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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테라 공성전 : 종말과 죽음] 3: iv 파편들

말카도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4.18 13: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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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v

파편들



그것은 종말이되 종말이 아니다. 죽음이되 죽음이 아니다. 테라의 황궁에 빚어진 최후의 요새는 이제 그 수명이 하루조차 남지 않았건만, 그 하루는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 선형적 시간은 사라지고, 워프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을 시간으로 대체된다. 소용돌이치는 불길의 분노는 영원히 격렬할 것이며, 황금 옥좌에서 죽어가는 그 자체가 불멸에 이른다.






도금의 길, 클라니움 구역, 팔라틴 고리의 부서진 페로크리트 폐기물 일대를 따라 반신의 시체가 널린 채다. 시체들은 황색과 적색, 백색과 금색으로 화려하게 세공된 전쟁의 갑주를 착용한 채다. 갑주 안에는 뼈와 고기, 빠르게 식어가는 피, 꿈과 의무의 종막, 자랑스러운 원칙의 끝이 담겨 있다. 시신 하나하나가 지켜진 맹세요, 순간의 끝이다. 기억하는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에, 누구도 말하지 못할 삶의 이야기를 담은 시신들이다. 유언도, 유언장도, 필멸의 선언도 없다. 그 값에서 그램 단위로 재어도 삼중수소를 천 배는 월등히 능가하는 프로제노이드 씨앗을 나르테시움과 부드러운 수술용 리덕터로 채취할 이조차 살아남지 못한다. 반신들은 홀로, 누구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채, 이미 위대한 삶을 가장 위대하게 만들 그 죽음이 목격되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너무도 많다.


이 끝없는 날이 또 무엇에 이르건 간에, 아스타르테스는 이제 종말을 향해 간다. 그들은 이제 최정예 타격대에 지나지 않으리라. 다시는 걸출한 다수로 세상을 걷지 못하리라.


그들의 군기는 발 아래 짓밟히고, 선혈에 물들고, 진흙으로 얼룩져 있다. 시신을 휘감듯 깃발이 드리워진다. 그들이 행진하며 자랑스레 내세웠던, 온 존재를 바쳐 믿었던 상징이 그들을 죽음의 순간에조차 감싼다.


적의 어두운 깃발은 여전히 굳게 세워져 있다. 거대하고 결코 깜빡이지 않을 눈빛이 수천의 깃발에서 뿜어지고, 그 미친 시선이 깃발을 들어 올린 이들이 저지른 파괴 위를 광기 속에서 지켜본다. 연기가 자욱한 황혼 속에서 붉고 어두운 반역자들의 군기가 펄럭이고, 대학살의 바람 속에서 박쥐 날개처럼 휘날린다. 끊임없이 노호하는 반역자들의 목소리 속에서 소름을 일으킨다.


이미 펄럭이는 군기에 더해 새로운 군기가 빚어진다. 불꽃으로 가득 찬 어둠 속에서, 작고 기형적인 불생자들이 쉿쉿대며 주진공로 배후에서 움직인다. 죽은 자와 거의 죽은 자의 가죽을 벗겨, 인간의 골격으로 빚어진 뼈대에 걸어 군기를 만든다. 눈부신 빛과 피의 웅덩이에 웅크리고 앉아 꽥꽥대며 단검과도 같은 손가락으로 거대한 눈의 상징, 가짜 신의 상징을 찔러댄다. 여덟 별의 상징이 새겨지고, 그들은 이름을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그 이름이 속삭여질 때마다 기대감 속에 몸서리를 친다. 그 이름은 어둠의 왕이다.






나이트 로드 군단의 카가슈(Khagashu)가 에이레니콘 관문(Eirenicon) 너머의 도살장을 걷는다. 또 다른 팔라틴 구역의 보루가 화염에, 갈기갈기 찢어내는 돌격 앞에 무릎을 꿇기 시작한다.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는 없다. 거짓 밤에 드리운 잿빛 연기는 너무도 어둡고, 거리는 아직 너무 멀다. 하지만 심장이 멎을 듯한 돌풍에 실려 날아오는 소음이 들린다. 마크로 포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빚어진 락크리트와 아다만티움이 거대한 송곳니와 탐욕스러운 발톱 앞에 굴복한다. 맛있는 소리가 난다.


