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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단편] 백빙검 (4)

래녹(112.148) 2014.12.20 00:18:21
조회 1240 추천 14 댓글 14







 "가, 같이가요!"


 "힘들면 굳이 따라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 쪽이 일부러 빨리 걷고 있잖아요!"


 "전혀."


 "거짓말!"


 헉헉거리며 검마의 뒤를 열심히 쫓았으나 점점 힘이 부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검마는 '나는 대단히 편하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휘적휘적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 걸음이 무척이나 잽싸고 얄미웠다.


 "내, 내게 이럴 수 있어요?"


 "그건 또 무슨소리냐."


 "우린 친구잖아요."


 그 말에 검마가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나에게로 되돌아와 내 이마에 검지를 대고 지그시 눌렀다.


 "난 너같은 꼬맹이를 친구로 둔 적 없다."


 "...염노가 그러기를, 사해는 동도고, 그러니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고, 게다가.."


 "난 염노가 누군지 몰라."


 "어제의 그 할아범 말이에요!"


 검마는 턱에 손을 얹고 잠시 생각하더니


 "아, 그 쟁자수?"


 "그 옆에 다른 노인이요!"


 "아, 그런가... 그런건 상관없잖아! 난 어차피 그 노인네를 모른다고!"


 다시 쌩쌩 걸어나가는 검마. 나는 또 죽어라 달리듯이 비탈을 뛰어올라야 했다.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을까. 그 객잔을 발견했을때는 이미 옷이 땀에 젖어서 몸에 달라붙고 머리카락도 축축하게 되어버린 후였다. 검마는 제법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를 우습게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것을 반드시 알려줄테다!


 하지만 역시나 배가 고픈 것은 인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성장기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많이 먹어두어야 한다.


 "이봐요! 배고프지 않아요?"


 검마가 힐끗 나를 돌아보았다.


 "나를 언제까지 그딴 식으로 부를 셈이냐?"


 "어..."


 "내 이름은 독청이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무례하게 이봐요가 뭐야."


 검마에게 무례하다는 소리를 들어버렸으니 그건 엄청나게 억울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살아있는 무례의 표본같은 주제에 갑자기 왜 예의를 따지는거야?


 "독 형, 시장하지 않소이까?"


 "징그러운 놈..."


 검마는 허탈하게 한 마디를 툭 뱉더니 객잔으로 쑥 들어갔다. 나도 곧장 뒤를 따랐다.







 "여기 소면 한 그릇 주시오."


 그리 험한 산은 아니라 하지만 대체 산 속 깊은 곳에 객잔을 차려놓았는데 생계유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아, 빨리도 가져오는군."


 객잔을 휘휘 둘러보니 첫 인상보다 꽤나 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점원도 객잔의 주인 한 명뿐이라서, 요리와 접대를 동시에 하는 모양이었다. 구부정한 노파가 지팡이를 짚으며 위태하게 소면을 날라왔다.


 "먹을만 하군."


 청소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얼핏보면 눈치챌 수 없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의없이 슥슥 문질러댄 걸레질이 눈에 잡힐 듯 보이는 것이다. 분명히 저 빌어먹을 소면 속에도 각종 벌레들이 우글대고 있을 것이다.


 "손맛이 괜찮군."


 "그래서 아주 좋겠네요! 혼자만 맛있는 소면을 드시다보니 아주 좋겠네요!"


 "어, 왜 화를 내나? 혼자서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길래 가만 놔두었더니."


 "처음부터 한 그릇만 시켰으면서 무슨 소리에요? 혼자서만 먹는 소면이 맛있긴 한가보죠!"


 "맛있기는 한데."


 정말 얄미운 사람이었다. 대체 처음의 고고한 인상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강호에 이름높다는 그 검마가 소면 한 그릇 가지고 이렇게 쩨쩨하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어이없는 마음에 허탈하게 심호흡을 하고 있으려니 검마는 다시 후루룩 소면을 먹기 시작했다. 저깟 소면이 비싸면 얼마나 비싸단 말인가? 하지만 이 사람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들어먹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이대로 체면을 차리다간 정말로 굶게 될 것이다.


 "나도 소면을 먹고 싶어요."


 "먹던가."


 "돈이 없어서 이러고 있는거잖아요 지금!"


 검마가 젓가락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네가 돈이 없는 것을 왜 나에게 따진단 말이냐?"


