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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의 우상 김활란(야마기 가쓰란)의 연대

犬大狗(58.142) 2007.03.27 12:39:19
조회 517 추천 0 댓글 5

<光榮의 징병제>

지금 우리의 형편은 전선과 총후가 함께 전쟁에 이기는 것 외에 다른 소망과 목적이 없는 것이다. 나라에서는 전쟁에 이기는 것을 목적한 정치를 하고 있고 학교에서는 학생을 가르칠 때 전쟁에 이겨내기에 필요한 인물을 길러내는데 교육의 목적을 두는 것이다. 이러한 긴급한 시국하에 처한 이때에 문과계 여자전문학교가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자 양성기관으로 이름을 달리하게된것은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국가가 요구하는 교육기관이 되기를 기다렸다.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자 양성기관이 되기 전이라 해서 국가에서 요구하는 교육을 철저히 힘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한층 강력한 태세를 갖추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학부형 가운데 혹시 처음 자녀를 학교에 입학시킬 때와 목적이 달라진다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할 분이 있을지 모르나 나라가 있은후에 가정도, 부모도, 자세도 다 있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그러한 섭섭은 용납될 수 없다. 잣다른 인정으로는 따질 수 없는 조국의 흥망이 달려있는 이 전쟁을 이겨내기 위하여 내달을 뿐이다. 애지중지하는 아들이 제일선의 용사로 나가지 않는가. 지금 여자교육기관이 쇄신되어 전시에 적응한 교육기관으로 전신한 것은 오히려 늦은감이 없지 않다.

반도에서 전문학교까지의 교육을 받는 여성은 참으로 뽑혀 난 존재다. 과거에 전문교육을 받은 여성의 뒤에는 수많은 무식한 여성이 있는 것이다. 황국여성으로서 받아야 할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불쌍한 동무가 많은 것이다. 이러한 여성들의 지도자가 되는 학생은 한편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면 한편 큰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반도에는 광영의 징병제가 실시되는만큼 그에 따라 반도부인들의 임무는 중대하다. 훌륭한 군인을 반도에서 많이 진출시키느냐, 못하느냐는 어머니의 손에 달린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책임자인 어머니가 무식해서는 큰 문제다. 여기에 우리학교가 특별연성소 지도자 양성소로 새출발하게 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먼저 국어(일본어)를 가르쳐서 일본국민으로서의 자랑을 지니게 하고 따라서 내지여성에게서 본받아야 할 훌륭한 부덕을 가르쳐서 황국여성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자격을 가지게 해야 할 것이다. (매일신보 1944.1.4 )


<남자에 지지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1943년 12월 전시교육임시조치령에 따라, 이화여자전문학교를 폐교하고 "여자특별연성소"라는 농촌지도원 양성기관으로 바뀐 것에 대하여 매일신보에 발표한 글이다.

아세아 십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날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벌써부터 되어 있었습니다. 내지 학도들과 함께 전문학교 법문계 반도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일으키어 특별지원병으로서 오는 1월 20일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반도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당국으로 부터 장차 지시가 있을 줄로 압니다만, 대략 현재의 계획을 말씀드리면 명년 1월 부터 3월까지는 지금 재학생들을 단기간에 훈련시키어 지도원으로서 전 조선에 파견시킬 터이며 다음으로 4월 부터 1년을 수료기간으로 하여 신입생을 받아들일 계획입니다. 앞으로는 결전하의 국가 목적에 단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우수한 지도원을 양성하기에 전력을 할 각오가 있을뿐입니다. (매일신보, 1943.12.25)


<뒷일은 우리가 .....>

학도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은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다. 학병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냐. 제군은 오늘 이때를 영구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가라! 전선으로 그 뒤는 우리가 맡겠다. 총후의 여성들은 제군들이 안심할 만큼 만사를 해내일 각오가 굳은 바이니, 바라건대 모쪼록 빛나는 전공을 세워 조선학도의 참다운 일면을 길이 청사에 빛내여라! (조광 1943년 12월)


