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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문서] [괴문서]무림고수 또레나 -133-

무림또레시리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5.24 21:28:43
조회 884 추천 47 댓글 14
														

승리 기념으로 하루 동안 간식 제한이 풀린 다이아가 내일은 누구와 무얼 먹으러 어디를 갈까 하며 행복한 고민을 하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끼는 소장품들이 개박살이 난 것을 본 다이아네 아빠가 부인에게 전후사정을 듣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날 밤. 남의 집에서 비싼 물건들만 골라서 깨부숴먹은 또레나는 미래에 나올 성과급으로 급전 대출이 되냐며 무림맹 지부에 급전 대출심사를 타진했다가 월 일 할이라는 살인 물가에 기겁하고는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아오 그냥 애들한테처럼 심검이나 조금 보여줄걸... 그리고 백주 넌 언젠가 두고 봐..."


흐린 달빛 아래 많이 차가워진 가을바람을 뚫고 도로를 달리던 그가 도착한 곳은 시내의 한 고층 건물이었다. 길 한복판에 타고 온 철마(鐵馬)를 놓은 그는 정문 옆에 붙어있는 안내판을 보며 목표를 확인하고는 건물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야심한 밤 정장도 아닌 운동복 차림으로 배낭을 둘러멘 채 걸어오는 수상한 이를 본 경비원들이 그를 막아세우자 또레나는 주머니에서 흑천(黑天)이라는 금색 글자가 새겨진 검은 옥패(玉牌)와 회사의 문장이 새겨진 명함을 꺼내 보여주었다.


"흑천 사...? 혹시 용무가 어떻게 되시는지..."


"퀵이요."


너절한 복장, 이륜차, 배낭. 이륜차가 조금 비싸 보이기는 했으나 이 이상으로 배달의 기수(騎手)임을 나타내는 외모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에 이륜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경비원은 더 묻지 않고 길을 터 주었다. 빠르게 올라가는 승강기가 띵 하는 소리를 내며 멈추고 문이 열리자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것은 진득한 마기(魔氣)의 흔적이었다.


"음~ 이 x같이 찐득한 마교 꼬랑내는 언제나 내 기분을 나쁘게 만든단 말이야."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투자회사의 사무실은 한밤인데도 대낮처럼 환했다. 퇴근하지 못한 수많은 직원들은 피곤에 찌든 얼굴로 쉴새없이 전화기와 한 책상에 몇 개씩이나 올라 있는 모니터 화면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어 손님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무실을 쭉 훝던 또레나는 마기를 뿜은 직원들이 누구인지를 눈에 담고는 정신없이 바쁜 사무실 한가운데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중간쯤 걸어가서야 외부인이 들어왔다는 것을 눈치챈 사무실이 다른 이유로 부산스러워졌다.


"누구십니까."


이 사무실에서는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는 중년 사내 하나가 또레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다 마르고 배만 살짝 나온 전형적인 사무직의 몸에서 마기가 약하게 새어나오고 피냄새가 나지 않는 걸 보아 마공에 입문은 했으나 무공을 제대로 익힌 이는 아닌 게 분명했다. 얼굴이 퀭한 걸 보아하니 적어도 사흘은 제대로 잠을 못 잔 게 너무나도 선명했다.


'세상에 사람을 잠도 안 재우고 부려먹으려고 무공을 가르치는구나... 아무리 마교라지만 이럴 수가 있는가.'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용무를 밝히지 않았으면 경비원을 부르겠습니다."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경비원을 부르겠다니, 마공을 익힌 이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가 아니었으나 거기에 감명받은 또레나의 눈이 절로 커졌다. 답이 없던 외부인을 보다못한 중년 사내가 전화기를 꺼내자 또레나는 주머니에서 흑옥패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흑옥패를 본 중년 사내는 크게 놀라더니 머리를 숙였다. 얼마나 부려먹었는지, 숙인 고개를 드는 것도 힘겨워하던 그는 또레나를 승강기로 안내했다.


"본사에서 오셨나 보군요. 윗층 사무실에 임원분들이 계시니 그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피곤에 쩔은 몸을 이끌고 행하는 태도는 전형적인 본사에서 나온 사람을 마주한 현대의 직장인이었다. 그 태도에 거짓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보아하니 이 자는 마공의 편린만을 익혔을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평범한 금융업계 회사원이었다. 보는 눈이 많았기에 둘만 있을 때 조용히 쓱싹하려던 또레나도 그 태도를 보고는 살의를 거두고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혼자 가겠습니다. 임원 사무실은 몇 층입니까?]


