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를 기습 공격했다. 이른바 진주만 기습 공격이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일본의 동맹인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미국은 이른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 초기의 전황은 일본군이 승승장구했다. 더글라스 맥아더가 지키고 있던 필리핀과 영국의 식민지 버마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와 미국령 괌과 웨이크 섬까지 일본군에 의해 단번에 점령됐다.
(조선건국동맹, 1944년 8월 10일 현우혁의 집에서 만들어 졌다.)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보복 공습을 계획했다. 이 보복 공습이 바로 두리틀 공습이다. 1942년 4월 8일 일본의 수도 도쿄는 대략 16대의 미국 항공기에 의해 폭격을 받았다. 미군 항공기의 공습을 받은 일본 도쿄는 순식간에 혼란과 공포에 빠졌다. 이 공습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이었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부터 일본의 패망을 예상했던 여운형은 미군의 일본 공습을 목격하자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다. 1943년 여운형은 친구 오건영에게 자신이 목격한 미군 공습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건국동맹 서울 조직의 현재 위치)
“지난 4월 18일 미국 비행기의 동경 공습을 직접 목격했는데 미국기의 성능은 일본기 성능보다 우수해 일본기가 미국기를 추적하지 못했다. 동경에서 미국 방송을 들으니 미국도 전쟁 준비에 광분해 최후의 승리는 미·영에 있게 될 것이며, 미·영이 승리하면 조선의 독립이 확실히 가능하고,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독립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전쟁은 장기전이 될 것인데, 내 생각에는 일본의 물자 부족 때문에 뜻밖으로 빨리 종결될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이 미국과 함께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고, 나도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여운형은 미국에서 이승만이 하고 있던 ‘미국의 소리’라는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들었었고, 몇몇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방송 내용을 주변 인사들에게 전달했다. 그 결과 일제가 그토록 은폐하고자 했던 태평양 전쟁의 전황과 해외 독립운동의 상황이 일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조선건국동맹 깃발)
1942년 12월 일본은 여운형을 치안유지법을 포함한 4가지 죄목을 씌워 감옥에 수감했다. 일본이 여운형에게 이렇게 한 이유는 자신들의 침략전쟁에 대해 협력하지 않은 보복적 차원이기도 했지만, 여운형이 일제의 패망에 대해 비밀리에 알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구속된 여운형은 대략 7개월 동안 유치장에 구치되어 각가지 고문을 당했으며, 1943년 여름이 돼서야 풀려났다.
(서울 1945에서 나왔던 조선건국동맹)
감옥에서 풀려난 여운형은 1943년 8월 10일 조동호·이상도·이상백 등과 같은 인물과 만나고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아우르는 조직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결의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조직의 하부를 구성하기 위해 각지에 연락원을 배치했으며, 조직을 넓혀 나갔다. 이 조직이 점차 확대되어 1년 뒤인 1944년 8월에 새로운 단체로 확장 그리고 탄생했다. 그 조직이 바로 조선건국동맹이었다. 여운형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정병준 교수는 1995년에 쓴 저서 <여운형 평전>에서 조선건국동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지금까지는 건국동맹이 1944년에 전격 결성된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건국동맹은 실상 여운형의 형무소 생활시기(1942년 12월~43년 9월)에 구상되었고, ‘조선민족해방연맹’이라는 잠정명칭으로 1년여의 숨 가쁜 준비 작업을 거쳐 조직된 결과물이다. 즉 1944년 8월에 선포된 건국동맹은 1년 이상이 걸린 결과였던 것이다.”
조선건국동맹은 1944년 8월 10일 서울에 있는 현우혁의 집에서 건설됐다. 건국동맹은 ‘3불맹서’라는 원칙을 규약으로 채택했고, 두달 뒤인 10월 8일 자신의 고향인 양평군 용문산으로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여기서 여운형은 또 다른 단체를 조직하는데, 그게 바로 농민동맹이었다. 농민동맹 또한 조선건국동맹과 마찬가지로 조국의 해방을 목표로 활동했고, 징병 및 징용자들을 도피시키고 그들을 반일운동을 전개하게끔 활동하고자 했다. 또한 여기서 여운형은 청년학생들을 조직했고, 여운형이 이런 과정속에서 만난 대표적인 청년이 바로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 그리고 시인이자 <여운형 평전>의 저자인 이기형 선생이다.
(배우 신구가 연기한 여운형, 신구는 서울 1945에서 여운형을 연기했었다.)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은 국내의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를 제외하고 조직 가능한 모든 세력의 힘을 결집시키고자 했다.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노동자, 농민 그리고 학생과 부녀자 까지 모두 하나의 깃발 아래 결집했다. 비록 일제의 철저한 감시 때문에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건 그런 감시와 억압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을 미리 대비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은 1945년 4월 연합국의 샌프란시스코회담과 관련하여 연안에 대표를 파견하고자 했으며,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과도 연락망을 형성하고자 했다.
이렇듯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은 일제 통치 말기에 이런 독립운동을 전개해왔고,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합하고자 했으며, 좌우를 총 망라했다. 여운형의 이러한 노력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한 이후 남과 북을 아우르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으로 확산되었고, 해방정국 초기에 치안과 행정을 담당해나갔다. 안타깝게도 여운형은 이러한 업적에 비해 매우 저평가 당해왔다. 이것은 레드 콤플렉스의 영향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그의 이러한 독립투쟁사가 재조명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한국독립운동사』, 박찬승, 역사비평사, 2014
『몽양 여운형 평전』, 김삼웅, 채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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