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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번역글) 남송 효종조에서의 태상황제의 영향력과 황제 측근정치 (1)

위진갤러(59.16) 2024.05.11 06:5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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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宋孝宗朝における太上皇帝の影響力と皇帝側近政治 - 고바야시 아키라(小林晃) 著



시작하며(はじめ)


효종은 남송 정권의 최전성기를 쌓은 황제로 알려졌지만, 그 정치에 대해선 상이한 두 가지 평가가 병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효종이 재집(宰執)보다 황제 측근의 무신 관료(이하 '측근 무신'으로 약칭)를 중용한 것에 주목한 평가와, 2) 효종조 27년 중 25년에 걸쳐 초대 고종이 태상황제로 생존하고 있었던 것에 착안한 평가, 두 가지이다.


이 가운데 1)을 제시한 선행 연구에 따르면, 효종은 측근 무신을 수족으로 삼아 강력한 정치를 주도하여 재집의 권력을 크게 억제했다. 즉, 효종은 자신이 신임하는 측근 무신으로 하여금 추밀원의 문서 행정을 통괄케 하고, 재집의 제약을 받지 않는 명령 계통을 확보했으며, 재집을 거치지 않고도 황제로부터 담당 부국(部局)에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어필(御筆)을 정권 운영에 많이 사용함으로써 정책 결정에 있어서 재집을 배제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선 효종이 재상에 의한 전권을 경계했던 것에서 찾은 아베 나오유키(安倍直之)씨와 효종이 실무 능력이 부족한 과거(科擧) 관료보다 무신 관료의 중용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에 돌린 후지모토 다케시(藤本猛)씨 사이에 견해차가 있지만, 1)은 효종이 황제에 의한 '독단'적 정치 운영을 실현한 점을 중시한 견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2)는 태상황 고종이 효종조 정치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선행 연구에 의하면, 효종은 본래 대금(對金) 강경론을 지지하고 있었으나, 태상황 고종이 화평을 원했기 때문에 이를 자제할 수밖에 없었고, 고종의 체면을 손상시킨 관료의 파면을 강요받는 등 여러 레벨의 정책 결정에서 태상황으로부터 간섭을 받았다고 한다. 즉, 효종의 정책 결정이 태상황 고종의 강력한 억압하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 것이 2)의 견해였다. 1), 2)의 견해는 언뜻 보면 서로 대립하는 것 같다고도 생각된다. 데라치 준(寺地遵)씨가 2005년의 논고에서 효종에 의해 중용된 측근 무신이 실제로는 태상황으로부터 효종에게 보내진 '감시역'이었다고 논한 것은 두 설의 대립을 해소하고자 한 것이었다. 즉, 데라치 씨는 두 설을 토대로 우선 2)의 견해를 중시하고, 효종에 의한 '독단'적 정치 운영이 실은 태상황 고종을 뒷배로 삼고 있었다고 해석함으로써 1)의 견해를 사실상 부정한 것이다.


두 가지 설을 정합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데라치 씨의 시도는 극히 중시된다. 그러나 제3장에서 보듯이 효종의 측근 무신들이 고종과 대립하려는 움직임을 자주 드러냈던 점을 감안하면, 데라치 씨의 견해엔 의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1), 2)의 어긋남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이에 대해 필자는 1), 2)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견해가 아니며, 어느 쪽도 당시 정치 실태의 한 측면을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효종이 측근 무신을 중용한 원인은 아베・후지모토 양씨(兩氏)가 거론한 이유에 그치지 않고, 태상황으로부터의 강한 제약에 대해 효종이 주체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것에서도 찾을 수 있듯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추측의 타당성은 태상황이 어떠한 수단으로 정책 결정에 관여했는지를 토대로 판단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2)의 선행 연구는 태상황 고종이 개입한 정책・인사의 단편적인 사례로부터 이른바 인상론적으로 태상황 영향력의 강함을 지적하는데 그쳤으며, 이 문제에 대해 상세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하나의 정치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추적함으로써 태상황 고종이 현실에 어떠한 형태로 효종의 정책 결정에 개입했는지를 체계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문제 관심하에 본고 제1장・2장에서는 소흥 32년(1162) 6월의 효종 즉위로부터 융흥화의가 체결된 융흥 2년(1164) 12월까지 남송 중앙에서 이뤄진 대금정책 논의의 추이를 재검토한다. 데라치 씨도 같은 문제를 1988년에 논한 바 있지만, 그는 그 시점에서 태상황 고종의 영향력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태상황 고종이 당시의 화전(和戰) 논쟁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를 탐구함으로써 데라치 씨와는 다른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더욱이 거기서의 결론을 바탕으로 제3장에서는 태상황이 가진 영향력과 효종에 의한 측근 무신 중용과의 관계를 논하기로 한다.