그의 입에서 나온 중국어를 듣자 중년 사내가 움찔하더니 능숙한 중국어로 답했다.


[36층입니다. 제가 안내를...]


[혼자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레나가 단호하게 말하자 중년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는 한 발 물러났다. 홀로 승강기를 탄 또레나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승강기 문이 열리자 이번에는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득한 마기가 층 전체에 흐르고 있었다. 피부를 타고 오르는 마기를 느끼며 태세를 갖춘 또레나가 기감을 넓게 펼치자 꽤 강렬한 마기를 뿜어내던 이가 넷이 그의 감각에 잡혔다. 그들은 그제서야 적이 온 것을 알았는지 화들짝 놀란 기색이 느껴졌다.


'마교도가 평화에 절어서 반응이 늦는다..? 무림이 숫제 거꾸로 돌아가는구만...'


투쾅 하며 나무 문이 거칠게 열리고 가장 가까이 있던 초로의 교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트러진 정장 차림의 그는 조금 전 아랫층에서 봤던 중년 사내와 비슷할 정도로 피폐한 안색이었다.


"너희한텐 볼 일 없어. 너네 두목 어디 갔어."


또레나가 차갑게 말하자 초로의 마교도는 말없이 기를 끌어올렸다. 곧 다른 마교도 둘이 거의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고, 뒤이어 그들 중에서는 가장 젊은 장년의 마교도 하나가 또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동영화경..."


"척가이검이라고 불러 버러지들아. 너네 두목 어디 갔어? 나 지금 두 번 말했어. 내가 웬만해선 마교도는 사람으로 안 대하는데 밑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봐주는 거야."


말을 마친 그가 기를 끌어올리자 옷자락이 세차게 일렁이며 그를 둘러싼 공간의 마기를 일소(一消)했다. 가장 앞에 서있던 초로의 교도는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전히 답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난 오늘 너희 두목과 얘기하러 왔다. 이번에도 말이 없으면 생사결로 받아들이겠다."


"두목이라면... 대군 어르신 말씀이시오?"


초로의 마교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또레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대군이 돌아왔나? 애비건 아들이건 누구든 상관없다. 어차피 나한텐 좌호법 아래로는 다 거기서 거기야."


마교주를 대리하는 좌호법 아래를 싸잡아 깔아보는 광오(狂傲)하다는 말조차 모자란 폭언(暴言). 자신들의 주군을 모욕하는 발언에 마교도 노인 넷의 표정이 일그러졌으나 그들 중 누구도 그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으지직 하는 이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간신히 분노를 참아낸 초로의 교도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대군 어르신은 계시지 않소... 소군 공자님께서도 중요한 모임이 있어서 나가셨지... 전언이 있으면 남기고 가시오. 우리가 전해주리다..."


"꼴값 떨지 말고 전화나 걸지? 전화기는 장식이야?"


"정파(正派)라는 자가 한밤중에 남의 사업장에서 행패라니...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


가장 뒤에 있던 노인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붕 날아가 통유리 창문에 처박혔다. 고층 건물을 튼튼하게 지탱하는 통유리에는 커다란 거미줄같은 금이 가득 새겨졌고 얼굴 한가운데가 움푹 패인 노인은 그 유리 한복판에 대자로 박힌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음, 내 생각보다 많이 약하네. 사무직이라지만 흑천대 간부라길래 조금은 기대했는데."


세운 주먹을 내리는 또레나는 나머지 세 노인을 차갑게 돌아보았다. 세 노인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뭐가 어째? 강호의 도리? 키우는 벌레도 아니고 날벌레 하나하나한테 예의범절 깍듯하게 차리면 그건 미친놈이지. 안 그래? 살려준 거에나 감사하라고. 나 원래는 이렇게 말 길게 안 해."


그 자리에 없는 주군에 대한 폭언을 넘어서 이젠 그들의 귓속으로 대놓고 모욕이 꽂혔으나 그들은 울분만 삼킬 뿐 여전히 아무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방금 내린 주먹은 그들의 눈에 비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시대가 많이 흘렀다지만, 강자존(强者存)의 원칙 아래 강한 자는 윗사람이고 그런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대놓고 모욕을 주는 것이 용인되는 게 마교의 관행이었다. 노인들은 그런 관행을 모르지 않았기에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저 태도에 더 반박을 해 봐야 마교도에게 교의 법칙대로 대해줬다- 하고 반박하면 바보가 되는 것은 자신들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말한다. 전화 걸어."


