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하루 앞둔 재하네 팀 분위기는 다들 여유가 흘러넘쳤다. 아직 암것도 못했다며 팀원들을 걱정시키던 세사람도 의기투합하여 하루만에 작품을 멋지게 완성했다. 이젠 대전만 잘 치르면 되는것이었다.
딱 한군데, 막날까지 자꾸만 삐그덕거리는 요팀만 빼고.


- 김영우. 오늘 연습 접자.  더이상 안되겠다.


결국 재하는 연습을 중단했다.
안무만 살벌하게 완벽하면 무엇할까.
살육으로 이글거려야 할 저 눈빛에서 자꾸만 드러나는 묘한 사심은 재하를 한계로 몰아부치고 있는데.
안무가 이재하의 사전에 이런 부조화는 있을수 없는 일이다.
그 상대가 애인이어도 예외는 아니다.

- 진짜 연습 안해요?
- 어. 안해도 돼.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냐.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며 연습실을 나서는 뒷모습을 조용히 따랐다.
이전같았으면 마음을 다치고도 남았을 영우가 이렇게 의연할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그런 사심을 재하가 분명히 알아챘음을 알기 때문이다.


- 호랑이, 사자, 늑대같은 짐승들은 눈에서 뿜어내는 이 안광만으로도 먹잇감을 얼어붙게 만들거든. 당연히 눈동자부터 보통사람이랑은 다르지.  뱀파이어도 마찬가지고.
사실 우리가 하려는게 사람은 아니잖아?


감정조절의 실패로 인한 자구책이긴 했지만 부족한 1프로를 채워줄 소품이 필요하다는말에는 동의했다.
어찌되었든 내일만큼은 이 눈을 숨겨야만 하니까.
신중히 고민하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골라준것은 오렌지빛이 감도는 붉은 렌즈와 회색이 감도는 노란색 렌즈였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에게 더할나위없는 선택이었다.

- 우리 여기서 한번 껴볼래요?
잘 어울리나 안어울리나.

갑작스런 영우의 제안에 조금 당황했지만 재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색이 잘 맞는지 보자는 핑계를 내세웠지만, 실은 처음으로 둘이서 무언가를 나눠가진 오늘 이 순간을 간직하고 싶었다.

- 오~~ 형 봐봐요.  진짜 잘 고른것 같아 그죠?

기대이상으로 빛을 발하는 사진속 결과물에 흡족한 영우가 재하를 보며 웃는다.

분명 야수의 눈을 기대했건만, 어째서 판타지영화속 엘프가 떠오르는걸까.
지금 녀석이 자신을 보며 무언갈 말한다면, 그게 무엇이건 그대로 자신을 홀려버릴것만 같은 기분이라니.

재하는 아무말도 할수가 없었다.

- 저 이상해요?
- 아냐. 잘 골랐네. 들어가자. 단체연습하러.
렌즈는 빼고. 좀 무섭다야.

자구책으로 내세운 게 결국 자충수로 되돌아왔음을 깨달아버린 재하는 돌아오는 내내 스스로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어느덧 두번째 대전을 위한 마지막 연습이 끝났다.
씻고 돌아오니 벌써 새벽한시. 아침일찍 리허설을 하려면 일찍 자야하는데 졸리기는커녕 정신만 또렷했다. 오늘따라 시계바늘소리가 두사람의 귓가에 날카롭게 꽂히는건 그저 기분탓일까.

-  형. 몇시간 안 남았네요.
-  그러게.
-  이번대전, 어떨까요?
-  글쎄...요번주 내내 연습할때 보니까 저쪽 애들 독기가 바짝 올랐던데?

당연했다. 이번에도 지면 그걸로 끝인데. 우승이 간절한것은 저쪽팀도 마찬가지일거였다.

- 왜, 금세 마음이 바꼈냐?

재하를 오래보고 싶은 마음에 뱉은 말이긴 했지만, 막상 진다면 마냥 좋지만은 않을것 같았다. 어쩔수 없는 이놈의 승부욕이라니. 영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 비기는건, 없겠죠?  
- 비기고 싶어도 안될껄? 소수점 첫자리까지 나오는데.
- 우리무대만 이겼음 좋겠다고 하면 넘 이기적일까요?
- 지던 이기던 우리는 최선을 다 해야해. 그냥 이번주만큼은, 저쪽이 아주 조금 더 멋진 무대이길 바라자구.

불안감을 다독이는 다정한 목소리에 영우는 조금 더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 형. 잠이 안와요.
- 뭐. 자장가라도 불러줘?
- 자장가는 아니고...

흐려버린 말끝과 빤한 시선의 의미를 알아버린 재하의 심장박동이 급하게 빨라졌다.
어느틈엔가부터 제 안에 또아리를 틀어버린 몹쓸 마음은 안 그래도 위험한 지경인데, 주체못할 선을 넘어 여린마음에 상처를 주게 된다면 그건 절대로 안될일이었다.

- 졸립다. 얼른 자라. 리허설 9시다.

아직은 혼자만 삭혀야할 마음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는 못들은 척 황급히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모로 누워버렸다.

- 멍충이.

알고서 저러는건지. 아님 정말로 모르는건지.
모르쇠로 나오는 저 태도가 영우는 마냥 서운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