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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탄] 19살 내 생일, 사람들의 머리 위에 숫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청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7.15 16:3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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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상상해서 무서워지기 시리즈
· 상상해서 무서워지기 시리즈





19살 내 생일, 사람들의 머리 위에 숫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0, 아빠도 0, 내 동생은 1.


엄마는 87.


도대체 뭘 의미하는 숫자일까. 처음 그 숫자를 봤을 때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하지 않고 동생이 한 것, 아빠도 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많이 한 것. 도대체 뭐가 있지?


숫자가 뜨는 것도 생면부지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지 길거리 사람들의 숫자는 보이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은 보였다. 민수 0, 기태 0, 김다정 0. 선생님도 0. 친분에 따라 보이는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기준인진 잘 모르겠다.


반 친구들이라고 다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보면 인사하는 정도로는 숫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에서 0 외의 숫자는 보이지 않았다.


동아리에서도, 학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숫자가 보이지 않아서 몇 번은 일부러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도 전부 0이었다.


내 주변에 0이 아닌 숫자는 엄마, 그리고 동생. 그 둘뿐이었다.


숫자의 의미를 생각해보다가 불건전한 생각에 미쳤지만, 그건 아무래도 아닌 듯했다.


아빠도 0이었거니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은 선생님도 0이었으니까.


그럼 도대체 숫자가 의미하는 건 뭐란 말인가?


하지만 다가오는 6모, 그리고 기말, 죄여오는 입시의 압박 때문에 더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엄마나 동생의 숫자도 87과 1에서 더는 변하지 않았기에, 어쩌면 이미 과거에 경험한 무언가일 수도 있겠단 생각으로 넘겼다.


머리 위의 숫자도 좀체 바뀌질 않으니 점점 무뎌져서 그러려니 했다. 엄마와 동생을 빼면 누구를 만나도 0이었다.


숫자가 없는 애들에게 일부러 말도 붙여보고 친해졌는데, 그래도 머리 위의 숫자는 0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엄마나 동생에게 뭘 했냐고, 특히 엄마는 87번이나 한 게 뭐가 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모르겠고,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했을 때도 마땅찮게 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동생에게 넌지시 너 뭐 했냐고 물어봤지만, 친절한 욕설 말고는 내 정신 건강을 걱정해주는 것 외에 별 소득도 없었다.


2학기, 수시, 그리고 수능. 나는 숫자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지다 못해 거의 안 보인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냥 가벼운 병 같은 거라고, 환각 같은 거니까 나중에 약이라고 처방 받으면 낫지 않을까, 하는 그런 가벼운 마음도 품었다.


수능 전날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다. 두 분이 딱히 결혼기념일에 약속을 잡으시는 편은 아니었는데, 그날은 유달리 이상했다.


엄마는 친구와의 약속이 있다고 가버렸고, 동생도 친구랑 같이 놀러갔다. 집에는 나와 아빠뿐이었다.


"철우야."


그리고 결혼기념일답지 않게, 아빠는 혼자서 깡소주를 3병 째 마시고 계셨다. 나는 차마 술은 마실 수 없고, 아빠의 술잔만 채워드리며 묵묵히 있었다.


아빠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무언가 억눌린 채 사는 것 같았다. 그런 아빠의 모습은 처음이라서 나도 당황한 채 술만 따랐던 것 같았다.


"사실 넌 입양아야."


"네?"


"내 핏줄도, 네 엄마 핏줄도 아니라고."


아빠는 그렇게 말하더니 술잔을 내려놓고 아예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나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라고 부정했던 불건전한 가능성이 다시 수면 위로 올랐다.


설마. 그럴 리가.


"아빠. 사실 저도 말할 게 있어요."


지금이라면,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말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병나발을 불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초점 없던 눈빛에 나는 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제 생일 때부터 숫자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숫자?"


"네, 머리 위에 숫자요. 저, 아빠는 0. 다른 사람들도 다 0."


아빠는 멈칫한다. 내가 고의로 누락한 두 사람을 곧바로 직감했기 때문일까. 나는 아빠가 재촉하기 전에 말했다.


"동생이 1. 엄마가 87이었어요."


"이런 쌍노무새끼가!"


아빠는 그대로 손을 들어 내 뺨을 후려쳤다. 나는 그대로 식탁에서 쓰러져 바닥에 엎어졌다. 아픈 것보다 갑자기 격노한 아빠가 이해되지 않아 얼을 탔다.


"어디 가서 그딴 소리하지 마라!"


"하, 하지만 아빠......."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숫자 얘길 지껄이면....... 아니, 엄마나 네 동생에게도 입 뻥끗했다간 호적을 파버릴 줄 알아!"