카가슈는 의기양양한 자부심 속에 공작 같은 뽐내는 기쁨을 담아 야만인들, 아인종들, 그리고 썩어가는 서비터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전장의 피비린내 나는 오물들 사이로 펼쳐지라는 지시다. 썰물 때 해변에서 조개 껍질과 신기하게 생긴 조약돌을 줍는 아이들처럼, 그들은 두개골을 모은다.


카가슈와 그의 채집꾼들은 그림자 속에서, 축축한 공기에 불과할 중얼거림 속에서 지시를 받는다. 그리고 이는 완수되어야 할 임무다. 승천의 대관식을 위해, 엄격한 의식적 기준 아래 두개골의 산을 조심스럽게 쌓아 나가야 한다.


그리고 옥좌를 지어내야 한다. 카가슈는 아직 그 옥좌가 누구의 것일지 알지 못한다.






팔라틴 전선의 주요 요새 중 하나인 이레닉 망루(Irenic Barbican)의 널찍한 사면을 따라 기계들의 전쟁이 갑작스러운 분노로 확대된다. 레기오 그리포니쿠스의 말예들은 30분 동안 망루를 지키기 위한 격렬한 반격을 펼친다.


모든 규칙은 사라진 채다. 사거리를 따지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지경이다. 물이 꽉 찬 수로에서 돌진하고, 지원 기갑부대는 적의 다른 궤도 차량과 격돌한다. 거체끼리의 격돌이 이어지고, 주 무장은 거의 영거리에서 불을 뿜는다. 바실리스크 포격 플랫폼은 흡사 결투용 권총처럼 사용되고, 초근접한 채 서로 머리를 맞댄다.


구멍이 뚫린 원자로의 불이 꺼지고 임계 상태에 이르면, 광활한 보루의 가장자리를 따라 새로운 태양이 연이어 번쩍이다 사라지며 모든 것을 휩쓴다. 방사되는 열이 너무도 강렬해 진흙의 호수는 순식간에 별 모양으로 갈라진 건조한 해저로 화한다.


레기오 마그나의 치욕을 입은 워로드 타이탄 가르낙 오마파지아(Gharnak Omaphagia)는 이레닉 망루의 사면에서 포격에 맞아 전사한다. 거병의 상체를 날려버린 일격이 빚은 연료의 구름 속에서 순식간에 내용물이 쏟아진다. 새어 나온 동체 조각들과 함께 오마파지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타며, 흡사 이교도의 한여름 희생제물 꼴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 위를 악마 들린 워로드 타이탄 코르네스 고어워커(Khorness Gorewalker)가 불타는 기세로 짓밟는다. 그 발치에서 뒤따르던 워하운드 타이탄 세 기가 충성파 기계교단이 깔아 둔 거대한 락크리트 마름모 위로 나가떨어진다.


고어워커가 경사면에 쓰러진 인도맛 셀시오르(Indomat Celsior)의 시신 측면을 지나간다. 레기오 그리포니쿠스의 주력 자산이던 셀시오르는 불타오르는 중이었으며, 그 광대한 시신 위로 썩어가는 반역자들의 지상군이 진격한다. 고어워커는 전차들과 헤르미티카 가문(House Hermitika)의 나이트 아미거들을 장난감처럼 차고 지나간다. 다음 순간 고어워커는 제방 중간 즈음에서 워로드 타이탄 벨루스 쇼카트리스(Bellus Shockatrice)와 아르젠트 폴레미스테스(Argent Polemistes)의 연이어 날아드는 광선 포격에 맞아 멈춰 선다. 그 포격으로 고어워커는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구조가 찢겨지며 차체가 파열되고, 균열이 돋아났으며, 동력을 공급하는 비물질계의 에너지가 붕괴되면서 처음 건조될 당시 상정한 이상의 피해를 입는다. 고어워커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그 와중에 고어워커를 지원하던 병력들도 짓밟아진다. 하지만 그것도 폴레미스테스가 어깨의 사일로에서 막대한 양의 로켓을 쏘아내기 전까지다. 고어워커의 가슴과 어깨를 북 두들기듯 두들겨댄 로켓은 작은 폭발들로 얽힌 거대한 화환을 만들어 고어워커를 덮치고, 고어워커는 곧 쓰러지기에 이른다. 거대한 놈의 잔해가 경사면 아래로 200미터 가까이 미끄러지고, 강습전대의 전차들을 모조리 사면 너머 깊숙이 끌고 들어간다.