 의뭉스럽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검마는 이런 식으로 나를 떨굴 속셈인것 같았다. 처음부터 나는 일행으로 생각치도 않은 것이다. 그가 하는 말들이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건만 이유없이 서러워졌다.


 "다.. 당신이."


 뭐라 말을 이으려 했는데 목이 메여왔다. 이런데서 울음이 나오려 하다니 나도 참 미친 놈이다.


 검마에게 들키지 않게 끅끅대며 설움을 삼키고 있으려니 또 염노의 생각이 났다. 염노, 나 학대받고 있어요.


 "음..."


 검마가 소면을 집어가던 젓가락을 문득 멈추었다. 나를, 아니 내 방향의 허공을 지그시 바라보는 안색이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어린애가 우는 것을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어느정도냐 하면,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버릴 정도로.


 "독?"


 검마가 손가락으로 가슴을 이리저리 팡팡 두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바닥에 소면을 토해냈다. 이 때쯤 나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쪽으로 와라!"


 난데없이 무슨 소리인가하고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객잔의 주인노파가 등뒤로 다가오면서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그 자의 말이 맞았구려. 과연 검마로군."


 객잔의 입구에서는 두 명의 중년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염포사걸을 도륙했다더니, 어김없이 이 산을 오르는구만."


 "소문대로 미숙하이. 역시 애송이에 불과해."


 멍청하게 검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퍼뜩 깨달았다.


 적이다!


 "단홍정산독이다. 네 놈은 이미 반쯤 저승길에 발을 들여놓은게야."


 목덜미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노파의 냄새나는 입이 귓가에 기분나쁜 바람을 만들고 있었다. 노파가 흐뭇한 목소리로 웃었다.


 "흘흘흘, 내가 여기서 검마를 잡는구나."


 이들이 말하는 '그 자'가 누구일까. 혹시 염노였을까? 염노가 이들을 시켜 검마를 죽이라고 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염포사걸의 지인들일까? 이자들은 지금 염포사걸의 복수를 하려는 것일까? 어쩌면 장무관의 사람들일까? 아니, 검마에게 원한이 있는 다른 사람들일까?


 검마가 피를 왈칵 토해냈다. 그리고는 더욱 창백한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도저히 면목이 없었다. 나는 인질이다.


 "누구냐.. 너희들은."


 "우리는 산동삼살이다. 그리고 저 노파는 귀영파라고 하지."


 대답은 검마의 등뒤에서 들려왔다. 입구에서 들어온 두명의 중년인 중 하나가 검마의 목에 검을 겨누며 말했던 것이다. 중년인들의 눈초리가 매우 사나워서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꺼려졌다.


 "왜, 나를 죽이려 하는거냐."


 노파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듣기 싫게 지껄였다.


 "흘흘, 네놈이 이제껏 만들었던 원수가 몇 명이라 생각하느냐. 그리고 네놈을 잡아 명성을 얻으려는 자는 또 몇 명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런걸 굳이 물을 필요는 없느니라. 염라전에 가면 알 수 있을 게다."


 검마가 처연하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와 마주앉아 있으려니 참았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불안하고 분해서, 미안해서.


 "그런가... 알았다."


 "이 녀석은 무언지 모르겠군. 얘야, 너는 검마의 일행이더냐?"


 노파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자애로와서, 너무도 공포스러웠다. 그리하여 어깨를 덜덜덜 떨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잘 됐군. 어차피 죽여야 할 녀석이라면 일행인 편이 마음 편하지."


 이어서 노파가 중얼거렸기 때문에 나의 공포심은 극에 다달았다. 검마의 등뒤에서 중년인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검마의 목을 겨눈 중년인과 눈을 마주친 그는 검마에게 다가가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곧 그에게 내리칠 듯 했다.


 그리고 시간이 멈추었다.


 검마의 검이 검집에서 해방되었다.


 검마를 내리치는 중년인의 검보다, 검마의 목을 겨누고 있던 또 다른 자의 검 보다도, 내 목을 겨누고 있는 노파의 칼날보다도, 검마의 손에서 뽑혀나오는 눈부신 광채보다도 빠르게 덮쳐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소름끼치는 냉기였다. 처음으로 맞닿뜨린 검마의 살기는 비록 나를 향한 것이 아닐지라도 확실하게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대로 온 몸이 굳어서 털끝만큼의 미동도 할 수 없었다.


