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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제국은 어떻게 멸망했을까?-3 (토탈 워 마이너 갤러리)

토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3.11 20:3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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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를 위해, 행차 과정에서도 안테미우스를 위한 안배를 잊지 않았다.


안테미우스를 해로로 파견하지 않고 육로로 파견해 달마티아를 지나가게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달마티아는 리키메르에 반대해 자립한 일리리쿰 장관 마르켈리누스의 영지였다.


마르켈리누스는 동로마 황제 레오가 선임한 안테미우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 레오가 준 약간의 군대와 자신이 이끌고 있던 군대를 합쳐 이탈리아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탈리아에서 안테미우스는 거의 반대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리키메르 역시 안테미우스를 인정했다.


하기야 인정하는 수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던대로 레오가 서로마 황제를 지명했으니.


동로마 황제 레오는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쏟아부었는데,


이는 이전의 서로마 황제들이, 심지어 마요리아누스조차도 동로마 황제에게 전혀 받아보지 못한 지원이었다.


이 지원은 동로마 황제 레오의 딸이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의 아들 마르키아누스에게 시집가는 것으로 대표된다.


뿐만 아니라 안테미우스 역시 딸인 알리피아를 리키메르와 혼인시켜 리키메르와의 우호 역시 다져놓았다.


처음에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리키메르 역시 안테미우스를 반겼다.


서로마 제국에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마르켈리누스를 제외하면 기반이 전혀 없어 꼭두각시로 적당하고,


동로마 황제의 이러한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제위 지망생은 지금까지 없었으며


또한 딸을 자기한테 준 것을 통해 자기 자신도 동로마 황제의 인척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키메르의 이 계산은 또 한 번 빗나가게 된다.




내내 말하지만 리키메르는 자신이 황제에 오를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황제로 앉혀놓고 자신은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안테미우스는 마요리아누스와 비슷한 성향의, 책임감 있고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


안테미우스는 황제로서 실권을 행사하고자 했다. 즉위 이후 리키메르와 상관 없이 자기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실제로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 그 자신의 능력과 동로마 황제 레오의 강력한 지원,


그리고 서로마 제국 각지의 군벌이 단합하여 안테미우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안테미우스에게 굴복해야 했다.


아마 마르켈리누스 뿐 아니라 갈리아 장관(자칭) 시아그리우스 역시 안테미우스에 대해 지지를 밝혔으리라 생각된다.


이런 상황은 서로마 제국의 실권에 예나제나 집착하던 리키메르에게는 참기 힘든 것이었다.


아무튼, 안테미우스는 원체 동로마 제국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 대중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편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대중적으로 인기 있던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리키메르였다)


모두가 안테미우스를 황제로 환영했으므로, 그리고 동로마 황제의 지원을 받기 위해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 치세 이후로 진짜로 신하 노릇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안테미우스의 이런 움직임은 레오와 진작 협의가 되어 있었던 건데


안테미우스는 마르켈리누스에게 파트리키우스 겸 제국군 총사령관 칭호를 수여하고(리키메르와 공동)


이를 레오가 승인을 한 일로써 안테미우스와 리키메르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한 파탄을 고했다.




안테미우스가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반달 왕국에 대한 응징 원정이었다.


마르켈리누스가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의 명을 받고 시칠리아에서 깽판을 놓던 반달족을 공격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반달족을 공격하긴 어려웠고, 마르켈리누스와 안테미우스는 합의 끝에 이 원정을 중단했다.


사실 이 원정은 다음 해 있을 동서 로마 제국의 합동 작전의 전초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 합동 작전의 시작으로서 우선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가 우선적으로 탈환되었다.


468년이 되자 동로마 황제 레오와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가 공동으로 주관한 아프리카 원정이 실체를 드러냈다.


원정군 총사령관은 동로마 황제 레오의 처남인 바실리스쿠스였는데 그도 몇몇 전공이 있는 장군이었다.


그리고 이 원정군에는 당대 동로마 제국 최고의 장군이었던 에데사의 플라비우스 헤라클리우스 장군도 있었다.


이 헤라클리우스가 훨씬 후대에 등장하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선조일 수도 있는데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일리리쿰 장관 마르켈리누스와 제국군 총사령관 리키메르가 참가했다.


이렇게 참가자를 보면 동서 로마 제국이 이 원정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마 가이세리크가 긴 인생 동안 넘어야 했던 거의 마지막 난관이자 거의 최악의 난관이었을 것이다.


이 원정은 가이세리크를 제거하여 서로마 제국의 숨통을 트여줌과 동시에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의 정치적 입지와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보해줄 것이었고,


레오 역시 그 때는 대놓고 황제와 대립하던 장군 아스파르를 제거하기 위한 전공을 필요로 했다.


