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의 역사와 술, 과학에서 독일의 전쟁방식은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인드에서 떠오르는 것은 기관총과 "판저" 그리고 2번의 세계대전 일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전쟁방식을 특이하게 만드는 것과 그 시기의 연결점은 희미하다.
모든 것은 한참 전, 1806년, 예나 아우어슈테트 전투 직후에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처참한 참패를 당했다.
프로이센에는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게프하르트 폰 블뤼허,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같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대부분의 유럽 군대가 가진 구조에 크게 실망했다.
예나 아우어슈테트의 여파는 두가지 큰 전환점으로 이어졌다.
먼저, 프로이센 전쟁대학의 창립이었다. 이후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을 다룬 유명한 그의 책을 쓰고 교사로 지낸 곳이다.
샤른호르스트와 클라우제비츠는 이후 프로이센 개혁운동을 주도한 군사 지식인 서클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프로이센 전쟁대학은 클라우제비츠 본인이 그랬듯 나폴레옹이 한 것을 치밀하게 복사한 것이었다.
진짜 혁신은 없었다.
개혁 운동은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군대 구조를 조정하는것으로 시작되었다.
"어떻게 프랑스인들은 그렇게 신속한가? 더 소통이 잘되고 어떻게 우리보다 숫적으로 우세했나?"
그러나 나폴레옹은 교리의 문서화를 잘 하진 않았다. 나폴레옹은 과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조직을 만들고 이끄는데 특화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곳에 쓰여진 교리같은건 없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사실 "나폴레옹은 어찌했는가?" 로 명명될 수도 있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원리를 이해하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이 발전은 프로이센을 나폴레옹의 교리를 문서화하는것 뿐만 아니라 그 차이를 인식하도록 이끌었다.
프로이센의 개혁은 임무형 지휘와 정교하고 강력한 부사관단의 탄생이었다. 이 글은 역사를 다룬건 아니기에 그 과정까지 다루진 않겠다. 독일의 전쟁은 4가지 요소로 이뤄진다.
-자율적인 지휘관/자
-성공과 주도권을 위한 결정적 요소로서의 속도와 기동
-전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의 주 노력
-전략적 면에서 결정적 전투를 빠르게 찾아낼 수 있게 하는 COG
이 모든 요소는 어느정도 예술적 접근법으로 놓여있었고 클라우제비츠는 항상 뛰어난 군 지휘관을 예술가나 작곡가로 비유했다.
비록 프로이센군은 규율을 중요한 요소로 여겼지만 이후엔 지휘관, 심지어는 개별 병사에게까지 의사결정의 자유를 제공했다. 창의성은 그 원동력이 되었다.
임무형 전술과 임무형지휘는 독일의 전쟁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임무형지휘는 명령을 내리는것보다 임무를 제공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임무형 전술은 하급 지휘자에게 고위급 장교와 비슷한 수준의 교육과 의사결정권을 제공한다.
이는 이후 유명한 쇼크 트루퍼와 같은 아이디어들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중무장한 소규모 분대는 그들 스스로 판단하여 적 참호 가까히 침투하여 틈을 확장시켰다.
독일의 군사교범에서 자주 보이는 문구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리하는것" 이다.
이는 결정적 전투만을 찾으며 작은 전투는 무시한 나폴레옹을 복사한 클라우제비츠에게서 나왔다. 쇼크 트루퍼는 그것을 소규모 전술 레벨에서 실행한 것 뿐이다.
이것으로 이 전쟁의 스타일은 "표면과 틈" 전쟁 이라고 알려지게 된다.
마치 물처럼, 독일군은 강점인 "표면"을 회피하고 압도적인 병력을 "틈"에 집어넣는다.
이러한 틈은 추후 확장되어 돌파되거나 적의 진지를 돌아간다.
속도와 대담성은 여기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독일의 전쟁 수행 방식은 전술 단계에 크게 집중한다, 예시로 러시아의 전쟁은 전적으로 작전적 접근 방식을 강조하지만 독일의 전쟁은 전투와 공격을 강조한다.
"작은 것들을 기반으로 쌓여진 큰것"이 주된 접근법이다.
2차대전과 그 이후에, 이는 전투-기갑정찰의 강조로 이어진다.
