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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의 게임ㅡ 신춘낙방에 대한 위로모바일에서 작성

(175.124) 2015.12.27 02: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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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지 않을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문청들에게 바치는 고백이다. 한때 그랬다. 사그라질 줄 모르는 열병이었다. 신춘문예는.

내년에는 절대 응모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다시 그 계절이 오면 나는 망각의 동물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끼적거리고 있었고 정성스럽게 주소를 인쇄해서 봉투에 붙이고 우체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질병이다. 언제 그 사슬에서 놓여날까? 작품을 부치고 돌아오는 날은 왠지 뿌듯하고 내가 뽑힐 것 같고 박하사탕을 빨아먹은 듯 싸해졌다. 그날 하루도 그랬다. 그래, 그 날이다. 나름 아주 명작을 갈무리하여 보냈다고 생각한 그날, 대작을 쓰고 응모한 기념으로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 날. 그러나 그건 가정주부이며 애 딸린 엄마라는 존재들에겐 쉬이 허락되지 않는 바람일 뿐이었다. 이런 날 남편이라도 일찍 와서 수고했어! 한 마디를 건네며 분위기 있게 술 한 잔을 기울인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그것도 내게는 한낱 꿈일 뿐이고! 남편은 그날 청춘을 바쳐 몸담았던 동아리 후배의 댕기풀이(아직도 이런 걸 하는 순수 열정이 발딱이는 사람들이 있다)에 가서 늦는단다.

예기치 않은 발령으로 살게 된 서울. 남편은 거의 매일 10시를 넘기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일벌레의 쳇바퀴 삶을 살다가 그날은 짬을 내어 기분 좋게 간 자리였으므로 나의 기분 따위는 밀쳐두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만취를 넘어 대취의 정점을 달렸나 보다. 12시가 조금 넘어 광화문 근처라는데 후배들을 돌아가면서 바꿔주고 2차로 자리를 옮긴다고 통보하더니 10분쯤 후 택시 타고 집에 오겠단다. 오 분 후 전화를 하니 정말 택시를 탔단다. 지도 검색을 했다. 택시 타고 오면 광화문에서 우리 집까지 20분~30분 소요된다고 나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은 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나는 아파트 근처를 수색하며 돌아다녔다. 그날은 마침 월드컵 조 추첨을 하는 날이었다. 아들은 두 시에 깨워달라더니 알람이 울리자 일어났다. 아들에게 아빠 들어오면 바로 연락하라 해놓고 남편을 찾으러 다녔다. 처음 맞는 서울의 겨울. 마음은 각오했건만 몸은 생경함으로 맥을 못 추는 서울 추위, 매서웠다. 이 날씨에 어디서 얼어 죽으면 어쩌나?

두 시간이 흘렀다. 아파트 입구에서 집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택시들이 가끔 손님을 부려놓고 갔다. 금요일이라 귀가가 늦은 사람들이 꽤 되었다. 아들에게서도 연락이 없고 속이 탔다. 두 시쯤 되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서울에 내리는 겨울비라 더 찼다.

차라리 다행이다. 차가운 비라도 맞으면 거리에서 잠들었다가도 깨겠지. 경상도를 벗어나 살아본 적 없는 남편이 서울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을까? 집을 제대로 찾아올까? 걱정이 채석강의 주름을 닮아가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제발 남편 보내달라고 그러면 신춘문예는 당선 안 돼도 괜찮다고. 기꺼이 바꾸겠노라고.

그렇게 되뇌며 3분이 지났을까? 엘리베이터 멈추는 소리가 들리고 복도에 발소리가 났다. 남편이 나타났다. 내가 배팅하길 기다렸다는 듯. 나 대신 당선을 안겨줘야 할 절실한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려줄 임무를 수행하느라 진을 다 뺀 사람처럼 몹시 휘청거리면서.

얼마 후 신춘문예 개별통지가 갔다는 소식들이 들리는데 내게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진즉에 남편과 당선을 바꾸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고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기다렸다. 그래도 작품이 워낙 출중(?)하여 당선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잖아 있었고 당선되면 남편을 다시 데려갈까 봐 그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러게 그런 약속은 섣불리 하는 게 아니라는 후회도 하면서.

어쨌든 나는 신춘문예 당선을 내주고 남편을 되찾았다. 당신도 전화를 못 받았다면 하느님께서는 분명코 당선 보다 더 좋은 선물을 주셨을 것이다. 올해 각종 시험에서 낙방한 그대여, 소중한 무엇과 바뀌었을 불합격에 감사하자. 올 한 해 안 좋은 일은 내년에 좋은 일로 되받으실 거다. 기억하시라. 하느님도 가끔은 게임을 즐기신다는 걸.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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