제1장 : 부리(符離) 전투 전야의 재상 인사와 화전 문제


소흥 32년(1162) 6월, 남송 초대황제 고종은 퇴위하고, 2대 효종이 즉위했다. 고종은 국정을 효종에게 맡기며 태상황제를 칭하고, 태상황후 오씨(吳氏)와 함께 덕수궁(德壽宮)으로 옮겨 거주했다. 덕수궁은 고종의 퇴위 후 거처로서 임안(臨安) 동남쪽 망선교(望仙橋)의 동쪽에 마련된 궁궐이었다. 망선교는 남송 황제 궁성의 북문이었던 화녕문(和寧門)에서 다시 북쪽에 있는 조천문(朝天門)의 동쪽에 위치했다. 덕수궁은 궁성 북쪽에 이른바 별궁(離宮)으로 소재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덕수궁을 '북내(北內)', 황제의 궁성을 '남내(南內)', 혹은 '대내(大內)'라고 불렀다. 고종은 순희 14년(1187) 10월에 붕어할 때까지 25년간 이 덕수궁에서 남송 정권의 최고 권위로 군림하고 있었다. 정작 이심전(李心傳)의 <건염이래조야잡기(建炎以来朝野雑記)> 을집(乙集)一, 상덕(上德)一 <임오내선지(壬午內禪志)>에 따르면, 고종은 자신의 퇴위 이유를 '이제는 늙었고 또 병중'이기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선행 연구에 의하면 고종 퇴위의 원인은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고종 퇴위 전후의 시기는 바로 송금관계의 격동기에 해당되었다. 우선은 선행 연구에 의거하면서 당시의 정치 과정을 주시하고 싶다. 고종은 소흥 12년(1142)에 진회(秦檜)의 주도로 이루어진 송금 화평을 강력히 후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러한 화평 중시의 자세는 소흥 25년(1155) 진회의 사망 후에도 변화가 없었다. 즉, 고종은 진회・탕사퇴(湯思退) 등을 재상으로 기용해 송금관계의 유지 및 안정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나 남송 정권내에선 진준경(陳俊卿)・우윤문(虞允文) 등 대금 강경론자가 서서히 힘을 키웠고, 소흥 29년(1159)엔 심해(沈該)가, 이듬해엔 탕사퇴가 탄핵으로 파면당했다. 그리고 금나라 황제 완안량(해릉왕)의 남송 침공으로 고종의 화평정책은 파탄나고, 소흥 31년(1161) 8월부터 재차 남송・금의 전면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채석(采石) 전투에서 남송이 승리하고, 반란으로 완안량이 횡사함으로써 금측의 패배로 끝났으나, 이는 강경론자들의 또다른 약진을 야기했다. 즉, 강경론자의 영수로 진회의 최대 정적으로서 배척당해왔던 장준(張浚)이 같은 해 10월에 판(判)건강부(建康府)로 현직 복귀를 이뤄낸 것이다.