아빠의 얼굴은 술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19년 내 인생에 찾아볼 수 없는 분노 때문인지 정말 시퍼렇게 변했다. 사람이 화가 너무 나면 새빨개지는 게 아니라 창백하게 질리기도 한다는 걸 나는 그날 깨달았다.


"죄, 죄송해요......."


"죄송한 줄 알면 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 숫자 같은 거 얘기하지도 말고! 정신병원에 집어 넣기 전에!"


나는 그대로 엉금엉금 기어가 내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울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소리가 새 나가면 무어라 화낼지 몰라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빠가 왜 그렇게 격정적으로 반응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해하기도 싫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아빠의 말처럼 내가 그냥 정신병에 걸린 거였으면 좋겠단 생각도 들었다. 엄마가 불륜하다니, 이제 고1이 될 동생이 벌써 다른 남자랑 몸을 섞다니.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현명하게 의심했어야 했다. 왜 아빠가 결혼기념일에 혼자 술을 마셨던 건지.


나는 조금 더 명확하게 기억했어야 했다. 결혼기념일에 혼자 술을 마신 게 그날 한 번이 아니란 걸.


그 모든 의문을 해결할 단초가 된 건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나 세수하고 아침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침을 차려주는 엄마를 봤다.


88. 숫자가 바뀌었다.


나는 하마터면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침착하게 다시 줍고 아무렇지 않은 척 밥을 먹었다. 그리고 등교 직전, 아직 방에서 자고 있을 동생의 방문을 열었다.


2. 숫자가 바뀌었다.


나는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즈음에야 나는 잠시 숨을 돌리며 뒤집힐 것 같은 속을 비웠다.


"학생, 괜찮아? 갑자기 여기서 토를 하면 어떡해."


경비 아저씨가 급히 달려와 내 등을 두드려주며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경비 아저씨를 뿌리치고 달렸다. 너무 역겨웠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났다.


창작물에서나 볼 법한 일이 현실로 일어나니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수능이 끝났다. 잘 본 건지 모르겠다. 어젠 아빠한테 뺨을 맞았고, 울면서 잠 들었다. 내가 OMR 마킹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없었다.


그보다 집에 돌아가면 엄마를 다시 봐야 한다. 아니, 그건 친구들이랑 pc방에 가면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 무시할 순 없다. 친구 집에서 자는 것도 하루이틀이고, 가출은 극단적이다.


아예 정면돌파할까? 결혼기념일에 어딜 가서 뭘 했냐고. 엄마에게 묻는 건 좀 그러니까 동생을 추궁할까.


엄마와 동생의 숫자가 늘었다. 다른 모든 사람이 0이었던 숫자가 다른 두 사람이 그날을 기점으로 숫자가 늘었다면, 서로 다른 행동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둘이 말만 다른 약속이고 함께 행동했든, 혹은 각자 행동했든, 그 행위 자체는 똑같을 것이었다.


그래, 동생을 추궁하자. 곧 엄마 생일이니까, 그걸 핑계로 바깥에 불러내는 거다. 조금 싸우더라도 만회할 수 있다.


그런데 끝까지 대답하지 않으면 머리 위의 숫자가 보인다고 말해야 할까? 아빠는 엄마나 동생에게 말하면 호적을 파버린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하다. 허울뿐인 가정의 평화를 지키려고 그런 말을 한 걸까? 다른 것도 아니고 숫자가 보인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잠깐 다른 생각도 들었다. 아빠도 숫자가 보인다면?


에이, 설마. 나는 금세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라면 내가 보인다고 얘기했을 때 자기도 그렇다고 답했겠지. 아닌가? 아니, 이건 너무 허무맹랑한 가정이다.


어쨌든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숫자의 의미를 밝혀내는 일이다. 동생에겐 문자를 넣었다. 읽긴 했는데 알겠단 대답이 돌아오질 않는다.


뭐, 상관없다. 당장 급하게 알아내야 할 건 아니다. 영 아니다 싶으면 동생이 없을 때 동생 방을 뒤져서 알아내야지.


pc방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오니 동생은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온다고 했다. 나는 그냥 이참에 바로 동생 방을 뒤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괜히 함부로 뒤졌다간 부모님이 의심할 수 있고, 특히 아빠는 바로 눈치챌 수 있으니까 새벽에 두 분 모두 잠드셨을 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차피 pc방에서 자면서 재획하느라 새벽까지 버티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새벽 3시, 모두가 고요히 잠든 시간. 나는 부모님이 깊이 주무시고 계신 걸 확인하고 동생 방에 들어갔다. 문을 닫고 불을 켠 뒤, 천천히 둘러봤다.


여자라고 꼭 깔끔하게 지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질러진 모습에 원하던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막막해졌다.