워몽거 타이탄 카스텔란 코르다(Castellan Corda)가 쇼카트리스, 그리고 폴레미스테스와 함께 전진하며 기념비에나 남을 법한 규모의 지원 포격을 퍼붓는다. 주포가 연이어 불을 뿜어내며 밀려드는 적의 기계들과 지상군들의 가장자리를 밀어낸다.


하지만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연기를 뚫고 망루를 향해 거대한 형상이 다가오고 있다. 흡사 레기오 마그나의 워하운드 타이탄이나 워로드 타이탄처럼 우뚝 솟은 인간과도 같은 형체이지만, 놈들은 기계가 아니다.


한 놈이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하늘을 날기 시작한다.






진타스 칸(Zhintas Khan)과 여덟 명의 화이트 스카 군단병이 보타티쿠스 정원 일대에서 루퍼칼의 사나운 아스타르테스들과 후퇴전을 벌이고 있다. 목숨을 파는 전투다. 진타스 칸은 이 표현을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 한 시간 전, 코투스 메피엘(Khotus Meffiel)이라는 블러드 엔젤 군단병으로부터 들은 표현이다. 진타스 칸과 메피엘은 크토니아 드레드노트 한 놈을 짧은 순간동안 야만적으로 난도질했다. 메피엘은 영원의 문이 닫히던 순간 밖에 남겨진 모든 충성스러운 전사들에게 남겨진 책임은 단 하나라고 했다. 자신의 목숨을 가장 비싼 가격에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죽음은 피할 수 없고, 그 전에 얼마나 목숨값으로 챙길 수 있을 것인가? 이 개념 덕분에, 감사할 이 없는 그들의 의무에 자부심과 열정이 더해졌다.


내 목숨은 얼마에 팔릴 것인가? 진타스 칸은 궁금해한다. 지금까지 그가 제 목숨 삯으로 챙긴 건 반역자 44명의 목숨이다. 그의 툴와르가 휘둘러지고, 선 오브 호루스 군단병 하나가 더 목을 잃는다. 이제 45명이다.


아직 부족하다. 한참 멀었다.






근친의 안뜰(Propinquity Court)은 팔라틴 가도(Via Palatine)에서 조금 떨어진 1평방킬로미터 너비의 열린 공원이다. 아틀라세스 저택(House of Atlases)과 알비 전망대(Albigen Belvedere), 데보토리움 문두스(Devotorium Mundus), 그리고 법학 대학(College of Jurists)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채다. 여섯 시간 동안 안뜰을 둘러싸고 다섯 번의 전투가 벌어졌고, 그때마다 시체와 잔해로 이루어진 새로운 지층이 생겨났다.


이곳에서 비질 시스터 베디아(Visil Sister Vedia)와 겁에 질린 민병대원들이 워드 베어러 군단을 섬기기로 다짐한 반역자 군세를 몰아붙인다. 놀라우리만큼 잔혹한 격전 끝에 데보토리움에 불길이 옮겨붙는다.


이곳에서 파이어 워든 아리’이(Ari’i)와 시길 마스터 마’울라(Ma’ula), 그리고 샐러맨더 군단의 서전트 헤마(Hema)는 데스 가드 군단의 연이은 세 차례의 공격을 막아낸다. 그리고 네 번째의 공격에서도 간신히 살아남는다. 카드무스 가문(House Cadmus)의 나이트 아미거가 지원해 준 덕분이다.


이곳에서 보루스 이카리가 지휘하는 선 오브 호루스 군단의 강습대가 회랑을 평평하게 만들 기세로 퍼부은 공격 속에 호트르 팔라딘 4개 부대가 학살당한다. 거의 의식에 가까운 처형이 자행된다.


이곳에서 레기오 쿠스토데스의 프리펙트 캡틴 아르자크(Arzach)와 그의 동행대원들이 시체를 먹이로 삼는 불생자들과 싸우고 놈들을 처치한다.


이곳에서 임페리얼 피스트 군단의 중대장 브라스타스(Brastas)는 월드 이터 군단의 파도를 막아선다. 탄약은 모두 소진했고, 검과 방패뿐이다. 결국 월드 이터 군단의 파도가 그들을 넘어선다.


