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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재업]<탄핵전후사의 인식> 4-1장, 강진원 저

심리학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5.17 1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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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전후사의 인식> 4장(1/2), 강진원 저


8. 서울 민주화 항쟁의 전개

1) 대규모 항명과 시민군의 결성(서울)

2017년 3월 11일 밤 늦게까지는 아직 주요 통신사(당시는 대부분의 미디어는 사기업이 운영하고 있었다.)는 통제되지 않고있었다. 검열없는 시신들과 계엄군의 모습이 SNS를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신촌, 홍대 주변에서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부상당한 사람들이 광화문을 터덜터덜 빠져나와 거리를 배회했다. 위수령이 계엄령으로 전환된 시점은 약 17시였기에 홍대 거리에는 아직 입학철 토요일의 대학가 분위기가 남아있었다. 이질적인 두 세계가 신촌과 홍대 거리에서 합쳐졌다.

 

'군인들이 사람을 쏘아요!'

 

찢겨진 홍대 과잠을 입은 16학번 여학생이 소리를 질렀다. 홍대 9번출구 앞의 버스킹은 갑작스럽게 끝나고 시민들은 학생을 부축했다. 신촌 방면에서 도망쳐오는 사람들을 부축하는 홍대 시민들의 모습은 이후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다.

 

홍익대학교 교내의 학생사회는 이미 초비상 상태였다. 홍익대 학생회와 홍익인권법학회, 홍익대 비정규직 노조는 이미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곧 각 대학가에 부대가 상주하게될 것은 당연했다. 홍익대학교 총학생회장과 인권법학회장 김민식은 싸울 결의를 다졌다. 홍대 주변 상인회와 마포의 시민단체들도 홍대로 모이기 시작했다.

 

(김민식 : 1997년생, 홍익대학교 법학과. 계엄령 긴급조치 위반으로 1년 형, 집회시위법 위반, 특수상해가중처벌죄으로 25개월 형 선고.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위원장 역임)

 

우리는 신도림에 있는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테이블에는 여러 민주화 운동 단체의 감사패가 늘어서있었다.

 

김민식 : 아! 안녕하세요! 오랫만입니다 하하. 어서 앉으세요.

필자 : 안녕하십니까 위원장님.

김민식 : 물어보실게 있으시다고요?

 

사글사글한 그는 커피를 타다 나에게 주었다.

 

필자 : 예. 당연히 여쭈어야죠. 서울 민주화 항쟁 이야기를 듣는데.

 

김민식 : 잘 찾아오셨습니다. 제가 이걸로 강연도 했는데요..ㅎ

 

필자 : 예. 저도 20대때 들었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무기를 모으기 시작하셨죠?

 

김민식 : 우리는 광화문에서 일어난 사태를 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여기서 가만이 있다면 나중에는 움직일 수 조차, 모일수조차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기를 모으기로 했습니다. 홍익대는 옛날부터 대나무를 잔뜩 길렀습니다. 미대도 많았죠. 소주병이랑 신나는 잔뜩 있었습니다.

 

필자 : 총기는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김민식 : 아무리 모아보아도 군부대에 맞설 무기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와우산의 방공초소가 생각났습니다. 총학생회장은 망설였습니다. 사실 당시의 홍익대 총학은 운동권 경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결단을 할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죽어가고 있는 다른 학생들을 위해 우리는 일어나야 했습니다. 힘을 내야 했습니다. 저와 경비 노조 분회장님은 함께 단상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됩니다! 함께 행진합시다!'

 

홍익대학교 학생 수백여명과 홍익대 경비, 미화노조원 50~60여명이 와우산으로 전진했다. 광화문에서 도망쳐나온 시위대와 마포 시민들이 합세해 그 숫자는 천여명으로 확대되었다.

와우산의 방공초소에는 겨우 1개 반 소대 규모의 병력만이 배치되어 있었던 데다가 장교의 수도 적었다.

 

김민식 : 그때 정말 식은땀이 많이 났습니다. 초봄 8시면 어두컴컴한 때, 총알이라도 날아오면...

 

그날 와우산의 병사들은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것을 거부했다. 와우산을 덮은 촛불의 물결에 방공소대의 병사들은 환호로 답했다.

