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저우 군구는 지리적으로 신장과 티베트에 가깝기에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란저우 군구 내의 간쑤 성 지방군은 마오의 대기근 후 인민공사에서 농업 경영권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돌려준
간쑤성장 왕펑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는 문화대혁명 당시 주석이 <반동 수정주의자>의 꼬리표를 붙인 최초의 희생양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저우언라이의 거듭된 명령에도 불구하고 지방군 사령관은 왕펑에게 등을 돌리길 거부했다.
1967년 5월부터 란저우 군구 사령관 장다즈를 지지하는 파벌과, 왕펑을 지지하는 파벌로 간쑤성에서 격렬한 충돌이 시작됐다.
8월 3일, 베이징은 란저우 군구 파벌을 <진정한 좌파>로 인정했다.
그러자 간쑤 성 전역에서 무기고와 무기 공장이 습격을 받았다.
톈수이에서는 홍위병들이 다이너마이트 공장을 습격해 수백kg의 폭발물을 빼앗아 도주했다.
그들은 또한 기관총과 박격포를 이용해 혁명을 추구하려 했다.
핑량에서는 도시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모든 도로가 봉쇄되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군에게 등을 돌렸고, 그 중에는 조잡한 무기로 무장한 수백 명의 학생들이 포함되었다.
허수이 현에서는 강제노동수용소의 죄수들이 단체로 경비대를 공격하고 무기를 찾으면서 사무실을 뒤졌다.
이제 란저우의 모든 이들이 내전에 휘말려들었다.
노동자들은 장대 끝에 드라이버를 매달아 창을 급조했다.
도시마다 곳곳에서 돌덩이를 바구니에 담아 건물 옥상으로 옮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호텔 식당 종업원과 요리사들조차도 주방에 모루를 갖다놓고 무기를 만들었다.
적대 관계의 두 파벌들이 백주대낮에도 혈투를 벌였다.
폭도들이 불운한 희생양을 포위하고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조잡한 창으로 찌르곤 했다.
거리마다 시신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거 "겨우" 선생님 좀 패죽이거나 문화재 좀 부수는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