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관이 무림을 제어하지 않느냐가 아님. 행정력이 발달하지 않은 전근대 중국 사회에서도 실제로 임협, 유맹, 토비 등이 발호했으니까. 여기에 초인적인 무공이 더해지면 관이 무림을 건드리지 않는 건 이상할 것이 없음. 진짜 문제는, 어째서 초인적인 무공을 가지고 있는 무림인이 평범한 인간이 지배하는 전제군주제를 전복하지 않고 이를 수인하느냐임.

판타지로 치면 군대도 사를 수 있는 드래곤을 단신으로 때려잡는 대마법사가 있는데 왜 Magocracy가 아니라 개좆밥들이 혈연으로 왕위를 승계하는 왕정이 지속되느냐는 건데, 사실 무협이나 판타지나 파워 레벨이 씹창이라 칼 맞으면 윽엑하고 군대는 어찌 상대할 방도가 없다고 하면 문제 없음. 문제는 평범한 인간은 백만 명이 모여도 답이 안 나오는 파워 레벨, 산을 뽑고 운석을 떨어뜨리는 하이 파워 설정에서는 고수가 왜 스스로 왕 안 해 먹고 형식적으로나마 개좆밥의 지배를 인정하는가에 대해서 그럴듯한 설명이 필요함.

이러한 모순은 무협이 그럴듯한 수준을 넘어서 밑도 끝도 없이 파워 인플레를 일으킨 탓일까? 꼭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움. 무협의 원류인 검협소설을 보면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신위를 발휘하는 장면이 많이 나옴. 비검(飛劍)은 어검술과 다를 게 없고, 검기(劍器)의 묘사는 검강(劍罡), 검기(劍氣)를 연상시킴. 정작 그렇게 초월적인 무공을 갖춘 검협들은 곤륜노처럼 비천한 노복을 자처하거나, 형십삼낭처럼 여염집 아낙으로 살아 가지만, 오늘날의 무협과 같은 모순을 느낄 수 없음. 재물과 명예를 도외시하고, 연이 닿은 자에게 진기한 재주를 서슴없이 가르쳐 주는 그들은 기본적으로 방외의 이인이고, 속세의 명리를 벗어난 존재들이기 때문임. 검협소설들이 한자로 수천 자에 불과한 단편들인 것도 영향이 있겠지. 짧은 이야기, 마치 그림 속에서 나온 듯한 신비하고도 표홀한 존재인 검협들은 평면적이나 그렇기에 강렬한 캐릭터성이 중요하지, 백스토리가 중요한 게 아니거든. 동화 속 마법사는 신비한 마법으로 서사를 구성하는 플롯 디바이스의 역할을 다하면 족하고, 그 모두스 비벤디는 설명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결국 오늘날 무협의 모순은, 신비로운 검협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인 검협소설을 끝없이 확장한 결과 초인적인 무공을 가졌지만 그 의식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무림인으로 가득 찬 '사회적 강호'를 만들어 낸 탓이라고 봄.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아예 장르로서의 무협의 컨벤션으로 간주하고 익스큐즈하거나(결국 팬덤 내에서 지속적으로 불평이 제기되겠지만), 아니면 나름대로 이를 해결하는 설정을 넣거나. 천마군림처럼 그래서 무림인들이 황제를 갈아버리고 고수크라시를 구현했습니다, 라는 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