뒷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결국 힘에 굴복한 초로의 교도가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사토노의 장로와의 모임이 끝난 후 소군은 사업상 어울리는 친구들이 있다며 새 술자리로 향했었다. 제 주인의 즐거운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년 비서는 사업체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물었다. 이런 한밤중에 전화를 할 정도면 꽤나 급한 안건인 게 분명했다. 심란한 상황에 무슨 사건이 또 터졌는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제발 예상 안에 있는 사건이기를 바라며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그의 작은 기대는 야무지게 박살났다.


-야, 너네 두목 바꿔.


분노에 찬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렸다. 대관절 무슨 상황인지를 이해하지 못한 그가 잠시 멍해 있자 전화 너머에 있는 상대방은 더욱 크게 소리쳤다.


-야! 너네 두목 바꾸라니까!


비서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동안 무언가가 꺾이고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아주 짜증날 정도로 빈정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이 노인네들이 진짜... 셋이 뒤에서 덤비면 될 줄 알았어...!?


비서는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현재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사무실에 쳐들어온 침입자가 당직을 서던 임원들을 제압하고 전화기를 뺏은 것이리라. 사무실에 쳐들어올 만한 이를 순식간에 좁혀낸 비서는 가장 의심가는 이를 불렀다.


"동영화경..."


-척가이검이라고 불러 버러지들아. 나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야. 당장 두목 바꿔. 자꾸 그렇게 시간 끌면 확 전차를 몰고 가서...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눈 앞에 닥친 비서의 침착함이 무너지며 표정이 일그러졌다. 진짜 전차를 몰고 올지는 모르겠지만 저자 혼자서 전차 몇 대분의 화력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다. 어질어질한 정신을 다잡은 비서는 큼- 하고 짧게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무슨 일이시오. 무림맹과 우리는 지금 자제하기로 합의..."


-무슨 일이시오? 이 미친 새끼가... 내가 니 친구야?! 마교도 버러지라서 예의범절을 못 배운 거냐 아니면 내가 만만해 보여서 그 잘난 강자존의 교리로 날 깔아보는 거냐? 오늘 한번 서열정리 해 줘? 칼질에 자신 있어? 너 어디야!


'미친놈이다...'


젊은 고수 중에 미친놈이 아닌 놈 없다는 강호 무림의 격언이 이렇게나 정확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미친놈을 자극해봐야 본인만 손해라는 생각에 이른 그는 굴욕을 참고 말을 높였다.


"용서하십시오 동영... 아니, 척가이검... 용무가 어떻게 되십니까...? 지금 소군 공자께서는 중요한 회의 중이셔서 제가 대신 전화를 받았습니다."


척가(拓家). 교주 바로 아래의 최고위 간부들을 줄줄이 학살하고도 상처 하나 없던 괴물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손발이 띵하고 단전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으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포와 굴욕을 꾹꾹 눌러 참으며 예의를 갖추자 그 필사적인 노력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전화기 너머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댁은 어디까지 알아?


"제가 소군 직속이기에 웬만한 건 다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아니, 대체 얼마나 일을 저질러댔길래 뭐가 뭔지도 모르는 거냐?


진짜 몰라서 저러는 건지 자신이 직접 말하기를 유도하는 수작인지는 모르겠으나, 간신히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놓은 저 미친놈의 역린(逆鱗)이 어딘지 모르는 이상 그에게 맞출 수밖에 없었다.


"저희 부하들이 담당 학생분께 저지른 일 말씀이십니까...?"


-어, 그것 말고도 하나 더 있기는 한데 일단은 그거. 왜 그랬니?


"그... 부하들에게 명령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조금 있었습니다... 저희는 단순 감시만을 의도했거늘 부하들이 과대해석을 해 버리는 바람에..."


-과대해석? 정확히 뭐라고 명령했는데 아랫놈들이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비도(飛刀)를 수백 개씩이나 던졌을까? 어찌나 충성스럽게 명을 수행하던지 관객석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놈들 찾느라 조금 힘들었거든.


중년 비서는 바쁘게 머리를 굴리느라 연신 땀을 훔치고 있었다. 지하주차장의 차디찬 공기도 사건을 자기 선에서 축소시키려는 그의 필사적인 노력을 제대로 식혀주지 못하고 있었다.


"잘 봐두란 말을 암살 목표로 오해해 버리는 바람에..."


-평소에 암살 지령을 그런 식으로 내리는구나. 그러니 부하들이 그딴 식으로 해석을 하는 거겠지.


"며... 면목없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을 할 터이니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보상이라... 뭘 줄 건데?