곧이어 금국의 새 황제인 세종(世宗)이 남송에 화평을 제의했으나, 이듬해 정월에 남송 조정에서 벌어진 논의에서는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양국의 화평은 암초에 부딪쳤다. 이처럼 소흥 32년 당시 남송 정권은 대금 강경론자들이 크게 대두하는 상황에 있었다. 고종은 바로 이러한 정세하에서 퇴위했던 것이다. 선행 연구를 토대삼아 말하자면, 고종은 자신의 화평 노선 파탄에 실망했고, 또한 공세를 강화하는 대금 강경론의 정면에 서는 것을 기피한 나머지 퇴위를 결심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왜냐하면 퇴위 직전에 '짐이 이 일을 헤아리건대 결국 화평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하는 등 대금 화평을 고집했던 태상황 고종과는 달리, 신황제 효종은 금나라를 '함께 하늘을 받들 수 없는 원수'로 보고, 즉위와 동시에 '회복의 뜻을 떨쳤던' 강경론자였기 때문이다. 근시(近侍) 때마다 '회복의 대계(大計)'를 주장한 효종에게 태상황 고종이 '1백년 후에 그 일을 논의하라'며 대꾸했다는 일화는 대금정책을 둘러싼 두 사람의 속셈의 간극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관련 상황은 당시의 정국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효종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는 대금정책의 키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였다. 한 번 좌절된 평화협상을 재개할 것인가, 강경론자들의 주장에 따라 다시 개전하는 것인가였다. 그리고 이 선택을 둘러싸고 커다란 조점이 되었던 것이 전년에 현직으로 복귀한 장준의 처우였다. 장준은 대금 강경론자로 알려졌고, 소흥 5년(1135)엔 재상을 지냈으나, 군벌의 해체를 서두르는 바람에 회서병변(淮西兵變)을 유발하는 등 실책이 많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고종은 장준을 기피했고, 송금 화평이 깨졌던 소흥 8년(1138)에 조정 신하로부터 장준의 재기용을 제언받자, 엄숙한 표정으로 '차라리 나라가 뒤엎어지더라도 이 사람은 쓰지 않겠다'며 일갈했다고 한다. 게다가 장준에 대한 고종의 불신은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퇴위 전후에도 불식되지 않았다. 예컨대 소흥 31년 6월 이전에 고종은 장준의 재기용을 요청받자, '장준의 재능은 얕다', '만약 다시 제군(諸軍)을 통솔하게 된다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이다'라고 답한 바 있다.


또한 이듬해 정월에도 기거사인 유공(劉珙)이 '중신(重臣)'을 강회형양로선무사(江淮荊襄路宣撫使)에 기용하도록 상주하자, 고종은 유공의 아버지 유자우(劉子羽)와 장준의 친한 관계로부터 '중신'이란 장준을 가리키는 것이라 의심하고, 격노한 적이 있었다. 고종이 장준의 재기용에 지극히 소극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효종의 즉위에 따라 일변한다. 장준은 효종 즉위 후 불과 1개월 뒤인 소흥 32년(1162) 7월, 전선 사령관인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로 기용되었고, 다시 반년 뒤인 융흥 원년(1163) 정월엔 집정(執政)인 추밀사로 발탁되었다. 원래 대금 강경론을 지지하던 효종은 '당시 황상의 뜻은 위공(魏公)에게 갔다'고 하듯이 이때 장준이 주장한 주전론에 공명했다고 한다. 고종이 일관되게 장준을 기피했던 점, 그리고 장준 재기용의 결과로 고종이 가장 원하지 않았던 대금전쟁이 벌어졌음을 생각하면, 이 인사가 전적으로 효종의 뜻에 따라 이뤄진 것임은 분명하다.


