지만, 남들 앞에서 자랑할만한 무언가를 해냈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 신기록을 세우진 못했지만 신기록을 세운 친구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했다. 


  제일 먼저 나서놓고서는 정작 먼저 의료문제로 실려가는 바람에 2호기가 무사히 건져올려진다던가 아스카가 엔트리플러그에서 나오는 순간이라던가를 볼 수는 없었지만, 무사한걸 알았으면 됐지 뭐. 나중에라도, 무탈한 아스카를 직접 확인했으니 됐지 뭐. 


  ‘그에 비하면 내 몸이 조금 불편한건 사소한 문제겠지.’ 그런 마음으로 온천 료칸 객실 바닥에 멍하니 드러누워, 다다미 장판의 규칙적인 감촉과, 온천 냄새 머금은 산들바람의 촉감에 몸을 맞기는 것이 전신의 피부를 자극하는 이질감이나 열기를 달래는데에 그나마 도움이 되고 있었다.


  엔트리플러그의 기본적인 파일럿 보호설계와 플러그 슈츠나, 완충되어있던 LCL 용액같은 보호장비 없는 상태에서의 ‘기본사양’이 제공하는 제한적인 보호작용 덕분에 ‘입수’ 직후부터 2호기를 낚아채고, 신경 연결이 차단된 찰나의 순간이라도 간신히 버텨낼 수 있었고, 


  ‘구출’ 되자 마자 곧바로 의료용 LCL용액 수조에 담겨 몇 시간이라도 응급치료를 받고 나온 덕분에 병원 신세 지지 않고 여기까지 따라올수라도 있었겠지만, 통원치료의 일환으로 내일 다시 네르프 병원의 신세를 지러 가기 전까지는 다다미 장판과 산들바람의 촉감이 최선이었다. 적어도 신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난 김에 다시 몇 시간 전의 기억을 되짚어본다. 맨 정신으로는 처음 들어갔다 나와본 의료용 LCL 수조. 제 5사도의 침공때 의식을 잃었을때도 이거에 신세를 한번 져 봤었다고 들어보긴 했다. 그때만큼 위급한 상황이라는 판단이 섰다는 이야기겠지. 


  예전에 비해 다소 나을 뿐, 객관적으로 사서 큰 고생 했지만, 그 고생을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다. 선생님 댁에 살던 시절에는 그런 사람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열네살 짜리 아이가 어른들 대신 총대를 매고 나서 총알받이가 되는것이 얼마나 부당한 처우인지 알면거도 이 위험천만한 도시에 잔류하기로 결정하여 에바를 타는 이유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의 이야기인 듯 싶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가치있으며 미안한지 알아봐주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도 그 사람들이 고마우니까.  그들과의 추억과 유대를 이어가고 싶으니까. 그런 소소한 행복을 지키고 싶으니까. 얼굴도 모르고 고마운줄도 몰라하는 불특정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에게 이런 감정적인 유대를 느끼기는 아무래도 힘들었다. 


  조 준위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지. 군인 일을 하는 이유로 직업윤리나 그 고귀한 가치를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학습했지만, 전투의 순간에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를 상기해보자면 결국 떠오르는 것은 바로 옆의 전우나, 고향, 가족이나 친구들 같은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들부터 생각날 수 밖에 없다던가.


  그들도 자신도 목숨 걸고 싸워서, 그런 개인적인 삶의 이유를 지키는 입장에 섰다. 지금까지는 그 결과가 퍽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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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밝고 푸르렀던 쪽빛 하늘은 어느덧 노랗고 그스름하게 노을져 따뜻한 색감이 되었고, 창틀에 한번 걸려들어와 어두운 그림자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방 안을 비추고 있다. 차차 어둠에 젖어들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몸을 일으켜 전깃불을 켜고싶지 않다. 조금만 더 이 자연광을 즐기고 싶다.


