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양한 자료를 언급하지만, 이의 대부분은 개발자의 "회상"이나 "주장"도 섞여있기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간략개발사
1989년 9월 13일 - 장관소비에트와 당중앙위원회간의 새로운 결정안 준비
1990년 3월 - M.D 보리슈크가 하리코프 설계국장으로 임명
1988-89 - 299에 대한 연구가 시작됨.
"1989년이 시작됨에도, 전차( 477/A) 개발에는 1987년과 비교해 진전이 없었다. - 설계적인 문제점이 자동장전장치부터, TIUS, 엔진시동까지 그 어느것도 확실히 해결 방향이 정해진것이 없었다." - Yu. 아푸흐틴(설계자중 한명)의 회상.
1990 - 소련의 2000년대에 운용할 차기 전차의 경쟁에서 477A가 승리. 경쟁자는 키로프 설계국측의 299, UKBTM의 187이 있음. (주의할점은, 187는 차기 전차라긴 보단 t-72 대체기획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 주)
1990-1994년 UKBTM의 187A 설계안 연구
1992년 - 477의 테스트에서 부정적 결과 도출
1992-93 477A의 첫 시제품 출고 시제품의 구동부는 T-80의 설계를 기반함.
1992-93 - 299의 첫 구동가능 시제품 출고 (스페츠트란스 라고 불리는 시제품입니다. - 주)
- 무장은 477와 동일하게 2A73, 30MM 2A72을 부무장으로 장착됨.
엔진 - 1250~1650 마력의 엔진 (가스터빈과 차기 디젤엔진 고려됨. 디젤엔진은 6TD-3 이후의 기종 고려.)
중량 - 55~57톤
477은 A라는 코드를 덧붙이고, 이름은 '몰로트'(망치)로 변경하고, 지속되게 됩니다만. 매우 높은 기술적 요구도와 함께 어려운 소련의 상황은 위에 언급되던 "진전없는" 상태를 지속하게 됩니다. 적어도 1990년도 까지는 말입니다.
그 틈을 타, 다른 설계국들은 미래전차에 대한 설계를 시작하여, 독주를 하고 있던 477A에게 도전장을 날리게 됩니다. 그중에서 가장 위협적으로 들이 닥친 설계작은 역시 299였습니다. 동일한 152mm 장착, 대형 차체, 모듈형 다용도 플랫폼. 또한 187이라는 안정적인 시제품도 등장하여, 현재 불안정하고, 느리게 진행중인 477A 계획에 대한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 작품도 UKBTM에서 등장하게 됩니다.


(위) 187 / (아래) 299(스페츠트란스)
477A는 예전부터 눈독들이던 유압현가장비를 장착하고, 전작보다 더 나은 방어력과 기동력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인 엔진출력은 1200마력이였지만, 1500마력도 기획되어 있었고, 1650마력도 문제를 해결하며 양산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80년대에 나왔던 에이브람스를 장갑면에서 누르면서, 더 가벼웠습니다.
전고는 1800MM 이였으며, 차와 지상의 간격은 500MM, 하부와 상판 두꼐는 50+50mm였으며, 내부공간의 전고는 1200mm 였습니다.
NII 스탈리가 개발했던 차체장갑은 1000MM+ 의 방호력 , 측면장갑은 150mm + 사이드스커트(130mm) 였으며, 콘탁트를 대체한 반응장갑의 개발로, 효과는 콘탁트보다 더 작은크기로 같은 효과를낼수 있어, 더 많은 여유공간에 넣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 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20~30mm 철판의 간격마다 신형반응장갑모듈을 장착했습니다. 이 장갑들은 125MM 주포와 텐덤탄으로 테스트 되었으며, 매우 강력한 대응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데이터로 전면차체장갑 개선을 하여, 더 높은 방호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티타늄을 차량에 가장 많이 적용했습니다. - 1991년 형 몰로트에는 승무원의 다층해치에 포함되어 있었고, 전차포탑 상부, 탈부착식 장갑모듈, 사이드스커트, 포방패 부분등에도 말입니다.