<거룩한 大和魂을 명심 - 적 격멸에 일로매진>

금 8월 1일 부터 수일간은 반도에 징병제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가진 행사가 조선에 뿐만아니라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새삼스럽게 큰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일시동인의 황공하옵신 성지에 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기회에 대동아 건설을 위하여 동아 10억의 민족을 저 앵글로색슨의 손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우리 황군이 도의의 싸움을 하고 있는 이 때에 반도 청년에 이러한 영예를 내리옵심은 더욱 기쁜 바이며, 또한 행복된 일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배속으로부터 대화혼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존업하옵신 황실을 받들어 모시고 생사를 초월하여 대군을 위하여 순국 봉사하는 그 마음 오직 우리 황국신민만이 특히 제국군인만이 경험할 수 있는 바이다. ....충성된 그 마음을 한결같이 대군에게 바침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대화혼은 3천년간 쉴 사이없이 흐르고 흐르고 크나큰 역사를 가지고 있다....(이하생략) 1943년 8월 7일 매일신보 논문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허둥지둥 감격에만 빠지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지만 어쩔지를 모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갈래를 못 찾는 것도 현명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 반도여성은 그저 내 아들 내 남편 내 집이라는 범위에서 떠나보지를 못했다. 떠나볼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자칫하면 국가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도여성에게 애국적 정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나타낼 기회가 적었을 뿐이다. 지금 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戰場)으로 내보내는 內地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막연하게 부러워도 했다. 장하다고 칭찬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 얼마나 그 각오와 준비가 있는 것인가? 실제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나라에 바쳐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대단히 막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 과연 우리에게 그런 각오가 있을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內地 여성에게 배울 점이 많다. 우리 일본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강한 원인의 하나가 일본 여성의 숨은 힘이라 한다. 말없이 참고 나가는 그들의 힘은 강한 인(仁)의 몇 배의 힘을 가진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러 나가는데 조용한 웃음으로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그저 모방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까지 만드는 그 근본정신을 지니도록 해야한다. 즉 국가를 위해서는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이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내 남편도 내 아들도 물론 국가에 속한 것이다. 최후에 내 생명까지 국가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국가에 속한 내 남편이나 아들 또 내 생명이 국가에서 요구될 때 쓰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못 쓰인다면 오히려 그 얼마 나 부끄러운 일인가. 꼬집어 말하자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바친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나라의 것을 나라가 쓰는 것이지 내가 바칠 것은 아무것 도 없는 것이다. 잠깐 맡았던 내 아들이 훌륭히 자라서 나라가 다시 찾아 가는 것이다. 나는 그 몇 해 동안에 책임을 다한 것이 즐겁고 그동안 그 아들이 많은 즐거움을 준 것이 감사한 것이고 좀더하면 책임을 다 못하여 나라에 돌려보내서 쓰이지 못했을지도 모를 것을 훌륭히 쓰이게 된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것뿐인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신시대, 1942년 12월 이화여전 교장 )


<여성의 무장>

저 흑노(黑奴) 해방(노예해방)의 싸움을 성전이라 했고 십자군의 싸움도 성전이라 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은 정말로 내려진 것이다. 동아 10억의 민족을 해방하고 광명으로 인도 하려는 도의의 전쟁이다. 우리 총후의 반도여성은 지금 이 도의 전쟁에 한사람의 투사로서 가담하고 있다는 광영(光榮)을 가졌다. 도의의 전쟁에 여성은 모르지기 도의의 무장을 갖추자는 말이다. 희생의 투구를 쓰고 적성의 갑옷을 입고 긴장과 자각으로써 허리띠를 매고 제일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도의를 무시한 물질 제일주의의 서양문명을 박차버리고 동아의 천지로부터 미영(米英)을 격퇴하여 버리자.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 결성식 부민관 대강당1941.12.27 오후2시)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 - 내선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