이렇게 기획된 원정으로 인해 동서 로마 제국군은 먼저 시칠리아에 집결하여 아프리카 침공 작전을 수립했다.


오늘날에는 봉 곶(Cap Bon)이라 불리는 카르타고 동쪽에 삐쭉 튀어나온 곶이 있는데


그 지역을 로마 당대에는 메르쿠리우스의 곶(Promontorium Mercurii)이라 불렀다.




총사령관 바실리스쿠스는 가장 거대한 본대를 이끌고 그 곶 북쪽에 상륙했고,


헤라클리우스는 소규모 분대를 이끌고 동쪽에 상륙했다.


서로마 제국군의 본대를 이끌던 마르켈리누스는 트리폴리타니아로 상륙해 그 곳에서부터 북상을 개시했다.


가이세리크는 일생일대의 절박한 위기에 몰렸으나 오히려 침착했다.


우선 가이세리크는 바실리스쿠스에게 항복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기왕 가는 것 편하게 가고 싶었던 바실리스쿠스가 이를 승낙해버렸다.


가이세리크는 5일 간의 휴전 기간을 갖자고 제의해놓고, 몰래 화공선을 준비해 바실리스쿠스에게 보냈다.


이 화공으로 인해 바실리스쿠스는 함대의 절반 이상을 날려먹고,


바로 뒤이은 반달 왕국군의 기습으로 간단히 격퇴되어 본인의 목숨만 간신히 건진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바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적은 병력만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반달 왕국군의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역시 헤라클리우스마저 철수를 결심하게 된다.


마르켈리누스도 승승장구했으나, 바실리스쿠스를 격파하고 기세가 오른 반달 왕국군와의 일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시칠리아로 우선 퇴각을 했는데, 이 시칠리아에서 로마군 탈영병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 메르쿠리우스의 곶 전투는 밝을 것만 같았던 안테미우스의 치세에 벌써 어두운 빛을 드리운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리키메르가 이 때 이탈리아에서 후방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람들은 그가 내심으로 이 해전이 패하기를 바랐다고 생각했다. 아마 리키메르로서는 그랬을 것이다.




이 참담한 결과에 동로마 황제 레오는 진노했다.


단순히 이름에 먹칠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거국적인 원정은 서로마 제국이 전비를 좀 대긴 했지만


레오 황제 본인이 재산을 털기도 했고 거진 대부분 동로마 제국의 재정이 투입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원정은 세심하게 준비되었고, 실패할 확률도 대체로 적은 것으로 평가된 원정이었다.


그는 이 사달의 가장 큰 원흉인 바실리스쿠스를 잡아서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황후인 아일리아 베리나가 친형제인 바실리스쿠스를 위해 날마다 울면서 빌었고


이어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황제는 그를 멀리 유배 보내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 짓는다.


그리고 이 결과는 동시에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에게는 절망을 가져다 주었다.


우선 안테미우스와 서로마 제국의 충신이었던 마르켈리누스가 죽었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 내 안테미우스의 군사적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마르켈리누스의 세력은 앞서 마요리아누스의 동료였던 네포티아누스의 아들 율리우스 네포스가 계승했다.


네포티아누스는 마르켈리누스의 여동생과 결혼했으므로 마르켈리누스의 조카가 되는 인물이다.


이 인물도 나중에는 서로마 황제가 되는 인물인데 다행히도 삼촌과는 달리 정통파 교인이었다.


더 큰 문제는 동로마 황제 레오가 단독으로 가이세리크와 강화를 맺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 레오가 안테미우스를 지원할 수 있는 방향이 크게 제한되었다.




하지만 안테미우스의 제위가 바로 위험해진 것은 아니었다.


일단 갈리아 장관 시아그리우스, 일리리아 장관 율리우스 네포스가 안테미우스를 굳건히 지지했다.


이들의 힘을 다시 한 번 빌려, 안테미우스는 다시 한 번 독자적으로 갈리아 정벌을 시도했다.


여전히 부르군트 왕국은 리키메르의 영향 하에 서로마 제국의 동맹이었고,


시아그리우스와 리오타무스 이 두 사람과 연계하여 갈리아를 통해 제위를 확고히 하고 싶었다.


리키메르는 여전히 동로마 제국의 눈치를 보면서 형식적으로는 안테미우스에게 복종했다.


안테미우스는 다시 한 번 병력을 모아 갈리아로 보냈는데,


그 사이 힘을 기른 서고트 족의 국왕 에우리크에게 패배한다.


서고트 족의 에우리크는 정식 서고트 왕국의 초대 국왕이라 말할 수 있는 인물로,


이 승리 이후 안테미우스가 직접 아들 안테미올루스를 파견해온 것에도 승리를 거두고 안테미올루스를 패사시켰다.


이 이후 서고트 족은 공공연히 서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된 서고트 왕국을 칭하게 된다.