 

===================================================================================================

김상현 (1996년생, 20기계화사단 3중대 박격포반 소속,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10년형 선고 이후 2022년 특사로 석방)

 

이것보다 세 시간이 이른 5시, 헌법재판소 앞, 20사단 장병 백여명은 중대장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장갑차에 실탄을 적재하고 양주에서 움직일때부터, 20사단의 일부 중대들에서는 명령불복종이 벌어지기 시작했었다. 김상현 병장과 박격포반장 장대한 중사는 이미 이 작전을 막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일부는 겁에 질려 시위대를 겨누고 있었지만, 3중대 대부분은 촛불집회에 참가한 가족, 친구들에 대한 걱정과 분노에 사로잡혀 방아쇠를 당기길 거부하고있었다.

 

김상현 : 중대원들은 총소리를 듣고 더 분노했습니다. '중대장님! 이건 아닙니다! 제 동생이 광화문에 있습니다!' 하고 2소대의 동기 한명이 소리쳤습니다.

 

장대한 : 중대장님이 호통쳤다. '이건 반역이야 반역이야! 지금은 준전시라고. 북한이 내려오고 있어!' 하고 말했다. 상현이 얘가 거기서 '계엄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반란입니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병사들이 찬동하며 소리를 질렀었다.

 

시위대도 술렁이는 병사들에게 '쏘지마! 쏘지마!'라고 구호를 외쳤다. 장대한 중사는 결단을 내렸다. 그가 든 곤봉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중대장을 내리쳤다.

 

장대한 : '야!! 다 풀어!! 쏘지마!!' 하고 내가 외쳤다. 중대원들 대부분은 총을 집어던지고 빵탄을 풀어해치고 시위대로 뛰어들었다. 저 서쪽방면에서 일어난 사태와 정반대였다. 어떻게든 막아볼려는 중대장은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가 포승으로 묶였다.

 

김상현 : 그때는 왜 그렇게 정의감이 솟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기쁨에 벅찼습니다. 한번도 본적이 없던 사람과 얼싸안았습니다. 곧 무슨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3중대는 시민들에게 총과 실탄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3중대뿐만이 아니었다. 각지의 부대들에서 항명과 투항이 일어졌다. 성북과 왕십리 등의 대학가에 배치된 병력들이 총부리를 거꾸로 잡았고, 광화문에서 흩어지던 시민들은 각지의 예비군 무기고, 경찰서로 향했다. 수천정의 총기가 서울시내에 흩어졌다. 단일한 대오와 지도부는 없었지만, 최초의 '시민군'이 탄생하고 있었다.

 

광화문의 아비규환속에 있던 촛불국민행동의 지도부는 시민들이 무장하고 있음을 파악했다. 민주노총의 사무처장 백석근, 노동정의당의 천노심 의원, 민주당의 한선재 원내대표, 참여사회연대의 사무처장 김박태식, 통일민중당의 윤종하 대표 등과 각 단체의 간부들은 확성기를 잡았다. '무기를 든 모두는 시청으로! 시청으로 향합시다! 싸울 수 있는 모든 시민여러분! 시청으로 향합시다!'

 

김지훈 옹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김지훈 : 총소리는 계속 났었어. 내가 있는곳에서는 군인들이랑 사수대가.... (쿨럭).... 엉켜붙어 싸우고있어서 그랬는지 총을 함부로 쏘지는 못하고 있었어.

 

갑자기 일선의 군인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뒷선부터 하나 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통인동과 정부청사쪽에서 총성을 피해 밀려드는 인파가 미는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지훈 : 뒤에서...(콜록).. 한 마흔명쯤 되는 병사들이 군경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어. 걔내가 소리를 질렀지. '우리는 민주군인입니다! 함께 청와대로 갑시다!!' 막 환호가 터져나오는거야. 걔내랑 우리는 그 계엄군 놈들. 사람 패고 끌고가던 군경놈들 잡아다가 패기 시작했어. 어떤 여자가 '그만해요! 애들 잡아요!'하고 소리지르기 전까지 말이야.

 

필자 : 사망자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김지훈 : ......

 

필자 : 보셨습니까?

