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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단편] 자판기

간티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8.01.22 22:56:10
조회 109 추천 0 댓글 6

2003년도 학교 문학상 올렸던 글, 최대한 가볍게 읽히게 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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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보는 자판기가 들어섰다.

 

이 붉은 색의 자판기는 엉뚱하게도 우리 집 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설치가 되었기 때문에,
함부로 문을 열었다가는

"쾅", "밤 중에 어떤 미친 노옴이야!". "아저씨 저기 누가 발로 차고 도망갔어요."


할 게 뻔했다.


코카콜라,펩시콜라,콤비콜라,다이어트콜라 어라? 815는 없네.

"정말 없네." 뒤따라 나오던 동생이 말했다.

 

음료수 자판기가 아니라 콜라 자판기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물론, 그런 말이 존재한다면.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제조사도 없고, 관리자도 안써있고, 맙소사, 가격표도 안 적혀 있었다.
이건 마치,

"아빠가 쓰는 회사 장부 같네." 라고 회계사인 동생이 나오며 말했다.

아니, 난 중국산 게 생각을 한 건데.


누가 설치한거야 이건.
"저녁까진 없었는데,"
동생은 남 이야기를 하듯이 태평하다.
사실, 남 이야기가 맞긴 하지만,

맘에 안드는 데.
"어때, 심심할 때마다 콜라 빼먹고 좋지. 종류별로, 815 빼고."


코카콜라에 그려진 게임 캐릭터가 예쁘게 웃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동전을 몇 개 넣어봤다.

100원, 200원. 아 귀찮다. 500원짜리 줘봐.
"없어. "

300원, 400원, 500원, 600원, 700원

아니, 잠깐. 이거 하나에 얼마야?
800원 째를 넣으려다가 어이가 없어서 손을 멈추었다.
700원을 넣었는데도 버튼에 불이 들어오질 않았다.

"안 넣어? 700원 넣었는 데 그만 넣게?"
에이씨. 알았어.

800원 900원 1000원 1100원

1000원 단위가 넘어가버리자 더 이상은 동생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기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서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동생을 바라보며 말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애는 아름답다. 태어난 지 27년 만에 처음 느껴보는 감동이었다.


"이거 혹시 단체 음객 전용 아닐까?"
그건 뭐냐.
"왜 유원지 가면 그거 있잖아. 단체 고객 20인 이상이면 할인해 주는 거."
자판기에 그런게 있어?
"지금와서 이 자판기가 보통일 거라고 생각해?"
아니.

오기가 생겼다.


동생은 그 길로 동전을 바꾸러 갔다.

그래서 일단 집 문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동생을 기다렸다.

편의점이 집에서 상당히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동생이 늦게 올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해서 자판기 여기저기를 뜯어보았다.
새 자판기라서 그런 지, 여기저기 광도 나고, 옆 면조차도 어쩐지 자연 발광을 하는 것 같았다.


툭툭.

누가와서 내 등을 툭툭 쳤다.


네?.
"비켜봐요."


키가 크고 페르시아 고양이처럼 야하게 생긴 여자가, 나를 밀치더니 자판기 아랫부분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것과 동시에 자판기가 열렸다.
이 녀석 상당히 속물적인 걸.

아가씨가 설치했어요?

"아니오. 난 그냥 중개업자일 뿐이에요."
아, 네.


자판기 안은 무슨 해삼물 냉동고 같이, 모든 것이 얼어있어서. 중국산 게나 개라도 들어있을 것
같았다. 이런 것 안에 있던 콜라를 팔아도 좋은 걸까?

여자는 안의 내용물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돈통에서 돈을 꺼내었다.


저기 혹시요. 이거 하나에 얼마씩 해요?
"난 중개업자라니까요."
그럼 이거 누가 설치 한거죠?
"난 중개업자일 뿐이라니까요."


여자는 개한테 꼬리를 물린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노려본 후 돈 통을 가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동생이 땀을 게거품을 물듯이 흘리며 동전을 한 봉지 정도 바꿔왔기 때문에,
다시 동전을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분은 절벽 끝에서 재를 뿌리는 기분이었다.

아까 어디까지 넣었지?

"글쎄. 이제와서 그게 관계가 있을까?"
하긴.

하긴 그렇구나. 그랬구나. 라고 생각했다.


넣고, 넣고 또 넣고, 또 넣고.

새로 이 만원 정도 넣었을 때였다.

"꽉 찼음"
이라는 글씨가 패널에 떴다.


뭐야 이거.


동전 없음도 판매금지도 아니고, 꽉 찼음?
"이거 자선냄비야?"