요즘 내선일체라는 것이 매우 활발한 문제로 되고 그를 위한 실제활동이 행해지고 있습니다마는 이는 매우 좋은 현상입니다. 그렇지만 남성들의 활동에 비하여 여성들의 그러한 행동은 아직 뒤쳐져 있는 느낌이 들어서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 현재로는 조선의 부인 문제도 내선일체라는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그것만이 옳고 바른 현실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내선 부인 동지가 서로 사랑과 이해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은 천성적으로 아름다운 감정을 갖고 있으니까 이론보다도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가 사랑을 나누며, 서로가 생활적으로 이해를 나누는 일을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현재 국방부인회나 애국부인회 같은 데서 내선 부인들이 함께 섞여 일하고 있지만 그것이 아직은 부인끼리의 인간적인 이해와 감정의 융합이라는 단계에까지 완전히 가 있지 못하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조선에서도 부인문제가 내선일체라는 커다란 역사 속에서 훌륭한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까 하고 저는 믿습니다. 과거 조선의 부인운동은 어쨌든 화려한 시기가 있긴 있었습니다마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정말로 구호에 불과한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내선일체의 대업 속에서 정말로 확고하게 현실성이 있는 부인운 동이 전개되어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 나는 조선의 부인들이 내지의 부인들과 서로 손을 마주잡고 진정한 자매로서 사랑을 나누어간다는 일이 중요하며, 이런 것을 통해서 내선 일체의 일로 남성들과 함께 협력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부인들도 이제부터는 커다란 희망과 신념을 갖고서 부인의 입장에서 열심히 사회 봉사 사업에 진출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동양지광, 1939년 6월호)


