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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번역] 변증의 초월

ㅇㅇ(220.120) 2020.04.27 17: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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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Julius Evola - The Doctrine of Awakening (1951)


불교의 깨달음의 교리에서의 가장 첫 전제는 변증의 악마를 말살하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이는 단순한 의견과 다양한 이론들의 표현이자,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한 자신만의 원리를 아직 찾지 못한 의식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동요의 투영이라 할 수 있는 사고와 성찰의 다양한 생성의 단념이다.


이것은 단지 우주론적 고찰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인간의 본성, 운명, 그리고 수행(asceticism)의 궁극적 목표에 대한 개념적 결단과 연관된 문제에서도 적용된다. “나는 과거의 시대에 존재해온 적이 있었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았는가? 과거 시대의 나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나는 어찌하여 그 때의 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인가? 미래의 나는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미래의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미래의 나가 되어갈 것인가? 그리고 현재마저도 [평범한 인간들에게] 의문에 휩싸이게 된다: 나는 정말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찌하여 나로 존재하는가? 이 존재는 정말로 이곳에서 나온 존재인가? 그리고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러나 불교에서의 이러한 물음은 모두 공념(空念)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무지한 속인이 탄생, 부패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곳에서 사로잡혀 길을 잃은 “이것은 견해의 막다른 골목, 견해의 협곡, 견해의 가시나무, 견해의 덤불, 견해의 그물로 불린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한다: “’나는 존재한다’은 견해이다; ‘나는 이것으로 존재한다’는 견해이다; ‘나는 존재하리라’는 견해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견해이다; ‘나는 [순수한] 형태의 세계에 존재할 것이다’는 견해이다; ‘나는 형태로부터 자유로운 세계에 존재할 것이다’는 견해이다; ‘나는 자각할 것이다’는 견해이다; ‘나는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는 견해이다; ‘나는 자각하지도, 자각하지 못하지도 않을 것이다’는 견해이다; 오 제자여, 견해는 병이요, 종양이자 괴로움이니라. 오 제자여, 모든 견해를 극복해낸 자는, 우리가 아는, 성자라고 칭하는 자이니라.”


이것은 우주론적 질서에서도 동일하다: “’세상은 영원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은 유한하다,’ ‘세상은 무한하다,’ ‘생명의 원리와 육신은 동일하다,’ ‘생명의 원리와 육신은 개별의 존재다,’ ‘아라한(阿羅漢, The Accomplished One)은 죽음에 후행한다,’ ‘아라한은 죽음에 선행한다,’ ‘아라한은 죽음에 후행하고 선행한다,’ ‘아라한은 죽음에 후행하지도 선행하지도 않는다’ – 이것이 바로 견해의 막다른 골목, 견해의 덤불, 견해의 숲, 견해의 올가미, 견해의 미궁이며, 고통스럽고, 절망스럽고, 뒤틀어졌으며, 초연함으로도, 진전으로도, 통찰로도, 깨달음으로도, 소멸로도 이끌지 아니하니라.” 아라한의 교리는 “잘못된 이론, 독단, 체계로의 모든 집착과 만족을 뿌리째 뽑는 것”, 그리고 그리하여 두려움과 희망을 덜어내는 것으로 설명된다. 부처는 이 문제에 답을 한다: “고타마 님[싯다르타 왕자의 성]께서는 아마 의견[견해]이 있으시겠지요.” 이것은 다음과 같이 단언할 수 있다: “견해: 이것은 아라한과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다. 아라한은 그것을 바라본다.”