근친의 안뜰만이 아니다. 성벽 밖에 남겨진 충성파 병력들, 곧 목숨을 팔아 싸우는 병사들이 적의 진격을 막아서려 하는 팔라틴의 수많은 거리와 마당, 정원, 궁정에서 전략적 의미가 없는, 모순된 다수의 전장이 펼쳐지고 있다. 충성스러운 아스타르테스 전사들의 시신처럼, 결코 기억되지 않을 행동이고 그 의미도 주목되지 않으리라. 전쟁의 기억은 짧다.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였다면 기록 속에서 기념되었을 놀라운 업적은 다음 폭력의 물결이 휩쓸고 들어오기도 전에 종결을 맞고 잊혀지며, 용감한 자와 패배한 자의 뼈는 한 곳에 뒤엉켜 짓밟힌다. 테라 공성전의 끝나지 않을 마지막 몇 시간, 수천의 책을 채우고, 테라 군사사의 영예로운 기록 보관소를 가득 메울 행위와 업적들이 남지만, 혼돈의 안개와 연기 속에서 잊히고 지워지리라.






뵈드바르 브야르키(Bödvar Bjarki)가 다시 일어선다.


눈에는 피가 흐르고, 태반이 그 자신의 피다. 머리를 깊게 찢어 놓은 마지막 충격 때문에 두피가 찢겨져 열린 채다.


델픽 흉곽 끄트머리의 나푸스 교차로(Nafus Crossing)에서 충성파 부대는 세 시간째 적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지만, 시간은 한때의 옛 정의를 잃어버린 것 같다. 데스 가드 군단이 전진할 때마다 충성파 부대의 병력은 줄어들고 있다. 테라에 남은 소수의 제6군단 스페이스 울프의 전사인 시체를 쌓는 이(Heaper-Of-Corpes) 비야르키는 그 자신이 나푸스 교차로를 지키는 마지막 전사들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검을 쥔 채,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그는 마지막 전사들의 일부가 아니다. 그가 마지막 전사다.


전쟁의 나팔이 다시 울부짖는다. 멜타의 날카로운 폭음이 들리고, 돌이 익어가는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 그는 다리 북쪽 경계에 쌓인 시체 더미 위에서 빌어먹을 놈들과 세 차례나 싸웠다. 세 차례나, 시신의 정점에 올라선 채 싸운 것이다.


부러진 뼈와 찢겨진 살점의 능선을 따라 다시 올라설 때마다 그와 함께 할 전사들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비야르키의 실타래는 아직 끊기지 않았고, 노래할 스캴드는 없을지언정 그의 사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


비야르키는 침을 뱉으며 펜리스의 영을 일깨운다. 흑백의 숲을 누비는, 늑대가 아닌 어둠과 침묵의 존재를. 그는 다시 시체 위를 오르기 시작한다.


네 번째 전투까지 이어질 것이다. 아니, 다섯 번. 몇 번의 전투를 치르게 되건, 혹은 얼마나 되는 시간이 그에게 남았건 간에. 테라에는 이제 늑대가 거의 없지만, 러스의 이름으로, 그는 단 한 명의 라우트가 될 것이다. 다시 일어선다.






판콘 제5연대의 전방 관측병이자 박격포 분대의 사격 관측병인 란트리 잔(Lantry Zhan) 이레닉 가도(Via Irenic) 서쪽의 잔해로 된 능성을 오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가 속한 여단은 근처에 반역자 아스타르테스들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 수도 위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잔이 괜찮은 시야를 확보하는 데에만 15분 가까이 걸렸다. 능선 정상에서 조준경을 펼친 끝에, 마침내 적의 모습이 보인다. 저것들은 아스타르테스가 아니다. 끔찍한 불생자들이다. 떡 벌어진 어깨의 괴물들이 마크로 탄이 빚어낸 크레이터의 호수에서 웅크리고 뭔가를 가지고 노는 듯하다. 잔은 초점을 조절한다. 저 잔혹한 괴물들이 뭘 하고 있는 걸까? 대체 무엇을-


잔은 놈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고 조준경을 내린다. 차라리 보지 말 것을.






델픽 방어선에 합류할 수 있다는 희미한 희망 속에 메톰 행진로(Metome Processional)을 따라 나아가던 마샬 아가테는 마침내 이름에 얽힌 수수께끼에 대한, 혹은 왜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답을 얻는다.


