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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일상

1111(121.64) 2017.09.19 23: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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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3월 4일이었던가. 대학교 새학기를 맞은 대학생 새내기의 심정을 상률은 이따금씩 기억하였다. 위화감과 기대감이 한 순간에 교차하는 듯한 어수선한 기분이랄까. 고학의 결실을 맺은 대학교 새내기로서 당연히 홀가분한 느낌이어야 했지만, 이미 내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워져만 가고 있었던 그 중압감을 종종 그는 기억했다. 


 입학 전 사전에 이뤄지는 동기들과의 친목도 실패했고, 정모니 새터니 하는 데에 가서 단체행동을 해도 전혀 감정의 동요가 없었으며 결국 과 사람들과의 교류도 원활히 이뤄지지 못했다. 솔직히 그들과 친해지고 싶지 않았던 거다. 상률은 음주와 향락 위주로 흘러가는 대학생활에 대한 일종의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대책없이 놀고 싶어하는 1학년생들이 대다수였기에, 동기랍시고 무작정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친해질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상률은 대학은 학문적 성취를 위해 가르침을 받는 신성한 전당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술에 의지하는 인간관계로 괜히 감정소모하기가 너무나 싫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아싸'의 길을 택했다. 애초에 마음 맞는 친구를 찾는 건, 당시 그의 혼미한 정신상태와 전체주의적인 대학문화의 양상을 전부 고려했을 때 쓰레기장에서 진주를 찾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는 대학 입학에 따른 자부심 때문이었는지, 전공학문을 배우는 일에 대해 뭔지 모를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술잔만 기울이며 허송세월이나 하는 부류의 대학생들에 대해 일종의 혐오감과 깊은 기피의식이 내재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생활패턴을 전공 공부에 최적화시켜 버렸다. 대학생에게는 있을 수 없는 혁명적인 접근이었다. 거의 고3 수험생과 다를 바 없는 규칙적인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새내기임에도 의지할 대학 친구 한명조차 없이 저렇게 혼자 공부에 빠져 살기를 3개월, 한 학기 내내 반복해오니 왠지 모를 심한 지겨움을 느꼈다. 상률은 자기 자신의 학문적 성과만을 위해 정진했을 뿐, 스스로의 행복추구에는 소홀했던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지속적인 학문 수양으로 인한 정신적 피로감 때문인지 진정한 삶의 낙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면서 되려 공부로만 점철된 일상에 대한 심한 매너리즘과 회의감에 빠졌다.  


  그렇다. 1학기 말부터 상률은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걸 배겨낼 수 없었다. 지루함을 넘어 괴로웠다. '학문 수양'으로 보낸 나날들은 왠지 모를 무가치함으로 남았다. 그는 대학생으로서의 진정한 본분을 다 하려 노력했고, 그렇게 살고자 했는데 역시나 힘들었구나 하며 탄식하기를 수십번이었다. 너무나도 지겨웠고 하루하루가 1년 같았다. 일상에서의 매너리즘이 극에 달했다. 그제서야 상률은 '이러려고 고3때 그렇게 피터지게 공부한 게 아니다.' 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곧이어 일상의 파격과 일탈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한 감정적 우여곡절 끝에 진정한 방학을 맞이했다. 이젠 등교를 할 때 수업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숨이 차도록 뛰어갈 필요도 없고, 과제와 강의에 정신을 갉아먹히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잠시동안 홀가분했다. 이젠 원없이 내 자유의지대로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방학때의 그는 이미 학문과 학생으로서의 본분에 얽히고 구속당하는 수도승과 같은 자기통제적 삶에 이골이 나 있었다. 이젠 그러한 생활을 버리리라 다짐했다. 더 이상 배겨낼 수 없었다. 상률은 아주 예전부터 마음 속 한가운데 진정한 행복을 찾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었던 것임을 이제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그의 마음의 소리였다.   


