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은 《철학사 강의》에서 대상에 대한 체계의 성립을 학(學)이라고 했습니다. 헤겔의 이 말은 단순히 주관에서 자의적으로 학의 체계를 생성해낸다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 개념, 즉 이념의 전개가 이미 학의 체계의 성립 준거를 내재하고 있고, 이념의 전개와 합일된 인간 정신이 그것을 포착해내어 새로운 학의 체계를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관념론적인 발상이지만, 학의 체계가 주관 속의 공상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객관적인 개념, 즉 이념의 전개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유에서 학의 체계는,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거꾸로 세운 것과 같은 방향에서, 헤겔의 체계 이론을 거꾸로 세운 것과 같은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변유에서는 물질의 자기운동 상에서 전개된 객관적 체계의 반영의 다양한 양상 중 하나가 학의 체계라고 간주합니다. 물론 여기서 반영되는 것은 그냥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므로, 체계도 사회적 존재의 체계이며, 학문 역시 사회적 존재의 체계를 반영한 것입니다.
객관적인 체계의 운동을 보자면, 그것은 범주 간, 저마다의 특정한 필연적 매개연관으로서 순차적 범주 운동을 구성해냅니다. 다시 말해, 논리적인 범주를 그 나름의 자연적, 또는 사회적 필연성에 따라 특정한 순차로 실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헤겔은 존재논리학에서 개념논리학에 이르기까지 범주 순차적 운동을 구성해내고 그것을 실재의 불변적 운동으로 상정합니다. 이는 헤겔이 각 범주를 변증법적으로 구성해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의 혁명성을 보여주는 것인데, 또한 동시에 그것의 종합에서는 형이상학적, 그리고 관념론적 한계를 보여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반면 변유에서 범주 순차는 물질의 운동에 의해, 헤겔이 구성한 것의 역순의 순차를 가질 수도, 또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순차를 가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물질, 또는 그것의 전개로서 갖가지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특수를 과학적 실천을 통해 연구하고 이로부터 쌍범주 간 반성 관계를 그 본질로 지니는 지양된 존재 규정을 파악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 학의 체계란 설정한 대상의 객관적인 체계상 운동, 즉 체계를 규정하는 범주, 또는 범주는 규정하는 체계의 내적 모순과 연관을 파악하고 그것을 일정한 형식으로 담아낸 것입니다. 여기서 학문을 구성하는 데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두 가지 요소로 역사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이라는 변증법적 범주가 성립하게 됩니다. 논리적인 것이란, 쌍범주의 반성 관계, 개념―사회적 존재의 반영에 의해 성립된―의 전개와 존재규정의 함의를 분석하고 종합해내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것이란, 쌍범주의 이행, 관념상에서 개념의 전개를 근거짓는 사회적 존재의 전개 양상이 필연적 순차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승인하고 그 기초하에서 현재 형성된 쌍범주의 반성 관계와 반영되어 형성된 개념의 역사적 근원을 따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헤겔에 따르면, 대상의 양(量)이라는 존재 규정을 가능하게 하는 일자성(一者性)은 대상의 질(質)이라는 계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유에서는 그 역(逆)도 가능합니다. 어떠한 한 존재 규정이나, 존재 규정화된 쌍범주의 반성 관계의 그 계기와 이행의 순차에서, 과거의 논리적 전개를 따지는 것이 곧 역사적인 것입니다.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간의 관계는 서로 제한하며, 서로 그 동일성을 확보하여주는 본질적인 관계입니다. 두 동일자 간 관계는 역사적인 것은 곧 논리적인 것이 되고, 논리적인 것 역시 역사적인 것이 됨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두 동일자 중 하나가 결여된 ‘학문’은 학문이 아닙니다. 부르주아 학문에서, 특히 부르주아 사회과학에서 학사(學史)를 "철학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고의적으로 축소화하거나 없는 취급하는 현상이 고질적인데, 이는 부르주아 학문의 객관성이 크게 떨어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관점이 없다면 형성된 이론의 발생 기원을 따질 수 없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은 한편으로 논리적인 것에서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역사적인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객관적 대상의 순차상 필연적 운동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특정한 시간 구간에서 객관적인 연관 고리를 가지고 양적인, 동시에 질적인 변화가 수반되었다면, 변화 결과는 그것의 계기가 된 객관적 연관 고리를 내포합니다. 새로운 변화 결과는 역시 순차상 필연성에 근거하여 새로운 규정을 지니게 됩니다. 역사적인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현재를 구성한 규정이 나름의 필연적 법칙성에 따라 형성되었다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현재를 구성하는 규정이 우연적으로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형이상학적 방법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각 규정에 대해서 항상성, 고립성, 불변성을 강조하는 바로 그것으로 말미암아 학문적 객관성의 토대를 완전히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대상을 대하는 태도로서 그 세계관이 문제가 되는 것인데, 학문에 빗대어서 표현하자면 이는 방법론 문제가 됩니다.
