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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에 목숨 건 사람들

운영자 2022.06.27 10:01:50
조회 826 추천 13 댓글 20

비전향장기수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세상에 알리는 작업을 이십년이 넘게 해 온 친구가 있다.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송환2’가 평창국제영화제에 올랐다. 동해에서 짙은 안개낀 여름폭우를 뚫고 대관령을 넘었다. 영화관 안은 한산했다. 객석에는 나를 포함해서 대 여섯명만 앉아 있었다. 세상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소재였다. 그런 영화를 고집스럽게 만든 친구도 인위적으로 사람을 동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객석에 한 사람이 없어도 자기 길을 가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비전향장기수’라는 딱지가 붙은 노인들을 화면을 통해서 보게 됐다. 허리가 굽은 채 하얗게 바랜 팔구십대 노인들이 리어커를 끌고 폐지를 줍고 있는 광경이다. 그들은 허름한 집에서 합숙을 하고 있었다.

“미 제국주의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놨어. 우리 민족은 통일이 되야 해. 우리민족끼리 통일을 못할 이유가 없어.”

정말 우리의 소원이 통일인지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같은 민족이라도 나라가 다른 경우도 많았다. 조선족은 같은 민족이지만 중국인인 것 같다. 냉전시대 세계가 미국과 소련의 패권경쟁 속에서 우리가 과연 독자적으로 통일능력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비전향 장기수인 노인들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남조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보니까 개인의 이익이 전부예요. 자기 이익 앞에서는 사회도 국가도 없어요.”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밑바닥에서 소외와 차별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양극화가 심한 사회다. 그들은 과연 천민자본주의의 부자들을 보면서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통일’이라는 구호를 믿을 수 없었다. 굳이 비교 한다면 그들의 통일은 기독교 신자들의 ‘할렐루야’나 비슷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그들 역시 권력자들이 입혀놓은 정신적 유니폼을 평생 입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민주화투쟁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간 고영근 목사에게서 들은 애기가 있다. 그는 비전향장기수들이 사는 감방 옆에서 징역생활을 했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그는 더러 비전향장기수들과 몰래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비전향장기수가 어느날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우리는 남조선을 해방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데 목사인 당신은 북에 가서 순교할 용의가 없소?”

그 말을 듣고 행동하는 그들의 사상에 섬뜩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말하는 통일의 열망은 왠지 익지않은 날 것의 냄새가 나는 느낌이었다. 기독교에서 ‘천국 소망’하지만 사실상 죽고 싶은 사람이 없듯이. 나는 화면에서 그 답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화면에는 북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되는 여성이 비전향장기수에 대한 당의 정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가서 통일 투쟁을 하다가 잡힌 영웅들의 가족에게 당은 매달 생활비를 지급하고 있어요. 혁명 영웅이 죽을 때까지 그 돈이 나오는 거죠. 북에 있는 가족들은 그 돈이 끊기는 경우 아 이제 우리 아버지가 내 남편이 남조선에서 죽었구나하고 짐작을 합니다.”

사상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그들의 속내가 그런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인 친구가 화면 속에서 비전향장기수노인에게 묻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평생 살았는데 왜 굳이 북으로 돌아가려고 해요?”

공산주의가 아니라 세습왕조체제인 거기가 그렇게 좋으냐는 뜻이 배어 있는 것 같다. 죽음이 얼마 안 남은 듯한 십대 노인의 얼굴에 순간 쓸쓸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북에 두고온 아들을 보고 싶어. 아마 지금 육십쯤 됐을거야.”

사상보다 진한 게 피였고 사랑이었다.

영화제가 끝이 나고 나는 감독인 친구와 횡계의 한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무엇이 저들을 그렇게 완강하게 만드는 거야? 사상은 겉포장이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만이 다가 아닌 뭔가가 또 있는 것 같아.”

“내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그들과 이십년 이상 가까이 하다 보니까 어떤 오기들이 뒤에 숨겨져 있어. 여기서 잡혀서 고문들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오기들이 생긴 것 같아. 그들은 대공요원 네 놈들보다는 내가 한 수 위의 존재라는 자부심이 있어. 그게 오기가 되어 전향을 끝까지 거부하는거지. 반면에 그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따뜻한 인정을 베푸는 후원자들에게는 맑은 눈빛으로 그렇게 순진하고 겸손하게 대해. 서늘한 반공의 바람보다는 따뜻한 사랑의 햇볕이 그들을 녹인다고 할까. 동해안의 어부들이 고기를 잡다가 경계선을 넘어 간 경우가 많아. 납치된 건 만은 아니야. 북에서는 그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쌀을 주고 돌아가게 했는데 여기서는 그들을 간첩으로 만들어 징역을 살린 경우도 발견했어. 사람은 따뜻한 곳으로 마음이 가게 마련인 것 같아.”

이십년 공들인 친구의 다큐멘터리 한편으로 많은 걸 배운 날이었다. 외아들인 그 친구는 독특했다. 엄마가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였다. 엄마는 아들의 든든한 배경이었다. 대학 시절 그는 얼핏 보면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장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보컬그룹의 기타리스트로 무대 위에서 청춘을 즐겼다. 어느날 그가 백팔십도로 변했다. 성경속의 부자 청년이 들은 말처럼 재산을 다 없애고 가난 속으로 뛰어들었다. 빈민 운동가가 된 것이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에는 비전향장기수에게까지 간 것이다. 화면 속의 비전향 장기수 노인이 친구를 향해 이런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빨갱이가 아니야.”

그랬다. 사랑이 있는 친구는 사상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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