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5.115) 2020.04.06 11:51:22
작성자-얀갤용계정
용의 거처에서 지낸 지 어느덧 한 달째.
고산 꼭대기에 동굴을 뚫어 만든 이 보금자리는, 솔직히 말해서 매우 아늑했다.
용의 동굴 안엔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용들의 보금자리처럼 보물들이 가득했다. 책에서 얘기하던, 한 나라를 먹여 살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쓸 수 있을 정도는 있는 듯 했다.
용은 생각보다 바깥 세상에 무지한 듯 했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은 커녕 인간이란 종족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본인 말로는 인간이든, 엘프든, 드워프든 고블린이든, 자기 눈엔 두 발로 걸어다니는 들짐승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용은 나의 이야기로 세상을 보고, 내가 들려준 이야기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을 좋아했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좀 오만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성격이 더럽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 용병단을 녹여버린 건 영역에 침범해서 그런 거겠지.
사실 다시 생각해보니, 이 용이라면 이야깃거리가 떨어진 날 한 끼 식사로 뚝딱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식사 같은 것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고기와 과일만 먹어야되는 게 흠이었지만, 용이 가져다 준 식사 덕분에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제 또한 있었으니, 역시 식사였다.
매일 똑같은 고기와 과일만 먹으니 정신병에 걸릴 것 같았다.
향신료 없이 먹는 고기도 하루이틀이지, 점점 고무를 씹는 것처럼 느껴졌고, 빵이나 야채 같은 것들도 먹지 못해 큰 일을 볼 때 딱딱한 변으로 인해 항문에 피가 나오고 아주 곤욕이었다.
술 역시 그리운 것들 중 하나였다. 아, 물 말고 술로 목 좀 축이고 싶다.
무엇보다 나의 직업병이자 내가 먹고 살게 해 준 원동력, 방랑벽이 도졌다.
계속 동굴 구석탱이에서 먹고 자고 싸는 생활은 무료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용에게도 간청해 보았다. 하다 못해 마을에 가서 음식들은 좀 사게 해 주시면 안 되겠냐고.
큰 실수였다. 용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섬뜩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며 동굴이 울릴 정도로 말했다.
"내가 왜 이 동굴 제일 깊숙한 곳에 네 놈을 들였는지 아느냐, 이야기꾼?"
"자... 잘 모르겠습니다. 용이시여."
"난 항상 나의 보물들을 동굴 깊숙한 곳에 숨겨놓지. 아무도 가져가지 못하게. 이해가 가느냐?"
용의 목소리는 한 층 누그러든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꿈뻑대며 벙찐 표정으로 용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를 통해 세상을 보고 세계 각지를 여행한다. 너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너와 한 달 전에 잿더미로 만든 들짐승들이 인간이라는 종족이었다는 것도 몰랐겠지.
네가 마음에 든다, 이야기꾼이여. 몇 백년을 살아온 이래로 요즘이 가장 재미있는 순간이야.
주위를 둘러보아라, 이야기꾼. 사방에 있는 보물들이 보이느냐? 그리고 내가 베푸는 자비와 황송한 대접을 알겠느냐?
너는 나의 보물이다. 그리고 난 누군가가 나의 허락 없이 내 보물을 채가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용은 마지막으로 나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일부러 과시하듯이 이빨을 드러내 으르렁거리며 말을 마쳤다.
"매우."
며칠 뒤 내가 본 것은, 산을 내려가는 길들이 모두 무너져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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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는 동굴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며 탈출할 길이 있는지 쭉 둘러보았다.
얼마 전 나와 용병단이 올랐던 길은 부자연스럽게 파괴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보나마나 용이 길을 부숴버렸음에 틀림이 없었다.
다른 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정도의 크기가 지나갈 수 있을만한 길은 죄다 부숴져 있었다.
산 정상은 바다 없는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절망감과 슬픔이 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늙어죽을 때까지 용의 시중이나 드며 살아야 하는 건가? 아니, 애초에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지면 용이 나를 죽이려 들지 않을까?
그냥 콱 죽는 것도 하나의 방법 아닐까?
확 절벽에 뛰어내려버려?
암울한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올 때, 갑자기 섬광이 스치듯 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잠깐, 떨어진다고?
황급히 동굴로 다시 들어가 용의 보물들을 뒤적거렸다.
아마 용은 아무 생각 없이 반짝이는 것들을 수집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 중에 마법 장신구가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금화 무더기들을 파헤치며 마치 유물이라도 발견하듯, 반지나 목걸이, 보호대, 아무튼 몸에 착용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찾아서 감정해 보았다.
이래봬도 몸에 두르고 있는 마법 장비들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두른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난 기본적인 감정을 통해 장비들에 어떤 마법이 깃들어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주머니에서 용케 깨지지 않은 감정용 안경을 옷깃으로 닦아 한 쪽 눈에 끼고 장비들을 하나씩 감정했다.
물을 뿜어낼 수 있는 반지? 아니야.
시체를 언데드로 되살리는 마법봉? 이런 소름 끼치는 물건은 대체 누가 만든 거야?
추위를 막아주는 목걸이? 필요없어.