 냉기를 이루는 것은 살기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사위를 감싸는 오한은 그것이 정녕 무형의 살기로만 이루어진 것인지 믿을 수 없었다.


 검마는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빛으로 이루어진 비단이 검마의 목 언저리로 흐르며 그를 겨누던 검을 박살내었고, 멈추지 않은채 폭사되어 노파의 오른팔을 날려버렸다.


 그것은 분명 인세에 찾을 수 없을 엄청난 쾌격이었으나, 왜인지 너무도 선명하다. 나는 알아볼 수 있다. 몸을 회전시키던 검마의 왼쪽 어깨에 중년인이 내리치던 검이 박히는 모습도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한눈에도 위중한 일검임을 알 수 있었다. 검마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회전에 박차를 가해, 그의 어깨를 갈라버린 중년인의 허리를 베었다.


 검마의 살기에 내가 굳어졌던 그 찰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끄악!"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비명이 울려퍼졌다. 내 목을 겨누던 노파의 팔은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것이기에, 나는 힘껏 노파에게서 멀어지며 객잔의 탁자 밑으로 들어갔다.


 그 상황에서 아무도 나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노파가 뒤로 주춤 물러나며 왼손으로 커다란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그것이 노파의 무기인 듯 싶었다. 검마의 목을 겨누던 중년인은 부러진 검을 그대로 검마의 목으로 질러갔다. 그리고 입구에서 또다른 중년인이 뛰어들어오며 노성을 토했다.


 검마의 회전은 멈추지 않았다. 검마는 자세를 약간 낮추어 탄력을 일으키다가 튕기듯이 몸을 곧추세우며 목을 노리는 중년인의 검을 피해냈다.


 후방으로 튕겨간 그의 진행방향에서는 새로운 중년인이 검을 겨누며 기다리고 있었으나, 검마는 회전의 방향대로 빛의 비단을 유도해서 그의 공격도 퉁겨내었다. 쩌엉! 하는 소리.


 "네 이놈! 천갈래로 죽이겠다!"


 노파의 목소리는 엄청나게 컸다. 내가 평생 들었던 어떤 외침보다도 소름끼쳤다. 노파는 지팡이를 치켜세우고 검마에게 도약해 들어갔다. 팔이 잘려나갔는데 아프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노파의 지팡이가 위잉 하고 무서운 소리를 내며 검마를 공격했다.


 "내가 바로 독청이다!"


 검마가 화답하듯 소리치며 검을 뻗었다. 그의 검에서 이글거리는 냉기가 뻗었다.


 그는 찔러오는 중년인의 검을 피하며 그의 얼굴을 베었다. 동시에 허리를 젖히며 검이 부러진 중년인의 뒤로 흐르듯 스쳐지났다.


 노파의 지팡이가 검마를 놓치고 객잔 바닥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부러진 검날의 중년인이 자세를 바꾸며 검마를 향했고, 그 순간 그의 목으로도 검마의 빛줄기가 강하게 부딪쳤다. 중년인의 목은 잘려나가 엄청난 속도로 객잔의 천정에 처박혀버렸다.


 "나를 죽이려는 자는 모두 죽인다!"


 노파의 지팡이가 검마에게 다시 겨누어졌다. 그것은 빙글 돌며 회전력을 얻더니, 무거운 일격으로 객잔의 탁자를 박살내며 휘돌았다. 검마는 무사히 그것을 피했으나, 다시 왈칵 하고 피를 토하고 말았다.


 지팡이에서 무서운 기세가 일어났다. 지팡이에 아지랑이가 깃들더니 검마의 얼굴을 누르듯이 뻗었다. 검마의 검에서도 백광이 치솟았지만 그의 냉기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콰앙!


 검과 지팡이가 부딪쳤다. 검마의 검이 지팡이를 베며 노파의 가슴에 길고 붉은 선을 그었다. 그러나 검마 역시 퉁겨나가 객잔의 벽에 강하게 부딪쳤다. 그의 입에서 피가 솟는 것이 보였다.


 "쿨럭!"


 나는 벌떡 일어나서 검마에게로 달려갔다. 노파는 비명도 없이 죽어있었다. 검마의 참혹한 상세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정말 위중한 상태인 것 같았다.


 "괜찮아요?!"