  그렇다고 퇴폐적인 길에 빠지려 하진 않았다. 무엇인가 관념적으로 이상적인 길을 택했다. 개인적 교양과 고급 문화지식을 넓힘으로써 마음 속의 끝없는 공허함을 채우고 진정한 행복을 찾고 싶었다.  일반인들이 잘 듣지 않는 클래식 명반을 다운 받아 감상하기도 하고, 종종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미술전시회를 찾아 세계적인 명화들을 관람하기도 했다.  이 모든 행동은, 한없는 여유로움의 끝에 생겨난 일상의 권태로움을 떨쳐내고자 궐기한 상률의 정신적 발악이었으며, 진정한 자아의 해방을 모색하기 위한 일상의 탈환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어느새  8월 중순이었다. 유난히 더웠고 방학도 끝나갈 즈음의 그 때, 예술의 전당에서 알폰스 무하전을 열고 있었다. 알폰스 무하, 체코의 화가로서 아르누보 양식의 정수를 보여주며 여성을 고혹함을 아주 잘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인터넷으로 언뜻 보고 나서 이 사람의 화풍에 완전히 반해버렸는데 마침 예술의 전당에서 이 사람의 작품전을 한다고 하니 기쁘기 이를 데 없었다. 예술적 지식 축적과 함께 예술적 심미안을 길러 정신적 공허함을 달래줄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상률은 더위를 무릅쓰고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상률은 알폰스 무하의 매혹적인 그림들을 보면서, 내 피폐해진 정서와 깊은 고독감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내상을 치유해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 전시회장을 돌아 아르누보 양식의 그림 속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취해 감동에 한껏 젖어있을 때, 그는 무심코 자기 앞을 지나가는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다른 작품을 보려 옆으로 고개를 돌리던 사이 우연히 그 여자와 마주보게 된 것이다. 그는 그 순간 당황하면서도 내심 설렜다. 첫눈에 보기에도 그녀는 예뻤다. 순백으로 어우러진 느낌에 청순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마치 저 알폰스 무하의 황도 12궁 속에 그려진 여인의 옆모습과 그대로 중첩되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비록 어딘가 아파 보이는 기색이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그녀를 더욱 빛나게 했다. 



 잠시 마주치다 상률의 앞을 무심히 지나가는 그 여자, 슬픈 듯한 눈빛으로 작품을 보면서 무엇인가 쓸쓸한 듯한 걸음을 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 여자 같았다. 그런데 그 여자의 걸음걸이가 점점 더 이상해지는 듯 하더니, 계속 비틀거리다가 갑자기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상률은 잽싸게 쓰러진 그녀의 상체를 부축하며 의식을 확인했다. 

 

 "여보세요, 괜찮으세요? "


 그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완전한 혼절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상률은 119에 연락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그는 그녀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따라 갈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슬픈 눈빛이 떠올라 차마 두고 갈 수 없었다. 그저 걸음이 저절로 그쪽으로 옮겨가는 느낌이었다. 불가항력임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를 마음 속 깊이 걱정하고 있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상률은 그녀의 핸드폰으로 그녀의 부모, 일가친척들 중 연락이 되는 사람을 찾아 연락했고  입원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그녀는 심한 과로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왠지 창백해 보이는 그 얼굴빛에서 드러나는 쓸쓸함과 애련함이 순백의 병원 침대 위에서 피어나는 듯 하여 상률에게는 그것이 묘하게 애달프게 느껴졌다. 


 상률에게는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깊은 연모와 동정심이었다. 상률은 차마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지금 떠나버리면 언제 다시 또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진부한 대학생활 속 천편일률적인 학문의 길에서 잠시 벗어나 문화적 일탈의 끝에 우연찮게 인연을 맺을 기회가 생겼는데. 당시 외로움에 뭇내 서럽던 상률의 심정으로서는 도저히 병원 응급실 문 밖을 나갈 수 있는 마음가짐이 아니었고, 발걸음을 뗄레야 뗄 수가 없었다. 병상 옆에 앉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한 두시간 정도 지났을까. 그녀가 깨어나는 것이 보였다. 창백한 건지, 순백의 미를 드러내고 있는 건지도 모를 만큼, 흰 빛의 얼굴이 상률을 주시했다. 그녀는 힘겹게 상률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간신히 입을 떼었다. 


  "누..누구세요..?" 그녀는 두려운 눈빛으로 상률에게 물었다.


 "아.. 괜찮으세요? 전 그쪽이 미술관에서 쓰러지시는 걸 본 목격자입니다. 이제 좀 정신이 드시나요?"


 " 아.. 네,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 거 같네요. 감사합니다. 여태껏 계속 기다리면서 지켜봐 오신 거 같은데."


 " 아.. 아닙니다. 그저 그쪽이 좀 걱정이 돼서요. 그저 쉽게 두고만 갈 수는 없겠더라고요."


 "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귀중한 시간만 뺏기셨네요. 이를 어쩌죠. 제가 무슨 답례를 해 드려야 할지.."