순간 비서의 말문이 막혔다. 말본새를 보아하니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간 다시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확실하게 말하자니 상대는 돈 몇 푼 쥐여주면 좋아할 여염집 계집애가 아닌 사토노 그룹의 딸이었다. 그런 이에게 일개 비서인 자신이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결국 뭘 말하든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는 후자 대신 그의 분노를 감수할 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여..."


-그럼 너네 두목 바꿔. 댁이 직속 비서라면서? 그럼 최소한 한 건물에는 같이 있을 것 아니야. 나 이게 지금 세 번째 말하는 거야.


결국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버렸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두통에 눈을 꼭 감은 비서는 결국 다 집어치우고 애원했다.


"십 분만 주십시오...! 십 분 후에는 반드시 바꿔드리겠습니다!"


잠깐의 침묵 속에 전화기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칠 분.


비서가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띠링 하면서 전화가 끊어졌다.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전화기 화면을 잠시 바라보던 비서는 힘껏 열어젖힌 운전석 문을 닫지도 못한 채 비상구를 뛰어올라갔다. 비상구 계단 십수 층을 단 이 분만에 날아오르듯 주파한 중년 비서는 온 몸에서 땀을 흘려가며 제 주인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최고급 사교클럽의 최상층 나이트풀. 그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원들이 거칠게 달려오는 비서를 막아세우려 했으나 비서는 경비원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잖고 문짝을 부숴가며 주인을 찾았다.


"소군! 소군! 큰일났습니다--!!!"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벽 아래를 굴러다니는 고급 술병과 사용한 주사기, 매캐한 풀 탄내에 섞인 비릿한 살내음, 헐벗은 선남선녀들. 옛 은(殷)나라의 주지육림(酒池肉林)이 이러했을까. 음탕하다 못해 아름답다고 느껴질 퇴폐미 가득한 별천지(別天地)에 취해 있던 이들은 잔뜩 취해있던 꿈을 일거에 날려버린 침입자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지 못했다. 그가 한참 동안 방 안을 소리지르며 찾아다니자 깊은 곳에 있던 그의 주인은 양 옆에 끼고 있던 여자 둘을 거칠게 밀어내더니 느릿한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와 뺨을 올려붙였다.


"금방 나갈테니까 끝날 때까지 대기하라던 내 말을 못 들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한 걸까? 어느 쪽이든 문제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주인의 얼굴이 벌건 걸 보아하니 술기운을 몰아내지 않은 게 확연했다. 중년 비서는 코에서 흐르는 피를 닦지도 못한 채 돌아갔던 얼굴을 제자리에 놓고 손에 든 전화기를 내밀며 말했다.


"척... 아니, 동영화경에게서 전화 왔습니다. 공자님과 직접 대화하고 싶다 합니다."


"뭐? 그놈이 이 번호는 어떻게... 하오문이야?"


"저희 투자회사 간부 번호로 전화가 온 것을 보건대 아마..."


그제서야 소군의 눈이 커지며 얼굴의 붉은 기운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먼저 가서 차에 시동 걸어...!"


중년 비서는 들어왔던 속도만큼 빠르게 달려나갔다. 소군은 뒤에서 무슨 일인가 하고 바라보던 친구들에게 손짓을 까딱한 뒤 수영복 한 장만을 걸친 그대로 빠르게 걸어나갔다. 승강기를 기다리는 그의 눈은 전화기 화면에서 한 순간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달칵 소리가 나며 연결이 되자 소군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동영화경.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 실로 반갑..."


-척가이검.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아, 미안하오. 자꾸 그렇게 부르다 보니 버릇이 돼서. 아무튼 무슨 일이시오."


소군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기싸움에 익숙한 그는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고 상대를 가늠하고 있었다. 띵- 하며 도착한 승강기에 탄 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평소의 버릇처럼 머리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우선, 주어진 칠 분에서 십 초씩이나 지났다는 걸 말해두지.


"그건 또 무슨...?"


소군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화기 속에서는 위이잉- 하는 화재경보기 소리가 났다. 직후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는 그 시끄러운 경보음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선명했다.


-나를 이딴 식으로 대하는 건 어지간히 우스워서 그러는 거겠지? 그래서 실력행사를 좀 했어.


"실력행사?"


-중요한 건 메시지지.


영화의 명대사와 화재경보음을 머릿속에서 합치니 나온 장면은 하나였다. 당황한 소군은 멍한 표정으로 전화기에 대고 물었다.


"혹시 우리 회사에 불 질렀어?"


-애비랑은 다르게 똑똑하네.


".... 그 건물에 우리 회사만 있는 거 아닌데...?"


