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는 죽은 것이지만, 계란은 살아서 바위를 넘는다." 최근 한 영화에 나와 화제를 모았던 대사다.
딱 7년전. 자본금 120억원의 국내 중소콘텐츠업체 사장이 "이왕 할거면 크게 하자"며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나섰다. 드림웍스, 픽사 등 쟁쟁한 할리우드 기업들이 주도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것.
↑하회진 레드로버 대표. |
시장의 반응은 당연히 싸늘했다. 투자자들의 눈에 그의 계획들은 전형적인 '작전'의 냄새를 풍겼기 때문. '디워'의 씁쓸한 기억들도 오버랩됐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배급사 계약이 지연되자 그에겐 '양치기 소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정작 배급사 계약이 이뤄지자 '개봉은 하는 거야'라는 말이 나돌았다.
지난해말 '넛잡 : 땅콩도둑들'이 마침내 북미 4000개 스크린에서 개봉,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르며 등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2월말 기준으로 넛잡의 북미 극장수입은 6000만달러를 돌파했다. 북미 이외 다른 지역 극장수입에 부가판권 등을 합치면 넛잡의 수입은 총 2억3000만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양치기 소년은 단박에 '2억달러의 사나이'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회진 레드로버 대표의 이야기다.
애니메이션의 변방인 한국이 만든 넛잡이 본고장 미국에서 대박을 터뜨린 비결은 뭘까. 하 대표는 "어려울 때마다 우연처럼 찾아온 소중한 인연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인연 1 : 제발로 찾아온 애니메이션 거장=2007초 '미녀와 야수'를 감독한 캐나다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인 앤드류 나이트가 레드로버에 연락을 해왔다. 레드로버의 주력 제품인 3D 모니터의 북미 및 유럽지역 딜러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 레드로버의 전문가용 3D 모니터는 대당 6000만원(24인치 기준)을 호가하는 가격에도 의료, 군사, 영상제작용으로 미국과 유럽 등으로 인기리에 팔려나갔다. 특히 전세계적인 3D 붐을 일으킨 영화 '아바타' 제작에도 사용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실리콘테크 등 반도체기업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하던 하 대표는 2004년 6월 직장동료 2명과 함께 '세븐데이타'(현 레드로버)를 창업했다. 당초 산학연 과제로 개발한 3D(차원) 모니터를 반도체 후공정 검사분야에 활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적용이 여의치 않아 의료나 엔터테인먼트, 게임쪽으로 사업방향을 틀었다.
나이트와의 인연이 시작될 당시 하 대표는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뛰어들고 싶던 차였다. "국내시장만을 타깃으로 해서는 답이 안나온다"는 판단에서였다.
하 대표는 제발로 찾아온 나이트와 의기투합, 3D TV애니메이션 '볼츠앤블립' 제작에 뛰어들었다. 투자를 유치하는 등 제작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뜻밖의 사고가 발생한다. 2008년 4월 프랑스 칸에서 열린 영상콘텐츠박람회에 참석했던 나이트가 뇌출혈로 사망한 것. 박람회에서 나이트를 만나고 비행기에 올랐던 하 대표는 공항에서 비보를 듣고 망연자실했다.
현실화되던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했다. 하지만 하 대표는 포기하지 않고 볼츠앤블립 제작을 밀고 나갔다. 이 작품은 2010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전세계 100여개국에서 방영되고 있다.
#인연 2 : 할리우드의 거물을 사로잡다=2009년 가을 할리우드의 한 카페. 하 대표는 소개를 통해 워너브러더스의 수석프로듀서인 마이크 카즈를 만났다. 와튼스쿨 출신의 카즈는 미국 영화계의 실력자중 한사람이었다.
하 대표의 노트북에서 넛잡 트레일러가 재생되자 카즈는 탄성을 질렀다. "이 수준으로 영화를 끝까지 만들 수 있냐"는 질문을 던진 후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할리우드의 쟁쟁한 영화사 대표들과 약속을 잡았다. 애니메이션 본고장 미국에 대한 넛잡의 공습이 시작된 순간이다.
카즈 덕분에 30군데 배급사 대표들을 만나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기라성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목소리 캐스팅이 마무리되는 등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카즈는 아예 넛잡의 총괄감독을 맡았다. 또한 현재는 레드로버가 2012년 8월 미국 현지 펀드사와 합작으로 설립한 글로벌 영화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걸프스트림픽처스의 최고경영자(CEO)도 맡고 있다.
↑'넛잡 : 땅콩도둑들' 포스터 |
#인연 3 : 대통령을 잘 아세요?=2013년 5월 1일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제 1차 무역투자진흥회의'가 열렸다. 각 분야 중소기업 관계자들이 참여해 애로사항을 말하고, 즉석 토론도 진행됐다.
회의가 길어지면서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다급해졌다. 시간관계상 마지막 순서인 문화부 초청 콘텐츠 관련기업들에 발언 기회가 주어지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 유 장관이 부랴부랴 "저희쪽 기업들 얘기도 들어달라"고 박 대통령께 부탁을 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레드로버 관계자는 애니메이션기업으로서 해외마케팅의 어려움을 호소했고, 박 대통령은 "애니메이션 등 콘텐츠는 창조경제의 핵심"이라며 "도와줄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보라"고 관련기관에 지시를 내렸다.
레드로버는 이후 수출입은행에서 70억원을 저리로 융자할 수 있었다. "이 돈은 넛잡의 미국 마케팅에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것이 하 대표의 설명이다.
박 대통령은 첫 '문화가 있는날'이었던 1월 26일 소외계층 아동 및 청소년들과 함께 넛잡을 관람하기도 했다. "그전까지 일면식도 없었죠. 대통령 옆에 앉아서 영화를 보려니 긴장이 많이 되더라구요. 정치성향과 관계없이 기업인 입장에선 중소기업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주면 너무 감사하죠."
하 대표는 넛잡에 대해 아직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북미 이외의 다른 국가에서도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둬야하는 '숙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저에게 '돈복'이 있다고들 해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동안 믿고 투자해주신 분들에 대한 신뢰를 지켰기 때문에 넛잡의 성공이 가능했고, '한국 애니메이션이 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죠."
넛잡의 성공 이후 하 대표는 더 바빠졌다. 내년엔 서유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스파크'를 개봉할 예정이고, 넛잡2도 시나리오 작업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하 대표의 글로벌 도전은 이제부터 '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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