언제든 발포할 채비를 갖춘 강철 바퀴를 두른 야포를 끌고서 3천여 명의 누더기 꼴을 한 보병들이 메톰 장벽(Metome Walls)을 엄폐물 삼아 전진한다. 머리 위로 적이 쏘아댄 포탄이 날아들어 북쪽으로 3km 떨어진 충성파 진지에 떨어진다. 지금 그들은 흡사 시궁창에 갇힌 쥐 꼴이다. 3천에 이르는, 이름이 반쪽이 된 쥐새끼들이다.


전투가 소강 상태에 이르렀을 때 아가테는 에르미타주 관문(Hermitage Gate)에서 군대를 둘로 나눴다. 호르트 중대장 마르티뇌(Martineaux) 휘하에 2천을 맡겨 티그리스 회랑(Tigris Arcades)를 수비하도록 보냈고, 나머지 6천은 사이어-밀리턴트 스칼래터(Skalter) 휘하에 맡겨 크라토스 초중전차와 함께 도금의 길 방면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 방향에서 치솟는 불길은 그것이 의미없는 결정이었음을 이제야 보여준다. 이제 남은 것은 403연대와 베스페리 연대 휘하였던 1개 대대뿐이다.


파이크스가 거칠게 명령을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병사들을 밀어붙이며 야포들의 채비를 점검하는 거친 소리. 아직 교전은 펼쳐지고 있다. 방벽을 뚫어내려 시도하는 다족보행 차량(Stegatank)들과 근접 교전은 물론이고, 학살에 눈이 먼 광기의 악취가 진동하는, 괴저로 물든 반역자들과의 처절한 근접전이 펼쳐지는 중이다.


아가테는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지형에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쓴다. 광범위한 피해와 격변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기괴한 변화를 이르는 것이다. 석벽은 축축한 피부로 덮인 것 같고, 대지는 얼어붙은 고기처럼 서서히 녹아내린다. 건물들은 괴저 질환에 걸린 듯 썩어들어간다. 부패의 악취가 풍긴다. 행진로 일부에서는 부드러운 호흡의 메아리를 담은 한숨이 들려오는 것 같고, 끈적한 바람 속에서 수상한 떨림이 느껴진다. 아가테는 무시하려 애쓴다.


어둠의 왕, 고려조차 하기 싫어지는 이름이다. 벽에 저렇게 새겨져 있다는 것은 뭔가 의미가 있다는 뜻이겠지만, 그리 알고 싶지는 않다. 상상력을 자극할 뿐이니까. 이 지옥에 있으면서도, 더 나쁜 무언가가 있을 수 있음을 두려워하다니. 정신이 파괴적인 추측의 영역에서는 비할 수 없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403연대원들의 이름은 추측하는 데 있어 보다 덜 괴로운 요소라 할 수 있겠다. 403연대원 대부분은 미카일 대위처럼 성을 뺀 이름만 사용하거나, 별명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그저 일련번호만. 어쩌면-


야포 한 문이 물에 잠긴 채다.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밧줄을 가져와 야포를 빨아들이는 진창에서 끄집어낸다.


“자네들은 이름 전체를 쓰지 않지.”


아가테가 근처에 서 있던 미카일에게 말을 건넨다. 미카일은 그게 질문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기에 무어라 답할지 찾지 못한 채 아가테를 힐끔 본다.


“익명 아래 남고 싶은 건가? 아니면 수치심 때문에?”


미카일은 대답흘 꺼린다.


“복무하라고 명령을 받은 게 아니지? 신경 쓰지 말게. 대답도 필요 없어. 뭐가 됐건 인정할 필요 없네. 난 신경 안 써. 하지만 자네와 자네 부하들, 복무 명령을 받은 게 아니잖나. 갤로우힐 수용소에 동원령이 떨어진 적은 없으니까.”

“시간이 없었습니다.”


아주 조용한 대답이다.


“누구도 동원령을 전달한 바는 없었겠지.”


아가테가 말한다.


“그냥 스스로 동원 채비를 갖춘 거지. 이름을 고르고, 시체로부터 총을 찾고.”

“무언가, 해야 했습니다.”


미카일의 대답이다. 아가테는 이해한다.


“용감한 선택이었네.”

“용감한 게 아닙니다.”


미카일이 대답한다.


“그저 도망칠 곳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처음 분명한 교전을 겪었을 때, 우리가 뭔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진정성을 가지고 싸우는 것뿐임을 깨달았죠.”