오르골 소리를 내는 반지? 장난하냐?
한참을 뒤진 끝에, 쓸모가 있어 보이는 장비 몇 개를 꺼내 앞에 쭉 나열해 보았다.
화염 저항을 가진 목걸이,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 주는 반지, 튼튼해 보이는 보호대 몇 개와 값이 꽤 나가 보이는 보석 몇 개였다.
보석 몇 개쯤은, 여기서 한 달을 고생한 나에게 정당한 댓가가 아닐까?
동굴 입구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용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급히 장비들을 눈에 안 띄는 구석으로 밀어넣은 다음 딴청을 피웠다. 곧 황금빛 비늘을 두른 앞발이 모습을 드러내고, 동굴의 주인이 내 앞에 나타났다.
용은 한 쪽 발로 과일을 떨궈내고, 입에 문 멧돼지를 뱉은 후 기분 좋게 그르릉거렸다.
"좋아, 이야기꾼이여. 어제 못 끝낸 엘프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자꾸나."
고개를 숙이며 씰룩거리는 입을 애써 진정시켰다.
두고 봐라, 도마뱀 놈아. 난 여기서 나가고야 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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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보금자리에서 생활한 지 벌써 세 달째.
드디어 때가 왔다.
쭉 관찰한 결과, 용은 새벽에 자리를 비웠다가,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는 제국시를 적용해 본다면 오후 2시쯤 동굴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마 식량과 주변 순찰을 함께 하는 것 같았다.
한 번은 자는 척 하며 용의 수면 시간도 조사해 보았다. 용은 내가 잠이 든 것을 지켜본 후에 잠에 들었다.
지금은 몇 시인진 잘 모르겠지만 검푸르던 하늘이 점점 붉은 주황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동굴을 둘러 보았다. 용은 보이지 않았다.
살며시 일어나 동굴 밖으로 살금살금 몸을 옮겼다. 역시 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황금빛 비늘이면 어디에 있든 눈에 띌 텐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보금자리를 완전히 뜬 것처럼 보였다.
동굴 앞에 서 절벽을 내려다 보았다. 산꼭대기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아찔했다. 떠나왔던 마을은 저 너머 지평선에서 점이 되어 있었다. 밑엔 바위투성이 산의 중턱과 울창한 숲이 보였다.
침을 꿀꺽 삼키며 손에 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이 반지의 효능을 시험해 볼 수는 없었다. 일단 한 번 뛰어내리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용에게 잡아먹히든 바위에 처박혀 다진 고기가 되든, 어찌됐건 죽는 건 똑같았다.
그래, 죽어도 이왕이면 자유롭게 죽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한 발짝, 한 발짝 절벽으로 발을 내딛고
이내 뛰어내렸다.
"으으으읍!!"
거센 바람이 나의 얼굴을 강타하여 숨을 쉬기가 곤란하였다.
비명을 뱉어내려던 입을 간신히 다물었다. 이 곳은 정상이다. 비명을 지르면 메아리가 퍼져 용의 귀에 들리지도 모른다.
눈을 꼭 감고 손에 쥔 반지를 반대편 손에 힘겹게 가져갔다.
제발, 병신아, 똑바로 하자. 여기서 반지를 놓치면 넌 뒤지는 거야.
제발, 제발.
얼굴을 힘껏 찌뿌리며 반대편 검지에 반지를 꽂았다.
잠시 세상이 멈춘 듯 했다. 뺨을 스치던 칼바람도 어느새 산들바람이 된 듯 했다.
천천히 질끈 감은 눈의 힘을 풀어 떠 보았다.
공중에 떠 있다.
점점 내려가고 있긴 하지만 분명 공중에 떠 있었다.
기쁨에 찬 웃음을 터뜨리려는 입을 또 다시 틀어막았다.
병신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진정해.
그러다 갑자기 바람에 세차게 한 번 불었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나는 이리저리 허우적거리다, 산에 볼록 튀어나와 있는 바위에 몸을 박을 뻔했다.
보호대가 있는 어깨 쪽으로 몸을 부딪히고 발로 밀어내 다시 공중에 떴다.
위험하다. 이대로 계속 떠 다니면 언제 내려갈지도 모르는데, 바람 한 번 세게 불면 끝장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고 작은 고민을 한 끝에, 난 왼손에 껴진 반지에 손을 가져가 뽑아버렸다.
또다시 거센 칼바람이 뺨을 스쳤다. 나의 몸은 어마무시한 속도로 저 밑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이를 악 물고 다시 반지에 손을 끼웠다. 다시 칼바람이 멈추고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존나 재밌잖아!"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나지막히 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유용한 물건이다. 고마워, 반지야. 반지가 껴진 검지에 가볍게 입맞춤을 맞춘 그 때,
산꼭대기에서 비명에 가까운 포효가 들려왔다.
벌써? 왜 벌써 돌아왔지? 왜? 오늘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반지로 놀 시간은 없는 듯 했다.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이제 반지를 끼고 빼는 데 저항이 없어진 나는, 반지를 다시 빼 무서운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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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투리 시간 내서 글 써서 올렷는데 왜 불타고 잇누...
얀갤아 아프지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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