 벽에 기대어 거친 숨을 쉬며 그는 어설프게 웃음을 지었다. 입에서 쉴새없이 흘러나오는 피가 그의 깨끗한 얼굴을 더럽히고 있었다. 피는 목까지 흘러내려 그의 검정색 웃도리를 적시었다. 그의 왼팔은 축 늘어졌고 어깨에서도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품에... 영단... 하얀색."


 넘어갈 것 같은 갸냘픈 목소리였다. 그는 그 말만을 뱉어내고 혼절한 듯, 눈을 감고 거친 숨만을 내쉬고 있었다. 호흡이 점점 옅어진다.


 허둥지둥 검마의 품을 뒤졌다. 검마의 가슴팍은 너무나도 꽁꽁 묶여있어서 마음이 앞서는 성급한 손으로는 좀처럼 풀어낼 수 없었다. 한참이나 허둥댄 끝에 겨우 그의 앞섶을 펼칠 수 있었다.


 그의 옷을 풀어헤치면서도 현실감이 없다. 짧은 시간에 너무 정신없는 사건이 연이어 생기는 바람에, 마치 꿈을 헤매다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검마에게서 피비린내가 난다. 그는 처음부터 혈향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검마의 품 속에서는 예상외로 많은 물품들이 흘러내렸다. 작은 자기병 하나와 얇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종이묶음,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단주머니 등이었다.


 검마의 가슴은 흰색 헝겊으로 다시 꽁꽁 동여매어 있었다.


 "이, 이건가?"


 떨리는 손으로 자기병을 집어들었다. 자기병은 가벼운데도 무척이나 힘겨운 일인 것처럼 고생스러웠다. 검마가 말한 영단이 바로 여기에 들어있을 것이다.


 운명처럼 나의 눈을 사로잡는 물건이 있었다. 그의 품속에서 온기를 받아 따뜻해진 종이묶음이었다. 그것의 표지에는 믿을 수 없는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 파양신검결(破洋神劍決).


 파양신검.


 나는 파양신검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들어본 적이 있다. 지워진 나의 기억 저편에서 나는 파양신검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그것은 본능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이것은 내 것이다!


 나는 종이묶음을 나의 품으로 갈무리했다. 가슴을 찌르는 죄책감을 무시하며 영단이 들은 자기병도 품 속에 넣었다. 이것만 있으면 나는 강해질 수 있다.


 이것만 있으면 나는 강해질 수 있다!


 검결을 품에 넣는 순간 나는 검마를 배신한 것이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이다. 나는 기꺼이 건너리라.


 그는 곧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지만.


 눈앞에 다가온 기회를 저버릴 수가 없다.


 나는 검마를 배신했다.


 기적처럼 검마가 살아나게 된다 하여도 나는 그를 마주 볼 자격이 없어졌다.


 그런데 그가 정말 살아난다면?


 그는 무적의 무인이었다. 비록 지금은 중독되어 기식이 엄엄하지만 검마는 가장 유명하고 가장 강한, 최고의 무사였다. 그런 그가 다시 살아난다면? 정신을 차리고 나의 배신을 알아낸다면? 그것만큼 공포스러운 일은 없으리라. 이 세상에서 검마보다 무서운 자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서 화근을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문득 그가 들고 있는 흰색의 검에 생각이 미쳤다. 처음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그 검. 두자 남짓한 길이의 아름다운 병기였다. 그것은 검마의 손에 꼭 쥐여있었다.


 저 검과 검마가 함께 있는 이상 검마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 나밖에는!


 그의 손에서 검을 빼내기로 했다. 검마의 손에  힘을 주는 동안에도 언뜻언뜻 검에서는 불길한 광채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파멸을 예감케하는 사악한 빛이었다. 그것은 이미 조금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이것을 검마에게서 빼앗아야 한다!


 검마는 무척이나 강한 아귀힘으로 나에게 저항했다. 이미 의식은 없을 터인데도, 손톱이 하얗게 되도록 검병을 잡고 절대로 놓지 않는다. 내가 그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밤을 지냈던 그 상황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가 내 팔꿈치의 어느 곳을 건드렸는가 기억한다. 손끝에 힘을 주어 검마의 팔꿈치 안쪽을 강하게 치자, 검마의 팔이 꿈틀 하며 검이 땅에 떨어졌다. 다행히도 내 수법이 제대로 통했는가 보았다.