  산 속 어딘가임을 주지시켜주는 듯 한 풀벌레 소리, 맥빠지게 까마귀 까악거리는 소리까지도 통증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편안하게 진정시켜주는데 크게 일조해주고 있다. 이 기분좋게 느긋하고 나른한 망중한. ‘평화라는게 별 게 아니야. 이런 게 힐링이지.’


  그런 찰나의 여유를 깨버린 어수선한 바깥의 소리.


  “택배왔습니다! ‘네르프’의 관계자 분? 이카리 신지 씨 계세요?”


  아, 귀찮은데. 이번에도 내가 나서야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네. 여기 네르프에요.” 익숙한 목소리가 먼저 나서주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약간 이질감은 들지만 알아듣는데 지장없는, 외국인 치고는 깔끔한 일본어 발음과 억양. 경비대의 조 준위님이다.


  사인을 해달라거나 하는 뻔하고 의례적인 대화가 오가고, 사람이 멀어지는 소리. 다른 사람의 쿵쿵대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나 싶더니, 스르륵 열리는 다다미방 미닫이문.


  “어휴, 무슨놈의 택배가 이렇게 부피가 크담.”


  “죄송합니다. 저 대신에…….”


  “신경 쓰지 마. 원래 다들 쉬고 있을때 바깥에 살피는게 내 일이기도 하거니와, 신지 군 너도 오늘 고생 많았잖니. 내가 마주친 사람들은 다들 네게 고마워하고 있었어. 아스카도 그럴거야.”


  아스카의 감사인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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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빚 지고는 못 사는거 알지? 큰 빚을 졌으니까, 꼭 갚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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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뜻 퉁명스러워보이는 목소리였지만, 그게 정말로 기분 나쁘다던가 싫어서 그러는게 아니라는 정도는 알만큼 가까운 친구사이다. 누가 보면 몇 달 만나보지도 않은 주제에 참 많이 아는척한다고 비야냥대며 훈수를 둘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십년을 이름만 알고 지낸 사이보다는 훨씬 가깝다고 자평할 수 있었다. 신지도 아무나 위험해 처했다고 용암에 뛰어들 수 있는 성인군자는 절대 아니었다.


  그랬기에 신지는 한 치의 의심이나 망설임 없이, “예, 아스카한테는 아까 감사 인사를 듣긴 했어요.” 리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래. 아무튼, 네가 한 고생에 비하면 내 일 하면서 택배 대신 받아주는게 무슨 대수겠니.” 여전히 근무중임을 보여주는듯, 남들 쉬러 놀러오는 곳에서도 피곤해보이는 군복 차림에 총까지 등에 빗겨멘 조규진 준위는 힘든 내색도 없이 방금 내려놓은 큼직한 택배 박스를 신지를 향해 밀었다.


  “그보다 이거, 네 앞으로 감사부의 카지 상이 보냈더라.”


  “저한테요?” 


  “따로 이야기 된 물건이 아닌가봐?”


  “에… 그러게요. 딱히 뭐 받기로 한건 없었는데…….”


  ‘이렇게 큰 물건을 카지 상에게 택배 받을 일이 있던가’ 싶은 의구심을 품은 채로, 전신을 자극하는 무시못할 정도의 열감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킨 신지가 박스 뚜껑 양 옆을 눌러 테이프를 떼어내자마자, 뚜껑이 확 열리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익숙한, 반가운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펜펜!”


  “꾸왁!”


  “어우야.”


  집 밖에서 만난 반가운 반려동물을 크게 기꺼워하며 안아주고, 신지는 펜펜을 무슨 인형이라도 된것마냥 품에 안고서 잠깐이나마 같이 벌러덩 드러누웠다. 


  부드러운 털이 새삼 안정감도 주고, 몸에 잔류한 용암의 열기와 이질감을 보듬어주는 기분도 들었다. 고양이도 키우지 못하게 했던 ‘선생님 댁’ 시절의 불쾌한 기억이 잠깐이나마 다시 뇌리에 떠올라,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떨쳐내야 했다. 그때라면 상상도 못 할 호사였다. 미사토 상과의 동거생활은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었다.


