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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 [스압]악마와 함께 살기 by 스티븐 뱃첼러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8.08 03:54:54
조회 258 추천 8 댓글 1
														



https://www.youtube.com/watch?v=hdDNgsDGZks&list=PLE4797A5A2FC0076A&ab_channel=SecularBuddhisminAotearoaNewZealand


구글 번역돌려서 정리했습니다. 부족한점 양해부탁드립니다. 지적 많이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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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글 수정1




인간은 감당할수 없는 어려움 앞에서 그 어떤 변화를 생각할수 없고, 스스로가 상황을 바꿀수 있다는 비전을 상상조차 못할때가 있다. 그저 삶이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한다. 이 때 무거운 우울감에 눌려버린다.


단테의 신곡에서 소개하는 지옥의 맨 밑바닥은 거대한 얼음 지대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사탄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가슴까지 뻣어오르는 얼음에 파묻혀있었는데 사탄은 깊은 고뇌에 빠진 모습이었다. 왜냐면 그는 얼음에 완전히 갇혀 옴짝달짝 하지 못한체 오직 차가운 상태로써 텅빈 눈동자를 가졌고 영혼이 없었다. 악마성의 뿌리는 고통과 비참함의 얼어붙음, 실존의 침체된 형태다. 자유로운 흐름과 창조적인 유동성이 불가능한,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힘인 것이다.


종교적으로 악마, 사탄은 방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어로는 대적자이다. 인간의 심리적 언어로는 마비된 정신상태. 폭정에 대한 고통이자 능동적으로 길을 막는 것이다. 그것의 목적은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하게 한다. 인간이 깊은 마음에서 바라는 바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막아 서는 것이다. 지옥의 원래 본성은 출구가 없는 것이다. 그곳엔 절대적으로 무능한 곳이며 수많은 인간이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굴레에 사로잡혀 서로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


불교에서 악마로 등장하는 마라는 살인자를 의미하는데 죽음을 뜻한다. 심리적으로 해석하자면 마라는 인간이 실존하지만 죽음으로 향하게 하는 억압인 것이다. 한 인간이 스스로 발전적이고 성장할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 행동을 억제하는 것이다. 마라는 우리가 가진 집착과 밀접한데 이것은 인간적 추세로 볼 수 있고 인간의 심리적 경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자신, 자아라는 정의에 영속성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며 향상성이 있고 자신의 삶에서 안전하게 느끼게 한다. 마라는 우리에게 소외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며 스스로 진화할 수 없다는 고정된 느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 마치 본질적인 정체성, 현실인양 아주 안정적인 닻을 술렁이는 바다아래에 깊숙이 내리듯 한다고 지적한다. 모든 고뇌와 불만, 좌절의 근원이자 세상에서 겪는 고통 그리고 성취되지 않은 느낌인데 말이다.


부처는 깨어난 자이다. 정화된 사람이고 제약하거나 파괴하는 것을 제거하는 자다. 그러나 마라는 움켜쥐고 닻을 내려 마비된 이미지와 관념에 본능적으로 집착한다. 그리고 분열과 분리, 독립적이며 안정감있는 불멸의 자아가 되는 것이다. 붓다는 이런 마라에 대해 경계와 한계, 끝을 강제하는 자이지만 마라는 우리의 삶을 멈추게 하고 궁지에 몰아 갇힌 느낌을 갖게한다.​


인간이 마라의 지배에 있을 때 특정 한계에 갇히며 어려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거부하며 그것에 고정된 정체성을 부여한다. 마라는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한 이분법적인 개념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유혹적인 먹잇감으로써 거짓된 안정감을 갖은 것 같은 쾌락이 있지만 실은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제한적으로 인식하며 나의 능력? 잠재력?을 가장 깊은 곳으로 가두게된다. 마라는 이같이 인간 정신의 구조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인간은 이것에 사로잡힌다.


불교에서 농부의 모습을 한 마라가 부처에게 질문했다.

"내 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본 적 있습니까?"


부처는

"마라, 당신에게 소란 무엇입니까?"


마라는

"소의 눈은 내 것, 귀는 내 것, 코는 내 것, 혀는 내 것, 몸은 내 것, 소의 마음은 내 것. 소가 있는 광경은 내 것, 소리는 내 것, 냄새, 맛, 생각, 모든 것이 내 것입니다. 소가 날 피하려면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답한다.


​부처가 대답한다.

"눈도 귀도 코도 없는 곳, 몸도 마음도 없습니다. 경치도 소리도 냄새도 정신도 인식도 없는 곳. 마라 당신을 위한 장소는 어디입니까?"