 상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가 상률의 선행과 호의에 대하여 답례를 하고 싶어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녀와의 찬란한 미래를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귀중한 시간을 뺏겼다?.. 아니다. 솔직히 잉여로움과 권태로만 가득찬 일상에 무엇인가 반전과 파격을 꾀했던 건 오히려 상률 자신이었다. 상률은 그녀가 답례로서 생각할 만한 그 무엇인가를 떠올리기를 기대하며 하염없이 뜸만 들이고 있었다.


 "....." 




어색함이 감돌았다.





" 아! 혹시 핸드폰번호 좀 알려줄 수 있으세요? 조만간 제가 식사 한번 대접해 드릴게요." 아!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다. 마침내 그녀와 이어질 수 있는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긴 것이다.


"아, 그러시다면, 예,..." 상률은 굳이 사양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오히려 이건 사양하면 절대 안되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었다. 상률은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 상률의 핸드폰번호를 입력하고 그녀의 핸드폰번호가 저장되게끔 전화버튼을 눌렀다. 


 "퇴원하고 난 후에 조만간 꼭 연락드리죠.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예. 알겠습니다. 도리어 제가 고맙네요.."


 본의 아니게 성사된 그녀와의 식사. 상률은 미리부터 설레어 심장이 격한 진자운동을 하며 그만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 다시 볼 수 있는 건 맞죠..?" 


" 그럼요. 꼭 연락 드릴게요. 며칠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아련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처량함을 내뿜는 듯한 아우라를 뒤로 하며 상률에게 답해주었다. 아픈 기색이 아직 역력했다. 

 상률은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기쁜 내색을 애써 감추며 뒤돌아섰고 병원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상률은 뛸 듯이 기뻤다. 

 상률은 이제 드디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녀를 보고 만남을 성사시켰음에도 기쁨은 잠시였다.



 발걸음이 점점 늘어가면서 심중의 우울함이 다시금 밀려오는 게 이상했다. 


 상률은 이제 찝찝함만을 가득히 안은 채, 어느새 심한 고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니, 그녀와의 관계 진전에 대해 깊이 생각하던 중 매우 불행한 결말이 자연스레 상률의 뇌리를 감싸안고 만 것이다.      



그녀의 작고 고운 음성을 뒤로 하고 병원 밖을 나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까만 밤. 

밤의 침울함과 음울함은 상률에게 정서적인 외로움을 더욱 배가시켰고, 열패의 심리를 더욱 충동질했다. 과연 상률은 그녀와 함께 설 수 있을까. 상률의 비정상성을 그대로 껴안을 수 있는 자비와 관용을 그녀는 진정 갖고 있을까. 오히려 상률은 겁이 났다. 난생 처음 대해보는 여자를 어떻게 배겨낼 수 있을까. 상률이가 좋아하면서도, 외려 좋아하기에 그녀에게 더더욱 다가서기가 힘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결국 그녀를 더 외롭고 아프게 하지는 않을까, 결국 상률을 무시하고 다른 남자를 찾게 되지 않을까. 그녀를 마음에 담고 나서부터 원체 심했던 자존감의 결여는 극에 달했다. 

 

그렇게 그녀를 처음 본 그 날. 상률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상률은 그 후 며칠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녀만을 생각하면서 계속 방 안 침대 위에 누워 '그녀'라는 상념의 나래에 빠지기 일쑤인 나날을 보냈다. 아무런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무료함이 더욱 강하게 상률의 정신을 옥죄어 갔고 상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스마트폰이 울렸다. 평상시 연락하는 지인들이 극히 적은 상률의 상황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휴대폰 번호를 확인해보니 그 때 미술관에서 만났던 그녀였다.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 그녀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상률은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던 그녀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상률은 아직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무지했다.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 때부터 가슴 한켠이 저며오면서 불쾌한 느낌이 들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얼굴에 비친 순백의 청아함과 쓸쓸함의 결정체를, 고요한 눈빛의 조명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겠지만, 음울하고 씁쓸한 상률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녀의 모습이, 혹여 그녀와의 미래를 암시하는 하나의 메타포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상률은 위와 같은 잡념이 그대로 스쳐지나간 채로 그녀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지난 번 미술관에서부터 시작해서 병원에서 만난."