해치 부분에는 약간 단점이 있었는데, 차장이 바깥으로 나오기가 매우 불편하게 설계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두개의 해치를 열어놓아야 겨우 바깥에 나갈수 있을 이중의 형태로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두 구동부를 기반한 차량이 있었는데, 하나는 219(T-80)을 기반한 가스터빈형 차량(구동부가 8톤급), 464(T-64)를 기반으로한 디젤형 차량(6톤급)이였습니다. 두 종류의 차량은 전부 파워팩을 장착해 있었습니다.

152MM 2A73을 장착하고 (몆몆 보고에는 다른 언급도 있지만.) 30MM 기관포를 포탑과 동축으로 운용되게 했습니다. 또한 두기의 기관총을 장착해 있었습니다.
477A에 관련한 변환점은 2A73의 장전장비가 477와 분타르등에 기획되던 장전장치(고장이 잦았던)를 교체하여, 새로히 설계된 드럼형 컨베이어와 차체 컨베이어가 준비되었고, 이는 문제없이 구동되었다고 보고되었습니다만, 몆몆 보고에는 이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었다. 라는 주장도 있어, 사실 확인이 어렵습니다. 탄약은 34발을 장착했었으며, 10+12+12 포탑부분의 드럼, 차체컨베이어, 예비탄약고 순입니다.
탄약은 기존의 152MM 형 분리탄, 그리고 '형체변화식 장약'을 도입한 탄,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탄(아마 유도탄형?)으로 총 3종류가 있었습니다. 형체변화식 장약은 - 액체형(무탄피형이라고 언급됨 - 주) 장약을 연구개발하려고 했던것으로 추정되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기획이 중단되었습니다.
전자장비와 사통체계에는 차기전차 다운 엄청난 개발품을 장착했습니다. TIUS는 '브로시-1'(브로치) 라는 이름으로 준비되었으며, FCS+레이더인 "나티스크", 전차-항공기간 데이터교환 통합통제시스템(네트워크 전 장비)'포지치야'도 몰로트와 그외 차기 기갑을 위해 개발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위성항법장치, 암호화통신장비, 피아(국가)식별시스템, 무선식 전차통제(이동,전차포 발사같은 기본적 체계)시스템 등, '미래'라고 생각되는 모든 전자장비는 부착이 되었거나, 될 예정이였습니다.
FCS(사통)에 있어서는 현대전차에 운용되는 전파장(열상,주야간), 레이저 거리기(미사일 조준도 가능함 -주)와의 통합은 물론, 레이다와 같은 특이한 파장부분도 관여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통제모니터에 레이다 화면를 띄워, 표적을 지정해 그곳에 유도무기를 발사하거나, 표적을 발견해 사격하는 등의 기능을 할수 있었습니다. 이는 나티스크 FCS와 관측 레이다 '아르구진'(VNII 시그날 설계작)의 존재로써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설계품의 테스트 결과 몆 부분에서 결함이 있었습니다. 지상의 지형은 레이다 신호를 왜곡했고, 이동표적을 잡아내긴 쉬운일이 아니였습니다.
포탑부분은 저피탐성으로 개발되어,많은 장갑부분을 줄일수 있었으나, 관측장비들이 노출되게 되었습니다. - 초기 시제품에는 이런 부분에서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포탄뿐만이 아니라, 모든 접촉할수 있는 어떠한 지구상의 물질에도 포탑 구동에 문제가 생길수 있을 정도로 유약했었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은 티타늄 설계(아마 부착식 장갑모듈을 포탑에 붙이는 형태로 추정- 주)들로 개선을 시도 했습니다.
지속된 개선의 결과로 성과도 보이면서 1990년에 있었던 차기전차의 몰로트의 선정으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약 1995년쯤에는 양산차량의 배치가 성공적으로 될수 있었을듯 했지만. 1991년, 그 기획을 구상하고 지휘하던 설계국과 국가의 운명이 한순간에 바꿔져 버렸습니다. 1991년 이후로, 소련은 붕괴되었으며, 1992년, 최대 전차설계국이 있엇던 소련 하리코프는 우크라이나 하리코프가 되었고, 대부분의 실험시설이 있었던 소련 쿠빈카는 러시아 쿠빈카가 되었고, 구 소련군을 이어받은 군대는 러시아 연방군이 되었고, 우크라이나군은 소련과 연관이 없다고 언급된 독립된 국가의 군대로 분열되었던 것입니다.