이 이야기에서 부처는 마라로부터 자유가 있음을 지적한다. 당신이 이해하는 방식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 삶, 보이는 것, 생각들이 현실을 단위들로 축소하고 별개의 것들로 분리하여 이해하고 인식한다. 마라는 우리 스스로 제한할 때 이 세계에 집착하여 붙잡고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들 안에 갇히게 한다. 불교는 5가지 장애물을 말한다. 애착, 증오, 무기력, 동요, 의심이다. 불교는 인간이 걷는 길, 경로를 구멍과 같고 공허한 빈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목적이 있는 움직임을 허용하는 길이며 이것은 풍부한 은유로써 받아들이길 바란다.. 이것은 열린 공간이며 장애물이 없는 공허함으로써.. 의견을 포기하는 것, 의견을 버리기, 중도로 설명한다. 비우는 상태는 공허인데 허용하는 공간이다.​


인간의 어떤 행동으로의 가능성, 길을 걸어가도록 하는 발, 움직일 가능성을 의미한다. 다음 단계를 향해서.. 공허함은 생명 있는 생각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의심과 망설임, 집착과 두려움을 넘어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이다. 명상에 들어가 이 길을 찾는 개념은 제한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길은 가능성으로 열어주는 것이다. ​


불교에서 마라는 우리 안에 있는 힘이자 가능성을 차단하고 방해한다. 마라는 일반적으로 붓다와의 대화에 나타났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마라를 물리쳐야 했다. 그때 붓다는 가장 깊은 두려움과 맞서고 욕망, 집착 및 망상과 마주했다. 그가 마라의 군대와 맞선 그 순간부터 각성이 일어난다. 마라가 부처를 스토킹하거나 도발하는 이것들은 붓다가 깨달음 후에 일어났다. 그리고 부처가 죽기 직전까지 일어났다! 계속해서 여전히... 역설적으로 부처는 마라를 물리친 사람이다. 그러나 마라는 지금도 주변에 계속 있다.


이것은 상징적이고 신화적이지만 붓다는 자신의 경험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그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일어나는지, 일어날 것인지를 자유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강력한 힘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부처가 마라와 그 만남 이후 계속 부처를 유혹하나 그는 자신이 끌려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다.


​마라는 떠나가며 이런 이야기를 남긴다..


​-언젠가 까마귀를 본 적 있다. 먹음직한 기름 더미 위에 낮게 떠 있었지. 그러나 그 더미는 그냥 바위로 드러나 버렸다. 까마귀는 그 바위를 먹을 수 없었다. 까마귀는 바위를 싫어하고 떠나가 버렸네.. 난 충분히 먹었어! 나는 그 까마귀처럼 바위를 쪼는 자야, 고타마 싯타르타는 끝났어.


​까마귀가 맛있는 것을 즐거이 발견했지만, 그것을 뚫을 수 없다. 까마귀는 바위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부처의 마음을 맴도는 마라는 사로잡을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빈공간에서 거하는 부처는 부정적인 생각, 자신감 부족이든 뭐든... 지우거나 청산하지 않고 파괴하지 않는다. 부처가 인간의 몸, 심신을 가졌듯 그는 마라의 지배 아래 있었다. 마라는 집착, 증오, 기만, 망상과 같은 신경 생물학적인 은유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일부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가진 부처. 그는 우리와 같다.​ 붓다의 자유는 깊은 수용과 관련 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두려움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이 우리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라보는 것이다. 단지 마음의 게임일 뿐임을... 그것에 기름 더미 같은 먹이를 주지 않거나 재확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스쳐 갈 것이다.


​붓다의 자유는 존재를 보는 것, 바라보는 것으로 구성돼있다. 우리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어떤 충동과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 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것을 이해할 뿐이라고.


부처는 마라에게

- 나는 너를 안다 마라.


​마라는

- 당신은 저를 알고 있어요.


​마라는 사라진다..


​까마귀 이야기에서 해방, 자유, 깨달음의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한다. 우리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제거하지 않고 파괴하지 않는다. 붓다는 경험을 구성하고 경험이 깨어날 뿐이다. (바위로 드러났다!) 붓다는 마라와 동일시 하지 않고 그를 놓아주었다. 우리를 산만하게 만드는 이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본능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때 내가 산만하다는 것을 인식한 후 이해하면서 점점 더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가면 자신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명상에 깊이 들어가면 통제력이 상실될 때가 있다. 어느 정도 의식적인 것들이 희미해진다. 환상이든 뭐든. 마라와 공생하고 있는 것이다. 신경 생리학적으로.. 붓다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깨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의 소명이었다.