하지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어질러진 걸 다 기억하고 있을 린 없을 테니 오히려 이것저것 들춰보긴 딱 좋았다.


30분을 뒤진 끝에 나는 동생의 생활 습관을 정말 고쳐야겠단 생각 외에 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자물쇠가 달린 비밀일기장이었다. 열쇠는 찾지 못했다. 아직도 이런 걸 쓰고 있나 싶지만, 지금으로선 여기에 내가 찾던 진실이 담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열쇠는 없지만 자물쇠는 조잡했다. 나는 내 필통에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라며 클립으로 만들었던 락픽을 찾아 자물쇠를 이리저리 쑤셔봤다.


딸칵. 열렸다.


시간을 확인했다. 두 분 모두 잠귀가 밝은 건 아니지만 이런 건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40분 정도 지나 벌써 새벽 4시에 가까워졌다.


나는 길게 볼 것 없이 결혼기념일에 쓴 일기를 찾았다. 제발 일기를 썼길 바라는 심경으로 마지막 페이지에서 천천히 넘겼다.


11월 15일 수요일.


있다. 나는 재빨리 전문을 핸드폰 무음 카메라로 해당 내용을 찍고 일기장을 잠근 뒤 원래 있던 자리에 두고 불을 끄고 나와 조용히 내 방으로 향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판도라의 상자의 자물쇠를 땄고, 이제 여는 일만 남은 기분이었다.


이 사실을 아빠가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기어코 숫자의 의미를 알아내려 했다고 호적을 파버릴까? 아마 그러지 않을까?


인제 와서 겁먹은 거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 어쩌면 익스트림 스포츠 같은 걸 수도 있잖아. 그런 건 일반인 중에 얼마나 했다고. 내 주변이 전부 0인 것도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게 아니란 건 직감하고 있었다. 결혼기념일에 나간 엄마와 동생의 옷차림이 익스트림 스포츠 같은 게 아니란 건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둘의 옷차림....... 나갈 때와 돌아올 때가 조금 달랐다.


......그래, 정황 증거 하나 더 찾아냈다고 결정적인 걸 찾았다는 양 굴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확실한 물증이 내 갤러리에 담겼지 않은가.


잠이 오질 않았지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서 볼 생각이었다. 그러면 적어도 엄마나 동생을 붙잡고 생난리를 칠 일은 없을 테니까.


다음날 아침에 동생이 집에 들어왔다. 3. 숫자가 바뀌었다. 동생은 아침 먹었다면서 빨리 씻고 바로 등교하겠다고 난리였다.


"아, 맞아. 오빠. 수능 잘 봤어?"


그걸 이제 묻냐. 문자 보낸 건 다 씹더니. 나는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차피 나도 간밤에 동생 방을 뒤진 터라 피차 할 말은 없었다.


수능 끝난 고3의 학교가 뭐 있겠는가. 종례 후 점심, 그리고 하교. 남은 시간은 자습을 빙자한 놀자판. 나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느라 결국 학교에서 갤러리를 열어보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pc방에 가서 저녁 먹을 때까지 게임하고, pc방에서 저녁까지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그제야 갤러리를 확인해야 한다는 걸 떠올렸다.


막상 확인하려고 하니까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걸 확인하는 게 맞는 걸까?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


판도라가 상자를 열자 온갖 끔찍한 것들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희망이 남았다고 하지만, 그 희망이 튀어나온 끔찍한 것들에 비해 열 만한 가치가 정녕 있는 것이었을까?


아빠처럼 알면서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외면하는 게 어쩌면 더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사진은 찍었다. 어쩌면 매몰비용의 오류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알아볼 진실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믿었다.


갤러리를 열었다. 19살 남정네가 사진 찍을 일이 얼마나 있다고, 최근 사진의 첫 번째는 당연히 내가 찍은 동생의 일기장 전문이었다.


나는 천천히 두 손가락으로 확대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른 사람에게 들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하고 거세게 뛰었다.


11월 15일 수요일.


언젠가 이 일기를 들춰볼 오빠에게.


그 언젠가를 위해 쓰는 일기니까 이걸 읽을 때쯤 오빠가 몇 살일지 모르겠네. 적어도 20살은 넘겼을까?


오빠는 은근 순진해서 사람을 잘 믿으니까. 어쩌면 이 글은 영영 읽히지 않을지 모르지.


그래도, 오빠에게 진실을 알 기회는 줘야하지 않나 싶어서. 가족으로서의 양심이랄까, 아니면 선의랄까.


막상 진실을 적으려고 하니까 또 심통이 나네. 맨입으로 알려주긴 어려울 것 같아.


하지만 나도 대충 알겠어. 이건 친구나 지인에게 숨길 수 있어도, 가족에겐 숨기기 힘들어.