효종은 태상황 고종의 화평 노선과는 다른 독자적인 대금정책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주목하고 싶은 것이 당시 재상의 동향이다. 효종 즉위로부터 북벌전쟁 결행까지의 기간에 재상을 맡은 이는 진강백(陳康伯)・사호(史浩) 2명이었다. 진강백은 소흥 29년 9월에 상서우복야로 임명되어 소흥 31년 3월 상서좌복야로 승진, 융흥 원년 12월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또 한 사람인 사호는 소흥 32년 8월에 집정인 참지정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융흥 원년 정월에 우복야 겸 추밀사로 승진해 동년 5월에 사직했다. 당시 진강백・사호의 동향에 대해 이심전은 '4월 무진일, 위공(魏公, 장준)이 들어와 일을 아뢰고, 황상이 뜻을 정해 출병하여 회수(淮水)를 건너고자 했으나, 진강백과 사호 두 공(公)이 불가하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당시 재상을 맡았던 두 사람이 모여 효종의 강경책에 반대를 표명하고, 그 추진에 대해 일정한 억지력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물론 황제와 재상이 정책을 놓고 대립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문제는 진강백・사호의 재상 기용에 태상황 고종의 뜻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진강백은 고종조 말부터 재상을 맡아 완안량의 남송 침공을 극복함으로써 고종의 신임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왕십붕(王十朋)의 상주에서 '또 하나의 재상으로 그를 보냈다'고 언급한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사람들은 진강백을 태상황이 남긴 인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소흥 32년 10월에 진강백이 사직서를 제출하자, 효종은 어필을 내려 '태상황께선 경을 남겨 짐을 보좌케 했다'고 말하면서 달랬고, 효종으로부터 청원을 받은 고종도 어필을 내려 진강백에게 사직 철회를 명했다. 유립원(柳立言) 씨는 이 사건을 효종이 태상황에게 가탁해 관료를 달랜 사건으로 해석하며 태상황 고종의 권위가 지닌 크기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삼았다. 하지만, 이 사건엔 다른 양상도 있었다. 누약(樓鑰)의 <공괴집(攻媿集)> 권93, 신도비 <순성후덕원로지비(純誠厚德元老之碑)>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진강백이 사직을 청하자, 효종은 비답으로 은례(恩禮)가 이미 다했다면 응당 어떠한 직책을 주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뜻이 어찌 공(公, 사호)에게 속하겠는가? 공은 즉시 '진강백은 전조(前朝)의 노신(老臣)이므로 [현직에] 머물지 않고 중시된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만약 그 청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면, 반드시 덕수궁의 성유(聖諭)를 얻어야 그 뜻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날, 고종이 하사하신 어필로 진강백은 이내 직책에 머물렀다.'



효종은 진강백의 사임을 인정할 생각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사호에게 자문했는데, 사호는 고종조의 노신인 진강백을 만류하지 않을 수 없으며, 계속 사임을 요구한다면 태상황의 성유에 따라 위무해야 한다고 답했다. 즉, 효종은 진강백의 재상 유임을 반드시 원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종이 기용한 인물이었으므로 임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파악되는 것이다. 또 한 사람의 재상 사호는 황자(皇子) 시절의 효종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사호의 재상 기용은 효종 자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장의빈(蔣義斌) 씨는 사호가 고종과 마찬가지로 화평론자였고, 더구나 고종이 재위 당시부터 사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사호의 재상 기용이 태상황의 뜻이었음을 추측했다. 다만, 장씨는 고종과 사호의 관계를 드러내는 사료를 제시하지 않았고, 또한 고종과 사호의 관계가 당시 화전 문제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도 검토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선 <보경사명지(寶慶四明志)> 권제9, 서입 중(敍入中), 선현사적 하(先賢事跡下) <사호(史浩)>의 기술이 주목된다.