현대적으로 볼 때 마라는 삶의 어떤 부족, 권태, 무의미함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어려움을 향해 개방하고 참여하며 행동으로 생명적인 것을 불어넣을 수 있는가? 불성과 마라는 완전히 다른 것인데... 이것은 인간 유기체로서의 은유다. 집착하지 않고, 놓아주며 비우는 것? 인간인 우리는 열거나 닫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붙잡거나 놓아줄 수 있다. 사랑하거나 두려워하는 것.. 이처럼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이런 생각과 정서 등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대립하고 분리하려는 경향들과 이분법의 극한의 것들이며 유혹적으로 논리를 내세우며 악을 투사하기도 한다.




+


변역원본


인간은 크나 큰 어려움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바뀔 수 없고, 그 상태 이상을 상상조차 못 하고 삶이 막혔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궁지에 몰린체 우울한 무거운 느낌과 갇히고 막힘에 눌려버린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의 맨 밑바닥은 얼음 지대였다. 그 중앙에는 사탄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가슴까지 얼음에 파묻혔고 사탄은 깊은 고뇌에 빠져있었다. 왜냐면 그는 완전히 갇혀 얼음에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는 차가운 상태로써 영혼이 없었다. 악마성의 뿌리는 고통과 비참함의 얼어붙음이다. 그것은 실존의 침체된 형태다. 자유로운 흐름과 절대적으로 반대하며, 삶의 창조적인 유동성에 반대하는 힘이다.

종교적으로 악마, 사탄등은 방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어로는 대적자이다. 인간의 심리적 언어로는 마비된 정신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폭정에 대한 고통이며 길을 막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하게 한다. 인간이 깊은 마음으로 얻고자 하는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막는 것이다. 원래 지옥의 본성은 출구가 없다. 그곳은 절대적으로 무능한 곳으로 인간들 각자가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함정에 갇혀 서로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

불교에서 악마인 마라는 살인자를 의미하는데 죽음을 뜻한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마라는 실존하지만 죽어가도록 억압하는 것이다. 인간의 발전적이고 성장하는 능력과 행동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다. 또한, 마라는 특별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집착과 밀접한데 이것은 인간적 추세로 볼 수 있고 심리적 경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라는 우리에게 자신, 자아로써의 영속성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향상성이 있고 삶에서 안전하다고 느끼게 한다. 우리에게 소외감을 들게 하며 진정으로 진화할 수 없다는 느낌이다.

불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런 집착이 마치 본질적인 정체성, 안정적인 닻을 내리듯 한다고 지적하는데 모든 고뇌와 불만, 좌절의 근원이자 세상에서 겪는 고통 그리고 성취되지 않은 느낌이 그것이다.

부처는 깨어난 자이다. 정화된 사람이고 제약하고 파괴하는 것을 제거하는 자다. 마라는 움켜쥐며 닻을 내려 마비된 이미지로써 이런 관념에 본능적으로 집착한다. 그리곤 독립적이고 안전적으로 그런 불멸의 자아가 되는 것이다. 붓다는 마라에 대하여 경계, 한계, 끝, 강제하는 자로 우리의 삶을 멈추게 하고 한계의 궁지에 몰아넣어 갇힌 느낌을 준다고 했다.

우리 삶이 마라의 지배에 있을 때 특정 한계에 갇힌다.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거부하며 그것에 고정된 체 정체성을 부여해 준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한 개념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유혹적인 먹잇감으로 거짓된 안정감으로 사로잡는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누구인가를 제한한다. 나의 능력? 잠재력? 이런 것을 제한하며 가장 깊은 곳으로 가두는 것이다. 인간 정신의 구조에서 우리를 사로잡는다.

불교에서 농부의 모습을 한 마라가 부처에게 질문했다.

"내 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본 적 있습니까?"

부처는

"마라, 당신에게 소란 무엇입니까?"

마라는

"소의 눈은 내 것, 귀는 내 것, 코는 내 것, 혀는 내 것, 몸은 내 것, 소의 마음은 내 것. 소가 있는 광경은 내 것, 소리는 내 것, 냄새, 맛, 생각, 모든 것이 내 것입니다. 소가 날 피하려면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답한다.

부처가 대답한다.

"눈도 귀도 코도 없는 곳, 몸도 마음도 없습니다. 경치도 소리도 냄새도 정신도 인식도 없는 곳. 마라 당신을 위한 장소는 어디입니까?"

이 이야기에서 부처는 마라로부터 자유가 있음을 지적함이다. 당신이 이해하는 방식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 삶, 보이는 것, 생각들이 현실을 단위들로 축소하고 별개의 것들로 분리되어 가득 차 보인다. 마라는 우리 스스로 제한할 때 이 세계에 집착하여 붙잡고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들 안에 갇히게 한다.

불교는 5가지 장애물을 말한다. 애착, 증오, 무기력, 동요, 의심이다.