-방화벽 작동하는 거 보니 좋은 건물은 맞더군. 그럼 위아래로 옮겨붙을 일은 없단 뜻 아니냐. 그래서 마음놓고 질러 봤어. 참, 노인네들이 치사하게 등 뒤에서 기습하길래 그 보답으로 사무실에 있는 금고들이랑 서랍을 죄다 열어 놨다. 안에 마른종이 많던데 덕분에 잘 타겠더군.


미친놈이다. 소군의 머릿속에 꽉 찬 생각은 좀 전의 중년 비서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몰려오는 두통에 잘생긴 얼굴을 크게 찡그린 소군은 승강기에서 내려 차에 탔다.


"그게 무슨 자료인지는 알아?"


-뭔진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안 중요한 물건이라는 건 확실하겠지. 내 학생이 너한테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암살지시를 내렸던 것처럼 말야.


"암살지시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가 내린 지령 중에는 죽이라는 말은 없던 게 진실이었으니까. 단지 실수로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여 소군이 진정성 넘치는 의문을 표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나오는 말에 싸늘함을 넘어 감정이 담겼다.


-네 비서가 그러더군. 너희들은 암살지시를 그렇게 한다고.


그 말을 들은 소군이 운전석의 비서를 쳐다보자 비서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친놈입니다. 정상적인 대화가 통하는 놈이 아니에요. 아전인수(我田引水)나 침소봉대(針小棒大)가 숨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정상적인 대화? 선빵 맞았으면 보복하는 게 강호의 도리고 무림의 법도 아냐 이 마교 버러지들아? 선빵으로 못 잡았으면 처맞아야지 뭘 잘했다고 억울해하고 있어?


"네 학생을 건드렸다고 이런 식으로 보복하는 건가? 이자가 좀 센데 그래..."


-학생? 무슨 헛소리야. 이건 전화가 늦어서 벌인 거야. 그 문제는 지금부터 얘기할 거고.


그 말에 눈이 커진 소군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중년 비서는 그런 주인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일단 맞춰주시지요. 공연히 자극해봐야 우리만 손해입니다."


멍한 와중에도 그 말이 옳다 여긴 소군은 전화기를 귀에서 뗐다.


"십 분 후에 다시 걸지."


-내가 한 번 봐주는 거다. 윗층도 너네 회사가 쓰는 사무실이더군. 십 분 지나면 바로 불지른다.


말이 끝나자마자 띠링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전화기 든 손을 의자에 툭 하고 내려놓은 소군은 자동차 지붕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런 놈이었어...?"


"무위를 제외하고는 알려진 정보가 너무 적어서 저도 몰랐습니다... 쉽지 않겠군요."


"... 신호 신경쓰지 말고 밟아."

중년 비서는 명을 받들었다. 어지간한 대도시 집값보다 비싼 최고급 자동차는 신호건 순서건 다 무시하며 한밤의 도로를 달렸다.




엄마닭의 뒤를 따르는 병아리마냥 여러 대의 경찰차를 주렁주렁 매달고 도착한 고급차에서 내리자마자 소군의 눈에 보인 것은 창문을 뚫고 뿜어져 나오는 새까만 연기였다. 그 연기 밑으로는 세 개 층을 집어삼킨 화마(火魔)가 보였다. 소방차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음악 삼아 그 불길을 멍하니 보고 있던 소군의 옆으로 당직을 서던 투자회사의 사원들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말에 정신을 차린 소군이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그들은 잘 모르겠다며 가로저을 뿐이었다.


"당직 서던 임원들은 어디 갔나?"


"구급차에 실려갔습니다... 연기를 마셨는지 다들 쓰러진 채로 발견되셔서..."


사무직이라 해도 흑천대의 간부가 연기 따위에 쓰러질 일은 없을 터다. 이를 깨물은 소군은 머릿속으로 손해가 얼마일지를 추산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흑천대 소속 사업장에 대놓고 불을 싸질르는 놈을 상대로 그딴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전화기를 꺼내 시간을 보니 아직 십 분이 채 되지 않았었다. 분노를 넘어서 냉정해진 머릿속을 잘 갈무리하며 전화를 걸었다.


-약속대로 윗층 두 개랑 네 부하들 있던 아랫층은 남겨줬다.


허탈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쯤 되니 대체 어떤 놈인지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


"아직 안에 있나?"


-올라와.


그 말과 동시에 가운데 층의 불길이 확 타올랐다. 밑에서 보던 사람들은 움찔할 정도로 기세가 거대했다. 단전을 가진 몇몇 사원들은 비틀거리거나 경악에 찬 표정을 짓기도 했다.


