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하람과 천기의 집까지 소식이 들려온 이후, 하람은 계속 묘한 기분에 쌓여 있었다. 결국 잠에 들지 못하고 마루에 걸터 앉았다. 이게 무슨 기분이란 말인가...
하람이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기가 옆자리에 앉았다.
"부인, 내가 깨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씩 웃으며 옆자리에 걸터앉는 천기가 약간 흐트러져 있던 하람의 옷깃을 매만졌다. 고민이 깊었던 탓에 옷이 흐트러져 그 안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관양으로 가보시겠습니까?"
"예?"
"도성으로요."
"아닙니다. 괜히 걱정시켜 미안하오. 들어갑시다."
하람은 애써 웃었고 잠이 든 천기의 어깨를 토닥였지만, 그날은 잠에 들지 못했다.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침을 먹고 있던 하람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계십니까?"
하람과 천기가 눈이 동그라진채 밖으로 나갔다. 얼마 전 생일에 급히 찾았던 저하의 측근들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저하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이걸 어찌 직접..."
하주부, 그곳은 여전히 평안한가? 상 중이라 서신을 보내는 것도 조심스러워 이리 사람을 보내네, 놀랐을 터인데, 미안하네, 이틀 후면 즉위식이네, 가지 않을 것 같던 시간도 가고 다가올 일은 다가오는구만 해서 그 시간이 오기 전에 잠시 들러줬으면 하는 마음에 사람을 보내었네, 궐에 돌아와달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내 친우의 응원이 필요할 뿐인 마음을 헤아려 잠시 들러주면 아니 되겠는가, 거절한다면 내 어찌 하겠소만, 내 꼭 자네를 만나 전할 이야기가 있으니 꼭 들러주시게.
<율>
"저하께서 모셔오라 하시었습니다. 끝내 거절하신다면 답신을 받아오라 하시어..."
"....."
하람은 그대로 서신을 손에 쥐고 말을 잊지 못했다. 그때 천기가 하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녀오시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하람은 천기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마음은 정해졌으니.
"잠시 채비를 할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
하람은 새로 지어 다려놓은 옷을 꼼꼼히 덧입고 갓을 썼다. 천기는 하람의 갓끈을 꼼꼼히 매주었다.
"내 금방 다녀오리다. 부인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네시진(8시간 내외)은 족히 걸리는 거리입니다.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관양에 가면 백유화단에 들를 것입니다. 전할 말은 있으시오?"
"단모님 음식이 먹고 싶어요."
"예, 전하겠소."
"모두 안부를 전해주세요, 뱃속에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다고요."
"그리하리다."
하람은 천기를 깊게 끌어안았다. 혼인 후 제일 길게 떨어지는 날이었다.
"하중아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있거라."
"예, 아버지."
"부인, 들어가시오."
천기는 소마를 타고 길을 나서는 하람을 묘한 웃음을 지으며 처다보고 서 있었다.
*
하람은 조용히 궐에 들었다. 즉위식 전날,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저하, 하가 람 들었나이다."
"들어오시게."
걔속 가라앉아 있던 양명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하람이 들어와 예를 갖추자, 양명이 손을 내저었다.
"되었네, 가까이 오시게. 궁에 든 것은 간만이구만."
"예, 5년만이옵니다."
"그래, 5년만에 궁에 들었으니. 간만에 서문관도 좀 둘러 구경도 하고, 옛동료들과 인사도 나누면 좋겠구나 ."
"그저 옛 직장일 뿐이옵니다. 오래 전 궁을 떠났으니, 제가 그곳에 다시 들러 무엇하겠습니까."
"아 이리 빡빡한 사람, 그래, 이래야 하람 자네가 아니겠는가."
잠시 소리를 작게 울리며 웃고 있던 양명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마치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깨달은 사람처럼,
"자네가 헀던 말이 생각나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그 세월을 모르면서 쉽게 사과해서는 아니된다 했었지."
"저하."
"그때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과 뿐이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니."
"예, 저하."
"허나.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네, 그리 오래 마음을 다잡았는데도 이리 버거운데, 자네는 오죽하였겠는가, 물론 자네에 비하면 티끌보다 작다는 것을 내 알고 있네."
"....."
"이보게. 하람 고개를 들게."
하람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자신의 눈은 바닥을 향해 있었지만 양명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물이 위로 지나간 입꼬리가 다시 살짝 올라갔다.
"그래서 나는 자네가 원하는대로 해줄 것이네, 온다하면 반갑게 맞을 것이고, 떠난다하면 따듯하게 배웅할 것이다. 자네는 오지 않겠다. 마음먹었겠지만."
"봄이 돌아오면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지아비의 보살핌이 필요한 이 시기에, 제가 집을 자주 비울 수가 없사옵니다. 하오나 저하, 저와 부인은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이옵니다."
"이 나라의 세자인 내게 오라가라 하는 이들은 자네 내외밖에 없을 것이네. 알겠네, 내 잘 기억하지."
