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는 그대의 과거 100세(世)가 이란의 신하였음을 알 터, 우리는 그대가 우리와 통교하는 외엔 거래처가 달리 없는 러시아인들과 결탁한 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노라. 비록 우리 측이 가신 모두를 손수 처리할 마음을 품지 않았다 했더라도, 지난해에 그대는 나로 하여금 조지아인 몇몇을 참수하도록 강제했도다. 지금 우리는 지혜로운 그대가…(중략)… 러시아인들과의 관계를 끊길 바라는 바이다. 명(令)을 받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즉시 조지아 원정을 실행에 옮길 것이며, 조지아인과 러시아인들의 피눈물을 크디큰 쿠라 강만큼 흘리게 하리라. - 아가 모함마드 칸의 최후통첩 中
캅카스를 두고 일어날 러시아-페르시아 전쟁의 서막이자, 카헤티-카르틀리 왕국 멸망의 단초.
나디르 샤가 1747년 원정 도중 암살당하고 난 뒤 페르시아는 오랫동안 분열되어 군벌들이 곳곳에서 할거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중간에 카림 칸이 잔드 왕조를 열며 다시 하나로 규합하나, 2대를 못 가 왕족들 간의 내부다툼으로 혼란해진 나머지 카자르족 족장 아가 모함마드 칸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지 못했다.
같은 무렵에, 조지아와 캅카스 남부는 페르시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사실상 독립을 누리고 있었다. 아마샤 조약(1555)에 따라 캅카스 서쪽은 오스만의 나와바리로, 동쪽은 사파비 페르시아에게 분할됐었다. 조지아도 마찬가지로 서부의 이메레티 왕국과 공국 4개는 오스만에게, 동부의 카헤티 왕국과 카르틀리 왕국은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편입됐다. 비록 여러 차례의 봉기로 분립에 성공했다 한들, 수백년 동안 조약으로 설정된 경계가 변하는 일은 없었다. 강대국이 제 체력을 되찾으면 또다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게 뻔했던 까닭이었다.
3만 5천에서 4만에 달하는 페르시아의 원정군이 1795년 9월 초순 아제르바이잔을 떠나 카헤티-카르틀리 왕국의 수도, 트빌리시와 지척의 거리에 있는 크르차니시 들판에서 조지아군과 조우했다. 잔드 왕조와의 오랜 전쟁에서 승리하고 명실상부히 카자르 왕조의 샤한샤에 오른 아가 모함마드가 군을 직접 통솔했다. 그러나 전투가 막상 시작된 후 페르시아군은 조지아군의 완강한 저항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5천이라는 숫적 열세에 불구하고 바그라티오니 왕실에 충성을 다했던 조지아인들은 수도가 뺏기면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으로 절박하게 싸움에 임했고, 같은 달 9일과 10일에는 페르시아군의 공세를 수 차례 격퇴하며 선전하고 있었다. 아가 모함마드는 조심스레 철군을 고려했다. 조지아로 떠나기 앞서 특유의 잔혹성으로 분열된 나라를 통일하며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일대의 제후국들을 복속한 그에게도, 적의 저항은 완강해 보였다.
서조지아와 동조지아에서 모여든 5천의 조지아인들은 에레클레 2세(ერეკლე II)가 이끌었다. 나이 일흔을 채 넘긴 카헤티-카르틀리 왕국의 국왕은 조지아 동부를 관할하며 청년기에 일찍이 능수능란한 처세술로 나디르 샤의 엄혹했던 학정을 견뎌냈고, 러시아 제국과 게오르기옙스크 조약(1783)을 체결, 왕실과 국가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나 성과가 따르지 않았다.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조지아가 위태로울 때마다 도와줘야 마땅했지만,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차르 예카테리나 2세와 제국 정부는 막상 페르시아가 조지아를 침공했을 즈음 에레클레에게 알아서 강화하라는 조언만 보냈다. 조지아가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든 어찌되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방관자의 태도로 일관한 것이었다. 에레클레는 결국 구원군이 결국 당도치 않은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침략군을 맞이해야만 했다.