이것은 근본적인 요점을 답해준다. 불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만약 정말로 그리했다면 필요에 따라 일련의 문제와 관련하여 상당히 정확한 가르침을 알려주는 문구들이 있기에, 곧 모순의 관계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는 그보다 변증의 악마에 반대하고, 추론적인 지성 – 심(尋, vitakka) – 에만 의지하고 오로지 “견해” (δόξα)의 가치만을 지는 모든 “진리”에 대한 거부다. 이것은 “추론자와 논쟁자들”과 거리를 두는데 이들은 “훌륭하게 논증할 수도 형편없이 논증할 수도 있으며, 이들은 이에 따른 이야기를 할 수도,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며, 이들은 자신들이 도출해낸 이론들만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교의 극기에서의 “모든 것을 버려라”(ἄφηλε πάντα)라는 말은 기독교의 모호한 사고의 유형과 같이 신앙을 위한 지성의 희생(sacrificium intellectus)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그보다 실제적 인식에 기원하면서, 즉각적인 통찰에서 얻게 된 – 초기 베다 전통에서와 같이 – 상급의 유형 혹은 확실성의 기준에 의해 해명된 예비의 정화, 정화의 필요성(opus purgationis)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경험의 기준이다. “믿음, 기질, 구전, 학문적 논거, 추리와 논증, 성찰에서의 유희로부터 단절되었을 때”, 이와 동일한 기준은 부처가 사물의 존재와 비존재를 결정할 때에도 적용되는데, 이는 즐거움, 고통, 혹은 망상의 존재를 자신의 이러한 상태들에 대한 경험에 준거하여 판단하는 자에게도 적용되는 것과 같다. 이외에도, 상당수의 지식은 논증적인 지식인 즉, 개인을 자신 그 자체인 채로 남겨놓는다: 이것은 상급의 지식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삼중 결합”의 제거에 전적으로 기여하지 않는다. “심원의 심리학”의 실제를 이미 숙달한 부처는 헛된 성찰과 무수한 문제제기는 동요와 괴로움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즉 “아리야의 길”(path of the Ariya)을 따라 감으로써 필히 뒤안길로 잊혀져야 하는 바로 그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사냥꾼의 우화에서 정신과 세계와 관련된 일상의 문제들을 스스로 제기하여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한 제자의 의향이 뒷걸음질로 간주되는 이유가 된다: 이는 먹이로 삼아 자신의 힘으로 흡수하기 위한 악마와 그 밖의 인간이 던져 놓은 미끼 중 하나에 불과하다.


“깨달음으로써 아는 것, 인식하는 것, 진리가 되는 것, 통찰이 되는 것” – 이것이 이상이다: 실체에 준거한 앎과 깨달음 – 실체에 따른 지식과 통찰(yathā-bhūta-ñāna-dassana): 모든 논쟁의 머나먼 너머에 있으며 수행의 실현과 밀접하게 엮인 직접적인 지적 직관이다. “철학적 견해의 빈곤을 인식하는 것, 그러한 어떤 것들에게도 집착하지 않을 것, 진리를 추구할 것, 이것이 내가 깨달은 것이다.” 팔리어 대장경(Pāli Canon)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아라한]는 이 세상이 천사, 선과 악의 영혼, 수행자와 브라만의 계급, 신과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고 깨닫게 된 이후,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었다,” 등등. 여기에는 이보다 더 극단적인 표현도 드러나 있다. 싯다르타 왕자는 말한다, “나는 상사(相似)에 따라 행동하는 자는 그리하여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비존재하는 것을 비존재하는 것으로, 천박한 것은 천박한 것으로, 고귀한 것은 고귀한 것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가능한 것은 가능한 것으로,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할 것이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러저러한 분야를 다루는 법칙을 상술할 수 있음을 단언한다; 그는 이것이 알려지고, 이해되고, 깨닫게 되어진 대로 이를 정확히 알고 이해하며 깨닫게 될 것이다. 지식의 최종 형태는 실체에 따르는 지식이다. 이보다 더 상위의 지고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그리고 곧이어 말한다: “’완벽히 깨달은 자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것, 이는 참이다; 그러나 너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수행자 혹은 브라만, 신 혹은 악마, 브라흐마 혹은 이 세상에 있는 그 밖의 다른 이들은 그러므로 당연히 나를 책망할 수 있기에, 이 가능성은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싯다르타 왕자는 말한다. 현명한 자, 아리야는 체제의 추종자가 아니며, 그는 신조를 알아보지 않으며, 사람 사이에서 현존하는 견해들을 관통하며 고찰에 무심한 채, 그는 이를 타인의 것으로 남기며, 동요 속에서도 평온을 유지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이 벌이는 언쟁에 관여하지 않는다: “오로지 이것만이 진리이다,” 그는 자신을 타자와 동등하거나, 우월하거나, 저열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정전(正典)으로 여겨지는 글귀에 의하면, 당대의 철학적 견해의 수렁에 대한 설명 이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만날 수 있다: “아라한은 이 너머[성찰과 같은 것을 넘어서]의 다른 것들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지식을 얻은 것으로 그는 자만하지 아니하고 태연함을 유지하며, 그의 내면에서 이 너머로 이끄는 길을 자각한다… 오 제자여, 여기에는 다른 것들, 심오한 것들, 깨닫기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다만 평온을 부르는 것들이 있다. 아라한은 이러한 것들을 상설할지니, 이는 그가 스스로 이들을 알게 된 이후, 그가 스스로 이들을 바라본 이후의 일이다.