'사호가 참지정사가 되자, 상황(上皇)은 내시로 하여금 불러들여 식사를 대접했다. [태상황이] 타이르며 말하기를 '경은 황제의 잠번(潛藩)에 있으면서 두루 충성스러운 힘을 빛냈다. 황제가 효성스럽고 자애한 것은 경이 보도(輔導)한 공적이다. 이제 경을 얻어 보필로 삼았으니, 나 역시 안심이 된다. [또 말하기를] 경은 황제의 친신(親臣)으로 모든 일은 제대로 규정해야 하며, 회피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사호가 소흥 32년 7월에 참지정사로 임명되자, 태상황 고종으로부터 환관이 파견되어 덕수궁으로 불려갔고, 식사를 대접받았다. 고종은 사호에게 황제의 근신이 된 이상 규정해야 할 행동은 제대로 규정하되, 회피해선 안 된다고 훈계하고 있다. 위의 기사는 덕수궁에 있는 태상황이 집정과 독자적으로 만나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수 있었음을 보여줌과 아울러 장의빈 씨가 언급한 것처럼 사호의 재상 기용에 고종의 의사가 끼워졌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또다른 사료가 고종의 발언에 이어서 '공은 즉시 감사를 표했다. 이튿날, 다시 [황제께] 아뢸 일이 있으므로 그것을 말했다'고 적었고, 사호가 이튿날 상주할 적에 고종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대로 효종에게 전달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사호가 효종의 행동을 '규정'하는데 태상황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내외에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호의 발언력을 증대시켰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아마도 고종은 효종을 비롯한 강경론자들의 움직임을 사호가 '규정'해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강회선무사 장준이 효종의 명령에 따라 북벌을 계획했지만, 참지정사 사호의 반대로 인해 좀처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사실은 고종의 의도가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효종은 태상황 고종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던 사호의 신중론을 쉽사리 물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종과 사호의 협력관계는 융흥 원년(1163) 4월의 논쟁에서 더욱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소흥 32년은 진강백・사호 등 신중론자가 강경론자를 억제한 채로 지나갔지만, 이듬해 정월에 사호가 우복야에 기용되고, 장준이 추밀사로 발탁되자, 사호와 장준 사이에 격렬한 화전 논쟁이 오가게 된다.


융흥 원년 4월, 장준은 효종에게 전선(前線)인 건강부(建康府)로 가서 직접 대금전쟁을 독전(督戰)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진강백은 침묵을 지켰지만, 사호는 반대론을 제창했다. 사호에 따르면, 황제가 움직이는 데엔 친정(親征)・군사 위무(勞軍)・이어(移蹕)의 세 가지 명목이 있는데, 친정은 금나라 측의 대규모 반격을 초래하므로 불가하며, 군을 위무하는 것도 재정 부족으로 여전히 불가하다. 황제의 거처를 움직이는 이어가 제일 사정이 낫지만, 더욱더 충분한 논의를 요한다고 하였다. 이를 들은 효종은 '이어한다면 문제가 없다, 어째서 논의가 필요한가?'라며 자문했다.


<보경사명지(寶慶四明志)>는 효종과 사호의 언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호가 이르기를,


'아직 폐하께서 친히 6궁(六宮)과 가실 것인지, 상황을 모시어 함께 하실 것인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만약 상황을 모신다 하더라도, 당장 건강엔 덕수궁의 행궁(行宮)이 없습니다. 또한 상황께서 행차하시려는 의향이 어떠한지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신이 헤아리건대 상황께선 반드시 기꺼이 가시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상황께서 가시지 않는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6궁과 더불어 갈 수 있겠습니까? 별안간 폐하께서 몸소 가신다면 이는 곧 친정이지, 이어가 아닙니다. 만약 지금 친정하시더라도 전공(戰功)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실겁니까, 아니면 전공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귀환하실겁니까? 반드시 전공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전공이 필히 불가하다면, 바로 환궁할 기미만 못합니다. 정말로 전공없이 돌아오신다면 상황과 함께 군사를 살피러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다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이 듣자하니 옛 사람들은 적(賊) 때문에 임금과 아버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임전하시는 것을 필히 기다리신다면, 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도독(都督)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하물며 상황께서 이곳[임안]에 잔류하시고, 폐하께서 천 리(里) 바깥으로 멀리 떠나시면 [상황이] 아침 저녁으로 좌우(左右)의 입시(入侍)를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오랑캐 기병이 한 명이라도 회수를 침범한다면, 이 사이에 시끄러워 어수선해질테고, 달아난 이가 적다 할지라도 상황께선 심기가 동요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폐하 부자(父子)의 자애로움과 효성이 이와 같을진대, 오늘날 어찌 한 걸음이라도 서로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황상이 비로소 깨달아 장준에게 '도독이 우선 변경에 임하여 공로를 기다려라. 짐은 감히 가기가 꺼려진다. 지금은 아직 조령(詔令)을 내릴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