  “맞다, 그러고보니 얘, 온천 펭귄인가 하는거였지?” 라는 조 준위의 말에, 피로감에 노곤해져 느슨해졌던 사고력이 다시 돌아가는 신지였다. 그러고보니, 기껏 온천에 펜펜을 보내준 이유가 있었겠지. 그리고 굳이 미사토 상이나 아스카 앞이 아닌 나에게 보낸 이유는…….


  “아마도 같은 수컷이라 내게 보낸 거 같은데…….”


  “응?”


  “아뇨. 별 거 아니에요.”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이고, 신지는 펜펜을 몸에서 떼어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짧은 감동의 재회(?)가 끝난 펜펜은 본능이 이끄는 마음의 고향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 모양새였다.


  “펜펜을 료칸 직원 분에게 부탁해서 여탕으로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힘드시면 제가…….”


  “아니야, 아니야. 오늘 하루 고생 많았잖니. 탕에 못 들어가는것도 억울할텐데 누워서 잠이라도 푹 자려무나. 얘는 책임 지고 부장님한테 보낼테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잡일이라도 도와줄 수 있다면 내가 더 영광이야. 너희들에게 벌써 몇 번째 신세를 지고 있는데.”


  펜펜도 오른팔을 신지에게 흔들어보이며 그렇게 멀어졌다. 잠시나마 떠들썩했던 방도 인기척이 멀어지고 다시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예전같았으면 이를 기분 좋은 공허함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지금도 마음이 차분해진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썩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수학여행 대신인데, 기왕이면 다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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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이 멀쩡했어도 여탕에 따라 들어갈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울타리 너머로 이야기를 주고 받을수는 있을텐데.


  남들한테는 말 못할 야릇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이어지는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칸막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라도, 미사토 상이나, 아야나미라던가, 마나, 아스카와 같이 노천탕을 즐길 수 있다면. 아마도 그 딸기향, 사과향이 지금 또…….


  아.


  “팽창해버렸어…….”

  

  이카리 신지, 14살, 어쩔 수 없는 그 무렵 십대 남자아이. 펜펜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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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만난 고기마냥 신난 온천 펭귄의 푸드덕거림은 즐거운 기분전환 소재였다. 능숙하게 헤엄치고 물장구치는 펜펜을 보면서 귀여워 죽으려고 드는 마나와, 그런 마나 옆에 꼭 붙어서 펜펜에게 손을 내밀어보는 레이의 모습이 아스카님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목숨걸고 지키려고 하는 평화라는게 별 게 아니다. 죽을 고생 하며 사도를 해치웠기에 이런 일상이라던가, 지금껏 소녀의 인생에선 별 연관이 없는 줄만 알았던 친구와의 추억이니 하는 것들이 목숨 걸고 지킬만한 진정한 동력이 되고 있었다. 일본에 오고 나서 좋은 것 중 하나가 그런거였다. 그저 상투적 문구로만 달달 외우듯 떠들어댔던 에바 파일럿의 사명과 책무를, 이제는 마음으로 인지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런 감상적인 면모가 자신과 영 인연이 없으리라 생각했던게 불과 몇 달 전 이었던가. 엘리트 파일럿다운 냉철한 이성으로만 움직이던 과거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 할 변화였다. 그런 변화가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변덕스럽다고 해도 상관 없다. 내색 않고 살다가 스스로도 망각했던 모양이지만, 돌이켜보니 난 많이 외로웠던 모양이다.


  그런 감상에 젖어든, 평소보다도 조금 더 느슨해진 마음가짐 때문일까, 노천탕의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맡기며 마나와, 레이와, 펜펜의 광경을 옆에 나란히 앉아 느긋하게 응시하던 미사토에게 그런 말을 건넨 아스카였다.


  “있지, 미사토. 고백할 게 있어.”


  “마음은 고맙지만, 나 남자가 좋은데.”