"아무렴. 이름높은 고수이신데 이쯤은 해 줘야지."


빙긋 웃은 소군은 전화를 끊고 건물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인파의 가장 앞으로 가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를 쳐다보았고 상황을 통제하던 몇몇 소방수들이 그의 앞길을 막으려 했다. 소군은 자신을 막아서는 소방수들에게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그들에게 살기를 쏘았다. 살의(殺意)가 담긴 마기를 정면에서 받은 이들은 바로 쓰러져 온 몸을 덜덜 떨면서 거품을 물었다.


잠시 후, 소군을 태운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온갖 군데가 타오르며 매캐한 연기를 뿜는 불지옥의 한가운데였나 복도의 양 옆에 서 있는 두 젊은 사내는 그 불지옥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 고요한 태도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앉지."


기다리고 있던 운동복 차림의 사내가 허공에 손을 뻗자 그을린 벽을 부수며 탁자 하나와 목제 의자 두 개가 날아와 그들 앞에 놓였다. 권능에 가까운 경지의 섭물(攝物)을 본 소군은 진심으로 경탄하며 웃었다.


"굉장하군."


"꼴값하지 말고 앉아라. 할 말 많으니까."


"걱정 마라. 나도 묻고 싶은 말 많으니까."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조차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둘에게서는 범접치 못했다. 잠시 말이 없던 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또레나였다.


"내 학생을 건든 이유가 뭐냐."


"네게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또레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하고 코웃음을 치자 이번엔 소군이 물었다.


"출장 보낸 부하들과 연락이 끊겼다. 네 작품이냐?"


"내가 주도한 건 맞지."


"하하, 배포도 무위(武位)도 참으로 인정할 만해. 대단해. 명불허전(名不虛傳)이야. 흑천대의 부대주를 눈 앞에 두고서도 긴장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니."


"긴장할 필요가 없더라고. 솔직히 보기 전에는 조금 기대했는데 말야."


"나를 이렇게 깔아보다니...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받는 대접인지."


소군의 금빛 홍채가 빛나며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살기를 정면에서 받은 또레나는 그저 담담했다. 소군은 그 담담한 태도가 조금 불쾌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또레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고작 나에게 접근하겠다고 내 학생을 죽이려 들었지. 그래, 나를 보고자 했던 이유나 한 번 들어보자."


그 질문에 소군이 되묻자 또레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폈다. 명백히 하수를 대하는 자세에 한 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불쾌감을 표출한 소군은 으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불붙은 지붕 파편을 쳐내며 말했다.


"네게 묻고 싶은 게 많다."


"해 봐."


헛소리지만 일단 들어는 주겠다는 태도로 눈까지 감은 또레나를 본 소군의 이마에 힘줄이 살짝 돋아났다가 사라졌다. 숨을 내쉰 소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얼마 전, 우리 흑천대의 지부 몇 개가 소리소문없이 증발한 적이 있었다."


소군은 말을 살짝 끊고 또레나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반응 없이 담담했다. 감은 두 눈의 끄트머리조차 미동이 없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퉁탕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쾅- 하며 비상구 문이 뜯겨나가고 재투성이의 중년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군은 비서를 흘끗 쳐다보고는 다시 또레나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또레나는 한 쪽 눈을 살짝 떠 비서의 얼굴을 보더니 별 거 아니었다는 태도로 눈을 다시 감았다. 중년 비서는 불구덩이 한가운데에서 여유롭게 앉아있는 둘을 쳐다보았다.


"이 땅에서 일을 벌일 만한 사람 중에 네가 가장 유력하더군. 하여 내 전임 비서가 너를 조사하다가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됐지. 시체를 수습한 개방에 따르면 온 몸에 마공의 흔적이 있었다더군."


또레나는 머리를 등받이에 더 기댔다. 머리를 뒤로 기댐과 동시에 들어올려진 턱과 훤히 드러난 목줄기가 소군의 눈에 들어왔다. 상대가 급소를 대놓고 드러내놓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는 출수하지 않고 질문만을 던지고 있었다.


"내 아버님을 포함한 다른 이들은..."


"그래서, 그 사건의 범인이 나라고?"


갑자기 끼어든 또레나의 말이 소군의 말을 잘랐다. 흐름을 끊은 또레나는 눈을 뜨고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물었다.


"이미 네 마음 속에서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중년 비서는 이마를 짚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군은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또레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설프게 말 돌리지 말고 맞냐 아니냐만 얘기해라."


"아니라고 해도 어차피 안 믿을 거잖아. 병x같은 새끼야."


