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7. 원본 작성)

한때 나는 작화가 갤러리에서 배경동화에 관해 어느 갤러와 대화를 하다가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에 나오는 유명한 효과를 배동으로 재현한 것이 있을까 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말뜻을 제대로 이해를 못 해서 완전히 관계 없는 말을 늘어놓았기에 다시 생각할수록 부끄럽지만, 아무튼 그때 이후로 내가 다른 글에서 댓글을 쓰다가 다시 기억이 나서 이 주제를 꺼내고 내린 결론은 그런 연출이 일본 애니에서 시도된 적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그런 걸 배경동화로 만들어놓은 사례는 더더욱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때 이후로 나에게는 여러 애니들을 볼 때마다 달리 줌이 시도되는지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최근에서야 비로소 달리 줌이라고 부를만한 장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애니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흔치 않은 촬영기법이기에 이번에 일종의 발견 보고를 겸해서 소개해볼까 한다.

(<츠루네> 2기 1화 / 콘티 및 연출 : 야마무라 타쿠야(총감독) / 원화 : 이시다테 타이치 / 작화감독 : 타카하시 마리코 / 촬영감독 : 후나모토 코헤이)

비록 모든 것을 작화로 하진 않고 작화, 배경미술, 3D 그래픽, 촬영을 적절히 조합해서 만들어낸 장면이겠지만, 달리 줌 효과를 애니메이션에서 이 정도로 재현해낸 경우가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애초에 앞서 언급했듯 어떤 식으로든 달리 줌 자체가 구사된 사례 자체가 거의 없으니 대단히 귀중한 장면이라고 본다.

이 장면의 경우 앞의 피사체의 크기가 유지되는 상태에서 배경이 넓어지는 것을 보면 달리 줌 중에서도 달리 인 하면서 동시에 줌 아웃을 하는 걸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단히 신속한 스타일의 달리 줌이기도 하다.

달리 줌(Dolly Zoom)이란 카메라가 전진할 때 동시에 그 카메라의 화각을 조절하여 줌 아웃을 하거나 혹은 카메라가 후진할 때 동시에 줌 인을 하는 식으로 서로 상충되는 속성의 촬영을 동시에 하는 기법을 뜻한다.

이런 식의 촬영을 하면 결과적으로 화면이 안으로 오그라들거나 팽창하는 듯한 장면을 볼 수 있으며 앞에 인물 등의 피사체가 있다면 피사체의 크기가 어느 정도 유지되는 반면에 뒷배경이 가까이 다가오거나 멀어지는 장면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기법을 효과적으로 써서 유명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의 제목을 따서 '버티고 이펙트(Vertigo Effect)'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기증> / 57초부터)

달리 줌은 대단히 독특한 시각적 충격을 주는 테크닉이기에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실제 육안으로는 재현이 안 되는 장면이라 관객들이 순간적으로 '띠용?'하게 되는" 기술이다.

이 기법은 위처럼 인물이 느끼는 어지러움이나 정신적 혼란, 패닉 상태, 혹은 인물의 무언가에 대한 엄청난 집중, 몰입을 묘사하거나 아니면 어떤 거대한 현장의 임장감 따위를 묘사하고 싶을 때 자주 사용된다.

물론 달리 아웃+줌 인 조합, 즉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동시에 화각을 조절해 화면을 확대하는 촬영도 있다.

(<증오>)

나는 이전에 <체포하겠어> 리뷰를 하면서 전통적인 2D 애니메이션은 그 특성상 실사 영화에서 구사되는 입체적인 카메라 워킹을 재현해내가 태생적으로 힘들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https://blog.naver.com/too_too_02/222940856599).

그리고 물론 이것은 달리 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2D 애니메이션에서는 달리든 줌이든 하고 싶어도 뒤에 깔리는 배경미술부터가 한 장의 그림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카메라를 조작해봤자 대단히 어색해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애니 업계에서 촬영이나 3D 그래픽 기술이 많이 발전한 관계로 어느정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사 영화에서처럼 달리 줌이 좀처럼 구사되지 않는 이유는 일본 애니 제작자들이 영화에서의 여러 촬영 기법을 활용한 연출, 혹은 그것들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달리 줌에 관해서만큼은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관심이 있어도 일본 특유의 만화 전통에 입각한 기호화된 연출을 더 우선시하기 때문이거나 이 둘 중에 하나가 아닐까 나는 예상한다.