"아..네, 안녕하세요. 지금은 별 문제 없으시죠? "


"네, 좀 쉬고 나니까 괜찮아진 거 같아요. 그나저나, 제가 받은 호의에 대한 답례를 이제 드리고 싶은데. 내일 즈음에 혹시 저녁식사 가능할까요?"


"아, 네. 물론이죠. 가능합니다. "


"제가 진짜 잘하는 음식점 하나 알아 놨거든요. 내일 6시에 봐요. 장소는 카톡으로 보내드릴게요. "


"아, 네. 감사합니다. " 


상률은 심한 불안감과 엄청난 설렘이 중첩되는 듯한 감정에 휩쓸렸다. 가슴이 북받쳐 올라 어쩔 줄을 몰랐다. 난생 처음 만나는 여자, 그리고 그녀와 식사를 같이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심했다. 음식점에서 만날 그녀의 모습은 어떨까, 아팠던 그녀의 모습에 드러난 창백함과 쓸쓸함의 기색에서 상률은 자기 마음의 거울을 보았다. 몸이 회복되었다고 하니 이제는 좀 나아졌을까. 그녀의 그러한 자태에 아름다움을 느꼈고 미학의 영감을 느꼈으나 상률은 그녀를 존재로 대하는 것에는 너무나도 미숙했던 것이다. 오한과 식은땀이 났다. 가슴이 미친듯이 뛰어 조금이라도 놀라면 바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완연한 기품을 다시금 느끼고 싶은 강한 욕망 또한 일었다. 


상률은 이미 그녀에게 홀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미숙한 그에겐 아직 이상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다음 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다 보니 어느덧 저녁 6시. 그녀의 카톡대로 상률은 신림동 근처에 있는 순대곱창집으로 갔다. 





곱창집.



곱창집? 곱. 창. 집??




 곱창에 대한 철학이 있는 여자인가. 소의 내장이 불판 위에서 꼬이고 비틀리는 것을 보면서 예술적인 영감을 느끼는 사람인가. 혼자서 예술의 전당에 가서 알폰스 무하전을 감상하는 여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에 상률은 처음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음식점 문을 열어보니 그녀는 없었다. 그녀가 늦는 것인가. 상률은 들어오는 사람의 눈에 제일 띌 만한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발걸음만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면 그녀인가 싶어 일어서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매번 허탕이었다. 


그녀의 이목구비 사이에서 드러나는 암울함과 청아함의 공존은 그녀라는 존재의 신비로움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기품에 곱창이라는 존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대체 왜 곱창을 먹자고 하지? 왜? 도대체 왜? 


그녀의 실체를 이젠 알고 싶었다. 이런 데 나를 부른 그녀의 저의는 도대체 뭔가?



한 20분 쯤 지났을까. 그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는 그녀였다. 그녀는 미소 띤 기색 없이 상률에게 목례만을 할 따름이었다. 그러면서 상률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제가 좀 일이 있어서, 곱창 좋아하시죠? 제가 곱창 무지 좋아하거든요. 곱창이야말로 한국인의 토종음식이죠, 그쪽도 당연히 좋아할 거 같아서 곱창집 한번 알아봤어요, 괜찮죠?"



"아 그럼요. 괜찮습니다."


"그럼 먹죠."


"네."





그렇게 곱창을 먹었다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창...............................................................................................

곱곱곱 창창창 창곱창곱창곱창곱곱창..................................................................................




상률의 머릿속엔 곱창 두 단어만이 맴돌았다.  그러면서 이상한 난수표가 떠올랐다. 뜻모를 숫자와 곱창 두단어가 상률의 뇌리를 지배했다. 

곱창. 그녀. 그녀는 왜 곱창을 먹자고 했을까. 


"맛 없어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맛있네요. 허허"


"그럼 계속 먹죠."


"그러죠."


그렇게 계속 먹었다. 상률은 무슨 대화를 기대했으나 그런 대화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먹기만 했다. 이제 보니 상률에게 그녀는 그저 먹기의 ,먹기에 의한, 먹기를 위한 존재 같아보였다. 

물론 사람은 먹어야만 사는 존재다. 

'그래. 먹어라. 실컷 먹어라. 먹어야 산다. 바로 옆에 있는 나는 신경쓰지 말고 실컷 먹고 너의 내장을 배불려라. 나는 상관없다. 어차피 돈은 다 네가 낼 것이 아니냐. 나도 먹겠다. 이 내장의 비틀림과 꼬임을, 비틀린 마음으로 내 구강 내에 받아들여 쏟아주리라.' 