사호는 효종의 자문에 대해 효종이 태상황을 데려갈 것인지의 여부가 불분명한데다, 건강부엔 원래 태상황이 머물 거처가 없다고 답했다. 또한, 태상황은 아마도 동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태상황이 동행하지 않는다면 효종은 거처를 옮길 수 없게 된다. 더욱이 효종만 행차한다면 그것은 곧 친정이고, 친정이라도 모종의 전공이 없으면 장단을 맞출 수 없으니 체류가 장기화될 가능성도 있었다. 장준은 황제가 출진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도독이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물며 태상황을 임안에 두고 황제가 멀리 떠나 있다가 적의 기병 하나가 회수를 침범하면 임안은 커다란 소동에 빠질 것이고, 아군이 조금이라도 패주한다면 태상황의 마음을 어지럽힐 것이라면서 효종이 태상황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말을 들은 효종은 건강으로의 출진을 잠시 보류했다. 즉, 사호는 태상황 고종의 존재를 구실로 삼아 효종이 직접 전선에 나가는 것을 단념시킨 것이다.


강경론자 장준에게로 가는 효종의 출진은 사호가 가로막았듯이 이후의 송금전쟁을 장기화 혹은 대규모화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5월에 실제로 친정이 명령된 것으로 보면 사호의 우려대로 이 출진이 그대로 친정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을 개전 전의 이 시점에서 회피할 수 있도록 한 것엔 적지 않은 의의가 인정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태상황 고종의 신임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사호가 태상황의 존재를 방패삼아 그 의향을 대변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사호는 효종에게 신중론을 전개하고, 효종이 전선에 나가는 것을 단념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여기서 효종과 장준은 사호에게 예상외의 행동을 벌이게 된다. 즉, 장준의 진언에 따라 효종은 3성(三省)・추밀원을 거치지 않고 출병 명령을 내리는 비상 수단을 통해 대금전쟁을 강행했던 것이다.