양명은 다시 웃었다. 대군 시절 그 웃음으로.
"즉위식을 보고 가시게."
"예 저하."
하람도 마주 웃었다. 하주부 시절, 그 웃음으로.
*
"아이고, 서신이라도 보내고 들리지 그랬어, 천기는 같이 안 왔나?"
"부인, 아이 가진 애가 여기까지 어찌 오겠소."
"아참, 그렇지. 이리 갑자기 관양에는 어찌."
"저하께서 즉위식 전에 만나기를 청하시기에 이리 급히 오게 되었습니다."
"관양으로 다시 올 것인가? 저하시라면 분명 하서방에게 관직을 내리실 터인데."
"저는 다시 돌아갈 것입니다. 즉위식이 내일인데 하루밤 묵고 가도 되겠습니까."
"참 하서방,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 이리 들어오시게."
"천기 입덧은 안하나? 슬슬 때가 된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단모님이 음식이 그립다 하였습니다."
"당연히 해줘야지 장을 좀 봐뒀어야 하는데!"
"부인, 하서방 하루 묵고 간다하지 않소!"
하람은 편안한 마음으로 웃었다 이곳은 자신의 처가댁이었으니.
*
다음 날 양명의 즉위식, 이제는 대군도, 세자도 아닌 이제는 한나라의 임금이었다. 그 웅장하고도 무거운 즉위식의 모습을 하람은 조용히 뒤에서 보고는 즉위식이 끝나고 정신없을 때 조용히 상선을 찾아갔다.
"상선어른. 이것을 전하께 전해주시겠소."
"어찌 뵙고 가지 않으시고."
"즉위식을 마치셨으니 전하께서는 할 일도 만나뵈야 하는 분도 많으시지 않겠습니까 그저 침소에 드시기 전에 조용히 전해주십시오."
하람은 그렇게 조용히 궐을 떠났다.
그날, 밤이 깊어지고 나서야 하람은 집에 도착했다. 말에서 훌쩍 내린 하람의 양 손에는 단모님이 싸준 움식이 든 큰 보자기가 들려있었다.
"오셨습니까 나으리."
"그래. 부인은,"
"조금 전까지 나으리를 기다리시다. 막 잠에 드셨습니다."
"그래 이것을 따듯하게 데워 내일 아침 상에 올리거라."
하람은 만수에게 짐을 건네고 관양댁에게 이르고 나서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천기가 하람이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세상 모르고 잠이 들어있었고 자면서 조금 뒤척였는지 이불이 허리 밑까지 내려와있었다.
하람은 이불을 다시 위로 끌어올려줬지만 천기는 답답한지 다시 뒤척였다. 하람은 그 모습이 귀여워 소리 없이 웃다가, 이내 나란히 누웠다. 편안한 잠자리였다.
*
"부인, 일어나셨소?"
"서방님, 언제 오셨습니까?"
"어젯밤에 왔소,"
"제가 좀 더 늦게 잠에 들었어야 했나 봅니다."
"잠든 얼굴을 바라볼 수 있어 좋았소. 단모님께서 음식을 아주 많이 싸주셨소. 금세 만든 것보단 덜하겠지만 아주 맛있을 겁니다. 함께 듭시다."
하람과 천기는 곧 밥상 앞에 앉았다. 가득하게 차려진 단모님의 음식에 천기는 얼굴이 환해졌다가 이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부인 어찌 그러시..."
하람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천기가 입을 막고 밥상에서 고개를 돌렸다.
하람의 서신
전하, 즉위식이 끝나면 소신, 전하를 뵙지 않고 궁을 떠날 것입니다. 일전에 전하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분명 평안할 것이라 아뢰었지요. 전하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부디 평안할 것이니 두려워마시고 부디 백성을 위하는 성군이 되어 주시옵소서. 소신은 늘 같은 자리에 있사옵니다.
1. 하람이 다녀간 것을 사람들은 거의 알지 못함, 양명과 상선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고 하람을 본 몇 안 되는 사람들은 하람이 관양을 떠난 후 궁에 들어온 사람들,
2. 그 이후 사실은 하람이 궁안과 밖을 연결하는 아무도 모르는 통로로 궁을 드나든다는 소문이 돈다고 함 ㅇㅇ
3. 도성과 하홍집의 거리는 어림짐작, 오전에 출발해 늦은 오후 혹은 밤에 도착하고 다시 도성에 갔을 때도 날이 어두우려면 7.8 시간이 최선이지 않을까 생각해봄
이번엔 좀 쓰기 어려웠음, 특히 하람이 이 결정을 어떤 식으로 양명에게 전할 것인가 에 대해,
뭔가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연대가 끝나고 나니 홍시들도 하나 둘 떠날 것 같고. 그런데 그래도 이 글은 끝까지 마무리할 거니까. 홍시들도 마지막까지 같이 즐겨주길 바랄게. 우리 아직 볼 상플이 많다!!
입덧 그것은 헬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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