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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동반자들 - 7

설계도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7.30 18: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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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여행을 떠나려 해. 삼일 정도 아니 일주일 정도. 요즘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말이야. 라는 메모를 남기고 집에서 나왔다. 아내와는 여전히 금실이 좋다. 또는 금실이 좋다고 여겨진다. 아내의 재택근무가 길어짐에 따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나름 함께 장을 본다든가 산책을 한다든가 TV를 본다든가 하는 식으로 지낸다. 하나 살 것을 두 개 사고 두 개 살 것을 네 개 산다. 하나 만들 걸 두 개 만들고 두 개 만들 걸 네 개를 만든다. 그런 식이다. 혼자 여행하기로 한 건 충동적인 일은 아니었다. 자주 그런 식으로 국내든 해외든 이탈해서 무언가를 정리하고 다시 궤도로 돌아오곤 했다. 글쓰기나 취재는 핑계고 하여간 축적되는 생활의 권태-비단 사람에게 느끼는 것이 아닌-를 피해 영적인 도피를 늘 감행했고 대부분 실패했지만, 그 괴리가 주는 균열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균열을 응시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균열을 응시하고 있다


사이에서 심각한 듯 세상을 다 이고 잠깐 도피를 하지만 여전히 보는 눈은 많고 도피가 도피가 아닌 경우가 많고 머릿속의 상태도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경주까지 기차를 타고 거기서부터 택시를 타고 감포읍으로 갔다. 경주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관광객마냥 경주 시내를 싸돌아다닐 건 아니니까, 차도 없이 그저 호텔에 처박혀서 일주일동안 바다와 호텔만 오가면서 리프레쉬하면 된다. 생활의 잡내를 떨쳐내고 어쩌면 영감 같은 게 머릿속에 들어와서 해리포터나 스티븐 킹이나 써 재끼면 팔리는 소설을 쓸지도 모른다. 아니면 굉장한 사람을 만나거나 낯선 풍물에 자극을 받아 기삿거리를 써서 푼 돈 좀 챙길 수 있을는지 모른다. 매번 실패하는 그런 기대를 품고 시골과 도시, 도시와 시골 그 중간 어디의 어중간한 옛 수도의 굽이를 택시를 타고 넘었다. 


일찍이 나쓰메 소세키의 <춘분 지나고까지>라는 범작에서부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고도>에 이르기까지 오래된 도시에의 여행이나 암자에서의 은둔은 출생의 비밀이 아스라이 똬리를 튼 낭만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런 낭만과는 거리가 먼 경주는 천 년의 수도란 이름이 무색하게 거대한 고분, 무덤만이 페루의 여느 제단처럼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페루만치 천혜 자연에 파묻힌 곳도 아니어서 수도로 쓰였던 무덤을 빠져나와 동해 쪽으로 가면, 인가도 상가도 농가도 드문드문 있는 시골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오래된 버스 정류장 앞에는 공사가 한창이고 커다란 공사판을 지나서 바다에서 15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예약한 호텔이 나왔다. 호텔만이 바다를 마주하며 현대적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러 들어가면서 코로나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입구는 한 곳을 제외하면 폐쇄되어 있었고 호텔에서 운영하는 시설은 거의 운영을 안 하고 있었다. 깨끗하지만 폐허가 연상되는 시설을 지나 10층 언저리의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풀 짐도 없이 창문을 열고 누웠다. 에어컨은 바깥의 온도에 맞춰 센 바람을 내보냈다. 무척 더운 날씨였다. 강렬한 햇볕은 차양막 사이로 이리저리 새어들어 왔다.


“덥네.”


하고 내뱉고는 푹신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별안간 꿈을 꾼 것 같은데 그 내용이 기억에 나지 않는다. 근처의 불고기 백반집에서 밥을 먹고 바다로 나왔다. 해가 지려고 하고 있었다. 바다는 코로나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인적이 드물었다. 한참 먼 곳의 해수욕장은 폐쇄되었고 눈앞의 깊은 바다는 눕는 해를 안고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눈앞의 바다의 수심은 꽤나 깊었다. 녹색과 청색, 반짝이는 흰색, 노을의 주황색이 뒤섞여 넘실댔다. 멀리서 마른미역을 광주리 같은데 담고 흰 무명천으로 덮은 짐을 인 할머니가 걸어왔다. 느릿하게 걸어오는 그 모습이 정겹다기 보단 이질적으로 여겨졌다. 여기서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거지? 한편으로는 해가 질 때조차 더운 여름이라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수평선 저쪽 등대로 걷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은 어디까지나 젊은 여인을 향해 있었고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 할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 젊은 여자는 내 시선에서 엄지손가락 하나에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작은 원근감으로 먼 등대 위에 서 있었다. 무얼 바라보는지 돌아 볼 생각도 안하는 것 같았다. 저 여자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솔직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도 잘 몰랐다.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둑어둑해지자 호텔로 향하는 가로등 몇 개를 제외하고는 세상의 불이 다 꺼졌다. 여름이라 불안정한 대기 탓에 별도 잘 보이지 않았다. 여자를 기다려 볼까? 싶었지만 귀찮아졌다. 돌아서 호텔로 다시 돌아갔다. 금세 나갔다 오니 땀이 비 오듯 흘러서 샤워를 했다. 방은 시원했지만 텁텁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문을 열어도 습기는 가시지 않았다. 해안가인 것을 잊었다. 다만 문을 여니 먼 곳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등대의 불빛도 보였다. 여기서는 뭐가 잡히려나? 무엇이 명물이려나? 명물을 취재한다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 같이 의욕이 넘칠 때면 여행의 시간을 유의미한 무엇으로 바꾸어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은 예전이었고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그저 도피의 다름 아니었다.


등대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해가 지기 전에 등대에 서 있던 여인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야리야리한 몸매, 지는 해에도 꽃 같은 양산을 쓰고 그리스 산토리니의 어느 청순한 여자 배우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청초함이 있는 그런 여자를 상상했다. 방금 전 일인데도 상상은 기억에 엄청난 덧칠을 했다. 훈풍에 에어컨 소리가 맞서듯 세져서 문을 닫고 노트북을 켰다. 글이야 나올 것도 없고 이메일을 뒤져도 일거리도 없었다. 정해진 본능처럼 수음을 한참하고 잠이 들었다.    


한반도 최동쪽에 있는 감포읍도 아침이 빨랐다. 커튼 사이로 햇빛이 따갑게 들어왔다. 창문을 열고 또 어제 서 있던 쪽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이제는 엄지손톱만 하게 보이는 그 여인이 등대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양산이 없었다. 조그마한 여자의 뒷모습 하나 가지고 쫓아가서 어쩌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아무것도 없는 이 해안에 여자 하나, 그것도 젊은 여자 하나가 있다는 사실에 설레었다. 여기 호텔의 투숙객일까? 아니면 감포읍에 사는 여자일까? 궁금증이 들었다. 기다렸다가 정면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못생겼을지도 몰라. 아니지, 늙었을지도 몰라. 별안간 드는 충동을 억제하려고 했으나 쉽지는 않았다. 왜 나는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을까. 창문 옆에 있는 책상에서 메모장을 집어 한 문장을 적었다.


“매번 실패로 끝나는 서사시를 오늘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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