이를 알게 된 고종은 덕수궁을 방문한 효종에게 '장준의 허명(虛名)을 믿지 말거라. 장차 반드시 대계(大計)를 그르칠 것이다'라며 설득했음에도 번복시킬 수 없었고, 게다가 사호는 재상인 자신을 출병에 관여하지 못하게 한 효종의 행위에 분노해 5월 15일에 재상의 지위를 사퇴하였다. 그리고 고종과 사호의 우려는 적중해 5월 24일, 남송군은 부리(符離, 지금의 안휘성 숙주시)에서 금군에게 대패하게 된다. 아직 패보를 알지 못했던 효종이 마침내 조령을 내려 친정을 표명한 것은 5월 25일, 즉 패전 다음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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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400 공지 시사 기준은 1992년 이후입니다 [4] 하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4.05.22 121 0
7 공지 위진 남북조 마이너 갤러리는 승격에 반대합니다. [6] 독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7.21 991 5
92128 일반 조조가 199년쯤에 눈 딱 감고 [2] ㅇㅇ(128.148) 05:01 14 0
92127 일반 원숭환은 죽을만은 했지 뭘 [4]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59 22 1
92126 일반 정씨왕국이 대만 전토 차지한거 아니였음? ㅇㅇ(58.238) 04:05 15 0
92125 일반 무핑 대체 이 말은 왜 한 거임? [1] 위진갤러(211.169) 03:50 46 0
92124 일반 중세 한반도의 정치가 그만큼 위태로웠다는 걸지도 위진갤러(220.65) 03:30 27 0
92123 일반 원숭환은 숭정제 혼자 의지로 뒤진게 아니라 [2] ㅇㅇ(126.145) 03:27 41 2
92122 일반 조선이 위보다 더 심한거 아닌가 [3] ㅇㅇ(223.39) 03:09 49 1
92121 일반 초한지 소설 진시황 첫 등장쯤에 쓸 그럴듯한 문구 생각남 [5] ㅇㅇ(147.47) 02:58 45 1
92120 일반 원숭환이 황제 심기 거스른 건 맞는데 [6] ㅇㅇ(27.115) 02:14 74 2
92119 일반 계유정난 원인은 근본적으로 문종의 단명인데 [5] ㅇㅇ(223.39) 02:00 67 1
92118 일반 근데 좆공 단가행 같은 시의 문학성은 ㅇㅇ(121.157) 01:23 46 1
92117 일반 커뮤니티 보면 세조는 존나 불쌍한거같다 [1] ㅇㅇ(59.5) 01:14 77 1
92116 일반 청류 아이돌 원본초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4 44 0
92115 일반 근데 제갈량 익주호족이랑 성도 먹을 수 있지않았냐? [2] 위진갤러(1.231) 05.24 78 0
92114 일반 조선반도가 후한 13주로 따지면 어느정도급의 입지임? [2] 위진갤러(119.192) 05.24 104 0
92113 일반 신삼국 쇼츠채널 라스트댄스 가는구나... 위진갤러(110.76) 05.24 49 2
92112 일반 언어학갤에서 주워온 반도일본어설 최신동향 ㅇㅇ(58.238) 05.24 69 0
92111 일반 당중종 <<<<< 걍 병신 아님? 위진갤러(219.241) 05.24 61 1
92110 일반 일본은 왜 쇠뇌를 안썼음? [3] 위진갤러(1.231) 05.24 109 0
92109 일반 조씨들이 기본적으로 다혈질이고 성깔 더러운 건 맞는데 ㅇㅇ(223.39) 05.24 44 0
92108 일반 문/무관 구분이 희미한 시대인데 ㅇㅇ(210.101) 05.24 50 3
92107 일반 삼국전투기에서 의외로 끝도 없이 빨아준 인물 [2] ㅇㅇ(124.59) 05.24 126 5
92106 일반 삼국사기 4세기 말갈놈들은 정체가 뭐지 LucidAri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4 54 0
92105 일반 삼국시기는 볶음밥 형식으론 식사를 별로 안하나 [5] ㅇㅇ(121.157) 05.24 106 1
92104 일반 닉과 주디 [2] 일이일사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4 57 1
92103 일반 조예 마누라 죽이는 건 얼척이 없어서 웃기는 ㅇㅇ(223.39) 05.24 45 1
92102 일반 예비군 가면 조교한테 반말하는 사람이 있긴함? [3] ㅇㅇ(14.5) 05.24 70 0
92101 일반 손권이 분할된 중국도 성장할수있다는 상징같음 [8] 위진갤러(223.39) 05.24 118 6
92100 일반 근데 베트남 애들 돼지고기 엄청 좋아함? [12] 에오스-아우로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4 129 2
92099 일반 중화사 4천년의 적폐 [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4 117 0
92098 일반 하후연도 관도때까지는 후방 병참관리였는데 에오스-아우로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4 55 0
92097 일반 "우리는... 예주 사람이니까..." [2] LucidAri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4 113 2
92096 일반 청류 내로남불 특 [6] 하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4 103 0
92095 일반 이제 조씨 혈통 완벽 이해됨 [2] ㅇㅇ(223.39) 05.24 7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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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92 일반 하후씨는 우 임금의 후손이라고 한다. [2] ㅁㄴㅇㄹ(125.138) 05.24 5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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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81 일반 삼탈워도 전장 천천히 보니까 그냥 아비규환이긴 하더라 [4] ㅇㅇ(121.157) 05.24 78 1
92080 일반 완체장군은 커리어가 진짜 애매하네 [8] ㅇㅇ(121.157) 05.24 110 0
92079 일반 이엄 파주 설치 건의는 갈상국 입장에서는 거절할 법 하지 [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24 7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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