불판 위의 비틀림을 보고 그녀도 함께 비틀렸고 상률도 비틀렸다. 




곱창을 먹으니 내장 속이 더 꼬이는 거 같았다. 곱창을 먹고 그녀를 보면 상률은 더욱 속이 뒤틀리는 듯 했다. 왜일까.


그녀는 곱창을 먹고 또 먹기만 했다. 그녀는 비틀리고 뒤틀렸다. 곱창 무더기에서 혼자 허우적대며 자기도 불판 위로 뛰어들어가 스스로 불타버리며 비틀리고 비틀리고 또 비틀렸다. 상률은 그녀를 잡고 싶었으나 잡지 못했다. 곱창을 쳐먹어대는 그녀를 제지할 수 없었다. 상률은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진짜 맛있어요?"


"아.. 네..."


"별로 입맛 없는 거 같은데."


"....."

        

"아, 통성명이 늦었네요. 전혜린, 제 이름이요. 알고 계셨죠? " 


그녀는 곱창을 다 해치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곱창과 그녀. 상률에겐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없다. 그녀는 이제 상률의 마음 속 그녀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너의 이름 따위는 필요 없다. 어서 가라. 그냥 가라. 그냥 가면 된다. 제발. 상률은 생각했다.


상률에게 행복은 진정 어디에 있는 것인가. 어디에도 행복은 없는 거 같았다. 그렇다. 상률은 고통의 심연 속에서 삶의 단말마를 외치며 행복의 이상을 좇고 있었으나 역시 이곳에선 이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 네. 그럼요. 이만 일어나죠."


"네...?"


"이만 일어나자구요. 곱창은 잘 먹었습니다. 참 맛있더군요."


"뭐하시는 거예요 지금?"


"그냥 가라고요."


"뭐하냐니까 지금?"



"꺼지라고!!!!!!!!!!!! 눈도 마주치기 싫으니까!!"



"아니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참 나. 어머어머........"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매우 화난 듯 문을 세게 열고 식당 밖을 빠져나갔다. 그래... 우린 어울리지 않아... 가버려.. 가버리라고. 

상률은 곱창을 너무 먹었는지 속이 비틀릴 대로 비틀려 그녀를 내쫓아 버린 것이다. 그래... 이 모든게 곱창 때문이다. 곱창 때문이야...




곱창곱창곱창 창곱창곱창곱.... 곱창곱창곱곱곱... 창창창창곱곱곱곱창곱창곱창 창곱창곱창곱.... 곱창곱창곱곱곱... 창창창창곱곱곱곱창곱

씨발씨발씨발씨발 씨발씨발씨발씨발 씨발씨발씨발씨발.................



'곱창'과 온갖 패악스러운 욕설들이 상률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상률은 미쳐버릴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체 곱창이 무엇이길래. 상률을 이렇게 뒤틀어 놓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률은 눈 앞에 소가 있다면 바로 소의 배를 갈라 소의 내장을 들어내어 마구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곱창이 미웠다. 그때였다. 갑자기 뱃속에서 이상한 느낌이 왔다. 진짜로 속이 뒤틀린 것이었다. 상률은 심한 구토기를 느꼈고 바로 그 자리에서 먹었던 곱창을 전부 토해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눈길을 준다. 토하는 사람 처음 보나?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보지 마. 보지 말라고. 토해낸 곱창은 토사물 속에서 꿈틀거리며 상률에게 말을 걸었다. 


"야. 야. 야! " 곱창이 물었다. 


"니 속이 더 비틀렸더라. 도저히 니 속에는 살 수가 없어. 씨발 도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상태가 그 모양이냐?"

 

"닥쳐 이 개새끼야! 밟아 지져버리기 전에"


"육갑하지 마. 네 속처럼 속이 배배 꼬인 돼지새끼의 곱창이 곱창 중에서도 아주 쫄깃쫄깃하거든. 오히려 사람들이 너한테 있는 속 없는 속 다 들어내서 곱창을 해먹었어야 했는데."



"너같이 속만 꼬인 놈들은 다 똑같애, 이상은 존나 원대한데 실제로 뭔가를 하려고 하진 않지. 변화를 기다리기만 하려고 하고. 그래서 속만 배배 꼬이기만 하고 상병신같이 살게 되는 거야. 알아? 그런 사람들은 답이 뭔지 알아? 자살이야. 자살."