이렇게 외정이 실패하자 안테미우스가 안고 있던 내부 문제가 바로 터지게 되었다.




애초에 서로마 제국의 대중과 원로원은 동로마 황제가 내부 정세에 상관 없이


일방적으로 파견한 안테미우스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군벌들이 안테미우스를 강력하게 지지해서 일단 그 통치에는 수긍했는데


470년이 되자 이 내부 갈등이 서서히 불거져 나오게 된다.


리키메르는 그 때까지 의외로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내치에서 그의 영향력이 제한적으로나마 인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테미우스가 470년 리키메르 파였던 총리(Magister Officiorum) 로마누스를 처형하는 일이 발생한다.


로마누스는 부패한 관리였는데 리키메르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덕택에 고위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테미우스는 제국 개혁의 일환으로 로마누스를 체포해 부패 및 뇌물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형이 안테미우스의 명령에 의해 집행되자 마침내 리키메르는 황제가 현실적인 위협이 되었음을 감지하고


안테미우스에 대해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리키메르는 반달 왕국과 전쟁을 한다는 명분으로 6천 명의 병사를 모았는데, 그러고서는 북쪽으로 진군했다.


북이탈리아는 당시 리키메르의 본거지였기 때문이었다.


내전의 기운이 감돌자, 티키눔(오늘날의 파비아)의 주교였던 에피파니우스가 나서서 두 사람 사이를 중재했다.


안테미우스도 아예 힘이 없는 건 아니라 리키메르와의 전쟁에 돌입할 채비를 했는데,


에피파니우스가 발이 닳도록 뛰어서 황제와 제국군 총사령관 사이에 1년의 평화 조약을 체결시켰다.


사실 황제와 신하가 외국 군주 마냥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것 자체가 안테미우스의 운이 다했다는 소리지만...




그리하여 1년 간의 평화 조약이 만료된 471년에도 평화는 유지되는 것 같더니,


472년이 되자마자 안테미우스와 리키메르는 내전을 개시했다.


이 사이에 힘의 균형은 더욱 기울어서, 리키메르는 더 많은 지지자를 확보한 가운데


안테미우스는 더욱 고립된 상태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에피파니우스가 평화 조약을 연장하자고 호소해도 이번만큼은 거절당하기도 했다.


이제 내전은 막을 수 없었다. 리키메르의 지휘 하에 로마를 지키고 있던 황제군은 포위되었다.


레오는 여전히 안테미우스를 지지한다 표명했고, 이전의 올리브리우스를 평화 사절로 파견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올리브리우스의 진짜 목적은 평화 조약 협상이 아니라


이제는 레오의 신임을 완전히 잃은 리키메르를 암살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올리브리우스의 이 계획을 첩자를 통해 리키메르가 알게 되었고


리키메르는 올리브리우스와 만난 그 자리에서 바로 올리브리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선포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신임을 완전히 거둔 레오를 멕이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고,


리키메르가 마침내 새로운 동맹자로서 오랜 적이자 원수였던 가이세리크를 택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안테미우스의 저항도 소용 없이 로마는 함락당했고


안테미우스는 성 베드로 교회에 숨어 있다가 거지로 변장하고 도망쳤으나


이를 알아본 리키메르 측 병사에게 붙잡혀 리키메르에게 끌려갔고,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를 처형했다.


안테미우스의 아들인 마르키아누스와 레오의 딸 레온티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때 리키메르 측에 한 명의 지휘관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이 오도아케르였다.


오도아케르는 스키리 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스키리 족이 멸족당하자


몸만 겨우 빠져나와 서로마 제국군에서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아마 이 시기의 오도아케르는 리키메르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된다.




리키메르가 새로 옹립한 올리브리우스라는 사람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플라키디아의 남편이었다.


즉, 며느리의 동생의 남편으로 이렇게 일종의 사돈이 되는 관계였다. 가까운 인척이긴 했다.


올리브리우스는 아니키우스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굉장히 유서 깊은 로마 귀족이었다.


아니키우스 가문은 기원전 4세기, 로마가 공화정이었을 시절,


아니 아직 이탈리아 반도에서 빌빌거리고 있을 시절에 처음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가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평민이었는데 이후 로마 공화정의 정복 전쟁을 통해 귀족이 된다.


즉, 그 기원은 그라쿠스 형제 같은 신참 귀족(Homo Novus)이었던 것이다.


이 아니키우스 가문은 제정이 되자 더욱 전성기를 구가하며 지냈다.


당시 로마 귀족들은 대체로 로마에 머물긴 했으나 노바 로마...


즉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꽤 많은 수가 이주했거나 적어도 오가면서 지낸 것 같다.


올리브리우스 역시 주로 로마나 라벤나에서 지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 때도 많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저택도 가지고 있었다. 이 저택도 매우 으리으리한 것으로 이름 높았다.