불교는 인간이 걷는 길, 경로를 구멍과 같고 공허한 빈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목적이 있는 움직임을 허용하는 길이며 이것은 풍부한 은유로써 받아들이길 바란다. 이것은 열린 공간이며 장애물이 없는 공허함으로써.. 의견을 포기하는 것, 의견을 버리기, 중도로 설명한다. 비우는 상태는 공허인데 허용하는 공간이다.

인간의 어떤 행동의 가능성, 길을 걸어가도록 하는 발, 움직일 가능성을 의미한다. 다음 단계를 향해서.. 공허함은 생명 있는 생각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의심과 망설임, 집착과 두려움을 넘어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이다. 명상에 들어가 이 길을 찾는 개념은 제한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길은 가능성으로 열어주는 것이다.

불교에서 마라는 우리 안에 있는 힘이자 가능성을 차단하고 방해한다.

마라는 일반적으로 붓다와의 대화에 나타났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마라를 물리쳐야 했다. 그때 붓다는 가장 깊은 두려움과 맞서고 욕망, 집착 및 망상과 마주했다. 그가 마라의 군대와 맞선 그 순간부터 각성이 일어난다. 마라가 부처를 스토킹하거나 도발하는 이것들은 붓다가 깨달음 후에 일어났다. 그리고 부처가 죽기 직전까지 일어났다! 계속해서 여전히... 역설적으로 부처는 마라를 물리친 사람이다. 그러나 마라는 지금도 주변에 계속 있다.

이것은 상징적이고 신화적이지만 붓다는 자신의 경험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그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일어나는지, 일어날 것인지를 자유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강력한 힘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끝. 부처가 마라와 그 만남 이후 계속 부처를 유혹하나 그는 자신이 끌려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다.

마라는 떠나가며 이런 이야기를 남긴다..

-언젠가 까마귀를 본 적 있다. 먹음직한 기름 더미 위에 낮게 떠 있었지. 그러나 그 더미는 그냥 바위로 드러나 버렸다. 까마귀는 그 바위를 먹을 수 없었다. 까마귀는 바위를 싫어하고 떠나가 버렸네.. 난 충분히 먹었어! 나는 그 까마귀처럼 바위를 쪼는 자야, 고타마 싯타르타는 끝났어.

까마귀가 맛있는 것을 즐거이 발견했지만, 그것을 뚫을 수 없다. 까마귀는 바위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부처의 마음을 맴도는 마라는 사로잡을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빈공간에서 거하는 부처는 부정적인 생각, 자신감 부족이든 뭐든... 지우거나 청산하지 않고 파괴하지 않는다. 부처가 인간의 몸, 심신을 가졌듯 그는 마라의 지배 아래 있었다. 마라는 집착, 증오, 기만, 망상과 같은 신경 생물학적인 은유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일부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가진 부처. 그는 우리와 같다.

붓다의 자유는 깊은 수용과 관련 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두려움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이 우리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라보는 것이다. 단지 마음의 게임일 뿐임을... 그것에 기름 더미 같은 먹이를 주지 않거나 재확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스쳐 갈 것이다.

붓다의 자유는 존재를 보는 것, 바라보는 것으로 구성돼있다. 우리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어떤 충동과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 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것을 이해할 뿐이라고.

부처는 마라에게

- 나는 너를 안다 마라.

마라는

- 당신은 저를 알고 있어요.

마라는 사라진다..

까마귀 이야기에서 해방, 자유, 깨달음의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한다. 우리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제거하지 않고 파괴하지 않는다. 붓다는 경험을 구성하고 경험이 깨어날 뿐이다. (바위로 드러났다!) 붓다는 마라와 동일시 하지 않고 그를 놓아주었다. 우리를 산만하게 만드는 이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본능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때 내가 산만하다는 것을 인식한 후 이해하면서 점점 더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가면 자신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명상에 깊이 들어가면 통제력이 상실될 때가 있다. 어느 정도 의식적인 것들을 희미해진다. 환상이든 뭐든. 마라와 공생하고 있는 것이다. 신경 생리학적으로.. 붓다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깨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의 소명이었다.

현대적으로 볼 때 마라는 삶의 어떤 부족, 권태, 무의미함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어려움을 향해 개방하고 참여하며 행동으로 생명적인 것을 불어넣을 수 있는가?

불성과 마라는 완전히 다른 것인데... 이것은 인간 유기체로서의 은유다. 집착하지 않고, 놓아주며 비우는 것? 인간인 우리는 열거나 닫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붙잡거나 놓아줄 수 있다. 사랑하거나 두려워하는 것.. 이처럼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이런 생각과 정서 등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대립하고 분리하려는 경향들과 이분법의 극한의 것들이며 유혹적으로 논리를 내세우며 악을 투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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