 

김지훈 : 양측 모두. 싸움이 끝나니 시위대가 총에 맞아 죽은 시신을...(컥).... 치켜들고 행진하고 있었지. 보도로 옮겨놓은 시체들 사이에 시위대 사이에 껴서 맞아죽은 공수부대원도 있었지.(당시에 아직 시청과 광화문으로 투입된 공수부대원은 없었다. 기계화부대 병사, 혹은 기무부대원의 시신을 혼동한 것이다. 역식자 주)

 

필자 : 그렇군요.

 

김지훈 : 군인 하나가 내 손에 총을 쥐어줬어. 나는 그 군인 손에 촛불을 쥐어줬고. 총이 그렇게 무거운 물건인지 처음 알았고. 게임이고, 뭐고에서 본 느낌이랑은 전혀 (콜록) 달랐지. 그 군인은 스쳐지나가 버렸고 다른 아저씨가 와서 총 쓰는 법을 알려줬어.

 

병사들이 시위대에 합세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아무리 사단의 주력과 장교진에서의 투항이 없다시피했다 하더라도, 시민들에게 총부리가 겨누어젔다는 충격에서 평범한 학생들이었던 병사들이 헤어나오기 시작한다면 계엄은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육군본부는 진압군의 주축을 일임하던 30사단 91여단과 20사단을 시내 중심에서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시민군이 시청으로 진격하던 즈음이었다. 이는 전투 피해에 대한 위기의식이라기보다는, 공수 2여단, 9여단을 주력으로 한 진압군 재편성을 위한 처사였다.

 

김지훈 : 나는 서울역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계엄군을 보았어. 시민들은 허공을 향해 총을 쏘아대면서 '몰아냈다!'하고 .... (켁)... 기뻐했지. 하지만 몇몇은 알고있는 눈치였어. 알고있었어. 그들의 퇴각은 질서정연하고 깔끔했어. 작전상 후퇴였지. 우리를 고립시키려는.

 

 

최소 서울 각지 30여개 소에서 항명이 일어났다. 서울에 투입된 병력 9100여명 중 800여명이 항명에 가담했으며, 평시 주둔중이던 수방사의 병력 2~300여명도 항쟁에 참가했다.. 특히 합참과 긴밀히 연락하고 있던 수방사에서는 중대단위의 가담도 발생하였다. 그러나 항명의 광역화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는 대대 이상의 부대가 항명한 사례는 없었다.

 

이는 기무사가 파견한 '경비단'과 '계엄협조관', '사복요원'들의 공작이 주요했기 때문이다. 기무사는 이미 시위 이전 주요 목, 소에 사제폭발물을 준비해놓고 사복 요원들을 집회에 침투시킨 상태였다. 외교적, 군사적으로 계엄을 승인시키기 위해서는 집회의 과격화는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을 '청와대 경비단'이라고 소개했던 장교들은 각지 사병들에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발포를 강요했고, '계엄협조관'들은 계엄군에는 참가했지만 '독사파'가 아니었던 영관급 장교들에게 시위의 피해, 폭력수위를 과장하며 진압을 종용했다.

 

마지막으로 사복 요원들은 집회에 침투해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무장의 준비가 안된 평화적 촛불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할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누가 먼저 발포했는지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발포가 시작된 순간, 평범한 대학생, 청년, 아들, 친구였던 병사들은 '폭도'를 눈앞에 둔 진압군으로 스스로 변해야만 하는, 덧씌워져야만 하게 된 것이다.

 

틀림없이 각지의 투항 병력은 기무사의 예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기갑전력과 특전사가 온존한 이상 시민들의 무장은 계엄의 필요성을 강화해주는 좋은 구실이었다. 그러나 계엄군에게 있어 진짜 위기는 의회가 저항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2) 야당의 저항. 시민군의 결성 (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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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의원회관으로 진입하는 계엄병력의 모습(<한국사학회집> 7공화국사. 197p 발췌)>

 

30사단, 20사단의 주력은 굳건히 계엄을 지지했다. 수천의 탈영자가 나왔지만 주력이 되었던 전차여단과 공수부대에서는 병력손실이 없다시피하였다. 여의도로 움직인 30사단 91여단과 2공수여단또한 마찬가지였다.