"이참에 자살이나 하지? 더러운 세상 때문에 속만 꼬여서 고통받을 일도 없잖아? "




"어디 한번 죽어 봐! 죽으라고!"





"야잇!!!!!!!!!!"


상률은 광적인 분노에 휩싸여 상률의 토사물 속 곱창을 밟아 쳐 짓이겼다. 곱창은 끝까지 상률을 비웃었다. 비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토사물이 튀어 주변 사람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상률에게 눈총을 주었으나 상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 온 세상이 토사물 투성이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분노로 토하고 슬픔으로 토하고 일회적인 즐거움으로 토하고 난 토투성이 세상바닥에서 내가 이런다고 큰 죄를 저지르는 것인가?' 

어차피 피차간에 더럽기는 매한가지인데 혼자 깨끗한 척 하려는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도 상률은 심한 역겨움과 기피감을 느꼈다.





"꺼져 개새끼들아! 토하는 사람 처음 봐! 어!!!!! 어!!! 어!!!!!!!!!!!!!!!!!!!!!!"





상률은 힘이 완전히 소진됨을 느꼈다. 진이 쭉 빠지고 맥이 빠졌다.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이젠 무엇을 하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지? 누구란 말인가. 누구길래 이렇게 비틀거린단 말인가. '


 상률의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쳤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불안정한 호흡 속, 상률의 시야는 흐려졌다. 

 




- 제 2 부 - 



 

  그녀의 이름은 전혜린이다. 전혜린, 1950년대 수필가로서 과잉된 자의식 속에 스스로의 이상을 꿈꾸다 혼자 산화해버린 정열의 여인. 그녀의 이름을 빌려 살아가면서 나는 알게 모르게 그녀로부터 삶과 예술에 대한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 50년대의 전혜린과는 다르게 세태에 굴복하면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다. '육체적 생존'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조차 난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2013년. 요사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혜린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백조'였다. 학자금 대출의 이자는 계속 쌓이기만 하고 알바는 힘들어서 못 하고 있다. 알바를 한다고 해서 돈이 많이 모이는 것도 아니고. 고3때부터 걸린 악성빈혈 때문에 일도 오랫동안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기 인생이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상황을 받아들이고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하루하루를 보낼 뿐인 게 혜린의 일상이었다. 일상의 절망을 타개할 수 있는 건강상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다. 혜린은 그저 부모님의 손을 벌려 일상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만 하는 병자일 뿐이었다. 정말이지 그녀에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계상황 앞에서 늘 굴복할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어느덧 8월이 되었다. 혜린은 이런 무료함의 극치를 감당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일상의 전환을 꾀해야 했다.

때마침 예술의 전당에서 주관하는 알폰스 무하전이 열리고 있었다. 알폰스 무하. 그 그림 속 화려함의 미학에 취해 한동안 감동에 겨워 지냈던 고등학생 시절에 대한 일종의 데쟈뷰가 찾아왔다. 알폰스 무하에 대한 기시감은 혜린을 예술의 전당으로 발걸음하게 만들었다. 알폰스 무하. 희대의 예술가를 내가 직접 체험하고 감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무한한 기대감과 행복감이 느껴졌다. 이러한 무료함의 일상 속에서 자기극복과 부상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소극적이나마 이와 같은 시도라도 해야 했다. 껍질의 파괴와, 존재의 재탄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껍질의 파괴는 못하더라도 껍질에 금이라도 내야 했다. 


 혜린은 그렇게 알폰스 무하전에 찾아가 알폰스무하의 작품들을 감상했다. 역시나 알폰스무하는 황도 12궁이 압권이다. 아르누보 양식에 입각한 장식 주변 속 중심에 위치한 미녀의 모습. 미녀는 흡사 여신을 의미하는 거 같았다. 여신의 모습이 왜 미녀의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신이라고 꼭 미녀여야만 하나? 추녀와 같은 모습은 왜 여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인가? 이것도 하나의 인간사고의 '전형'이 아닐까 조심스레 잔상이 스쳐지나가며 감상을 계속해본다. 그래도 미학적 표현을 굉장히 화려하고도 감동적으로 해내는 양식은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 양식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둘씩 작품을 감상하면서 혜린은 정신의 내상을 치유해갔다. 


그러던 그 때.   


