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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충(124.63) 2018.09.30 16: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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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젯밤,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그는 어떤 의자에 앉아있었다. 밧줄로 압박된 하체와 등받이 뒤로 넘겨져 묶인 손목이, 최근 몇 년간 전혀 관리하지 않은 듯 사포처럼 거친 벽면에 닿을 정도로 좁은 방이었고, 바느질 실 같이 가느다란 햇빛이 드문드문 들어오는 창문은 암막커튼에 가려져 힘겨운 칠흑을 피어올리고 있었다. 의자에 묶인 남자는 조용히 팔을 움직였다. 그러나 정작 느껴지는 건 평소 체감하던 양 손의 자유가 아닌 지금 팔목에 새겨지는 붉은 쓸림 자국으로부터의 고통뿐이었다. 그제야 자기가 처한 상황을 이해한 남자는 저항을 멈추고, 천천히 그리고 길 잃은 다이버가 해저동굴의 벽을 짚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듯 묵묵히 생각해냈다. ‘아, 납치당했구나.’ 그러나 예상치 못한 충격에 멍한 머리로 어렵게 도출한 이 생각은 금세 또 의혹으로 돌변했다. ‘하지만, 어떻게?’ 어젯밤, 그는 분명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고 집에 돌아와 이불 속에 들어갔던 걸 흡사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청명하게 기억해냈다. ‘도대체 어떻게?’ 좁은 방 안에 갇힌 그가 일어서려고 땅을 세게 박찼다가, 역시 의자만 한 번 흔들거리고 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자 덥석 부풀은 입만 멍청한 오리처럼 뻥긋대며 내색했다.
그의 방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중심가는 아니었지만 거기서 고작 서른 걸음 정도 떨어진 골목 최상단에 위치한 낡은 하숙집이었다. 최근 들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연달아 일어난 도난사건의 피해자가 경감의 아들 댁이 된 탓에, 피 쏠려 붉어진 눈의 늙은 경관들이 일제히 신경질적으로 야심한 시각을 순찰하고, 혹 그 도둑이 침입해 오진 않을까 염려하는 상류계급층의 심부름꾼들이 눈을 부릅뜬 채 골목의 쥐새끼 하나조차 죽일 눈매로 쳐다보는데, 대체 누가 그의 집에 아무도 모르게 침입했으며 무려 6피트에 이르는 장신의 남성 – 그의 신장은 정확히 5피트 11인치였다 - 을 여기까지 옮기는 걸 다른 어떤 이에게도 보이지 아니했을까. 그러니 그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그간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게 살아온 탓에, 무료하고 지루해진 하느님께서 ‘네놈은 어찌 이리도 무정하고 무익무해하게 살아왔느냐’하고 호되게 꾸짖으려 잠자는 이의 영靈만 훌쩍 빼온 건 아닐까 하고.
그러나 곧 시커멓고 비좁은 방의 옆면에서 빗장 여는 낡고 유해한 소리가 들렸고, 가난한 대학생이 들었던 도끼만큼이나 묵직한 구둣발소리가 울려, 뻔뻔히 처량함을 연기하던 남자는 ‘아, 다행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잡아오셨던 건 아니었구나!’하고 안 그래도 조그마한 숨소리를 쪼개며 비오는 날의 농민처럼 안도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였다. 절망적으로 발목에 족쇄라도 단 듯 무거운 구둣발소리의 남자는 어수룩한 살인자가 갇힌 방의 바로 앞까지 오더니, 짐승처럼 거친 숨소리를 찬찬히 고르며 호주머니 속 열쇠더미를 짤랑거렸다. “살인자!” 자그마한 방 앞에 횃불처럼 곧추선 남자가 갑자기 구역질하듯 욕했다. “범죄자! 난 너를 알아! 살인범! 개자식! (그러고 그는 방의 문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로 세게 찼다) 이 사탄을 추종하는 가증스러운 새끼야! 비열한 훌리건! 너는 평생 여기서 썩게 될 거다! 해골이 되어 뒤질 거야!” 그리고 그는 겨우 고른 숨결을 다시 폭발적으로 날 세우며 무거운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해 뭔가를 세게 차대는 듯 했다.
그런 처참하고도 일종의 희열어린 소리를 벽 너머로 설핏 들은 살인자는, 깜짝 놀라면서도 영리하게, 기도 할 때에도 조금씩은 나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좁은 방 바깥에서 실컷 난동부리는 이의 목소리를 안개처럼 희미한 기억 속에 시계탑처럼 박아 넣었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 무정이 입술을 움직이는 그의 눈빛이 겨울철 웅덩이처럼 착 가라앉았으며 뒤이어 형광등보다도 밝고 뚜렷한 이성이 그 위를 덮었다. ‘저 자가 나를 가둔 이인가.’ 그러나 이 추측성 짙고 단발적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로 하여금 고개를 마구 젓도록 만들었다. ‘아니다! 조금 더 관여된 사람이 있다! 만약 저렇게 나에 대한 증오가 사람이 가두었다면…… 나는 진작 죽었으리라. 저렇게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굳이 분풀이할 이유가 없지. 분명 나에게 뭔가를 원하는 사람이 나를 가뒀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일을 번거롭게 만들 게 아니라 일찍 죽이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그가 두 눈마저 빛내며 호기심과 증오어린 추리를 편집증환자처럼 계속해서, 또 자신의 기억 속에 억지로 연결고리까지 만들어가며 간신히 이어갈 때에 – 문 바깥의 남자는 이십 분 정도 더 분풀이를 하다가 시가를 태우곤 늦게까지 돼서야 좁은 방 밖으로 멀어져갔다. 살인범은 남자가 떠난 걸 몇 번이고 의심하고 확인한 뒤에야, 꽉 묶인 몸과 함께 의자를 움직여, 아마 문일 것이라 의심되는 부분의 벽을 더듬어봤다. 그러나 평생 굳은 살 하나 받히지 않아 예민하기 짝이 없던 남자의 자그마한 손끝에 느껴지는 건, 다만 오랜 시간 방치되어 더럽고 까칠까칠하기 짝이 없는 싸구려 석고 벽면뿐이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다시 좁고 어두운 방 안으로 짤랑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두어 번 정도 들리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딘가로 사라져버리자, 단서를 향한 빛을 잃은 살인범의 두 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듯 한동안 고요한 이명 속에 푹 잠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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