 

여의도 앞에는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한 궐기대회가 열리고 있었지만 장갑차로 무장한 계엄군을 막을수는 없었다. 수십명의 시신이 널브러지고, 노조원들은 다리를 건너 도망치려했지만 이미 다리도 봉쇄된 상태였다. 수천명이 연행되고 수백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일부는 초봄 강을 헤엄처 건너려다 계엄군의 사격으로 죽었다. 2017년 봄. 한강 하구에는 불어터진 시신이 떠올랐다.

 

여의도에는 각 정당의 중앙당 사무실이 모여있었다. 민주당, 국민당, 노동정의당의 주요 당직자들은 초비상상태였다. 끊겨가는 통화선 속에서, 이들은 각지의 정치인들에게 사태를 알리기 위해 마지막까지 국회의사당과 사무실에 남았다. 의자, 책상과 기재도구로 조악한 바리케이드를 친 이들은 20여분도 버티지 못했지만, 이들의 희생 덕분에 각지의 국회의원들에게 연락을 돌려 탈출할 시간을 벌었다.

 

여기서 계엄군의 전략이 틀어졌다. 최대한 많은 수의 국회의원의 신병을 확보하여 계엄 해제를 방지해야 했던 쿠데타 세력으로써, 야당 의원들의 탈출은 심각한 위기였다.

 

당시 제 1야당이자 제 1당이었던 민주당은 국회 의장직을 잡고 있었다. 민주당의 정세훈 국회의장은 강남의 자택에서 소식을 접했다. 그는 신속하게 체포되지 않은 야당의원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국민당, 노동정의당, 여당 자유당의 탄핵 찬성파 의원들과 원내대표들과 연락이 닿은 국회의장은 전국 각지의 야당 지역당사 중 계엄군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필사의 노력끝에 광주시의회의 연락이 도착했다. 이와 함께 전국의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이미 평택과 아산까지 조금씩 계엄이 확대되기 시작했지만 11공수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이 계엄부대로 편성된 영호남권의 주요도시들에는 부대가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세훈 국회의장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가능한 모든 의원들을 광주시의회로 모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촉박한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충청도 이남의 국회의원들이 광주로 모였다. 시의회에는 충남, 전남의 민주당 국회의원 20여명과 노동정의당의 김태홍 원내대표, 국민당 의원 10여명 등 야당의 주요 의원들이 모였다. 광주광역시장 윤장진과 주요 공무원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민주당과 국민당의 분당 당시 양측 인사들의 중재역으로 유명했던 정치인이였고, 재야시절부터 광주시의 시정을 오랫동안 컨트롤해던 권력자였다.

놀랍게도 그의 옆에는 광주시 경찰서장과 광주에 주둔한 31향토사단장, 503여단장이 함께하고 있었다. 시의회에 모였던 의원들과 공무원들은 처음에는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윤장진은 야당 인사이긴 하였지만 권력지향적이고, 광주시정 내에서의 몇차례 뇌물사건도 치렀던 , 하자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천근같이 무거운 분위기 속의 대화가 양측에서 오갔다.

 

천만 다행이도 31사단장은 야당 의원들이 경계할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31사단장은 육사 출신이 아닌 학사장교였고, 메이커 여단 참모로 파병 실전 경력도 있었으나, 군내 계파를 멀리해 향토사단으로 배치된 경력을 가진 대쪽같은 인물이었다. 계엄세력이 그를 광주 계엄담당관으로 맞기지 않고 11공수여단을 남하시켜 광주로 향하게 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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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장 남아있지 않은 실제 3월 11일 광주 집회의 기록사진이다. (<한국사학회집> 7공화국사. 201p 발췌)>

 

3월 11일 7시 24분경, 금남로에서 열린 박 대통령 퇴진 기념집회에는 7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계엄소식을 접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광주시민들이 합세하여 그 수는 빠르게 늘고 있었다. 이전에 열렸던 축제분위기의 집회와 다르게, 그날 금남로의 분위기는 엄숙했다. 일부 시민들은 횃불을 들고 모여들었다.(2017년까지도 광주에서는 횃불을 들고 집회에 모이는 광경은 흔했다.)