  모처럼 진지하게 운을 떼었건만 돌아오는 대답이 저따위 저질 농담이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독일사람한테 조크 센스를 지적당하는건 부끄럽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다. 아무튼, 아스카는 가볍게 핀잔을 주고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뭐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어서 김빠지거나 하는 기분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 전에 말헸던 ‘목욕은 생명의 세탁’ 이라는 거 말이야. 처음 들었을때는, 솔직히 되게 오글거렸어.”


  미사토에겐 데미지가 좀 심했나보다. 저렇게 ‘윽’하는 소리를 내면서 동요를 보이다니. 하지만 아스카는 그런 미사토가 왠지 싫지 않았다. 예전같았으면 ‘사는게 서투른 성가신 여자’라는 인상에 기반해서 편견어린 매도를 속으로라도 늘어놨을텐데. 지금은 저런 모습도 나름 재밌고 보기 좋다. 그래. 아까 전의 시답잖은 농담보다는 확실히 재밌다.


  언제부터였을까, 내심 미사토가 한심하거나 귀찮기만 하진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게.


  최근 미사토가 어딘지 달라진 태도로 다가오는걸 성가셔하면서도, 가랑비에 옷 푹 젖듯이 나도 모르게 그 분위기가 스며든걸까. 익숙해진걸까.


  그게 그저 빈말이 아님을 알게모르게 조금씩 깨닿고, 당장 오늘만 해도 간신히 건져올려진 2호기에서 엔트리플러그 해치를 열어 젖힌 직후 제일 먼저 보인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바늘로 콕 찌르면 바로 눈물샘을 터트릴것 같은 낯빛으로 애써 웃어보이던 저 여자, 아니 미사토였기에.


  그런 미사토의 품에 안겨 떨리는 육신과 숨결을 직접 느껴본 날의 저녁이었기에, 그런 중2병같은 이야기에 살짝 공감해줄 여유까지도 생겨버린걸까. 왠지 민망한 기분이 뒤늦게 찾아온 아스카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를 부리며 진심이지만 분명히 과장된 언행을 보였다. 


  이를테면, “근데 적어도 오늘은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다음에 굳이 “후아아아아얽알ㄹ앍…….” 하면서, 기지개를 켜며 한숨을 크게 내뱉던것이 어째 끝으로 갈수록 물기가 섞여 꼬르륵대는 소리로 바뀌어가는 모습이라던가.


  과장돤 행동이었을지언정 몸이 편안해 기분 좋긴 했다. 노천탕에서 느긋하게 기지개를 펴면서, 편안하고 노곤한 기분에 젖어들어 기대고 있던 등이 미끄러지듯 앉은 자세에서 몸을 가라앉히고 있노라면, 따뜻함과 뜨거움의 경계에 있는 딱 알맞은 온도의 온천수가 전신을 적셔왔다. 뽀글뽀글.


  그렇게 눈만 내놓고 있다가 다시 얼굴이 수면 위로 불쑥, 튀어오르고. “푸하아!” 탄성을 내지르며 지긋이 감았던 눈을 다시 떠보았다. 석양이 깔리기 시작한 대자연의 정취. 기분탓인지 야외인데도 오늘따라 모기도 안 보인다.


  “영혼 세척력이 아주 우수해. 적어도 우리 사는 욕실보단 나아.”


  “그렇지? 수학여행 대신은 힘들어도, 언저리에는 비벼보려고 신경 좀 썼으니까.”


  오전에는 손님맞이가 꽤나 즐거웠다가 낮에는 찝찝하다못해 정말로 세상 하직하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 했더니, 저녁나절이 되자 다시 이렇게 천국에 나들이라도 온 기분. 도무지 일관성을 찾을 수 없는 롤러코스터같은, 잊을 수 없는 하루. 그나마 일관성이 있다면 잠수나 물 같은 요소 아닐까. 수영장, 마그마방, 온천.


  그리고 그런 요동치는 하루의 대미를 장식하며 멋지게 마무리해 준 것은, 역시 아무래도…….


