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1년 모스크바의 제1차 5개년계획 선전 스탠드 -
1. 5개년계획의 배경
러시아 혁명과 뒤를 이은 적백내전 기간 동안 소련의 경제 정책은 전시 공산주의 체제였습니다. 소련 내 모든 기업의 국유화, 토지의 전량 몰수와 농업집단화, 식량의 강제 징발과 국가 독점, 외국 무역 독점, 배급제 실시, 강제 노동 실시 등으로 소련은 적군의 물자 공급에 주력하면서 결국 내전에서 승리, 소련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내전이 끝났음에도 전시 공산주의 체제가 유지되어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의 불만이 쌓여갔고 이에 블라디미르 레닌이 1921년 제 10차 당 대회에서 신경제정책(новая экономическая политика)을 발표하여 이를 잠재우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신경제정책에서 국가는 대기업 및 중견기업만 통제하였으며 20인 이하의 소규모 기업에 대해선 개인의 소유를 허용하였습니다. 농산물의 강제 징발은 일정 비율의 세금 부담으로 대체되었으며 소작농의 경우 - 국영 농장 소브호즈에서 임금을 받는 노동자 형식으로 일을 해야 했지만 - 잉여 생산물을 국가가 지정한 가격으로 내다파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새 지폐의 발행과 동시에 화폐의 사용이 허가되었습니다.
신경제정책은 제 1차 세계 대전에서부터 전시 경제체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위기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었죠. 1920년 공업 생산량은 1913년의 13%, 농업 생산량은 20%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시 체제란 이유로 각종 제약을 가하니 노동자와 농민의 불만은 커져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1년 2월 대다수가 농민 출신이던 크론슈타트(Кроншта́дт) 해군기지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이 상황의 연장선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옥죌 이유도 사라졌으니 좀 풀어줄 필요도 있었죠.
하지만 이 신경제정책을 두고 당 내에서도 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부하린(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톰스키(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То́мский), 리코프(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ы́ков) 등의 찬성파는 신경제정책만으로도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신경제정책은 일련의 사태로 황폐해진 경제를 회복시킬 것이라 주장했던 반면 트로츠키(Лев Дави́дович Тро́цкий), 지노비예프(Григо́рий Евсе́евич Зино́вьев), 카메네프(Лев Бори́сович Ка́менев) 등은 신경제정책이 자본주의의 연장선일 뿐 좀 더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이 필요함을 울부짖었습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최후의 승자가 되는 스탈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은 뒤에서 관망만 보고 있을 뿐이었죠.
신경제정책을 주도한 레닌이 1924년 사망하고 열린 1925년 제 14차 당 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신경제정책에 대한 논쟁이 오가고 있었고 스탈린은 뒤에서 관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편은 찬성 측에 들어주었죠. 하지만 이런 상황도 곧 바뀌게 됩니다. 최대 경쟁자 트로츠키를 축출하고 소련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른 스탈린은 1927년 입장을 바꿔 신경제정책 찬성을 철회하고 대신 새로운 경제정책을 입안합니다. 훗날 수많은 개발도상국의 공업화 정책의 모티브가 된 5개년계획이었죠.
신경제정책을 펼칠 당시 소련의 상황도 좋지 않았습니다. 1927년 영국을 위시로 한 서방 국가들이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대거 단절하면서 소련은 서방 국가들이 적백내전 때처럼 소련을 점령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서방 국가들이 처 들어올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소련으로 하여금 국력의 재빠른 신장을 위해 급속한 공업화에 매달릴 수밖에 없도록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퍼져나가면서 계획 경제에 대한 소련 전역의 농민들의 불만 또한 늘어만 갔습니다. 급속한 공업화를 통해 내부와 외부의 위협을 동시에 제거한다, 이것이 스탈린의 의도였습니다.
2. 제1차 5개년계획(I пятилетний план, первая пятилетка)
- "목표는 법률! 목표달성은 의무! 초과달성은 명예! -
1928년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의 폐기를 선언하였습니다. 대신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진행되는 새로운 경제정책, 5개년계획을 내세웠습니다. 5개년계획은 생산재와 소비재, 농업, 교통수단, 통신, 보건, 교육, 복지 등 전 분야에 걸쳐 진행되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중점 분야는 서로 다른 시기에 진행되는 각 계획마다 상이했습니다. 하지만 역대 서기장들이 진행한 5개년 계획들 모두 일반적으로 전력 생산, 생산재, 그리고 농업 분야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최우선적인 분야였죠.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선 5개년 계획에서 세운 목표를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후진 농업국가가 10년 이내에 공업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한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맞서야 할 역경. 모두 견뎌내야 했죠. 어느 노동자가 언급한 대로 소비에트의 노동자들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계속해서 투쟁하고 투쟁하고 투쟁해야’ 했습니다. 5개년 계획은 생산량의 대량 증대 프로그램의 윤곽을 잡아내었습니다. 스탈린 본인의 말대로 “경제적 후진성을 끝내지 못한다면 자본주의 국가들이 소련을 박살낼 것”이었죠.
3. 농업 집단화
- 소련의 농업 집단화를 묘사한 어린이용 그림책 속 지도 -
1929년 스탈린은 소련의 모든 농지를 수십만 제곱m에서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집단 농장 ‘콜호즈(колхо́з)’로 편성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강제적인 농업 집단화와 고정 가격제 도입은 러시아 제국 말기부터 존재했던 부농 계층, 쿨라크(кула́к) 계층을 몰락시켰습니다. 쿨라크는 자신을 재산을 당국에게 빼앗기는 것에 저항하여 수확물을 불태우고 가축을 도살하는 등 당국의 정책 집행에 저항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살된 가축만 수백만 마리, 쿨라크의 저항은 1930년대 초반 우크라이나, 돈 강 유역 일대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근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죠. 하지만 집단 농장의 도입으로 가난한 빈농인 소작농들이 이전에 써보지도 못했던 트랙터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소련 전역에 농업용 기계와 트랙터를 생산하는 기업소가 세워졌고 소작농들은 이 기업소에서 공용 트랙터를 빌려 농사짓는 것이 가능해졌죠, 트랙터 등 농업용 기계의 대량 도입은 곧 농산물 생산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신경제정책 하에서도 가능했던 잉여농산물의 판매 역시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당국은 지역 상황에 무관심하였습니다. 일례로 1932년 농업 생산량은 평년보다 32%로 감소하였지만 정부의 공출량은 44%나 증가하였습니다.
- 트랙터를 이용한 콜호스의 경작 -
급속한 공업화를 목표로 하는 5개년 계획의 진행 상황 속에서 문화적 격변 또한 발생하였습니다. 새로운 사회 구조가 도입되면서 이에 따른 분쟁 또한 발생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일례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당국이 재배 작물을 면화에서 곡물로 바꾸라고 지시하면서 불만이 쌓인 유목민과 소작농 모두 1928년에서 1932년 사이 수동적인 방식으로 당국의 지시에 저항하기도 하였습니다.
P.S. 문제가 많아서 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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