운명은 아가 모함마드의 편이었다. 교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아르메니아계 탈영병이 페르시아군 진지로 흘러들어 ‘조지아인들은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 아가 모함마드는 이에 병력을 되돌리려던 계획을 철회하며 다음 날 11일 이른 아침에 전군을 이끌고 쿠라 강을 도하, 총공격을 감행했다. 포병대와 기병대의 협공과 함께 카자르 페르시아의 군대는 조지아인들의 방어망을 무너뜨리며, 지난 2~3일 동안 격전이 일었던 크르차니시 들판을 뒤로 한 채 트빌리시로 쇄도했다.
천여명 남짓, 조지아인들의 잔존 병력은 트빌리시 북쪽 외곽으로 벗어났다. 페르시아군의 추격이 이어졌고 희생이 뒤따랐다. 에레클레 2세 일행의 후퇴할 시간을 벌기 위해 아라그비 강 상류에서 온 산민들이 마지막까지 남아 항전하기를 각오하며 전장 속으로 뛰어들었다. 300대 수천, 많게는 수만명의 싸움이였다. 죽기로 각오한 이들 산민들은 일당백으로 남아 나라칼라 요새와 인근의 거리마다 페르시아군의 이목을 끌며 혈전을 펼쳤다. 거의 대다수가 비록 몰살당하고 말지만, 이들의 미담은 같은 순간에 함께한 왕족들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져 19세기 후반 일리아 찹차바제(ილია ჭავჭავაძე)와 여타 민족주의자들에게 영웅시되며 ‘아라그비의 300인 (სამასი არაგველი)‘이란 이름으로 후세에 널리 전해진다.
시가지에서 난전이 열린 지 수 시간째, 조지아인들의 저항은 분쇄되고 페르시아군은 트빌리시 시가지를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과거 잔드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 로트프 알리 칸을 거세시켜 장님으로 만들었듯이 아가 모함마드는 본인에게 끈질기게 대항해온 경쟁자들과 반대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칼에 베인 여인과 아이들의 몸뚱아리가 거리에 나뒹굴었으며, 도합 1만 5천명이 페르시아 본국에 포로로 끌려갔다. 쿠라 강, 조지아어로 므트크바리(მტკვარი) 강 유역은 피로 적셔졌다. 에레클레 2세가 다시 되돌아왔을 무렵에 도시는 살해당한 이들의 시체로 즐비했으며 잿더미로 황폐된 상태에 이르렀다. ‘피눈물을 크디큰 쿠라 강만큼 흘리게 하리라’ 는 아가 모함마드의 경고는 그저 그런 허언이 아닌 현실로 나타났다.
비단 트빌리시 뿐만이 아니었다. 일순간에 국가 전체가 무너졌다. 단 한번의 침공으로 인해 에레클레가 치세 내내 6~700여 명의 그리스 기술자들을 초빙시켜 진흥해왔던 광업도 페르시아군의 약탈과 살인으로 쇠락을 면치 못했다. 전쟁의 여파로 카헤티-카르틀리 왕국 왕실은 러시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1801년 러시아의 동조지아 합병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카르틀리-카헤티 왕국과 수도 트빌리시를 본보기로 삼아 아가 모함마드는 캅카스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재확립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향후 20~30년간 페르시아와 러시아 사이에 일어날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소식을 접하자 격분했다. 에레클레 2세의 요청으로 여제는 트빌리시가 파괴된 이듬해에 뒤늦게나마 러시아군을 캅카스에 파병했다. 발레리안 주보프(Валериан Зубов)의 지휘 하에 러시아군은 데르벤트와 바쿠, 쿠라 강으로 남진해 페르시아 본토까지 노렸으며, 곧 이어질 두 차례의 전쟁을 통해 근 2~300여 년간 지속되어온 질서가 무너져 캅카스의 주인이 바뀌게 될 터였다.
※ 쿠라 강은 터키의 카르스 인근 산악지대에서 발원, 트빌리시 시가지를 가로질러 카스피 해까지 달하며, 지류로는 므츠케타에서 갈라지는 아라그비강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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