혜린이 어떤 초췌한 모습의 사내와 잠깐 눈을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그러더니 그자가 혜린을 뒤따라오는 듯한 쌔한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누구지? 느낌이 이상하다. 한두번 그러고 말겠지 싶더니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나를 스토킹하는 것인가. 도대체 넌 뭐하는 인간이지? 간만에 기분전환 좀 하려고 왔던 전시장인데. 오히려 불쾌감만 든다. 다시금 사알짝 본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마약 중독자였다. 눈빛이 흐리멍텅하면서도 걸음걸이에 힘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고 혜린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 넌 도대체 누구야? 누구냐고? 진심 미친새낀가....'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나는 갑자기 심한 불쾌감과 함께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어지럼증을 느꼈고 

 어느 순간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그렇게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워있는 입원실에는 나를 제외한 그 누구 하나 없었다. 

혜린은 그 때의 상황을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분명히 자신은 어떤 괴한에게 미행당하고 있었고, 미행에 대한 두려움이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쓰러졌다.(악성빈혈을 앓고 있는 혜린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한 현상이었고 과거에 그러한 경험도 있었다.) 


혜린은 자신을 미행한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 준 사람이 누구인지는 꼭 알고 싶었다.  

하지만 입원 당시 간호사에게 물어본 결과 간호사도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다. 혜린 자신은 이미 보호자가 대동한 상태에서 병동에 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혜린은 알폰스 무하전에 혼자 갔었다.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가족이나 친족들은 주위에 없었던 것이다. 혜린은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입원 당시의 혜린은 심신이 너무 피폐한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 '그 사람'을 추적하고 찾아낼 여력이 되지 않았다.



혜린이 퇴원하고 3주 쯤 지났을까, 어느정도 혜린이 회복됐을 무렵, 혜린은 자신이 처음 실려왔던 병원 응급실에 찾아갔다. 병원 응급실이면 자신을 처음으로 병원에 데리고 온 '의인'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기억할 만한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혜린은 그렇게 의사, 간호사 할 거 없이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며 그 당시의 경황에 대해 끈질기게 질문해갔다. 


그렇게 샅샅이 사람 사이를 뒤질 때 쯤, 혜린 본인에게 먼저 아는 체를 하는 간호사가 혜린에게 말을 걸어왔다. 용건이 무엇이냐는 질문과 함께 시작된 대화는 어느샌가 당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심문과 증언의 신성한 문답이 되어버렸다. 간호사는 이렇게 사건설명을 했다.   


 



 " 2013년 8월이죠 그때가 아마? 그때 혜린씨가 응급병동에서 입원수속 밟고 입원실로 이동했을 때. 


  어떤 한 사람이 계속 서성이면서 혜린씨가 누워있던 응급 병상에서 혼잣말을 하더라구요. 


 혼잣말은 아니었고...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모습이었어요. 바로 옆에 아무도 없는데, 계속 침대에 말을 걸더라구요. 그러면서 자기가 스스로 답하고 말하기를 계속 2시간 가까이 반복하더라고요. 아 저사람 정신병자에 제대로 미친 사람이다 싶었죠. 참 딱해 보이던데요. 


그래서 제가 그 사람한테 전혜린씨 찾으시냐고, 전혜린씨 여기 없고 수속 밟아서 병동으로 옮겨갔다고 말하니까, 그 사람이 대화중에 끼어들지 말라고 계속 뭐라 하더라고요. 아, 저 사람 완전 제대로 미쳤구나. 싸이코구나. 그 때 저 사람은 완전한 정신분열증 환자임을 확신했죠. 


혜린 씨가 찾으려던 그 사람. 신원은 아직 확인이 안 돼요. 직접적인 가족관계가 있는 보호자가 아니라서 따로 기록해놓지 않았거든요. 

그 사람한테 사례하려는 마음은 알겠지만, 제 생각에는 그냥 안 가시는게 좋을 거 같네요. 제가 보기에도 완전 제대로 미친 사람이었거든요. "




 그 말을 들은 혜린은 혼자 생각했다.

 '그래.  . 더는 찾지 말자. 정신병자, 시쳇말로 또라이잖아?  오히려 보답한답시고 그 사람이랑 만나봤자 정신병자라서 엄청나게 스트레스만 받고, 뒷맛이 영 안 좋은 관계로 끝났을 게 뻔해. 가뜩이나 인생살이 힘든데, 나 좀 도와줬다고 그 사람한테 뭘 또 해 줘야돼? 존나 힘들어서 죽느니만도 못한 인생인데 도움받는게 당연하지. 더구나 미친놈이라매. ' 



결국 결론은


 '신경쓸 거 없지. 뭐, 차라리 잘 된 일이야.'