<김활란의 연대>

연 도. 나이 .활 동 내 용

1899.2.27 .1.인천에서 김진연(金鎭淵)과 박또라(朴萄羅)의 8남매 중 일곱째로 출생
1906. 7 ."헬렌"으로 세례를 받고 활란으로 개명
1907. 8 .서울로 이사,영화소학교를 그만두고 이화학당 입학
1914. 15 .이화학당대학과 입학
1918.3 .19 .이화학당 대학예과 졸업 및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1922.6.), 이화여전교수. 부교장
1920.6 .21 .『7인 전도대』조직 농촌계몽과 복음 전도활동 후 곧 중단
1922.5 .23 .아호 "우월"을 김달하(밀정,김활란 형부) 가 지어줌
1922.6 .23 .『한국여자기독교청년회 YWCA』창설 위원
1924.6. 25 .미국 오하이오 웨슬레안대학 졸업 문학사
1925.6. 26 .미국 보스턴대학 석사학위 받고 귀국, 종교,영어담당으로 교사 시작,
1927.5. 28 .『근우회』발기인으로 참여 (~1928 자진 탈퇴)
1931.10. 32 .미국 컬럼비아대학원 철학박사 학위 - 여성박사 1호
1936. 37 ."가정의 개선과 조선인 교화운동의 촉진"을 위한 간담회 참여「총독부」주관
1937.1.13. 38 .『방송선전협의회』부인강좌 강사
1937.1.30 .38 .『조선부인문제연구회』 상무이사 「조선총독부 학무국」주관
1937.8.20 .38 『애국금차회』 발기인 및 간사 친일행위 본격시작
1937.10.6 .38 "출정가족 간담회" 참가 「매일신보」주최
1937.12.24 .38 ."남경함락전첩 봉고제" 발기인
1938.2.24 .39 ."교육회개정 간담회" 참석「매일신보」주최
1938.5.8 .39 .『경성기독교연합회』(경선기련) 평의원
1938.6.8 .39 .『YWCA제네바동맹』탈퇴, 『조선YWCA』를 『일본YWCA』에 귀속(당시회장)
1938.6.20 .39 .『애국자녀단』결성 -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00명으로 구성
1938.6.22 .39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정동연맹) 발기인,이사『경성연맹』 상담역
1938.7.6 .39 ."생활정도를 낮추라"(총후부인봉사 강조) 「매일신보」
1938.9.12 .39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 기본양식" 『조선부인문제연구회』 강사
1939.1. 40 .이화여전 군국주의 교복 착용 - 강제 의무사항이 아님
1939.4. 40 .이화여자전문학교 7대 교장 및 유지재단 이사장(~1945.8)
1939.6. 40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 - 내선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동양지광」
1940.10.16 .41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및 참사
1941. 42 .창씨개명(天城活蘭-아마기 카쓰란)
1941. 42 ."여성의 무장" - "임전보국결전 부인대회 및 강연회" 연사
1941.7.5 .42 ."애국정신에 빛나는 총후의 각오" 강연
1941.8.25 .42 .『임전대책협의회』위원
1941.9. .42 .『전위여성격려대』연사로 부인층과 여학생 대상으로 "일본여성의 갈 길" 강연
1941.9 .42 .『조선교화단체 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이사,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1.9.19 .42 ."부인생활정의" - 조선총독부 강연반으로 충북지역 순회 강연
1941.9.30 .42 ."전시가정 군국의 여학생 - 연파소설을 청산 취미와 오락에도 시국색" 「매일신보」
1941.10.22 .42 .『조선임전보국단』평의원
1941.10.30 .42 ."전쟁총력동원 지역순회 강연"(평양,진남포,안주,신의주,선천,청주지역)
1941.11.26 .42 .『국민총력중앙이사회』 - 담화
1941.12.27 .42 ."여성의 무장" 『조선임전보국단』주최 결전부인대회 연사
1942.1.5 .43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2.2.15 .43 ."대동아 건설과 우리 준비" - "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 연사 - 부민관
1942.12. 43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3.5.5 .44 ."가정도 전장이다" - 방송
1943.6.27 .44 ."남자에게 지지 않게 큰 결의를 갖고 있다" - 강연
1943.8.7 .44 ."거룩할 대화혼을 명심 - 적 결멸에 일로 매진" 「매일신보」
1943.11.6 .44 .학병제 지원 독려 강연반 연사
1943.11.15 44 .『조선교화단체연합회』학병지원 부인계몽 독려반 연사
1943.12. 44 ."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12.25 .44 이화여전이 농촌지도원 여자특별연성소로 바뀐데 대한 감격 소감
1943.12.26 .44 "남자에 지지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매일신보」
1943.12.27 .44 ."여성도 전사다." - 부민관 강연
1944.1.4 .45 ."감격과 가중한 책임" -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자 양성기관 지정관련 기고문
1945.6. .46 .『조선언론보국회』이사
1945.9. 46 .이화여자대학교 총장(~1961.9.), 이사장(~1970.2.)
1945.12. 46 .우익계열의『독립촉성중앙부인단』조직
1948.5.10 .49 .『대한부인회』대표로 서대문구 초대 제헌국회의원 출마 낙선
1949.3. 50 .미국 보스턴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
1950.8. 51 .공보처장(~1950.11.)
1951.1. 52 .『전시 국민홍보 외교동맹』전체 위원장(~1953.)
1951.5. 52 .미국 웨슬레안대학 명예 법학박사 학위
1952.1. 53 .영자신문「코리아 타임스」사장(~1955.8.)
1954.6. 55 .미국 코넬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학위
1955.10. 56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및 조직위원(~1960.9.)
1956.4. 57 .『대한기독교 교육자협회』 회장
1959.12. 60 .『한국여성단체협의회』조직 회장(~1970.2.)
1960. 61.『다락방전도협회』 회장(~1970.12.)
1961.5 .62 .이화여대 총장 사임, 재단이사장,명예총장 취임
1963.8. 64 .필리핀 센트로 에스콜라 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학위
1963.8. 64 .교육부문 대한민국장 수상
1963.8. 64 .라몬 막사이사이상(공익부문) 수상
1963.10. 64 .다락방상 수상
1965.1. 66 .전국복음화운동 명예회장 및 총무(~1965.12.)
1965.9. 66 .대한민국 순회대사(~1970.2.)
1966.8 .67 .이화여자대학교 명에 법학박사 학위
1966.12. 67 .텍사스 감리교 여성교회 기독교 지도자상 수상
1970.2.10 .71 사망, 사회장 치룸, 대한민국 일등 수교 훈장
1998.10 .이화여대의 "우월김활란상"제정발표로 친일논쟁 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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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 참고자료>
친일파 99인『김활란』편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13회) 前이화여대 총장 金活蘭
대한매일
김활란 상 제정 설명회 및 토론회 발언록
이화여대 1998.11.3
파인 김동환 그 아들의 참회
김구선생 암살과 김활란 - 안두희 육성고백 녹취
창씨개명
근우회
김활란의 형부 - 밀정 김달하와 "우월"
역사의 심판 - 서울대, 장발(張勃)흉상 철거 논란
역사의 심판 - 고려대, 현민 유진오 빈소 시위
역사의 심판 - 청주, 3.1공원 "정춘수" 동상 철거
역사의 심판 - 대구, 박중양 기념비 "일소대" 철거
역사의 심판 - 문예진흥원, 이희승 흉상 건립계획 철회
역사의 심판 - 통영, 동랑 유치진 흉상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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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족행위의 시점