“아니, 용감한 선택이 맞네.”


아가테가 말한다.


“그리고 자네들이 옳은 편에 서 있다면, 자네들이 어떤 사람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이름이 없는 건…”

“그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가테는 장벽 너머의 얼룩진 지평선, 모호하게나마 적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저들은 우리 이름을 아는 것 같더군.”


아가테가 말한다.


“그런 것 같더라고. 혹은 배우고 있는 중이거나. 불생자놈들. 놈들은 우리를 부르고 속삭이네. 마치 그러는 게 놈들에게 힘을 주기라도 하는 마냥 말이지. 나는 그래서 놈들의 힘을 숨기려고 하는 이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게 기쁘지. 어쩌면 그 덕에 조금 더 오래 살 수도 있고. 저놈들은 이미 몇 주 전부터 내 이름을 불러댔거든.”


미카일이 한숨을 내쉰다.


“아마 이 일 때문에 총살을 당하겠죠. 이게 끝나면 도망자로 몰려서 총살당하는 거, 그게 저희 운명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고. 하지만 오늘 이후에 뭐가 우릴 기다리는지 어찌 알겠나?”


고함 소리와 총성이 들린다. 약탈자들이 300미터 앞의 협곡을 따라 들이치고 있다. 이미 전투는 처절하리만큼 근접해 있다. 바늘 이빨과 튀어나온 귀, 거미의 눈을 가진 박쥐같은 얼굴의 적들이 밀려온다. 놈들이 무기로 쓰는, 참호를 팔 때나 쓰이는 도구가 거친 소리를 낸다.


놈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장교들이 화력반을 부르는 일련번호의 외침이 들려온다.


이름은 없다. 오직 의무가 있을 뿐.






“응답 바람. 여기 헤게몬 사령부. 아나바시스, 응답 및 확인 바람.”


복스 통제석에 앉은 전쟁 의회의 하급자가 몇 분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너무 긴 시간이다. 처리해야 할 다른 보고와 우선 순위의 업무들이 빠르게 쌓이고 있음에도 산드린 이카로는 그 하급자와 그의 인내심 가득한 노력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나바시스의 상실은 말 그대로 그녀가 이해하는 모든 세상의 구조와 목적의 상실이니까.


무엇도 진짜처럼 보이지 않는다. 진짜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밥 요래를 떠난 이후 모든 것이 비현실처럼 느껴진다. 탈출 당시의 충격으로 인한 부분적 기억상실이라고 애써 생각하지만, 그 느낌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기묘한 꿈결처럼 느껴질 뿐이다.


밥 요새에 대한 강습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어떻게 대피했는지, 어떻게 최후의 요새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불타는 거리와 총성에 대한 짤막한 기억만 맴돌 뿐이다. 무엇보다, 어떻게 생텀에 들어온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영원의 문이 닫히기 전, 어떻게 들어간 것일까? 문을 통과한 기억조차 없다. 밥 요새와 전장의 광란, 그리고 그 이후 이곳 로툰다에 이른 것이다. 시간과 공간, 방향과 상대적 위치까지, 모든 것이 압축되고 뒤틀린 기억뿐이다.


이 모든 것이 그저 꿈은 아닐지 두려워진다. 자신이 죽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밥 요새에서 죽었을 수도, 아니면 저 바깥의 거리에서 죽었을 수도. 그 이후의 모든 것은 그저 환상이고, 죽음의 단말마 앞에서 펼쳐진 절망적인 상상일지도. 삶의 마지막 찰나에, 자신이 소원하고 동경하고 갈망한 모든 것이 꿈으로 펼처진 것일지도.


차라리 그게 사실이기를 바란다. 그랜드 보레알리스의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이기를, 그저 차갑게 식어가는 시냅스의 마지막 불꽃이길 바란다. 이카로는 그러기를 바란다. 이 상황이 현실인 것보다, 삶에 주어진 최후의 몇 밀리초 동안 갇히는 것이 낫다. 이 상황이 현실인 것보다, 죽음을 맞는 게 낫다.


내 죽음 안에 갇히는 게 훨씬 낫지, 이카로가 생각한다. 폐하께서 그분의 죽음에 갇히느니, 그게 훨씬 낫다.





아나바시스 강습 이후 황궁 일대에서 벌어지는 교전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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