우리는 서로마와 동로마를 구분하지만 당시에는 서로마나 동로마 같은 관념 자체가 없었고


똑같은 로마 제국이 분할 통치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나라에 동등한 위치를 가진 수도가 두 개고 오가면서 지냈다 생각하면 되겠다.


물론 이건 아니키우스 가문이 유서 깊고 굉장히 어마어마한 부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동로마 황제 레오는 올리브리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곧바로 새로운 서로마 황제 후보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마침 레오가 471년에 아스파르를 제거한 참이라,


이제 서로마 제국의 내전에 개입하는 데에 걸릴 것도 없었다.


리키메르는 올리브리우스를 옹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사망했다.


죽으면서 다량의 출혈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독살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갑작스러운 질병에 걸린 것일 수도 있다.


안테미우스가 피살당한 게 472년 7월 11일이었고 리키메르가 사망한 것이 8월 18일이었으니


실제로 거의 바로 죽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굉장히 길었는데, 리키메르의 상황이 아에티우스만큼 간단하지 않아서 그렇다.


리키메르가 자신의 모델로 아에티우스를 생각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는 죽을 때까지 독재 권력을 휘둘렀는데 리키메르는 그러지 못했다.


글을 읽으면 알겠지만 리키메르에게는 처음부터 절대 권력이 없었다.


그저 서로마 제국의 유력자 중 가장 강력한 자 정도의 위치가 리키메르의 정확한 위치였다.


리키메르의 끊임없는 정치적 투쟁은 아에티우스와 같은 절대 권력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나


사실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뭐 그리고 이게 그다지 이상할 건 아닌 게


아에티우스는 여느 장군이 감히 범접하기 힘든 전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리키메르 역시 장군으로서는 무척이나 유능하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특히 456년의 그는 영웅이었다.


그러나 리키메르는 그 능력을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을 위해 주로 내전에 활용했다.


아에티우스는 일단 내전이 정리되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굳건하게 지키면서 자신의 권위의 원천으로 삼았는데


(물론 발렌티니아누스가 무능해서 아에티우스 말고는 제국을 지킬 사람이 없다는 것도 중요했지만)


리키메르는 황제를 너무 자주 갈아치웠다. 이는 그가 지닌 지위가 불안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키메르는 유능한 황제가 등장해도 자신의 단기적인 야망 때문에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의 자생력을 스스로 갉아먹은 서로마 제국 멸망의 가장 큰 원흉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키메르는 서로마 제국을 약화시킬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마를 지키려 했다.


단지 자기 자신이 온전히 서로마 제국을 지탱해야 한다는 그 생각이 바로 문제였던 것이다.




리키메르에게는 아에티우스만큼의 전공까진 없었고,


또 그의 시대에는 너무 유능한 경쟁자가 많았던 것이 불운이었다.


아에티우스는 훈족이라는 거대한 적에 맞서 내부를 결집시킬 명분이라도 있었는데


리키메르에게는 그런 명분조차도 없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이 승인한 황제들


아비투스, 마요리아누스, 그리고 안테미우스와 적대한 것을 보면 정말 답이 없을 정도이다.


이 세 명은 철저하게 리키메르의 꼭두각시였던 리비우스 세베루스와는 달리 유능한 황제들이었다.


물론, 아에티우스 역시 필요하다면 서로마 황제들과 적대하긴 했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는 선을 지켰다.


이 때문에 동로마 제국에서도 아에티우스에 대한 지지는 한결같았으며,


아에티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동로마 제국에서도 안타깝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던 것이 리키메르가 죽으니 서로마의 대중과 귀족들은 리키메르의 죽음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지만


동로마 황제 레오는 리키메르가 죽자 골칫거리가 하나 사라졌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 대단원만 남았다.


서로마 제국은 리키메르와 함께 또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다.


안테미우스의 죽음으로 인해 서로마 제국은 이제 나르보넨시스를 제외한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사실상 상실했고


이탈리아, 일리리아(율리우스 네포스), 그리고 월경지로 갈리아 북부(시아그리우스)와 북아프리카 일부만 영유했다.


하지만 웃기게도, 서로마 제국은 이렇다고 해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멸망할 만한 나라까지는 아니었다.


이후에 보겠지만, 나는 리키메르의 행동에 대해 그 목표가 무엇이었고


그를 위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나름 합리적인 설명을 붙여보았다.


어쨌거나 리키메르가 서로마 제국 자체에는 충성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단지 황제에 충성을 안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질 상황은 더 이해가 안 되는 것들 투성이다.


마지막 글에서는 472년부터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다룰 것이다.


이번 글이 굉장히 길다는 것은 나도 알지만, 대신 마지막 글은 이렇게까지 길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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