경제학을 한다고 하면서, 객관 대상을 연구하는 기본적인 범주인 형식과 내용, 필연과 우연, 본질과 현상, 질과 양 등의 상호 관계를 전혀 얘기하지 않으면서, 다짜고짜 소비자의 심리 경향이 어떻녜, 국제수지의 균형―그나저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저서를 읽어보면 계속 ‘균형’을 언급하던데 도대체 그 ‘균형’이 무엇인지는 절대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소득과 금리는 어떻녜 하는 것은 장황하게 거짓말을 늫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결국 어떠한 학파의 학설을 공부하려면 그 학파의 방법론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수면 위로 떠오른 몇 가지 특징을 집산해서 외워봤자 그것은 올바른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유동이 "단순 부르주아 경제학이라 하여 배척하는 것 같다"고 했는데, 부르주아 학문을 배척하는 이유는 부르주아 학문의 방법론이 200년 전과 지금이나 똑같이 형이상학적 방법론에 기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적 방법론은, 몇 가지 정식, 법칙성, 대상에 대한 형식 규정을 가지고, 그것들을 절충하여 ‘실제적 모델’을 추상해내는 것에 만족하는 것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방법론으로는 객관적 실재의 실제적 운동 양상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떠받드는 수많은 이론적 모델은 대상이 끊임없이 운동한다는 관점이 사상되어 있습니다. 대표적 예로 신고전학파의 방법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랜시스 에지워스―가치 및 가격론에 대해, 로잔느 학파에서 신고전학파로까지의 가교 역할을 하였던 신발라스 일반균형학파에 속했던 학자―의 《수리정신학(Mathematical Psychics)》은 주관적으로 추상된 ‘대상’의 법칙성의 불변임을 강조하고 여기에 자신에 구상한 곡선 모델을 덮어씌웁니다.(오늘날 부르주아의 대표적 가격론인 무차별 곡선은 이 《수리정신학》의 내용을 그대로 복사한 것에 불과) 이 책은 「경제 미적분학」장부터 이미 실재적인 현실성이 없는 가정을 정의로 추상―예를 들어 ‘완전 경쟁 마당’ 도입의 전제로서 "어느 개인이나 무한한 수의 상대방 중 누구와도 자유롭게 재계약을 맺을 수 있다"(?), "어느 개인이나 자유롭게 무한한 수의 상대방과 동시에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등의 식으로―한 다음 기하학적 또는 대수적 방식으로 다음의 증명을 이끌어내는 방법론적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자유로운 계약’조차 그것의 반대항을 항상 내포하고 있으며, 또 그것의 형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을 분석한 다음, 그것의 생성이 지니는 역사적 경로를 모두 추적하는 마르크스에 비하면 신고전학파의 이 대표적 저서는 애들 장난 수준 같습니다) ‘계약 조건’의 성립에 있어서는 고려되는 변수가 완전성을 띠는 경쟁 상태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라는 하나의 기준밖에 없습니다.
그는 부문 간 자본 규모의 차이, 이윤-임금 간 관계, 불변자본 및 가변자본의 비중차 등, 계약이라는 형식의 성립 여부를 가를 수 있는 현실적인 수많은 연관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계약 관계만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지표가 많다는 것을 전혀 모릅니다.
영국 한계효용론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의 《정치경제학 이론》은 에지워스의 책보다는 덜하지만, 한계효용가치설을 일반화하는 서두의 과정을 보면 굉장히 조잡하며, 일부 구절에는 심지어 효용은 노동이 규정짓는다는 글까지 써놓았습니다. 이 구절은 당연히 효용론자들의 인지부조화를 야기―언급한 구절에 대한 알프레드 마셜의 평가를 참조할 것―했고,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숱하게 많은 경제학 교서는 몇 가지 자의적 ‘개념’―표상 덩어리에 불과한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현상을 ‘분석’하려고 하는 갖가지 ‘이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론’의 모든 공통점은 역사적 관점이 없다는 것―심지어 그 ‘이론’을 소개하는 ‘경제학 교과서’조차 그 ‘이론들’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전무함―입니다. 대상의 역사적인 것, 즉 대상의 계통, 개체 발생적 측면을 옳게 담아내야지만 비로소 대상의 운동이 지니는 방향성을 상대적으로나마 확정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위 ‘이론’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유동 선생이 언급한 그 《맨큐의 경제학》(맨큐는 이거 외에도 여러 저서를 썼기에 정확지 않습니다. 이 책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방법론에 기초하여 작성된 문헌이나, 그 방법론 자체의 내용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책입니다)에도 그러한 관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유동 선생이 적어도 사회주의권의 경제학 교과서를 한 번이라도 읽어봤는지는 의문입니다)
제가 이미 위에 헤겔이 지니는 체계의 형이상학적 한계를 지적했죠. 헤겔은 쌍범주 간 반성 관계, 그리고 개념의 전개에서 본질 규정의 역할을 옳게 규명해냈지만, 결국에는 그러한 체계가 하나의 불변의 ‘공식’으로 자리 잡게 되어서, 그것이 실재를 재단하는 절대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실재가 사유 기준을 근거짓는 게 아니라 사유가 실재의 기준을 근거짓는 게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형성 이래 이어져 온 부르주아 학문을 보면, 헤겔보다 훨씬 더 뒤떨어집니다. 헤겔은 반성 관계를 구상함에서 반성 관계의 두 항, 즉 두 동일자가 서로가 서로를 제약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지만, 현대 부르주아 학문은 그조차도 인식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현대 부르주아의 형이상학적 방법론은 실재의 실제적 운동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 하기 때문에 매우 공허한 학설이 됩니다. 혹자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국제경제 이론이 없다고 하는데,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 자본의 국제적 규모의 운동은 자본의 부문 간 이동을 통한 평균이윤율의 형성 과정으로 일반화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부르주아 사회과학이 사회과학의 대상인 사회의 그 필연적 법칙성을 사회가 항상 변화·발전한다는 관점, 그리고 각 규정은 항상 그 내부에 다종다양한 연관을 지닌다는 관점 아래에서 옳게 구상해낸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당연한 귀결로 부르주아 경제학은 현상에 대해서 일말의 예측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하는, 발달하는 기술에 올라타서 자기들이 구상한 본래의 이론을 가상의 차원에 밀어넣어버리는 식의 모습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저의 과문(寡聞) 때문일 수도 있으니, 반대의 예가 있다면 유동 선생은 그 사례를 간단하게 적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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