1930년대 중반을 넘으면서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 건설을 위해 민족말살정책·황민화정책을 강력히 시행하여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낭독 등을 강요하였으며 철저한 통제망을 조직하여 우리 민족을 전쟁수행의 도구로 삼기 위해 광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식인층이 일제에게 굴복하여 반민족적 행위에 나서는 데는 각각의 계기가 있었다. 기독교계 학교에 속한 인물들은 일제가 신사참배 등의 문제로 일제와 선교사들의 입장이 배치되었을 때, 폐교를 무릅쓰고 일제의 정책에 반기를 들 것인가, 아니면 묵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을 맞이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각 교파마다 그리고 각 학교마다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북장로교계에서는 학교 폐쇄를 불사하였다.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 대부분과 광주 수피아고녀, 숭일고 등은 폐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김활란이 몸담고 있던 이화여전은 일제의 각종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일제의 요구에 응하며 이리저리 끌려 다닌 대표적인 이가 바로 김활란이었다. 그가 저지른 친일행각은 교장직을 맡았을 때인 1939년 4월 이후부터가 아니라, 조만간 맡을 가능성이 엿보였던 1936년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1936년 부교장으로서 그는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한 사회교화간담회에서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1937년 1월 황민화정책을 철저히 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방송에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1937년부터는 일제와 관련된 일회적인 모임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단체활동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즉, 1937년 1월 말에는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중일전쟁이 터지자 손정규(孫貞圭)와 더불어 애국금차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사회자로 활약하였다. 애국금차회는 일찍부터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 부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단체였다. 애국금차회의 사업은 ""황군의 환송영"", ""총후가정(銃後家庭)의 위문"", ""총후가정의 조문(弔問)"", ""일반가정부인에 대한 시국인식의 강화·철저와 국방헌납과 황군위문금품의 헌납"" 등이었다.