우리는 싯다르타 왕자에게 붙여지고 나중에는 그의 길을 따라온 모든 이들에게도 수여된 부처라는 명칭이 “깨달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동일한 지점, 필연의 동일한 기준으로 인도한다. 아리야의 교리는 “상상의 너머”로 불리며, 어떠한 추론 과정에 의한 동화를 허하지 않는다. 앗타카바카라(atakkāvacara)라는 용어가 자주 반복되는데, 논리로 이해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 이 교리는 “깨달음”속에서 그리고 “깨달음”으로서 존재한다. 인식의 이러한 방식과 아남네시스(anamnesis)에 대한 플라톤의 관점 사이에서의 일치함을 곧 발견할 수 있는데, [플라톤 철학에서의] “상기” 혹은 “회상”은 망각의 상태를 극복한다; 불교에서 아사바(Āsava, 번뇌), “취하게 하는 것”, 열광, 흥분에 의해 만들어진 상태를 극복하는데 목표를 둔다는 점에서 정확히 같다. 이러한 용어, 상기와 깨달음은 그러나 지식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인식하고 평가하는 것 이상을 나타낼 수 없는데, 무언가를 기억하거나 일어나서 무언가를 보는 인간과 같이 여길 수 있다. 이는 후기 불교 문학에서 스포따(sphoṭa) 라는 용어가 되풀이되는 이유인데, 이 단어는 다음과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처음으로 베일을 벗는 것과 같이 현현한 지식이다 – 마치 수술을 한 뒤 눈을 다시금 뜨고 바라보는 것과 같다. 법안(法眼, Dhamma-Cakkhu), “진리의 눈”, 혹은 “실체”의 눈, 눈을 지닌 자(cakkhumant)는 통상적인 불교의 표현인데, “귀의”의 기술적인 대명사가 다음의 것을 나타내는 것과 동일하다: “진리를 향한 그의 눈을 떴노라.” 부처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곳에서 우리는 지식의 순수한 표상에 대한 언급을 자주 찾아볼 수 있는데, 직접적으로 혹은 “이전에 듣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직유(直喩)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본문의 또다른 중심사상이 드러난다: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무언가로써, 통찰은 나에게서 일어나고, 지식은 나에게서 일어나고, 직관은 나에게서 일어나고, 지혜는 나에게서 일어나고, 빛은 나에게서 일어났다”; 이는 “아리야의 자질에 부응하는, 지식의 참된 탁월함”이라 불린다. 이는 -voūs[이해]의 특성, 고대 인도-헬레니즘의 전통에 따라 “존재”에 엄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바라봄으로써 얻은 지식”에서 나타나는 숭고한(Olympian) 사고방식의 특성을 상기한다: -voūs는 기만에 반하는 증명이자, “마치 거울과 같이 완고하고 평온한 것으로, 갈구하지 않은 채 만물을 발견하며, 오히려 그보다 만물이 그로부터 스스로를 찾아내며”, 반면 티탄의 정신(Titanic spirit)은 “불안하고, 창의적이며 언제나 기묘하고 별난 무언가를 탐색한다.” “투명함”으로 이해되는 통찰은 불교의 이상이다: “맑은 물, 모래, 자갈, 그리고 조약돌의 색깔을 꿰뚫어 보는 자는 해방의 길을 구하는 자가 투명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에 다름이 없다.” 수행자가 아리야의 네 가지 진리를 깨닫는 방식을 그려낸 인상은 이와 같다: “만일 맑고 투명하며 순수한 물이 있는 고산의 호수에 예리한 시야로 껍데기와 조개, 자갈과 모래 그리고 물고기를 바라보며, 이들이 어떻게 헤엄치고 휴식을 취하는지 지켜보는 자가 그곳에 서 있다고 한다면; 그는 이러한 생각이 들게 될 것이다: ‘이 고산의 호수는 맑고 투명하며 순수하다; 나는 껍데기와 조개, 자갈, 모래, 물고기를 바라보며 그들이 어떻게 헤엄치고 쉬는지를 지켜본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수행자는 교리의 궁극적 목적을 “진리에 부합하여” 깨닫게 된다. “진리에 부합하여” 내지는 “실체에 알맞은” 공식은 – yathābhūtaṃ[진리에 따르는] – 본문에서 되풀이되는 주제로, “세상의 눈”, 혹은 “눈이 되다” 아니면 “지식이 되다”로 나타나는 깨달은 자의 자질과 같다.


