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10% 정도 부족하다

정치스릴런데 주인공이 50대 중후반의 여성 국무장관임 힐러리 클린턴도 국무장관을 했었고.

국무장관 출신이 쓴 스릴러라면 뭔가 색다른 디테일이 있어야 할 것만 같은데 놀랍게도 그런 거 없다.

주인공 국무장관은 이 나라 저 나라 날아다니면서 놀라운 기지로 상대를 속이거나 설복시켜서 테러를 막는데 다른 주인공들이 다 하던 거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평범한 스릴러 소설 주인공들이 하던 거랑 거의 차이가 없다. 정보부원이나 군인이 아니라 국무장관인데도 그 자리가 가지는 힘이나 권위를 활용하거나 하는 모습을 찾기 힘듬. 끽해야 나 저 나라 가야댐! 하면 대통령이 허 우리 국무장관이 미쳤군, 하다가 허락을 해주면 비행기 타고 슝 가서 그 나라 총리나 대통령을 만나는 게 다라서 그냥 원래 스릴러 주인공들이 하는 일에 계급만 두 단계 정도 올라간 게 끝이다. 이 부분은 좀 매우 실망스러움.

게다가 국무장관 전에 미디어 재벌이었는데 이 부분도 전혀 활용하지 않는다. 예전에 우리 회사 소속 기자가 누구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거 같아! 따위로밖에 안 씀.

주인공을 깨끗한 양지에만 놔두기 위해 전력을 다 할 거면 거창한 설정을 붙일 필요가 없는데 거창하게 이것저것 붙였으면서도 아주 선량하고 준법정신이 뛰어난 인물에서 멈춰놔서 너무 나이브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더라. 힐러리를 투영했으니 험하게 굴릴 수가 없었겠지만 덕분에 매력이 없음.

루이즈 페니는 무지하게 나이브하면서도 매력적인 아르망 가마슈 경감을 만들어낸 전력이 있지만 그건 작가가 온전히 다룰 수 있는 캐릭터여서 시의적절하게 장단점을 드러냈기 때문에 생긴 매력이었는데 암만 루이즈 페니라도 힐러리의 자캐딸을 막을 수 없었겠지. 딱히 막을 생각도 없었을 거 같고.

스케일은 되게 큼. 국무장관이라 이란에 파키스탄에 러시아에 영국에 독일에 기타 등등... 보통의 스릴러면서 스킨이 너무 거창하다보니 실속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거창함 자체가 재미로 느낄 독자도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함. 나는 "자네에게 쓸 예산이 없네!", "시, 시발... 미친 색히야! 사람이 죽는다고!"하면서도 버스타고 적국의 위험지대로 향하는 그런 스파이가 좋지만 그런 사소한 걸로 시간 잡아먹는 것보다 다른 나라의 음모를 비행기 타고 가서 막아내는 걸 더 좋아할 독자도 있을 거라 생각하니까. 그런 사람들한테는 스케일 큰 게 재미있을 것 같음.

주인공의 부족한 매력, 그간의 스릴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함, 근데 스케일만은 커져서 생기는 허전함을 빼면 베스트셀러 작가의 세세한 실력이 눈에 띄긴 함. 완급 조절이 괜찮고 문장도 읽기 쉽고 복잡한 상황을 제때제때 잘 정리하고 시점이 다각화될 때도 그리 헷갈리지 않고 초반 중반 종반 모두 긴장감을 심어둘 한 구절씩을 빼놓지 않아서 장이 하나 끝날 때마다 뒷내용이 기대가 되고... 글은 잘 썼다.

아르망 가마슈 시리즈와 슬쩍 연결고리를 만드는 게 웃겼음. 가마슈 본인이 나올 줄은 몰랐다.

장점이 없는 건 아닌데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이름이 뭘 했는지 모르겠다는 게 제일 문제. 주인공이 순진하고 착하면서도 실력도 있고 추진력도 갖췄다고 자캐딸을 치고 싶은 거 같은데 재밌게 치지도 못했다. 아예 뻔뻔했으면 최소한 웃기기라도 했겠지.

갤럼들이 상상할 수 있는 딱 그 정도 수준의 정치스릴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