안녕하세요. 오늘도 사랑의 자선냄비 행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거기가는 아저씨 이 냄비에 돈을 넣어주시면, 과식으로 배가 아픈 어른들에게
소화가 아주. 잘 되는 콜라를 드릴 수가 있어요. 단, 815는 안됩니다.
자자, 아직도 고통받는 우리 대한민국 어른들을 생각하신다면, 당신의 정성스런 동전 하나.
꼭 넣어주세요.

동생은 혼자 회전목마를 탄 아저씨처럼 화를 내더니 아까 그 미친 노옴! 처럼 자판기를 발로 뻥
차고는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다행히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나는 잠시 남아 이 황당한 사건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았다.

문제점은

1. 자판기에 가격표시가 없다.
2. 그래서 돈을 넣었는 데, 돈을 넣어도 표시가 안들어온다. 비싼가보다.
3. 그래서 더 넣었는 데, 이제는 돈도 넣지 말라고 한다.

어라? 뭔가 이상한 데,

내가 아는 자판기는


1. 자판기에 가격표시가 있다.
2. 돈을 가격표시대로 넣으면 누름 버튼이나 품절 버튼이 들어온다.
3. 누르면 음료수가 나온다.

이건, 애초에 자판기가 아닐 지도 몰라.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반환버튼도 없고,
그러고보니, 전원코드는 어디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러고보니, 이런 곳에 있을 이유도 없고,
그러고보니, 아까 그 여자가 비웃고 있었던 것 같애.
그러고보니, 아까 그 여자 이 게임 캐릭터랑 닮았네, 거의 똑같네.

뭐야, 직원이었나?

중개업자의 그림을 그려놓을 리가 없잖아.

아니, 문제는 그것보다, 전원코드가 없다.

깜짝이야!

정말 놀라버렸다.
불도 들어오고, 그대로 열어놓으면 세계에 빙하시대가 올 것처럼 차가운 자판기인데,
코드가 없다. 생물인가?

"건전지 아냐?"
어느 새,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동생이 말했다.
아, 그렇구나. 세상의 전기따위는 이 자판기에겐 필요가 없구나. 하긴 생물일 리가 없지.
이런 것이 생명력을 가지고 돌아다닌다면, 세상의 동전은 모두 고갈되어 버릴 게 뻔했다.
오히려 내가 전원코드를 꽂은 춤추는 콜라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하릴없이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자판기로 다가갔다.

녹색이다.
녹색 얼굴을 가진 사람이 어슬렁 어슬렁 자판기로 오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10원짜리 동전
한 개를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음료수가 나오는 배출구에 넣었다.
그리고는 버튼을 눌렀다.
어라. 나오네.
밑 구멍으로 음료수가 툭. 하고 떨어졌다.
남자는 콜라를 1분 정도 천천히 훑어보고는 그대로 가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항.
나도 밑 구멍으로 100원짜리를 하나 넣고 코카콜라를 눌렀다.

툭.

나왔다.
사이다.

사이다가 나왔다.

세상엔 내가 알지 못 하는 어떤 음모가 존재한다. 그건 어제 먹은 게가 중국산이냐, 국산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설사 게가 아니라 사실은 개였다고 하더라도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사이다를 손에 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할 수 없이 그냥 방에 가서 잠을 잤다.

-끼잉 끼잉

잠이 들었는 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어떤 미친 노옴이야!." 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창을 열었는 데,

그건,
정말이지.

UFO다.

UFO는 UFO인데 여의도 처럼 타원형의 길고, 축구 골대만한 작은 UFO가 자판기 위에
떠 있었다.

UFO에서 파란색 마스크를 쓴 외계인들이 차례차례 내리더니 자판기를 열고 붉은 색의 콜라 캔들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아하. 그랬구나. 그러니까 그랬군.
모든 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겠지.

UFO도 중국산 게도, 개도 페르시안 고양이도, 제멋대로인 자판기도, 어떤 미친 노옴도.
그냥 세상살기 힘들다보니 그랬겠지.
빙하시대의 공룡도 살기 힘들다보니 그랬었으니까.

서로서로 콜라라도 함께 흔들고 시원하게 터트리면 좀 더 나아질까?
콜라라도 터트려서 세상을 콜라로 채우고 나면 피어오르는 기포처럼 삶에도 희망이 피어오를까?
설사, 거품은 금방 가라 앉더라도,
조금은 덜 힘든 척 하도록 몸에 전원코드를 꽂고 춤이라도 추면서,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눈물을 감추고 몸을 바싹 웅크려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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