 

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역, 전철, 식당의 대형 스크린 앞에 모여 나오지 않을 뉴스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금남로의 연단 위로 올라섰다. 광주시장 윤장진과 30여명의 야당 의원들, 그리고 31사단장이었다.

 

'여러분. 지금 한국에서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윤장진 시장이 입을 떼었다.

 

'지금 이순간에도, 37년 전 빛고을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저 잔악한 공수부대와 진압군이 시시각각 이곳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좌중이 술령였다. 한숨과 탄식이 교차했다.

 

'하지만 여러분. 이번에는 그렇게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광주 시민과 민주공화국은 호락호락하게 도시를 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에는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향토 사단의 사단장과 영관급 장교들이 모였습니다. 당리당략을 초월하여 프레지던트 박의 탄핵을 위해 싸웠던 여야 의원들도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모일 것입니다.' (<한국사학회집> 7공화국사. 201p 발췌)

 

'하지만 여러분, 광주의 자랑스러운 시민 여러분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이 도시를 수호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의 피로 지켰던 5월 광주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함께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시는 계엄군이 빛고을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함께하실 수 있겠습니까?' (<한국사학회집> 7공화국사. 201p 발췌)

 

긴급한 상황이었기에 이 연설의 영상 혹은 자료가 얼마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당시 광주 시민들이 시장의 연설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배워 알고 있다. 그날 광주 시민들이 가족과 민주주의를 위해 다시 총을 잡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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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 일반 의외로 60년대 후반 북중결별은 사람들이 잘 안 다루더라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9.15 76 3
622 창작 다른쪽으로 많이 위험해진 이란 [3] 배윌리(112.168) 09.14 112 0
621 일반 국민당 통일 중국이여도 한국 경제개발 가능할지도 [2] ㅇㅇ(221.153) 09.14 140 2
620 일반 장제스가 중국 통일했으면 한국 지역 판도는 [2] ㅇㅇ(118.235) 09.14 107 0
619 일반 독중소 추축 세계관 동아시아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9.14 58 0
618 일반 장제스가 중국 통일했으면 북괴는 못버티고 망했겠지? [1] ㅇㅇ(114.200) 09.14 68 0
617 일반 ㄱㅇㄷ) 그러고보니 북베트남은 공산권 전부랑 두루 친하게 지냈네 [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9.14 66 0
616 일반 6.25 북진통일 대체역사 이렇게 됐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 [1] ㅇㅇ(211.46) 09.14 102 0
615 일반 지금은 삭제된 6.25 전쟁 대체역사 나무위키 문서 ㅇㅇ(211.46) 09.14 75 0
614 일반 한국전때 통일했을때 지리에 관해 물어볼게 있는데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9.14 51 0
613 일반 키프로스 인민 왕국 대역은 어떨까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9.14 55 0
612 일반 만약 12.12가 실패했다면 조선일보 영향력이 지금보다 약했을까? [1] ㅇㅇ(175.201) 09.13 62 0
609 일반 중국 분단 if애서 중화민국은 민주화가 됐을까? [8] ㅇㅇ(211.178) 09.13 109 1
608 일반 월남전에서 미국이 북진했으면 이후 국제 상황이 어케 됐을까? [8] ㅇㅇ(222.237) 09.13 97 0
607 창작 2014 평창 동계 올림픽 머11(112.168) 09.12 67 0
606 일반 월남전 60년대 중공군이 미군 상대가 가능할까? [3] ㅇㅇ(211.234) 09.12 51 0
605 정보 정보) 북한 광산 100선 정보 책자 소개함 [4] HK885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9.12 55 2
604 창작 인터뷰-2 머11(112.168) 09.12 37 1
603 일반 통일되고 중진국에 머무른다면 군사력 대규모 유지하지는 않을까 [3] ㅇㅇ(211.234) 09.11 91 0
602 일반 지금 대만이 문혁시절 개판이던 중국 시대로 트립하면 [2] ㅇㅇ(211.221) 09.11 65 0
601 일반 ㄱㅇㄷ) 오늘이 9.11 테러 일어난지 23년 됐네...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9.11 6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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