이는 오로지 점진적 과정을 통해 자연적으로 이루게 되는 것이다. “바다가 점차 깊어지고, 점차 줄어들며, 급작스러운 벼랑없이 점차 경사를 형성하는데, 법과 수양에서도 마찬가지로 점진적 수련, 점진적 행동, 점진적 나타남이 있으며, 궁극의 지식의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없다.” 계속 이어서: “말하건대, 지고의 지식을 한번에 모두 얻을 수 없다; 오로지 점진적 수련, 점진적 행동, 점진적 나타남을 행한 자만이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는 어떠한 방식인가? 인간은 확신에 따라 도달하게 된다; 도달한 그는 [아리야의 질서에] 임한다; 이에 임한 그는 경청한다; 경청한 그는 교리를 받아들인다; 교리를 받아들인 그는 이를 유념한다; 그는 유념한 것들의 인식을 시험한다; 인식의 시험으로부터 이들은 입증된다; 이들이 입증되고, 갈망이 탄생한다; 그는 생각에 잠긴다; 생각에 잠긴 채 그는 간절히 스스로를 수양한다; 그리고 간절히 스스로를 수양한 그는 마음속으로 극상의 진리를 깨달으며, 지혜로 이를 간파한, 그는 앞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성장의 이정표다. “확신”을 연쇄의 시작에 두는 것이 “믿음”으로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본문은 첫 단계에서 확신이란 언제나 고무적인 성장과 대가의 전형에서 촉발된다고 여긴다; 두 번째로, 우리가 연쇄의 전개로부터 명료하게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것은 일시적인 입회만의 문제이다; 진정한 귀의는 시험과 실천을 통해 이것에 선행하는 것과 전적으로 독립적인 직접적 깨달음과 지적 직관의 능력이 가능해질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굴의 자기 수련을 행할 수 없는 자, 진리에 달할 수 없다: 따라서 불굴의 수련은 진리를 달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암시적인 가정이 존재하는데, 이에 대해 상세히 다루기 이전에 우리는 하나의 가정을 논해야 하는데, 다시 말해, 교리에 인도되는 자들은 야만적인 짐승의 상태에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적 견해로서가 아닌 자연스럽고 타고난 감각으로, 감각의 것 이상의 실체의 존재를 인식한다. “범인”(凡人)에 속하는 자들은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들이다: “여기에는 주어짐도, 권함도, 목적도 없으며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의 결과도 없으며, 이 세상도 없고, 다른 세상도 없고, 정신의 부활도 없고, 완전하고 성취감에 찬 수행자와 브라만은 이 세상에 없으며, 자신의 이해로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이해하고 깨달아 자신의 지식을 알린 자들은 없다.” – 이러한 교리는 이전에 상술한 바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들은 “고결한 자손”을 정의하고 우리가 언급한 연쇄의 첫 구성물인 “확신”의 기초적인 특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들은 원문의 적절한 설명에 따르면, “야밤에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은 자들이다.


실용주의적이고 반지성적인 정신으로 각성의 교리(Doctrine of Awakening)를 행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는 탁월함에 대해 논하기 위해, 우리는 또다른 불교의 직유를 언급하고자 한다. 독화살에 맞은 한 남자는 자신의 벗과 동료들이 그가 수술을 받기를 바람에도, 누가 자신을 쏘았는지, 그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의 사람은 누구인지, 그의 모습은 어떠하며, 그의 활이 큰지 작은지, 무슨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활에 무엇이 매달려 있는지, 그리고 그 밖의 것을 알기 이전에 화살을 뽑기를 거부했다. 이 남자는 죽기전에 자신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깨달음에 다다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또한 – 원문에서 말하기를 – 숭고한 자에게 이 세상이 영원한 것인지, 육신과 생명의 원리가 별개의 것인지, 죽음 이후에 아라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 밖의 것을 이야기하며 자신에게 다양한 사변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을 준 조건 하에서만 숭고한 자를 따르는 사람과 같이 행동한 것과 같은데, 부처가 말하길, 이중 그 어떠한 것도 나에 의해 해명되어진 바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찌하여 나는 이를 해명하지 않는 것인가? 이것은 유익하지도 않고, 진정한 수행도 아니며, 질색으로 이끌지도 아니하며, 초연함으로 이끌지도 아니하며, 냉정으로 이끌지도 아니하며, 평온으로 이끌지도 아니하며, 명상으로 이끌지도 아니하며, 각성으로 이끌지도 아니하며, 소멸로도 이끌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나에게 해명된 적이 없도다.”


이 세상과 인간에 관한 대립 이론들 중 칸트의 이율배반 이론을 특징적으로 되뇌어보면, 하나가 대립하거나 다른 하나는 참일 수 있다. 허나 한가지는 분명하다: 이 상태는 인간이 자신의 일생동안 실제로 스스로를 찾고, 스스로를 수양할 가능성을 찾아 현 상태의 파멸을 달성하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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