왜냐면 가족과 집은 나의 안식처인 걸. 내가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이잖아. 마음의 틈은 방심을 만들어낼 거야.


그 방심은 분명 눈치 없는 오빠도 눈치채게 만들 큰 실수를 만들 수 있을 테고.


그러니까, 이건 정말로 언젠가 오빠의 손에 들어가게 될 거야. 오빠가 이걸 읽고 있다는 건, 엄마나 나의 이상함을 눈치챘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걸 묵인하는 아빠의 태도마저 눈치챘을지 모르겠네.


솔직히 말해서 끝까지 무시해줬으면 해. 영영 몰랐으면 해. 오빠는 나의 가족이니까. 엄마도 오빠를 자기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응. 분명해.


여자의 감이야.


나도 처음엔 왜 오빠가 아니라 나인지 몰랐어. 하지만 금방 깨달았지. 오빠는 평범하니까 안 돼. 할 수 없어. 이해하지도 못할 거야.


하지만 우린 가족이야. 가족이었으면 해. 나는 오빠를 영원히 오빠로 생각할 거고, 오빠도 나를 영원히 동생으로 생각해줬으면 해.


엄마도 마찬가지고.


아빠는 그러고 있어.


말하려고 했는데 자꾸 빙빙 돌려서 말하게 되네. 역시 언제 읽을지도 모르는 걸 딱딱 밝혀 적으려니까 못 쓰겠어.


대신에 다른 힌트를 줄게.


여기까지 눈치챘으면, 대충 언제인지 알 거야. 그 날, 혹은 그 날 직후 일어난 뉴스를 찾아봐.


그 날과 관계된 나중의 뉴스도 괜찮아.


오빠는 눈치가 없어도 똑똑하니까. 사람을 잘 믿긴 해도 모르진 않겠지.


하지만 믿어줬으면 해. 나나 엄마나, 그럴 수밖에 없었어.


아빠도 이해해주니까, 오빠도 그러리라 믿어.


우린 가족이잖아. 가족끼린 믿고 의지하는 거라고, 아빠가 늘 입에 달고 살았잖아.


그렇지?


일기는 여기까지였다. 나는 허탈, 공포, 안도, 불안 등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내릴 정거장도 놓친 채 종점까지 버려졌다.


"학생! 안 내려?"


결국 버스 기사 아저씨가 화를 내고 나서야 멍하니 내렸다.


뉴스를 보라니. 그날, 그날 직후, 혹은 그 날과 관계된 이후의 뉴스를 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으면?


다시 집으로 가려고 맞은편 정거장을 찾았는데 내가 탄 게 막차였는지 버스가 끊겼다. 하는 수 없이 걸어가야 했다.


집에 좀 늦게 들어간다고 부모님께 전화한 뒤, 나는 멍하니 길을 걸었다. 가는 길에 뉴스를 찾아볼까 싶었지만, 인제 와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이만하면 많이 열지 않았는가.


어차피 동생은 내가 일기를 봤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엄마는 당연하고.


그냥 모른 척하자. 모른 척, 아무 일도 없는 척. 머리 위의 숫자는 더는 안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편해지는 것 같았다. 언젠가 알기 싫어도 알게 될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있다면 내가 굳이 지금 알아야 하는 걸까?


나는 밤길을 걷다가, 정말 우연히 골목을 쳐다봤다. 가로등 없이 지독하게 어두운 골목이었다. 어째서인지 거기엔 숫자가 보였다.


0. 0 아래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이라 형체만 분간될 뿐, 누가 거기 서 있는지 몰랐다.


1. 숫자가 바뀌었다. 살짝 수그린 듯했던 숫자 1은 이제 올곧게 섰다.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1이 이쪽을 보기 전에(딱히 1에 입체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고개를 돌리면 숫자도 미세하게 흔들린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다) 나는 아주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엄마가 깨어서 날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철우야. 괜찮니?"


"아, 네. 이 시간까지 뭐하고 계셨어요."


"막차 끊겼는데 너 데리러 갈까 생각했지."


"뭘 굳이......."


나는 차마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엄마의 숫자를 보는 게 무서웠다. 88에서 더 바뀌었으면 어떡하지? 내가 살아있는 동안 엄마의 숫자는 얼마나 바뀌는 걸까?


나는 정녕 알 수 없었다. 알기도 싫었다.


"이제 자야겠다. 에구구."


엄마는 허리를 짚으며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엄마."


"응?"


"나 사랑해?"


나는 진실보다 거짓말을 택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닫기로 결심했다. 엄마는 피곤한 기색에도 싱긋 웃어줬다. 89.


"그럼, 사랑하고 말고.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잘 자."


89.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 외에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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