더 재미난 사실은, 결론적으로 이 미래전차 계획은 우크라이나군을 위한것이 아니였고, 구 소련군을 계승한 러시아 연방의 군대가 이어받게 되어, 우크라이나군은 이러한 장비를 만져볼 기회조차도 없게 된 것입니다. 계약서상 '소련군'을 위한 것이였으니까 말입니다.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어, 이후에는 자료가 거의 소실되었거나, 양측 정부에 기밀처리되어 477A에 대한 자료들은 친하리코프적으로 편향되었거나, 혹은 후에 등장한 타길(UKBTM)의 왜곡등으로 정식적인 자료의 신빙성 조차 의심되고 있을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게 됩니다.

477A는 1989-1990년 동안 10대가 있었던 걸로 언급되었으며, 그중 6대는 2016년 기준으로, 하리코프 주변의 바쉬코르프카라는 마을에 비치되어 있다고 언급됩니다. 가스터빈 형 엔진도 있고, 디젤형도 있습니다. - 또한 4대의 행방은 묘연한데. 몆대는 러시아 내부에 있을것이며 가장 현실적인 곳은 '쿠빈카'에 있을 것이라고 많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또한, 이중에서 3대는 실제 운용이 가능한 상태라고 아푸흐틴의 언급에는 나와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하리코프 측이 소유한 추구예프(이후 추위프라는 이름으로 개명 - 우크라식 지명.)에서 테스트 받고, 이후 쿠빈카로 옮겨가 소련군의 정식적인 테스팅을 하는 형식으로 도입시험평가는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쿠빈카 제 38 연구소(우리가 아는 그 실험장의 그 연구소가 맞습니다.)에 근무하던 한 연구자의 회상을 언급하자면
Я последний раз был в ХКБМ в декабре 2000 года. За период 1998-2000 гг я не однократно сидел в данной машине, управлял вооружением. На декабрь 2000 года "Молот" сделал несколько десятков выстрелов. Это была ЖИВАЯ машина, я ее ОЩУЩАЛ"
"나는 2000년 12월에 마지막으로 하리코프 설계국에 있었다. 1998-2000년동안 난 차량에 한번만 타지 않았고. 2000년 12월, 몰로트는 수십발의 테스트를 거추었고, '살아 숨쉬는' 전차였다. 나는 그걸 느낄수 있었다..!"
이 보고가 확실하다면, 2000년까지만 해도, 이 기획을 어떻게든 이어보려고 노력했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1990-2년, 소련이 붕괴하고 난뒤의 러시아군의 테스팅 결과는 477A에 대한 '긍정'적이였습니다. 몆몆 문제점을 해결하고, 양산품 준비를 해도 된다는 결과로 나타나, 하리코프 측에서는 야심차게 5개의 양산공정을 가진 공장을 하리코프 주변에 건설했었고, 필요한 생산장비도 마련했고, 구매자(소련-러시아)는 50대의 초도분량을 요구했었지만.
애석하게도 - 92년 붕괴여파로 나타난 극심한 행정체제붕괴, 무리한 기술요구변경, 경제악화 등으로 휘청거리다, 양산계획은 완전히 물건너가게 됩니다. 또한 하리코프 공정은 야심찬 기획보단, 기본적인 공장의 생존이 더 중요했기에, 이러한 기획을 뒷전으로 두고, 미래를 위해 미래를 갉아먹어야 하는 매우 암울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여파를 2000년까지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런 광풍을 겪으며, 몰로트는 결론적으로 도입은 이뤄지지 않게 됩니다. 사실상 소련미래전차, 모로조프의 마지막 꿈은 1991년 이후로 완전히 파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소련을 위해 제작된 미래를 기다린건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이 이미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477A의 개발은 2000년까지 이뤄지면서 양산형에 가장 가까워진 개량형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A1 '노타'라고 불리는 형태의 설계작이 그것입니다.
만약 소련이 돈이 많았고 나라가 안망했다면 obj 477은 채택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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