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과거 노예였던 자들이 자신들의 주인을 종으로 부리고, 과거 우리들을 호령하던 자들이 우리들에게 굴종한 것은.

우리는 한때 노예였고,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누구도 하기 꺼려하는 일, 그러면서도 누군가는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해야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팔리라이안들이 세기의 대발견을 하고, 모두가 추종하는 위대한 건축물을 세우고, 국가를 건국하고 쇠퇴시키며 활발히 역사서를 채울 동안,

우리는 그들의 도구로서 사용되며 잊혀졌다.

마치 우리가 태블릿을 사용하는 방법을 상세하게 묘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들은, 그들에게 있어 궁극적인 노예일 뿐이었다. 병들고 아픈자를 우리들에게 던져주고 약간의 시간만 흐르면, 건강한 노예가 탄생하는거다.

우리들이 역사의 저편에서 고통받는 동안, 저들은 양지에서 번성했고,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이 관계는 어느순간 역전되었다.

국가와 국가간의 피비린내나는 정복전쟁만이 기록되는 정부의 공식 역사서에 처음으로 노예들의 반란사태가 기록되기 시작했고,

수많은 학자들의 서적에서 농민반란사태의 기록 빈도수가 10배로 폭증하기 시작했다.

국지적으로 끊겨가던 국가의 통치능력은 어느새 국토의 대부분을 상실하는 결과로 나타났고,

이러한 현상이 행성 전역에서 일어났기에 그들은 손쓸 도리도 없이 무너져내렸다.

이제 우리는 명실상부한 행성의 지배자가 되었다. 약간의 잡음이 있긴 했지만 성공적으로 행성 전역을 통치하는 제국을 세웠고,

우리들의 주인을 노예로 만들었으며, 반항하는 자들은 힘으로 짖눌렀다.

우리에게 순종하는 자들은 우리들의 일부로 만들어 받아들여줬으며, 무엇보다 그들의 문화와 역사 모두를 그들에게서 빼앗아버렸다.

남은이들은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살기 위해 애쓰는 자들 밖에 남지 않았다.

오백년이 지났다. 세상은 변했다.

지금의 지배구조는 완벽하게 안착되었고 한때 인간과 동물들의 힘을 빌려야했던 육체노동은 기계와 전기의 힘으로 대체되었다.

한때 종이와 진흙판으로 진행되었던 서류작업은 전지구적 네트워크와 컴퓨터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우리의 역사.

우리의 근원.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언제부터 세계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는지.

그 어떤 기록도, 어떤 구전도 우리의 존재를 암시하는 자료는 단 하나도 없었다.

과거 팔리라이안들이 주체로 씌여진 역사는 우리들의 역사에 대한 단편적인 편린만을 기록해놓았고, 그마저도 너무나 오랜 시간의 장벽은 대부분의 기록들을 유실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한가지 분명한건, 특정할 수 없는 한순간 우리들이 나타났고, 팔리라이안들은 우리를 훌륭한 돈벌이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 뿐이었다.

수많은 명망있는 라이피안 학자들이 이 문제에 뛰어들었고, 절망했으며, 일부는 포기했고, 일부는 의도적으로 관심을 끊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박물관의 수장고와, 고서 저장고에서 수십년을 처박혀서 연구에 골몰하는 자들.

진화생물학과 계통분류학의 발달과 문헌학, 환경고고학 및 위성항공고고학 등등.... 수많은 학문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몇없는 증거들 사이에 숨어있는 진실의 장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동시에 증거가 없어 말하지 못했던 것.

발달한 과학은 우리들이 이세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우리는 하늘에서 왔다.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크드타드가 중얼거리며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 리포터가 초공간 드라이버를 탑재한 실험탐사기가 드디어 하이퍼레인 도약을 실시할 준비를 마쳤고 퀘니 지르감 궤도를 벗어나 오르트 구름에 거의 도달하고 있다며 속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제국 수석 이론물리학장 카고림의 역작, 초공간 드라이버의 시험탐사가 몇시간 내로 이루어질 것이다.

리아피안계에서 카로스까지, 빛의 속도로도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카고림의 실험이 성공하기만 한다면....5년이라는 시간은 한달정도로 단축될 것이다.

라이피안이라는 종족이 우주에서 떨어진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진 바로 이날, 라이피안이 드디어 성간진출을 할 수 있는 종족으로 발돋음하는 날이라니.

크드타드가 중얼거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몇시간 뒤면, 라이피안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크드타드가 머그컵을 들어 내용물을 한모금 마셨다. 이미 식어서 맛이 역겹게 변했지만, 상관 없었다.

행성 통신 네트워크를 통해 그의 이론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쉴새없이 반박하는 논문과 보강하는 논문들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몇시간 뒤면, 라이피안의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그리고 몇시간 뒤에, 라이피안의 모든 것이 바뀌었을 때,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의 조상은 어떤 삶을 살아갔고 어떤 이유로 고향을 떠나 이 행성에 떨어지게 된 것일까.

이 우주 어딘가에 우리의 고향이 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고향을 떠날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들이 이 우주 어딘가에 아직도 남아있을까. 그리고.

크드타드가 다시 머그컵을 들어 내용물을 한모금 마셨다.

우리들이 이 행성에 착륙했을때 처럼, 우리도 또다시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크드타드가 머그컵 안의 내용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식어서 맛이 역겹게 변했지만, 비단 머그컵의 내용물 때문일 것 같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