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미이니 섬 전투
“Nuts!” 추운 겨울바람이 불던 2차대전의 아르덴 전투 중 나치 독일군의 전령이 미 공수부대를 찾았다. 나치 독일군으로부터 항복을 종용받은 미 공수부대는 아주 짤막한 답변을 남겼다. 짧고 담백한 한 마디 답변은 당시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인해 위기에 처했던 미군에게 작게는 실소를, 크게는 항전의 의지를 올리게 만들었다. “Nuts!”가 아르덴 전투의 방향을 바꾸는데 기여를 하였거나 미 공수부대원들이 추운 겨울을 이겨내게 하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였는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적은 없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빼놓고는 아르덴 전투를 얘기할 수 없다.
정치인들은 길고 능수능란한, 고급진 표현들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다면 군인들은 짧고 직설적인 표현들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전달도 아니다. 그냥 보낸다. 그걸 받느냐 안 받느냐, 뭐라고 답변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Nuts!”도 마찬가지다. 일단 던지고 본 말에 호응이 좋자 그대로 보낸 것이다. 그걸 들은 나치 독일군의 반응이야 뻔할 뻔자였고 그게 그날 공수부대원들 머리 위로 떨어진 포탄의 숫자를 줄이는데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을 건 당연하나, 그 네 글자만큼은 강렬하게 남아 아르덴 전투를 상징하고 있다.
아르덴의 숲으로부터 한참 동쪽으로 가 흑해 한 쪽 틈새에 자리잡고 있는 즈미이니 섬은 별로 대단한 섬이 아니다. 크기가 많이 큰 것도 아니고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관광지로서의 가치도 없고 즈미이니 섬을 본적으로 두고 생활하는 민간인이 있던 곳도 아니다. 영토에 있어 한 발자국의 물러남도 없어야 한다 주장하지만, 사실 의미가 없는 섬이라 해도 상관없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내용이 전부 다 틀려도 상관없다. 러시아와의 전면전 시작과 동시에 즈미이니 섬에 있는 국경수비대원들은 고립되었고 우크라이나 본토로부터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바로 그날부터 공격을 받아 항복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우크라이나측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13명의 국경수비대원으로 1만톤의 순양함을 이기라고 하는 건 도둑놈 심보다. 그냥 곱게 항복하는 것이 목숨을 아끼는 선택이며 아무도 그들에게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2월 말의 시점에서 보자면 현명한 선택이라 해도 된다. 몇 시간 뒤면 사라질 정부 밑에서 일할 이유가 없으니까. 러시아 해군의 항복 종용도 빨리 마무리를 하자는 종용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즈미이니 섬에 있던 국경수비대원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짧고 굵은 표현으로 러시아 해군에게 답했다. “иди нахуй!” 엿이나 먹으라고 답했다. 러시아 해군이 확실히 들었으니 포탄을 퍼부었고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국경수비대가 항복, 즈미이니 섬은 러시아 해군에게 점령당했다.
즈미이니 섬의 국경수비대원들에겐 길게 얘기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 해군보고 들으라고 말한 것이라 동네방네 소리를 지른 꼴이었고 길게 얘기하다간 바로 통신소 위에 포탄이 떨어질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심사숙고를 하며 던진 말로 보이지도 않는다. 어딘가에 기록될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포격을 피하러 도망치다 쳐다도 보지 않고 버튼만 누르고 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иди нахуй!”이란 표현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작게는 실소를, 크게는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는데 아주 큰 기여를 하였다. 전투 직후 13명이 영웅적인 항전을 했다는 소식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그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겠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물론이요, 우크라이나군은 자국을 삼면으로 쳐들어오는 러시아군에게 결연히 저항했다. 호스토멜 공항에서, 하르키우에서, 마리우폴에서 항전의 소식과 승리의 소식이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패배와 함락, 후퇴가 있더라도 끈질김을 느낄 수 있다.
그게 즈미이니 섬 때문이냐 묻는다면, 당연히 알 수 없다. 일부 내용은 프로파간다였고 즈미이니 섬의 국경수비대원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라 인터넷 썰마냥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고 의미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겐 이게 인터넷 썰마냥 들리지 않았나 보다. 갑작스러운 일상의 붕괴로 초췌한 순간 들려온 이야기는 얼척이 없는 내용이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가끔 그게 더 기억에 남으며 그것으로부터 분위기를 전환하곤 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분명 그렇게 믿고 있다. 즈미이니 섬의 항전을 추모하는 물결이 이어지고 거대한 순양함을 향해 중지를 올린 우표를 발행하기도 한다. 우크라이나군의 힘이 축적된 뒤로는 즈미이니 섬 주위를 둘러싼 러시아 해군 전투함들을 공격하고 과감하게 전투기와 무인기를 이용한 공습을 벌였다. 항복을 종용하던 모스크바함이 격침되고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러시아군은 즈미이니 섬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러시아군이 즈미이니 섬을 포기한 것이 의미하는 전술적이며 전략적인 가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흑해를 해상봉쇄하는 거나 제공권을 장악하는데 있어 보여주는 가치를 이야기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정신적인 가치가 더 클 수밖에 없다. 러시아군은 욕만 듣고 더 악착같은 우크라이나군과 맞서게 되었으며 포격을 한 순양함은 침몰하고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군이 다시 즈미이니 섬에 상륙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기엔 너무나도 큰 출혈이자, 정신적 상처를 남긴 뒤다.
반대로 우크라이나는 이것이 엄청난 정신적 승리이자 성숙을 상징할 것이다. 전쟁 첫날 그들은 욕을 하는 것 말고는 맞설 방법이 없었다. 정말 할 수 있는게 그거 뿐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수도를 지키고 전선을 유지하며 후방을 타격하고, 하늘과 바다와 땅에서 침략자들을 밀어내고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만이 아니다. 세계가 그렇게 믿게 되었고 우크라이나를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됐다. 즈미이니 섬의 무전 때와는 전혀 다른 세계이자, 그를 통해 딛고 일어난 우크라이나가 보이고 있다. 그 중심에 서서 중지를 들고 순양함을 향해 뻗은 짧은 목소리가 있다.
우크라이나가 즈미이니 섬으로 다시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젠가 즈미이니 섬 위에 황색과 청색 이색기가 휘날리게 할 것이다. 그리곤 또다시 외칠 것이다. “иди наху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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