  “그 바보는 정말 괜찮은지 모르겠어. 말로는 괜찮다고야 하지만, 미사토도 알잖아. 그런 쪽으로는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해버리는 녀석인 거.”


  따라오는 반응에 농담이 섞여있진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할 노릇이다. 


  “적어도 지금은 괜찮은게 맞을거야. 의무대 쪽은 그런 성격이 아니니까. 그런데 말이야.” 아니, 정정. 슬슬 농담이 섞여들어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솔직하지 못한건 아스카도 비슷하지 않니?”


  “뭐, 잘 아네.” 맞는 말이라 쓴웃음이 절로 배어나온다. “미사토 말이 맞아. 내가 그 바보 입장이라도, 별 일 아니라고 내색 안 했을거같아. 그 이유는 좀 달랐을 것 같지만.”


  독일에서 일로 만나던 시절의 모습을 기억하는 미사토의 입장에서는, 슬쩍 떠 보았는데 선선히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는 아스카의 모습이 의외였다. 그간의 노력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걸수도 있겠다.


  조금 전에, 탕에 머리까지 푹 담궈 입수하던 무렵의 장난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얼굴이 된 아스카의 모습은 미사토에겐 나름대로의 성취라고 할 수도 있겠다. 거의 성공했다. ‘이대로, 앞으로 몇 발자국만 더 내딛을 수 있다면…….’ 새삼 가벼운 긴장감에 입 안이 조금 마르는 느낌. 주변에 물이 이렇게 많은데 마실수가 없다는게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내가 솔직하지 못한 건 독일에서 자주 경험했겠지. 근데 그때 미사토한테라면 그럴 만 했다고 생각해. 미사토도 이견 없지?” 


   말로는 미사토의 책임 역시 지적하고 있고 그것이 실제로 일리있는 이야기지만, ‘돌이켜보면, 세상 모든 것에 대고 기싸움을 하는 것 같았던 나와 여러모로 잘 안맞는 느낌이었지.’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가, 그것이 불과 몇 달 전 자신의 모습임을 자각한 아스카는 낯빛에 스스로를 자조하는 쓴웃음을 지어보일 수 밖에 없었다. 


  설령 지금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내 집 내 방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해 악몽에 시달리기 십상인 피곤한 동네, 피곤한 회사, 피곤한 나라. 


  “그때는 서로 비즈니스 관계였잖아? 쓸데없이 질척대는것도 싫었고, 미사토는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그런쪽으로 예민하기도 했지.”


  아스카와의 관계 재설정이 드디어 급격한 진전을 보이고 있어, 뭐라고 말해야할까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는 미사토가 새삼 아스카의 시선을 의식한것이 그 즈음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아스카의 시선이 닿은 곳은 미사토의 가슴께에서 살짝 아래쪽에 위치한 큼직한 흉터. 


  확실히, 예전의 자신이라면 릿짱한테도 먼저 말하지 않을 소재의 이야기다.


  “아, 이거… 세컨드 임팩트 때 난 상처야. 살아 돌아온게 용했지.”


  “미사토도 다사다난했겠지. 말 안해줘도 대충은 알 만 해.” 세컨드 임팩트의 현장에 있던 카츠라기 조사대의 비극적인 결말을 모르는 네르프 관계자가 몇이나 있을까. 아스카도 그 정도 말을 들으면 금방 상처와 세컨드 임팩트에 얽힌 전후사정을 적당히 유추할 수 있었다.


  문득, 아스카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내가 미사토의 달갑잖은 과거를 유추할 수 있다면, 독일에서 직무상 나랑 그런 관계였던 미사토 역시도. 적어도 내가 넘겨짚는 것 보다는 훨씬 정확하게.


  “미사토도 알고 있지? 나에 대한 이야기들.”


  “아스카한테 실례인건 알지만… 그때 내 직무 때문에라도 불가피하게 알게 됐지.” 