 였다.




 그렇게 혜린은 잘 된 일이라고 혼자 자위하며 밤늦게까지 공상에 빠져 마당에서 줄담배를 피다가,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서 할 것도 없으니, 아무 의미없는 인터넷 서핑만을 반복하던 즈음.. 

갑자기 '정신병자의 충격적인 난동' 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인터넷신문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한낱 타블로이드 계열 신문기자들의 농간이라고 생각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상당히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신문기사의 내용은 이랬다. 




     "...........(중략)........관악경찰서는 2013년 8월 31일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수사를 위해 신림사거리에 소재한 곱창집에 찾아가 식당 주인을 통해 당시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어 그 전말을 조사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만난 식당 주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20살 가량으로 보이는 묘령의 남성이었으며, 정리되지 않은 외모였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약간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듯한, 이상해 보이는 사람으로 인식되는데, 갑자기 그가  혼자 2인분을 시키더니 계속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처럼 혼잣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혼잣말을 되뇌는 것도 잠시, 증세는 더욱 심해져 분노어린 욕설을 혼잣말로 계속 내뱉더니 식당 밖으로 빠져나가 심한 구토를 한 후 토사물을 밟는 기행을 계속하였다 한다. 그 기행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도로 안으로 뛰어들어 치명상을 입고 회복 중에 있다가 결국 어젯밤 쇼크로 사망했다. 당국은 처음에는 교통사고에 의한 과실치사에 따른 타살의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조사하였으나 본 증언이 강력한 신빙성을 획득함에 따라 현재는 자살에 초점을 맞추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하 생략) "  


.

.

.

.



혜린에게는,


'흠 별일이네.'


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하루면 충분히 정리될만한 일이었다. 


지금 혜린이 보고 있는 신문기사에 나온 '20세 묘령의 남성'이 혜린을 미행하려다가 쓰러진 그녀를 보고 응급실까지 데려다 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면 혜린은 아마 기겁을 해서 한 열흘간 반쯤 혼수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혜린의 멘탈상태와 건강상태를 고려하면 틀린 말도 아니다. 물론 인간애적 관점에서의 슬픈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혜린에게 그러한 마음은 있을 수 없다. 다만, 놀라움에 따른 충격과 이에 따른 신체화의 가능성만큼은 충분히 있다는 얘기다.  


  혜린에게 상률이라는 사람은 얼굴을 보면 희미하게 알아차릴 정도의 사람일 뿐이고, 혜린이 상률의 죽음을 모른다는 건 당연했다. 원래 혜린에게 상률은 존재조차도 희미한 사람이었기에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몰라도 전혀 관계없는 것이었다. 혜린은 아마 상률의 불쾌한 미행만 제외한다면 '그 해의 8월'도 그냥 하잘것없고 별볼일 없는 일상의 연속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아마 그녀는 실제로 그녀를 미행한 사람이 그 '정신병자 상률' 이라는 말을 듣게 되더라도, 그에 대한 일말의 동정도 없이, 담담하게 반응할 것이다. 그녀에게 상률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바퀴벌레의 출몰쯤에 견줄 만한, 약간의 불쾌함을 파급하는 비루함의 집적체일 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런 타입의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왔으며, 오히려 그런 존재가 하나 죽었다는 사실이 반갑게 느껴질지언정 그런 사람들에게 조의를 표할 수 있는 감정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물론 혜린에겐 오늘 또 친구를 만나고, 어느 카페 같은 곳에서 담소를 나누며 청춘의 미래를 구상할 만한 여유로움은 전혀 없다. 그저 혜린은 소소하다 못해 비루한 일상 속에서 아주 조금 더 즐거운 나날을 보내거나 조금 더 암울한 현실을 감내하며 나날을 보내는 식으로 인생주기를 계속 반복할 뿐인 갑갑한 인생일 뿐이다. 그녀와 다른 일상을 살아갔던 상률은 그녀에게 있어 그저 아무것도 아닌 한낱 벌레나 다름없는 존재일 뿐, 어떤 의미도 아니었다. 인생은 원래 그렇다. 그가 죽어서 더 이상 그녀처럼 일상을 누리게 되지 못하더라도, 혜린 자신의 본연적 일상에 어떠한 영향도 없으므로 더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혜린은 지금도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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