그러나 위의 <츠루네>를 만든 제작사 교토 애니메이션은 사람들이 의외로 인지하지 못하고는 하지만 실제 카메라의 작용에 기반한 촬영을 재현하여 꾸준히 다양한 장면들을 보여주려 해왔다.

쿄애니의 원로들 중 하나인 이시하라 타츠야 감독부터가 실제 카메라 촬영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후배 연출가들이나 쿄애니의 촬영부서 사람들도 역시 실제 카메라로 찍는 듯한 영상미를 만들어내려는 면모를 자주 내비쳤다.

이 제작사가 만든 작품들에서 자주 나오는 아웃 포커싱을 비롯한 피사계심도 기법이나 보케 효과, 광각촬영 등이 그 예시일 것이다.

그 외에도 쿄애니는 실사 영화의 촬영술, 이른바 시네마토그래피(Cinematography)를 의식하는 듯이 일본 애니에서는 잘 안 나오는 오버 더 숄더 쇼트나 지니썰 쇼트(Zenithal Shot - 바닥에 있는 피사체를 수직 방향으로 멀리 떨어진 카메라로 찍는 것), 타임랩스 같은 것들도 종종 선보이곤 했는데, 이번 <츠루네> 2기에서의 달리 줌 시도 역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이라 봐도 좋을 것 같다.

비록 작화덕후로서는 이걸 배경동화로 만들었으면 더 엄청났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이들의 촬영 기술을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는 일이므로 앞으로도 이런 시도를 자주 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특히 이쪽 방면에 있어서 위의 후나모토 코헤이(船本孝平) 촬영감독은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그는 <타마코 마켓>, <타마코 러브 스토리> 등에서 촬영 보좌를 맡은 이후로 그 유명한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책 홍보용 CM에서 비로소 촬영감독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며, 그는 이 시리즈의 TVA와 극장판에 이르러서도 촬감 자리를 굳게 지키면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고 그 후 <츠루네> 시리즈에서도 촬영감독으로서 계속해서 인상적인 솜씨를 보이고 있다.

추가)

내가 이 글을 쓴 이후로도 총감독 야마무라 타쿠야와 촬영감독 후나모토 코헤이를 위시한 제작진은 같은 작품에서 여러 번 달리 줌을 시도했다.

<츠루네> 2기 3화

위의 해당 장면을 두고 작화 업로드 사이트 사쿠가보루를 운영하는 kViN(케빈)은 "훌륭한 달리 줌"이라며 호평을 남기기도 했다.(https://twitter.com/Yuyucow/status/1615848735300272128)

물론 그는 본디 예전부터 쿄애니의 엄청난 팬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 장면 뿐만이 아니라 처음 작품이 방영될 때부터 다음 화가 나올 때마다 매주 장문의 리뷰를 남기며 제작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나는 원글을 쓴 이후로도 정말 작화로 만든 달리 줌은 없을까 싶어서 틈틈이 이곳 저곳을 유랑했는데

그나마 찾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내가 작화 리뷰를 한답시고 예전에 만든 gif 움짤들 중에 있었다.

(<코바야시네 메이드래곤 S> / 원화 : 미상 / 작화감독 : 츠노다 유키)

공교롭게도 또 쿄애니 작품이었는데 어쨌든 이 장면은 배경동화로 만들어졌으며 익스트림 클로즈 업 쇼트에서 롱 쇼트로 캐릭터가 어느 정도 멀어진 다음부터는 몸의 크기가 유지되는 반면에 뒷 배경은 계속 수축하는 것으로 보아 달리 줌 중에서도 달리 인+줌 아웃으로 판별할 수 있겠다.

물론 내가 모든 애니들을 다 보는 건 아니니까 혹여나 내가 모르는 달리 줌 컷이 일본 애니판에 더 있을 수도 있다.

혹시 달리 줌이 시도된 다른 장면을 알고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길 바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