  꺼내기 쉽지 않은 주제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드디어, 조심스럽게 자신에게 말해주고 있는 아스카가 어찌나 고마운지. 어찌나 대견스러운지. 


  만약 아스카의 이런 접근을 받아들일만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더라면, 우리 사이의 관계는 또 얼마나 어떻게 꼬였을까. 아스카에게 또다른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까? 새삼 신지에게 다시 고마움을 느끼는 미사토였다. 적어도 지금의 자신은 그런 접촉 시도에 대해 서툴지언정 준비와 각오는 되어 있었다.


  “괜찮아, 아스카. 독일에서는 어려웠어도, 여기서만큼은 남들한테 조금 기대도 좋아.”


  “흥, 내가 기댈만큼 미더운 사람은 카지 선배 외엔 보이질 않는데?”


  아스카의 저런 반응은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센 척’임을 미사토는 이미 충분히 경험한 바였기에, 여기서 기가 꺾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지금같은 상황엔 여러모로 적절한 인선의 대화상대인 셈이었다.


  “이제와서 의젓한 어른 대접 받을수 있을거라고는 나도 기대 안 해.”


  ‘흐흐, 주제파악은 잘 되고 있네?’ 라는, 대놓고 기어오르는 듯 한 아스카의 반응도 지금의 미사토에겐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나이를 헛으로 먹은 애어른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렇게 먹은 나이도 아예 안 먹은것보다는 경험치가 쌓인듯 싶었다. 사고치고, 후회하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걸어나간게 벌써 29년차. 이럴때 진정성있게 다가갈 정도의 마음적인 여유는 생긴 듯 하다.


  “나도 그렇고, 신지 군도 다들 서툴고 부족한 구석이 많지만……. 그래서 우리끼리는 말이 통하는 구석도 있지 않을까? 화목한 가정에서 나고 자라 인생에 구김살이라곤 전혀 없이 자라온 녀석들이 하는 뜬구름잡는 소리를 조언이나 인생 상담이랍시고 듣는 것 보다는 속 편할 거 같은데.”


  “확실히, 그건 그래.” 


  아스카는 작지만 분명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불과 몇 달 전의 자신이라면 납득하지 못했을 이야기고, 받아들이기보다는 반항하며 마음을 지키려고 했을 그런 이야기였지만, 지금의 소녀에게는 분명 공감할만한 경험이 있었다.


  자기도 나처럼 혼자뿐인 어두운 밤은 싫었다고 털어놓았던, 나랑 비슷한 구석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그 바보녀석.


  그런 바보라도 분명히 의지가 되었던 짧지만 격렬했던 전투중의 상호 보완. 조금씩은 마음을 열기 시작했던 바보 신지를 마침내 친구로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준 제 7사도전 전야의 기억.


  터놓고 이야기해보니 생각보다 나와 많은 닮은 꼴이었던, 나를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뛰어들었던, 목숨을 빚진 믿음직스런 자식.


  신지가 그렇다면, 사는게 서툴은 한심한 여자라고 내심 매도하고 경멸했던 미사토와도 마음의 경계를 내려놓고보면, 아마도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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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안, 미사토.”


  “뭐가?”


  “뭐가 미안한지는 나중에 말 해줄게. 지금은 기분이 좀 그래.”


  이런 일방적이고 제멋대로인, 무례한 사과마저도 좋다고 받아주는 당신이라면 충분히.


  “나한테는 그만하면 됐고, 그보다는 신 짱한테 낮에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이따 한 번 더, 제대로 해 주렴.” 미사토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은 거리를 두고 나란히 앉아있던 아스카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겨서, 자신 옆에 기대게 만들었다. 


 “이때까지 우리 사이는 그런 식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아스카랑 신지 사이는 이제 시작이잖아. 말 해야 할 때 제대로 말 해 두는게 좋지 않겠어?” 


  “응…….”


  조금 당황스럽지만, 지금까지의 미사토에게선 기대해보거나 떠올려본 적 없는 이런 스킨쉽도 나름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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