대놓고 갈긴 모욕에 소군의 몸에서 칠흑보다 어두운 마기가 피어올랐다. 그 마기에 공명하듯 약해지던 불길이 화악 하고 폭발하듯 타올랐다. 거세게 일어난 불길에 휩싸인 중년 비서는 몸을 지키기 위해 내력을 둘렀다. 그 또한 흑천대에서 알아주는 강자였으나 부대주가 내뿜는 기운을 버티는 게 고작일 정도로 둘의 차이는 컸다.


그리고 그에 답하듯 또레나의 몸에서도 푸른 불꽃같은 내력이 일렁였다. 소군이 뿜어내는 기세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푸른 기운은 그저 커다란 강물처럼 찰랑이며 그저 담담히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소군은 더욱 거세게 기파를 내뿜었다. 몇 배로 커진 기파에 불꽃이 더욱 거세지는 것은 물론이요, 두 팔로 몸을 가리던 비서가 무릎을 꿇으며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버티는 것은 고사하고 몸이 부서지려 하는 것을 간신히 견뎌내는 상황에 비서의 몸 곳곳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하하하! 기예(技藝)는 대단했다만 힘은 내 쪽이 우위인 것 같은데?"


흑천개세신공(黑天蓋世神功). 마도(魔道)의 원류에 뿌리를 둔 그 무공은 부여되는 힘을 이겨내지 못하면 몸이 터지며 고통스럽게 죽는 부작용이 있었으나 제대로만 익힌다면 자신보다 한두 수 위의 상대와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게 만들어주는 절세신공이었다. 대성(大成)한 신공을 증명하듯 뿜어져 나온 기세는 주변의 바닥이나 벽은 물론이요, 타오르고 있던 불마저 힘으로 짓누르며 깨부수고 있었다. 한 층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막대한 기파에 또레나의 몸 주변을 두르고 있는 푸른 기운은 곧 부서질 듯 희미하게 일렁이며 작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아까까지 잘 떠들던 주둥이는 어디 갔지? 좀 더 지껄이지 왜 가만히 있나?!"


역으로 조롱하기 시작한 소군의 얼굴에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이 절세신공으로 짓눌러 터트리지 못한 적은 없었으니까. 굳은 표정으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상대를 연신 조롱해대며 광소(狂笑)와 함께 내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러자 으지직 하며 벽이 깊게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힘 좀 써 봐 화경 님! 그 이름에 부끄럽잖게 말야!"


상대가 제대로 된 반응조차 없자 조금 전에 명불허전이라고 칭찬한 게 새삼 아까웠다. 이대로 짓눌러 터트릴까, 아니면 조금 더 고통을 주다 죽일까 하며 기분좋은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소군의 귀에 또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했냐?"


"허세 부릴 여력이 있기는 한 모양이군. 아무렴, 화경 이름값에 그 정도는 안 해주면..."


그 순간 또레나의 몸을 지키던 호신강기가 사그라들며 소군이 뿜어낸 검은 기파가 또레나의 몸을 덮었다. 직후 새벽이 밤의 어둠을 몰아내듯 또레나의 몸에서 타오르는 푸른 기운이 소군의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비웃음과 함께 해일처럼 짓쳐든 푸른 기파에 밀린 소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잠깐 놀아주니까 신나하는 모습은 좀 귀여웠다. 그걸 뭐라고 하더라... 당랑거철(螳螂拒轍)?"


"크으윽...! 이 개자식이...!"


분노한 소군이 다시 내력을 끌어올리자 검은 기운이 다시 일어났다. 검고 푸른 두 기운이 다시 팽팽히 맞붙기 시작했으나 그 기운을 뿜어내는 사람의 태도는 우열(優劣)이 너무나도 명확했다. 맞붙는 기운을 버티지 못한 건물 곳곳에서 으지지직- 하며 깊게 금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아아악---!"


비명에 가까운 기합을 질러대며 기운을 내뿜는 소군은 눈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차가운 눈으로 그 모습을 보던 또레나는 경멸을 한가득 담은 조롱을 날렸다.


"흑천소군? 작은 버러지는 이름값을 못하네."


직후 그의 몸에서 폭발하듯 터져나온 기파에 검은 기운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타오르는 불까지 모조리 사라졌다. 그 기파를 정면에서 받은 소군은 뒤로 멀리 날아가 승강기 문을 뚫고 처박혔다. 바닥에 쓰러진 소군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속에서 올라오는 핏물들을 게워내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웨엑... 웨엑...! 이럴 수가... 느껴지는 힘은 분명 내가 위였는데...!"