이후 그는 이와 같은 목표를 둔 단체나 활동에 약방의 감초처럼 참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곧 ""출정가족 간담회""({매일신보}, 1937. 10. 6)에 참가하는 등 친일의 수렁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이전까지의 김활란의 행적에 대해서는, 일제하라는 조건에서 합법적인 계몽운동을 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애국금차회에 가담한 시기부터는 민족역사상의 분명한 반민족적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38년 3월 칙령으로 내선일체화란 이름하에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어 사학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수업중 조선어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학생들은 군수공장에 근로동원되고 학교과정에서도 우리 문화나 전통에 관한 것은 말살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김활란은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00명 처녀들로 ""총후 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한편 기독교 여성단체 중 가장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던 조선 YWCA가 1938년 6월 8일 일본 YWCA에 가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그는 그날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 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이지 아니하면 안되겠으므로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의 활동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 금번 ""제네바""동맹을 탈퇴……하고 기독교여자청년회 일본동맹에 가담하게 되었다"({매일신보}, 1938. 6. 9)라는 발표를 하고 있었다. 1941년경에 가면 결국 활동이 중지될 것을, 이토록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단체의 목숨을 연장시키고 있었다. 이 때 지방 YWCA에서 활약하던 인물 중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에 소극적이나마 저항하여 사회적 지위에 초연한 태도를 취한 여성들도 있었다. 조선 YWCA를 구상하고 탄생시킨 김필례(金弼禮)가 바로 그러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김활란의 친일활동은 계속되었다. 그는 1939년 이화전문학교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에 앞장 섰다. 당시 일제는 중등과정의 학생들에게는 강제로 교복을 입게 했지만 전문학생의 경우는 학교의 재량에 이 문제를 맡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부교장이었던 김활란은 언론({동아일보})과 학생·학부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체생활상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교복을 입게 하였다. 이것이 학교에서 한복이 사라지게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매일신보}, 1939. 1. 18, 19) 이렇듯 학교의 최종 결정권자인 교장 자리를 맡기 전부터 너무 많은 친일 행위를 했기에 ""학교를 살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친일을 했다""라는 정도의 면책조차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되어 김활란이 교장이 된 데에는 약간의 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이화고녀, 배재고 등 선교사가 경영하던 학교의 교장이 조선인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상태이기는 했어도 아펜젤러 교장이 물러나는 것에 대해 이사회 내에서 약간의 이견이 있었던 것 같다. 김활란이 교장이 되는 데는 당시 이사였고 선교사 대신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배재 교장이 된 신흥우(申興雨)의 힘이 컸다고 한다(최규애, {참다운 크리스챤 김활란 여사}, 나랏말 출판사, 1991, 91면). 김활란이 1939년 4월 정식 교장이 되면서부터는 일제에게 굴복하면서도 학교를 지킨다는 명분 하나만으로 민족사에서 학교가 해야 할 많은 역할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야마기 카쓰란이 되어 학병·징병을 권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연행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각종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여기에 친일 여성단체를 만들고 여성명사들을 동원하는 등 여성들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김활란은 임전대책협력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국민총력 조선연맹 평의원,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직을 맡았다. 그리고 여성대중에게는 노력동원, 가정의 절약과 저축을 강조하였다. 그는 1941년말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하였다.

그리고 부인궐기촉구 강연, 결전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하고 내선일체·황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반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인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남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 1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은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 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 12) 그는 후에 자서전 {그 빛속의 작은 생명}에서 일제 때 가장 안타깝고 분하게 여겼던 일 중의 하나가 1943년말 전시비상조치방책으로 이화전문학교가 농촌지도원 연성소가 된 것을 꼽고 있다. 이것은 사실 그가 친일행각을 중단할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때도 이렇게 말하였다.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 12. 25) 이화전문학교가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연성과로 바뀌어, 기존 학생들에게는 3개월간의 교육을, 신입생에게는 1년간의 교육을 시켜 전조선에 설치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로 배치하여 농촌여성을 계몽한다는 일제의 방침대로 되자,

1944년 이화여전 학생 모집에는 150명 모집에 40명밖에 지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재학생들도 격감하였다. 그리고 제자들과 후배들은 그를 외면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래도 그는 그냥 있었다. 아무리 자기 본심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이미 공인으로서의 행동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공인으로서의 책임있는 행동보다는 껍데기뿐인 이화를 잡고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일관했을 뿐이었다.

그가 조선 민족을 향해 내뱉은 그 숱한 반민족적 연설·글·방송을 어떻게 주어 담을 것인가. 이러한 친일적 지식인 여성들의 활동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과거 민족운동에 참가하였던 까닭에 일제에 대해 적극적인 투쟁은 커녕 안면몰수한 친일행위는 민중에게 분노와 실망만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지식인들에게는 패배주의를 낳게 했다.

김활란과 같이 교육계에 있었던, 특히 서울의 여학교 교장----황신덕*, 송금선, 이숙종, 신봉조, 조동식, 배상명----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같은 길을 갔다. 교육계에 종사한 이들의 친일행위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그저 보고 따르는 스승이었기에 악영향은 상대적으로 더욱 큰 것이었다.

김활란의 측근자였던 김옥길의 {김활란 박사 소묘}에서는 그가 1944년경 악성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 진실로 반성하는 구절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친일한 많은 이들이 자서전이나 전기를 남겼지만 대부분 친일행위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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