 땅에 떨어진 그 검은 더이상 검마의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아무리 빛을 뿜고 요기를 뿜어내도 검마의 손에서 벗어난 검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이 검 역시 나의 소유로 하기로 결정하고 검마의 허리에서 검띠를 풀어내었다.


 검집은 낡았지만 화려한 세공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할 수 없었던 검의 이름이 양각되어 있었으며, 가벼웠지만 무척이나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 백빙소검(白氷小劍).


 어울리는 이름이다. 검집을 나의 검으로 채우기 위해 무심코 검을 집어들었을 때, 그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생애 최초의 감정이었다.





********





 소년이 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사시나무처럼 부들거렸다. 누가 붙잡고 강하게 흔드는 모양처럼 소년은 미친듯이 몸을 떨었다.


 소년의 눈동자가 휙 돌아갔다. 눈에서 눈동자가 사라지고 흰 자위만 남아서 기괴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흐... 흐흐...."


 소년의 입가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의 관절이 부드득, 꺾이며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소년은 웃기 시작했다.


 "죽인다.. 죽.. 죽인다.. 죽인인다인다....."


 소년의 온 몸에서 살기가 터져나왔다. 무형의 살기에 유형의 사물이 영향을 받아 바람이 불고 창문이 삐걱거린다. 소년은 주위를 살피지 못하는 상태였다.


 "죽죽인다다..."


 소년의 손을 타고 순식간에 솟아오른 흰 검이 소년의 목을 꿰뚫었다. 피가 솟았다.


 "그르륵...."


 소년은 자신의 목에 검을 박은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쿵, 하고 바닥이 울렸다. 소년의 목을 뚫은 검에서는 순백의 광채가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객잔의 입구에 새로운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쯧. 주제도 모르고 마검에 손을 뻗었으니 네놈은 죽어도 싸다."


 남자가 소년의 목에서 검을 뽑았다. 피가 솟자 남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피했다.


 움찔.


 검을 잡은 남자의 안색이 변하며 그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검집에 집어 넣을 수 있었다.


 "요물이로다. 어찌 이것을 길들일 수 있었을까?"


 남자는 검띠를 두르며 검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검마는 시커멓게 죽어가는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도 어느새 검정색으로 변해있다.


 "너는 나를 쫓는다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내가 너를 뒤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검마는 결국 그의 의도대로 여기 시양산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이다.


 남자는 텅 빈 자신의 왼팔 소매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회한에 찬 표정으로 검마를 노려보았다.


 "그래, 확실히 잊고 있었다. 설마 네가 무공을 가졌을 줄은 몰랐거든. 당시에 내 일장에도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이었겠지."


 남자가 검마의 얼굴을 지그시 받쳐 올렸다. 그녀가 만들었던 오른손의 흉터는 이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남자는 기억을 되살리듯이 그녀의 얼굴에 한동안 시선을 집중했다.


 "놀랍게도 강해졌더구나. 내 아래에 깔려서 비명을 지르던 그 계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수많은 제물 중의 하나였던, 그리고 아무런 어려움도 기억도 남기지 못한채 그의 일장에 죽었어야 했던 여인의 얼굴이었다. 그제야 그는 여인의 약혼자였던 남자에 기억이 미쳤다. 그녀의 약혼자는 자신을 대신해 오명 속에서 죽어갔었다. 그 남자의 이름이 독청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늦었지만... 대답해주마. 너의 말이 맞았다. 내가 천면음 상관정이다."


 상관정은 검마의 얼굴을 내동댕이쳤다. 그녀는 나동그라지며 몇 개의 의자를 넘어뜨렸다. 그러나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조금의 반항도 보이지 못했다. 몸을 작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군자검은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 사이로 참을 수 없는 그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후후후... 하하... 흐하하하하하!!"






*****





 군자검은 검마를 베어 검마에게 잃은 왼팔을 설욕하고 친구인 섬서일검과 철협의 원수를 갚았다.


 마두를 처단하며 훌륭하게 복수를 완결한 그는 수많은 강호동도들의 찬사 속에 무림에 재출도 하였고, 그 후로도 많은 협행을 하여 후세에 청명을 길이 남겼다.




- 끝.









2002년인가 2003년에 썼던 단편.


파일 수정한 날짜 보니까 2008년에 다듬었음.


2014년에 무갤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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