"맞아. 내력만 따지면 네가 윗줄이기는 하더라."


수천 수만 번 마음 속으로 복기한 신권(神拳)의 가르침에 바로잡힌 맥(脈)이 더해지니 막대한 힘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음 속으로 짧은 기도를 올린 또레나가 몸을 일으켜 천천히 걸어가니 소군은 그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나."


눈 앞까지 다가온 차가운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 걸어나가 맞서는 소군이었으나 함부로 덤벼들지는 못했다. 손이 닿을 거리에서 재차 들린 차가운 목소리는 그런 소군의 머릿속에 후벼파듯 꽂혔다.


"네가 벌인 일을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놓고 이 땅에서 사라져라. 그러면 쫓지는 않겠다."


"빈 손으로 꺼지라고...? 그게 될 거라 보냐?"


직후 시선이 휙 돌아가더니 곧 볼이 얼얼해졌고 그 뒤를 이어 짜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자신이 뺨을 맞았다는 것을 인지한 소군의 눈이 커지며 코에서는 새로운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되는데?"


"이 개자식이 진짜...!"


굴욕을 당한 소군이 다시 기파를 끌어올리려는 순간, 벽을 짚으며 일어난 중년 비서가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군 공자님...! 더는 위험합니다. 잠시 물러났다가 준비를 갖추고 맞서시지요..."


머리 끝까지 분노한 소군이었으나 피칠갑을 한 채 몸을 떠는 비서를 보자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허나 행동으로 바로 옮기지는 못했다. 비서의 말이 옳기는 했으나 이대로 물러나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 꼴을 본 또레나가 입을 열었다.


"쥐구멍을 하나 열어주지. 정식으로 비무를 신청하마. 네 소굴로 돌아가면 바로 무림맹 지부에 사람을 보내라."


"비무...?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쉽게 말해 날 잡아서 다 걸고 일 대 일로 한판 뜨잔 얘기다. 내가 그 비무에서 패한다면 네가 말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겠다."


"모든 걸 다...?"


"그래. 대신 네가 지면 그 반대가 되겠지."


생각도 못한 발언에 소군이 잠시 멍하자 상처를 회복한 중년 비서가 그 말을 받았다.


"받아들이겠소! 숙소로 돌아가면 바로 연락하지!"


"뭐라고? 네가 뭔데 한다 만다..."


소군이 비서의 행동을 지적하려 하자 비서는 소군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받은 소군은 분노와 함께 말을 삼키며 또레나를 노려보았다.


"이건 비무의 증표로 맡기겠다."


비웃음을 날린 또레나는 주머니에서 무언가 하나를 꺼내 던졌다. 드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타다 남은 재와 그을음을 헤치고 소군의 눈앞으로 미끄러져 온 것은 흑천대의 옥패였다. 그리고 중년 비서는 그 옥패의 소유주를 떠올리고 식은땀을 흘렸다.


"원래는 아무 짓도 안 하길래 그냥 두려고 했는데 내 학생 건드린 걸 보고 마음이 바뀌었어. 한 번만 더 내 사람들 건드리기만 해 봐. 그땐 따까리로 안 끝나."


그 말을 남기고 퓻-하며 바람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또레나의 몸이 사라졌다. 그의 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소군은 분노가 담긴 주먹을 벽에 때려박았고 비서는 트레센 근처에 잠입시켰던 이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직감하고는 입에서 깊은 탄식을 뱉었다.


"일단 돌아가시지요 공자님..."


"지금 우리 피해가 어느 정도야..?"


"우리가 보유한 현금의 삼분지 일 정도를 이 투자회사를 통해 굴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유형자산 현금화가 다 끝나지 않긴 했는데, 일단 가용 현금의 대부분은 막힌 상황입니다."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비서를 본 소군은 이를 꽉 깨물었으나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 밑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올라오는 기척을 느낀 둘은 분노와 굴욕을 그 자리에 남겨두고 깨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밤의 어둠으로 뛰어들었다.


"제기랄...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이긴다. 남은 현금은 다 영약에 쏟아부어!"


일그러진 얼굴로 승리를 다짐하는 소군을 보는 중년 비서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밤공기를 맞아 차가워진 머리로 상황을 가만히 복기해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으나 이미 그것들은 과거의 얘기가 되어버렸다.


'혹시 이게 다 그자의 심계가 아니었을까...?'


허나 지면 쪽박이고 이겨야 겨우 본전인 상황에 그런 생각은 더는 중요치 않았다. 결국 비서 또한 생각을 그만두고는 남은 현금이 정확히 얼마나 될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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