고도의 기동성을 가진 중무장된 부대는 적의 방어를 탐사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이는 그들의 뒤에 있을 전투중심의 전술적 예비대를 끌어들여 틈을 유지하고 확장시킨다.(Recon Pull)
이 방식의 전쟁에서 임무형 지휘체계는 강조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다!
대규모 전술적 의사결정은 참모가 아닌 전선에서 이뤄진다.
참모는 현대 기업의 CEO와 같은 일을 한다. 경계를 설정하고 규율을 확인하며 대규모 전략적 목표를 구상한다, 직접적인 계획은 오직 확실한 필요시에만 적용된다.
이 모든 원칙은 설명하기 어렵고 독일군의 많은 구성원들 역시 수십년간 반대했다.
이 "프로이센-독일의 기동전"이 완전히 적용된 시점은 "블리츠크리그(전격전)"이라고 알려졌을 때이다. 물론 나치 정부는 이것을 연합국 언론이 만들어낸 "블리츠크리그"라는 용어에 대한 왕관을 가져가고 그것을 트레이드마크로 이용했다.
독일의 전쟁은 방법에 기반하지 않는 원칙이다. 야전 교범은 항상 짧거나 일부 주제에 관해선 존재하지 않았다.
"Kein Schema"(설계되지 않음)이 이 뒤에 있는 주된 뜻이었다.
이는 장단점이 있다.
물론 "Kein Schema"는 전투의 혼란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만 독일군은 특정한 소대와 중대급에서 절차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는 것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때때론 "상황에 따라 정한다."는 장점이 아니라 그저 시간 낭비가 될 수도 있다.
문제점은 2차대전 후반부에 확실히 밝혀졌다. 부사관과 장교의 훈련기간은 점점 짧아졌고 독일의 전쟁 방식은 그 약점을 들어냈다: 소모전
고도로 훈련되고 교육받은 분,소대장은 양산될 수 없지만, 양산되야 했다.
2차대전 초기 독일군 보병들의 지원조와 돌격조 구성은 단결된 분대 내에서 유기적이었지만 2차대전 후반부의 독일군은 연합군 보병들과 마찬가지로 돌격제대와 지원제대를 조직화하여 운용하었다.
(의역첨가)
높은 수준의 예술가적 접근은 더 이상 지속이 불가능했다.
주 노력은 아까도 말했듯, 독일의 전술적 규모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그 예시로 기관총은 현재까지도 "Schwerpunktwaffen"(주 노력 화기) 라고 불린다. 이는 연합군을 상대로 효과를 증명했기에 이를 대랑생산하는것은 중요했다.
모든 독일 소총 소대는 최소한 3개의 GPMG를 지급받으며 이를 유기적으로 운용하도록 훈련받는다.
"빠른 주 노력"은 많은 군대가 복제한 특징적 움직임이다.
특정 무기와 발명품은 독일의 전쟁방식을 도왔다.
특히 전차와 무전은 이러한 전쟁 방식이 의도된대로 갈 수 있게 해주었다.
보병과 기갑은 서로를 지원하며 질량을 유지하면서도 잘 분산된 대형으로 속도, 화력, 질량에서 적을 압도했다.
반면, 독일의 전쟁 방식이 신경쓰지 않는 유형의 군대도 있었다.
항공자산이 완전히 통합되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전투에 대한 강조가 컸기에 군수는 자주 관과되었다. 또한 특수부대도 잘 통합되지 않았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은 특수작전부대에 대한 몇가지 개념은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 잘 작동하진 않았으며 결정적 전투를 강조한 아이디어와 일치하지도 않았다.
2차대전 이후 "내면의 리더쉽"이라는 개념이 빠르게 신생 독일 연방 육군에 적용되었다.
내면의 리더쉽이란 임무형 지휘의 급진적 연장선이다.
내면의 리더쉽은 병사를 치명적인 도구로 대하는 뿐만 아니라 시민임을 최우선적으로 상기시키기에 다른 리더쉽 개념과 다르다.
임무형 지휘는 지휘관의 의도를 이행하기 위한 선택지를 고르는 반면, 내면의 리더쉽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의도를 상기시킨다.
내면의 리더쉽의 4가지 중심기둥은 다음과 같다.
정당화, 통합화, 조직화, 동기부여
이는 모두 사람을 가리킨다.
독일연방군은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지고 명령을 집행하지 않는 병사를 즉시 탈영병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어째서인지 이 개념은 국제적 관심을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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